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규닝
24. spring in the rain
한 번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만났던 나의 천사는 봄비 같은 사람인 모양이라고. 겨우내 한기에 싸여있던 온갖 녹음이 봄을 맞고 나서야 그 진가를 발휘하려고 들 때 찾아오는 그런 것. 봄으로 시작하는 한 해의 첫자락에서, 처음으로 '봄'을 달고서 등장하는 비의 내막은 따뜻한 그 이름처럼 마냥 빛나지만은 않는 존재임이 확실했다. 봄비는 봄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흐드러진 벚꽃잎을 웅덩이 아래로 떨구고나서야 그친다.
내게 봄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앗아갔던 비는 끝내 자취를 감추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몰랐다. 봄비라는 네가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나고ㅡ 먼 시간을 돌아 다시 내게 봄을 가져다 줄 줄은.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던 봄비는 그래도 역시나 봄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만난 시간이 가을이라 할지라도 너는 네게, 내리는 가을 비 속에서 만난 봄이었다.
*
새까만 머리가 잔바람에 흐트러져 눈썹 밑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소파 앞에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꺼트려 졸기 시작하며 우현의 어깨로 머리를 내어올 때 즈음이면 풍겨왔던 성규의 체취가 쌀쌀한 가을 기운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왔다.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우현의 머릿속을 무시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저처럼 당황해 말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말을 아껴 다물고 있는 것인지 모를 성규의 입으로 시선을 내린 우현이 소리나게 침을 삼켰다. 불에 그을렸던 밝은 갈색이 아닌 검은색의 머리에 대조적으로 비추어진 탓인지 한 층 더 묘하게 보이는 입술이 조금은 힘주어 다물려 있음에 아릿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텅 빈 플라스틱 통에 부딪혀 떨어내리는 것인지ㅡ 둘 사이의 침묵 속에는 통통거리며 튀기는 빗방울 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그렇게 쿵쿵거리며 울어오고 있는 심장 소리와 엇박으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알 수 없는 조합을 지나 완성되어가는 연주 끝에 우현의 커진 눈이 다시금 성규의 얼굴을 곳곳이 뜯어살피기 시작했다.
"개새끼는."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성규 쪽이었다.
한참 끝에 열린 성규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에 머릿속의 연주가 뚝 끊겨버린 느낌이었다. 천천히 내리던 눈을 바짝 뜬 우현이 여전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온 몸이 굳어감을 느꼈다. 성규가 지나치게 가까이 닿은 우현의 얼굴 앞에서 눈을 들어 바짝 얼은 두 눈동자에 제 시선을 고정했다.
"개새끼는 고양이 싫어하지 않나."
"……."
"고양이 보러 온 건가."
"……."
"그게 아니면 나,"
보러 온 건가. 물어보는 말인지, 혼잣말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성규의 독백 위로 배시시한 웃음기가 깔렸다. 그렇게 말하며 우현 못지 않게 굳히고 있던 눈꼬리를 유하게 풀어 웃은 성규가 맞아? 하고 재차 물었다.
"나는 성열이가 굶고 있을 것 같길래 도시락이나 갖다주려고 왔는데."
"……."
"너는?"
뜻밖에도 마주한 웃음에 그렇잖아도 굳어졌던 우현의 표정이 대답 대신 한 층 더 딱딱하게 변했다.
2년 전 겨울,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서마저도 볼 수 없었던 웃음은 거짓말처럼 코 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그에 우현의 입이 열릴 줄을 몰랐다. 조금만 움직이면 볼이 닿을 거리에서 눈을 휘어 웃고 있던 성규의 입꼬리도 따라 멈추었다. 이렇게 먼저 웃어보이면 병신처럼 또, 저를 따라 웃어버릴 것만 같았던 우현의 눈꺼풀이 미동조차 하지 않자 올렸던 입꼬리를 처연히도 내린 성규가 한 풀 꺾인 안색으로 우현의 눈을 살피려던 찰나였다.
