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이 세상에 뱀파이어란 종족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발견 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먼저 커밍아웃하고 양지로 나왔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흥밋거리로 가볍게 다뤄지던 뱀파이어가 상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주변에 실존한다는 것에 인류는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는가. 3차 대전에 맞먹는 공포였다.
그래, 공포였다.
호랑이와 사자 등 신체조건이 월등히 뛰어난 야생동물을 억누르고 인간이 위에 서있을 수 있던 이유는 단순히 지혜 덕분이었다. 그런데 인간과 같은 두뇌를 가지고 발달한 육체를 지닌 종족이 있다면? 인간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수한 종족이 있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수많은 생물에게 저질렀던 착취를 고스란히 받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뱀파이어는 식인종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전 세계 여론은 뱀파이어의 씨를 말리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런 판로를 바꾼 연구 결과가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단 뱀파이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협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저명한 생물학자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단순한 유전자 변이로 말라리아 모기 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먹이사슬 최정점에 서있는 뱀파이어는 인간 보다 근력이 배로 발달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기로 제압할 수 있었고 피를 빠는 것 외에 인류에 직접적으로 끼치는 피해는 없었던 것이다.
종교단체에서는 사탄이니 뭐니 들고 일어서긴 했지만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세계의 흐름은 점차 뱀파이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갔다. 아주 차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뱀파이어는 자연스럽게 인류와 섞여 들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
할짝할짝
입술에서 따듯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지호는 잠에 겨워 흐릿한 눈동자를 쳐올렸다. 역시나 녀석이 저의 입술에 대고 혀로 샅샅이 핥고 있었다. 자다 일어나면 항상 이 꼴이다. 덕분에 입술에 촉감이 보통 사람에 비해 수십 배는 발달했을 거라며 지호는 손을 들어 상대의 어깨를 밀어냈다.
“밥 차려 놨어. 같이 먹자.”
쪽, 하고 입술에 가볍게 모닝키스를 하고 나서야 우람한 녀석이 위에서 비켰다. 저혈압이라 유난히 아침에 정신을 못 차리는 지호는 콧잔등을 씰룩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 곳곳이 안 쑤신 데가 없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노동 덕분에 서서라도 감지덕지하며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지호는 저의 앞으로 쌓인 수십 장의 청구서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달도 마이너스였다.
“오늘도 늦게 들어와?”
막 식탁에 앉은 지호 앞에 잘 익은 쌀밥을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지호는 여전히 멍한 정신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욕이 뚝 떨어지는 게 입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후를 위해서라도 열량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믿기진 않겠지만 녀석의 요리 실력도 제법 출중했고.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쓰러질 거 같아.”
못마땅한 기색이 한가득 느껴졌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냐? 안 그래도 아주머니가 이번 주까지 밀린 월세 안내면 쫓아내겠다고 단단히 뿔났는데. 보증금도 다 까여서 여기서 나가면 우리 진짜 노숙자 되는 거다.”
이런 한심한 대화 할 시간도 없다고. 지호는 억지로 밥을 떠서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정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ㅡ.
“내가 돈 구해볼까?”
“……네가? 아아 그래. 공장가서 막노동이라도 좀 뛰어라. 힘은 더럽게 세니까 시급도 배로 주겠네.”
지호는 빈정거리다 이내 짜증내며 수저를 탁 내려놨다.
“됐다. 그냥 집에 처박혀 있는 게 훨씬 나.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보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차라리 속편해.”
“…….”
“표지훈.”
지호의 단호한 음성에 지훈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선해 보이는 눈매에 붉은 귀기가 비쳤다. 그의 섬뜩한 눈을 볼 때면 지호는 종종 잊고 있던 명제를 떠올렸다.
뱀파이어.
녀석, 지훈은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뱀파이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으로부터 멸시 받는 사회적 약자였다. 노숙자, 장애인, 심지어 전염병 환자보다도 입지가 나쁜 게 뱀파이어의 현 실황이었다. 인권 보호니 뭐니 곳곳에서 소수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차별은 노골적이었기에 일자리를 구하기는커녕 돌팔매나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소설처럼 뱀파이어의 피에 무슨 영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힘만 좀 센 거 빼면 인간과 별 다를 것도 없어서 도무지 쓸래야 쓸데가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쓴다던데 뱀파이어는 진짜 개똥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거다. 그런데 식성은 얼마나 좋은지 짐덩이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지호가 지훈과 함께 사는 이유는, 조금 어이없게도…….
모든 뱀파이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지훈은 흠잡을 데 없이 잘생겼다. 당장 연예인으로 TV에 나와도 꿀릴 거 하나 없는 본판이다. 실물로 봐도 가끔은 내가 영화를 보는 건가 싶었다. 얼굴이 다가 아니라지만 지훈은 묘하게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웃길 노릇이다. 포식자에게 호감을 갖는 먹이라니 이런 개 같은 경우도 다 있을까.
“맛있냐?”
“응.”
꼭꼭 밥알을 씹어 먹는 지훈을 보며 지호도 수저로 밥을 펐다.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에 시달리고 와도 녀석의 생글생글한 얼굴만 보면 다시 쌩쌩해지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디서 에너지가 무한정 계속 샘솟는지 연구 대상감이다. 덕분에 근래에 제대로 쉬어본 기억도 없었다.
“그래도 피가 더 좋긴 해. 보름 넘게 피를 먹지 못했더니 기력이 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딱 좋은데. 너 아주 팔팔해.”
“음, 그래? 그럼 지금 실험 해볼까.”
지훈이 짓궂게 웃자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완전히 뚝 떨어진다. 순수한 얼굴 너머로 지훈의 꿍꿍이가 확 느껴졌달까. 여하튼 그랬다. 재수 없다며 지호는 남은 밥을 쑤셔 넣듯이 입안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벌써 네시 반이다. 더 미적거리다간 우유배달 시간이 늦을 지도 모른다며 지호는 양치하면서 옷을 입었다. 멀티 플레이어에는 일가견이 없었지만 살아가려면 시간을 최대한 아끼는 게 정답이었다. 신발을 신으며 머리를 빗는다. 시간을 확인하며 가방을 멘다.
세수호가 닦을 시간도 없어 얼굴에 물기가 가득한 지호를 옥탑방 계단까지 바래다주면 그날 아침 지훈의 임무는 끝이었다. 고물 자전거를 이끌고 멀어지는 지호의 등짝을 보던 지훈은 쌀쌀한 새벽 기온에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기 걸리겠네.”
지훈은 묘하게 걱정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며 지호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 서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지켜보는 것도 참 힘들다면서 지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지호는 극구 사양하고 있지만 역시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여기서 더 혹사당하가단 여린 몸이 산산이 부서질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차올라서 지훈은 호흡을 다듬어야했다. 옥탑방에서 쫓겨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건만 예상외로 지호가 너무 열심히 버텨주고 있어서 계획을 변경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그전에.
“허기 좀 채우고 갈까.”
지훈은 동이 터오는 수평선 너머로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
00편은 프롤로그 였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프롤로그부터 약 1달간의 시간이 지났나고 보시면 되요!
잘부탁드립니닷 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