"그러면 김진아한테도 말했으려나?"
"아닙니다. 사모님한테는 권희영이 잠시 밖에 나갔다가 애를 배어 온 것 같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흠... 그래?"
여전히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말도 안 되는 연기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뛰는 가슴에 벌렁벌렁 대는 가슴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는 다리가 무서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송민호를 보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다리에 힘을 주고선 서있었다. 이 서재만의 숨 막히는 이 분위기가 가슴 아팠다.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연기도 못 했다. 지나가던 코찔찔이 아이가 보아도 ' 저 형 연기 진짜 못해-' 하며 지나갈 것처럼 못 했다. 눈치 빠른 송민호라면 아마 다 눈치채고도 남지 않았을까. 송민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내 애를 지키기 위해 권희영을 계속 저렇게 살게 해야 할까, 아니면 쓸데 없는 피가 섞여있으니 가져다 버릴까."
"저는... 후자가 나은 것 같습니다"
"너도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많이 뜨끔했다. 처음에는 그저 성욕, 욕정의 아이콘이었다면 어쩌면 나는, 그에게서 사랑을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 댄 사람은 처음이다. 강승윤도 물론 그랬지만 만나는 것도 가끔. 하지만 송민호는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어쩌면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몰라. 지금은 사랑을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매일매일을 피 터지는 싸움에서 이겨야 할 때였지. 송민호가 서류 하나에 대충 사인을 했다. 가지런하게 정리해둔 송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너가 원하는 대로 해. 난 말리지 않아. 필요한 일 있으면 나 부르고"
"네"
"아, 맞다."
"....?"
돌아서서 나가려는 나를 송민호가 잡았다. 솔깃할 것 같은 소리에 뒤를 돌았다. 완전히 돈 거는 아니고 반 정도만, 살짝 얼굴만 보이게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섹스 안 한지도 좀 됐지?
송민호의 말에 조용히 네.. 하고 말을 끌며 답했다. 하자는 소리겠지, 근데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지. 물론, 김진아가 임신을 해서 몸조심한다고 안 하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욕정을 나에게 풀려고 하다니. 별로 좋지 않아. 그래도 그 권력에 맛 들인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법. 적어도 한 번쯤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밖을 나갔다. 집요하게도 달라붙는 송민호의 눈길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복도에서 나는 내 구두 소리는 꽤 이 집에 잘 어울렸다. 어쩌면 삭막할 수 있는 집안에 내가 리듬을 더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김진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정중한 노크는 하고 나서. 들어가 보니 갑자기 김진아가 손을 뚝 떨어트렸다. 보아하니 불안감에 손톱을 깨물고 있던 것 같은데, 나름 품위라는 걸 지키고 싶었는지 내가 오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어떤 일에도 강한 여자인 척, 자신은 여왕인 척하는 허세가 보였다. 다 보여, 거짓말하지 마. 김진아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선 올려다보았다. 강한 향수 냄새가 너무 싫었다. 이런 향수는 대체 왜 뿌리는 거야. 그 향 나한테 옮기면 큰일 나는데. 별로 귀찮은 일은 만들고 싶지 않은데.
김진아의 그 눈빛에서는 어디에서도 나올 수 없는 간절함이 보였다. 제발 내 입에서 제 자신이 원하는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웃겼다. 왠지 몰라도 그냥 웃겼다. 왜일까, 뭔가 나보다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주저하는 내 행동에 김진아의 얼굴이 점점 질려갔다. 설마...를 되뇌던 그녀의 팔이 살살 떨렸다. 그 떨림은 나에게 전해졌다. 더 이상 끌다가는 벌써부터 애가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래"
그리고 나선 김진아가 기쁜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지 몸만 흔들어대면 될 것이지 왜 남의 몸까지 잡고 이 난리인지. 슬쩍 손을 떼고 싶었지만 권희영이 없어지는 것은 나에게도 분명 좋은 일이라는 걸 확신하기에 나도 김진아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래, 이렇게 좋은 관계와 신뢰가 형성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너의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을 가면 되는 거고. 남의 인생 망하는 것을 보는 걸 즐기는 나라 권희영이건 김진아건 한 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재미는 언제나 좋다. 아, 나도 언젠간 나락으로 떨어지려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에 김진아가 나를 몇 번 불렀었는지 내 얼굴을 톡톡 치며 나를 불렀다. 태현아?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잠시 멍했던 것처럼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이런 가식덩어리. 김진아는 내 손을 놓고 화장대에 앉아 크림을 하나하나 꺼내 바르기 시작했다. 원래 예쁜 김진아는 화장을 잘 안 했는데 권희영을 보낼 생각을 하니 절로 흥이 났나 보다. 참, 독한 년이야. 독한 년.
"송민호가 권희영하고 잔 거 본 거 몇 번이야?"
이상한 질문에 나는 1번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김진아가 입까지 벌려가며 크게 웃었다. 그 년도 별 년 아니었네. 별 년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지. 물어보기를 주저하는 내 표정을 보았는지 김진아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민호 오빠 한 여자랑 한 번만 자. 나 빼고. 김진아의 말에 의문점이 생겼다. 나는 수 없이 그와 몸을 나누었다. 분명 그는 스트레이트나 바이였을텐데. 아무래도 가슴이 있고 굴곡이 지고 바이라 하더라고 여자가 더 끌리기 마련인데 어째서 나는 더 많이 섹스를 했을까. 왜 너랑만 자? 라고 물으니 김진아는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오빠는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 비루한 말이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사랑... 사랑... 생소한 단어지만 뭐, 식상한 단어기도 하지.
김진아가 미스트를 얼굴에 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를 잡고 살짝 허리를 숙여 머리를 손질했다. 손질하나 안 하나 똑같구먼. 이해가 안 갔지만 여자의 심리려니 하며 대충 넘겼다. 슬리퍼를 대충 신은 그녀가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잠겨 있는 권희영의 방문을 열어줄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긴장감이 더해갔다. 드디어 이 음모가 끝이 나는 걸까. ?아마 이번 싸움에서는 비열하지만 2:1로 밀어붙인 우리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도착한 권희영의 방문. 적막이 귓가를 울렸다. 웅웅- 미운 정이 들어도 떠나보내야 할 사람은 떠나보내야 했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권희영은 들어오는 김진아와 내 모습에 덜덜 떨었다. 권희영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꼴사나웠다. 그 당당한 자태는 사라지고 두려움만 남아 권희영을 망쳤다. 권희영은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김진아의 치맛자락을 잡고 죄송하다며 마구 빌어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고 싹수없게 굴던 그 여자와 동일 인물인지도 궁금했다. 권희영은 김진아의 옷자락을 잡고 빌기에 모자랐는지 제 발을 잡고 빌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