"넌."
2년만에 맞이한 음색은 생각했던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성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는 대답을 뱉었다.
"김성규 아니야."
한참 후에 꺼낸다는 말은 되지도 않는 부정인 모양이었다. 성규가 잔뜩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다가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비춰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시덥잖은 말로 시작했던 인사가 무뚝뚝한 부정으로 매듭지어져 버린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뭐? 예의 그 옅은 눈썹을 장난스레 내린 성규가 의연히도 되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인 것 같은데."
"너,"
"……."
"아니라고. 김성규."
"……."
"…이렇게까지 잔인하진 않았잖아. 적어도 이렇게까지."
"……."
"잔인한 법은 없었다고. 김성규는."
그렇게 말해오는 주제에 성규의 앞머리에 고정 시킨 시선은 초점 하나 없이 흐렸다. 성규가 지나치게 가까이서 속을 꿰뚫어 오는 것처럼 제 눈과 마주하고 있는 우현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잔인하다고. 우현에게서 들은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어 본 성규가 완전히 굳힌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한 발자국 멀어진 탓에 한 층 더 또렷하게 보이는 우현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처음 등을 돌리자마자 저를 마주했던 표정 그대로인 것 같았다. 가까이 붙었을 때에, 우현의 다리에 닿았던 우산이 성규를 따라 한 발짝 물러서게 되었다. 잔인하다고 말해오는 우현에 미미하게 웃어보인 성규가 제가 짚은 우산을 내려다보던 눈을 들었다.
"당황스러운데."
"……."
"다시 만난 사람에게 해 줄 말이 그거 뿐인가."
우현이 마른 침을 삼키느라 다물었던 입을 떼었다.
"기척 없이 나타난 사람이 앞뒤 안가리고 반가울 리가 없잖아. 김성규."
"왜 니가 지금, 나한테 화를 내."
"…뭐?"
"기껏 만나, 먼저 웃어주기까지 하겠다는데 대체 니가 왜 화를 내고 있냐고. 개새끼야."
앞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휘어진 성규의 눈꼬리가 살살거리면서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먼젓번처럼 살갑게만큼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가시가 오른 성규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은 우현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벌렸다. 왜 화를 내고 있냐고? 초점 없던 눈에 힘을 준 우현이 보란듯이 웃고 있는 성규의 눈을 노려보다가 허탈함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 왜 화를 내고 있냐고? 그럼 내가 어떤 반응이기를 바랬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주제에 내가 죽고 못살았던 웃음 한 번 지어보이면 그걸로 내가 좋다고 널 따라 웃어버릴 줄 알았어?"
"……."
"몇 년 만에 만난 친구랑 다시 재회한 것처럼, 반갑다 반색하면서 악수라도 해 줄 줄 알았냐고. 내가 지금 화 내는 게 너한텐 이상해? 니 말마따라 나는 개새끼였으니까, 그저 좋다고 꼬리나 흔들다가 웃었어야 했어? 맨날 개새끼 개새끼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내가 진짜 그런 개새끼처럼."
"……."
"아무 곳에나 버렸어도 될 만큼, 가벼운 존재였냐고 묻는거야. 내가 너한테."
딱 그만큼의 존재였냐고.
어느새 입을 딱 다물고 있는 성규를 마주한 우현의 눈이 일렁였다. 씨발 내가 진짜. 끝내 덧붙이지 못했던 욕지거리를 입 안으로 삼킨 우현은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핀트가 엇나가 있을 만큼 밭은 숨을 몰아 쉬었다. 제대까지 하고나서 4개월동안, 그러니까 거의 3년동안 그림자 하나 비춰주지 않던 니가 불쑥 나타났다고 해서. 개새끼처럼 내가 진짜. 우현이 울컥 울컥 치솟는 화를 그나마 제어하지 않는다면 뱉는대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부러 제 입술을 세게 물었다. 답은 없었다. 그만큼 제가 가벼운 존재였냐고 묻는 말에 곧바로 돌아오는 것은 눅눅한 공기만큼 무거운 침묵이었다. 굳었던 표정이 점점 흐트러져만 가는 우현의 얼굴을 빤한 눈으로 들여다보던 성규가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를 기울였다.
"니가 여기서 화 내는 거, 솔직히 납득이 안 가긴 한데. 나한테 화내는 건 처음이라 어색해."
"그런 말 말고, 대답."
"표정 풀어. 명령하지도 말고."
"대답."
"많이 컸다 이거네, 남우현."
"김성규."
대답. 한 층 더 벌게진 눈을 한 우현이 성규에게 세 번째 대답을 다그쳤다. 그에 우현과 똑같이 눈에 힘을 주려던 성규가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런 말 말고… 대답부터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우현의 목줄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우현의 안색을 찬찬히 살피던 성규가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화도 낼 줄 알고. 꼭 화났다는 걸 알아달라는 개처럼. 우현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입꼬리를 올린 성규가 빗방울 소리만이 가득차 있던 정적을 깼다. 그렇게 안 봤는데, 둔하네. 우리 개새끼. 그렇게 말하는 성규는 우현처럼 느닷없이 눈가가 따끔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뜬금없는 대목임이 분명하지만서도. 성규가 마른 침을 삼키며 저의 눈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는 우현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걸로는 대답이 안 되나봐."
"…뭐?"
"그만큼 니가 좋다는 뜻이였는데. 이걸 꼭 이렇게, 말로 해야만 알아 듣나. 멍청한 게."
따가운 눈가를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해사하게 웃은 성규가 고개를 까딱했다.
"진돗개가 원래 이렇게 멍청했던가?"
"돌려 말하지 마. 알아듣게 설명해."
"돌려 말한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말 했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개새끼만 손해지, 뭐."
환하게 입꼬리를 올리던 성규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간다."
잔뜩 돌려 말한 주제에, 어이없는 대화를 끝맺는 말은 결국 두 번째 이별을 고하는 대책없는 말이었다. 우현이 제 귀를 의심하기도 전에 접었던 우산을 펴 든 성규가 잠시동안 우현을 흘끔거렸다.
허탈함으로 가득 찬 우현의 눈이 성규의 행동 반경을 좇았다. 잔 비를 막아내고 있는 우산을 제 머리 위로 기울인 성규가 아까처럼 의미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현이 무뎌져버린 고개를 틀어 잔 비 속으로 걸음을 딛는 성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것은 느렸다. 여느 날 매일 꾸던 꿈에 뒤척여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겪었던 것처럼 시야의 모든 것이 느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걸음걸이였지만, 우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느렸다. 성규의 발걸음은 느리게도 편의점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느리게도 간이 테이블을 지나치고 있었다. 성규의 걸음걸이를 좇느라 우현의 고개도 따라 돌아갔다. 가겠다는 말을 뱉은 이는 정말이지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했다. 그게 화 나. 우현이 허탈해 마지 않는 입을 벌렸다. 방금까지도 흥분해 따진 것은 저 혼자였고,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랐던 것도 혼자였고. 어이없는 이별에 또 다시 등 뒤로 남은 것도 혼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그 발걸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은 하나도 알아 듣지 못한 탓이었다. 화끈거리며 열이 오른 눈과 함께 입으로는 허탈한 웃음을 뱉은 우현의 발걸음 또한 비 속을 내딛었다. 살아있는 걸로는 대답이 안 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그 입으로 직접 어떤 말이든 들어내야 말 거라고 생각한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벌써 편의점 코너를 돌아가려 저만치 멀어져 걷고 있는 성규의 뒤를 향해 뛰던 걸음은 결국 우산을 들고 있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그 반동으로 성규의 몸이 서툴게 돌아갔다.
"…니가 왜 울어?"
"너 진짜 미쳤어?"
"남우현."
"아무리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다고 해도, 가겠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거기서 그렇게 말하고 가면, 내 엿같은 기분은 생각이나 해봤냐고."
"야. 개새끼야. 일단 눈,"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이라도 해 줬어야 알지."
제 얼굴 쪽으로 손을 뻗어오는 성규의 말을 자른 우현이 답답함에 받친 목소리를 내었다.
"나한테 말했던 것처럼, 죽으러 간 게 아니었다고.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말을 해줬어야 알지. 먼저 찾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도 안 해주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말해오는 목소리는 이미 절반은 울고 있었다.
우악스럽게 잡힌 팔에선 어느새 힘이 빠져나가 있었다. 내키는대로 화를 내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새 절제를 잃은 것 같아 보이는 우현의 눈이 급기야는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성규가 당황한 눈을 깜빡거리다 우현에게 잡힌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혹시라도 더 멀어져 있을까 급하게 쥔 것이 분명한 옷소매가 너무 세게 잡은 탓에 구김이 가 있었다. 니 말마따나 멍청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미 감정이 따르는 대로 울고 있는 목소리가 다음 말을 덧붙였다.
니가 없는 세상이라 생각하고 네 달 동안이나 살았는데. 성규의 팔을 잡은 손이 다시금 세게 그것을 붙들었다.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울었다. 성규가 우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저의 눈높이만큼이나 꺼진 고개와 시선을 나란히 하던 성규가 앞을 보고 있던 몸을 틀어 우현과 마주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어느새 굵은 빗방울로 변해가기 시작한 모양인지 우산에 와 닿는 빗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성규가 어깨 맡에 가만히 기대고 있던 우산을 떼어 우현 쪽으로 기울였다. 가없이 바닥을 향해 떨구어져 있던 머리 위로 성규와 나란한 우산이 얹어졌다.
"성열이가 너한테 리본…. 전해주고 왔던 날."
우산이 좁은 탓에 우현의 왼쪽 어깨가 굵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성규가 우현 쪽으로 더욱 우산을 기울여주며 말했다.
"그거 주면, 니가 나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어."
"……."
"그 날은 하루종일 성열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물어볼 말도 생각해놨고, 티비를 봐도 집중이 안 됐고 낮잠을 자려고 했어도 설레어서 잠이 안 왔어."
우현의 떨어진 고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현의 어깨 맡으로 우산을 기울여 이번에는 되려 제 어깨가 젖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마찬가지로 고개를 떨군 성규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리본 받고 개새끼가 뭐래? 날 찾았어? 금방 오겠대? 왠지 착잡한 표정으로 집에 도착한 성열이가 사실은, 불안해서 먼저 선수치듯이 물어보기도 했었어. 물론 결과는 내 예상하고 달랐지만."
개새끼가 많이 컸구나. 2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나 없이 못살지만은 않는 놈이었구나. 그래서 굳이 건드리려고 들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나는 또 지옥을 줄 수도 있는 새끼라서. 성규의 목소리가 마음에도 없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음에도 웃고 있는 목소리는 우현의 마음을 휑하게도 뒤집어 놓았다. 그에 우현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이미 마음 가는 대로 눈물을 쏟고 있던 우현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져 있었다. 우현이 성규의 눈에 집요하게 제 눈을 맞췄다.
"리본."
"응."
"그게 대체 뭐였는데."
우현의 물음에 성규의 대답은 간단하게도 돌아왔다.
"규브리엘이 달고 있던 거. 니가 줬던 선물."
진심을 담아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우현에게 대답한 성규가 실없이 웃어보였다.
"아까 보니까 주인님한테 대들 줄도 알던데, 짖는 연습만 하면서 살았냐."
"……."
"예전엔 그런 거 없이 마냥 고분고분하기만 했어서, 어딘가 머리가 부족한 새낀줄로만 알았더니 그런 건 아니었나봐. 화도 낼 줄 알고. 몰랐지 나는. 그저 2프로 부족한 새끼여서 나한테 그렇게 꼬리나 흔들면서 산 줄로만 알았지."
우현이 듣기로는 성규는 여전히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다. 복잡해져오는 머릿속에 성규의 말을 끊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던 지청구가 막혀 버린 것은, 또 다시 모든 생각을 멈추어버리게끔 만들어오는 성규의 다음 말 때문이었다.
"내가 니 인생을 채워준다며."
성규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우현과 마주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남은 2프로도 마저 채워줘볼까 하고 기다린 사람은 정작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짖는 연습만 열심히 해 왔네."
"니가 날 기다려?"
우현이 아까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를 성규의 말에 반문했다. 그에 성규의 고개는 너무도 쉽게 끄덕여졌다.
"규브리엘이 매고 있던 리본. 그거 보여주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두 번째였다.
예고없는 만남 이후로, 그 잠깐 새에 두 번째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정지해버리는 느낌을 받은 우현의 눈이 매섭게도 굳었다. 리본. 우현의 입이 반사적으로 리본이라고 되뇌였다. 그러니까 그 리본. 이게 뭐냐고 물었던 질문에 그저 묵묵대답이었던 이성열이 건네주었던 네달 전 그 리본이.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린 탓에 지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리본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면서 동시에 겹쳐 보이는 것은 성규의 입에서 뱉어진 규브리엘. 은방울꽃. 연쇄적으로 떠올라 버린 것은 나의 인생을 채워준다는 글귀를 적어 넣던 그 때의 장면과 함께ㅡ 화분 둘레에 널널하게 매달았던 하얀색의 리본 하나. 우현의 눈이 응시하고 있는 성규의 뒷편에서 우산 끝에 맺히는 빗방울이 점차 빠른 속도로 뚝 뚝 떨어져가고 있었다. 우현이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말을 잃자 성규가 물끄러미 우현을 향하던 눈을 거두어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에, 쌀쌀한 가을 기운은 다시금 언 뺨을 스쳐오고 있었다. 성규가 저의 말에 대답 하나 않는 우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남우현. 성규의 입에서 뱉어진 건 매번 불리우던 개새끼라는 대명사와 달리 생소한 이름이었다. 우현의 굳은 표정이 갖는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한 성규가 허탈해지려는 입꼬리를 올리다가 웃었다. …설마.
"까먹고 있었다고 하기만 해봐."
우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넌 진짜 씨발, 죽을 때까지 개새끼니까."
결국엔 개새끼,하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흐려진 말꼬리가 우현에 의해서 삼켜졌다. 앞서 우현이 그랬던 것처럼 절절하게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려 했을 때 찾아든 입술은 서로의 답답한 눈물을 삼켜냈다. 우현이 벌리지 않으려는 입술을 열고 집요하게도 입을 맞춰왔다. 짜증나. 얼떨결에 눈을 감으면서도 머릿속으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전부 다 짜증나. 그걸 어떻게 …못 알아 들을 수가 있어. 아까부터 따끔거려오던 눈가에 결국은 눈물이 맺혔다. 엉엉 울고 싶은 입을 다시금 막은 것은 우현의 입술. 밀어내려 하지도 못하게 뒷통수를 잡아 당겨오는 우현의 왼손이 더욱 깊이 둘의 입술을 맞물리게끔 만들어 왔다.
둘의 머리 위로 씌워졌던 우산이 절반 넘게 기울어졌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성규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간 탓이었다. 힘없이 허공으로 기울여진 우산이 궤도를 그리며 어깨 맡에서 멈추었다. 그에 부슬부슬 내려오는 잔비가 둘의 머리 위로 흩뿌려졌다. 우산은 이미 성규의 손을 떠나 있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발치로 떨어진 우산이 툭 튀어나온 시멘트 계단에 부딪히며 나동그라졌다.
니가 잘못한 건지, 내가 잘못한 건지. 부드럽게도 맞추고 있는 입술은 암묵적으로 그런 것 따윈 묻지 않기로 약속하고 있는 듯 했다. 우현은 단지, 일부러 널 찾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아줬으면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우산을 떨어트려 버린 탓에, 비어버린 두 손을 올려 우현의 목에 팔을 두른 성규가 비스듬히 맞닿은 우현의 앞머리에 저의 이마를 당겨 고개를 틀었다. 기분 좋은 협주곡이었다.
신경 써 정리했던 머리가 비를 만나 흐트러져 있음에도 그 순간, 빈 쓰레기통에 와 닿아 통통거리며 울리는 빗소리가 무엇보다 듣기 좋은 협주곡으로 들려 올 때 둘의 재회는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우산을 챙겨오지 않아 젖어버렸던 우현의 왼쪽 어깨가 성규와 나란히 속도로 젖어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온도로. 다시는 달라졌으면 하지 않던 삶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은 개새끼와 같은 무언가로. 지독하게도 저의 온도를 좇아 오던 우현에게 팔을 두른 성규가 이제는 제가 그의 온도를 닮아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과 마찬가지로ㅡ 평범하기 그지 없는 편의점 앞, 두 번째 천국은 시작되었다.
* * * * *
"만났댄다."
"어어?"
"만났대, 둘이. 남우현하고 성규 형."
호원이 성열에게서 온 문자를 동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호원을 따라 배를 깔고 누워 낑낑거리며 오렌지를 까려던 동우가 반색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진짜? 갑자기? 어어떻게? 역시나 시끄러운 리액션이 귓전을 때렸다. 니가 봐. 동우의 리얼한 표정에 쯧쯧거리며 혀를 차던 호원이 동우의 앞으로 휴대폰을 밀어주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퍼득거리며 자리에 앉은 동우가 성열에게서 온 문자를 소리내어 읽었다. 일 하다 말고 밖에 보니까 둘이 뽀뽀하고 난리 났다. 물론 남우현하고 성규형이. 무뚝뚝함이 흘러 넘치는 성열의 문자를 보고 믿을 수 없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인 동우가 호원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진짜야? 뻥 아니고? 나 또 속이려는 거 아니고?"
"뭐 좋자고 이런걸로 널 속여."
"어떻게 만난건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방금 안 건데."
진짜 띨빡이냐. 질린다는 표정과 함께 동우의 머리를 멀찍이 밀어버린 호원이 동우의 손에서 휴대폰을 앗아갔다. 하여튼 좀, 생각 좀 하고 말해. 늘 그렇듯이 똑같은 타박과 똑같은 톤의 애증어린 말투였다. 이번에는 좀 아프게 쥐어박힌 동우가 입술을 삐죽이며 맞은 부분을 살살 문질렀다. 맨날 때려. 나보고 멍청하다면서 머리만 때리는 건 또 뭐래. 그렇게 툴툴거리려던 동우가 갑자기 번뜩 든 휴가 생각에 호원 쪽으로 붙어 앉았다.
"그럼 있지, 우리 피서 갈 수 있는 건가?"
"피서 저저번 달에 갔다 왔잖아."
"그건 우리 둘만 간 거고. 왜, 옛날에 계획했던 거 있잖아. 더블 피서."
"그 답답한 커플이랑 같이 가기로 했던 거?"
"응. 그거!"
"안돼. 그건 이미 변질돼버렸잖아."
"무슨 변질?"
"애초에 너희 커플, 우리 커플. 남남커플. 이렇게 세 쌍이 가기로 한 거였으니까."
호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년에 가면 남남커플 더블 피서일 테니까 본질이 달라."
"그게 무슨 상관인데?"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던 동우가 눈꼬리를 내리며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에 열심히 빈정대며 휴가를 부정하려던 호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금방 또 이렇게 시무룩해지는 게 귀엽다니까. 하지만 동우는 이 쯤에서 더 삐지기 전에 얼른 풀어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안색마저 변하려는 동우의 머리에 손을 얹은 호원이 소리나게 웃으며 부슬부슬한 앞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알았어. 가기로 해. 어찌됐든 가기로 했던 건 사실이니까."
"…진짜? 바다로? 나는 계곡보다 바다가 좋아. 펜션도 잡아서? 고기도 구워먹고? 성열이도 같이?"
"미쳤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호원의 인상이 단박에 바뀌었다.
"이성열 걘 뭔데. 빼"
*
"만났네."
항상 이 시간 즈음이면 찾아와 같은 담배를 사 가던 단골 손님이 딸랑,하는 종소리를 내며 편의점을 나가자 턱을 괸 성열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30분 전 쯤이었다. 성규가 가져다 준 도시락을 깠는데 그럭저럭한 반찬들에 비해 완두콩으로 'ㅋㅋㅋ'라며 새겨진 밥을 보니 알바나 하고 있는 저를 비웃고 있는 성규의 음성이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었다.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들어 성규에게 '비웃지 마요.'하는 문자를 전송하려던 찰나였다. 우연히 쇼윈도 너머로 고개를 돌린 성열의 눈에 믿을 수 없는 둘의 모습이 포착된 것은.
너무나도 놀란 탓에 크게 뜬 눈을 다섯 번이나 비비고 봐도 남우현과 성규가 분명했다. 성열은 개구리처럼 유리창 앞에 붙어 둘의 행보를 눈으로 좇았었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남우현은 여기 왠일인데? 머릿속으로 가득 차오르는 물음표에 입을 떠억 벌린 성열은 편의점 코너 쪽에서 기어이 입을 맞추고야 마는 둘의 모습에 쇼윈도로 이마를 찧었다.
쿵,하고 머리를 박는 소리가 둔하게도 울려왔다.
"행쇼네."
성열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행복하쇼."
분명히 좋은 일인데.
마냥 들뜰수만은 없는 이유가, 문득 떠올라버린 저승사자 때문이라면. 성열이 쇼윈도에 박은 머리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갑자기 왜 또 저승사자는 떠올리고 그래. 그 사람이 대체 뭐라고. 존나 음침하게도 생긴 주제에.
누가 진짜 저승사자 아니랄까봐 하늘로 떠 버린 사람을 이제와서 왜. 반사적으로 떠오른 명수의 생각을 지워낸 성열이 유리창에 짖이기던 머리를 들어 두 사람이 서있던 자리를 괜스레 살폈다.
이미 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뭐야. 다른 곳으로 행쇼하러 갔나. 성열이 부루퉁하게 내민 입을 쏙 집어넣고 간이 의자에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그래. 비록 남남커플이긴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아주 난리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부럽다는 건 아니고. 성열이 애먼 옆머리를 긁적이다가, 아무렇지 않음을 어필하기 위해 보는 이도 없는데 부러 하품을 유도했다.
* * * * * *
화려하게 색을 입은 옥탑방 길목의 벽화가, 이젠 제법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보일 정도로 느슨해진 시간은 두 번째 맞는 천국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사실은 2년 전부터 0214 였던 도어락은 어느새 매일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니들 자꾸 들락날락 거리지 마. 김성규 집이니까. 잔뜩 가시 돋힌 말이 세 사람을 향해 명령할 때면 어이없음으로 입을 모은 나머지의 대답은 한결같이 돌아왔다. 뭐, 이 씨팔 미친놈아. 너 없을 동안 우리가 더 오래 있었어! 뒤늦게서야 나타난 두 번째 주인 아닌 주인에 세명의 목소리 또한 같은 톤으로 버럭하며 올라갔다.
옥탑 위 평상 옆에는 자그마한 개집도 보란듯이 자리했다. 물론 개 집이 있다고 해서 살고 있는 강아지는 없다. 쓸데없는 데다가 돈을 투자했다며 또 다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는 성규의 입은 습관처럼 우현의 입에 의해 막혀버렸다. 이것은 두 번째로 맞는 그들의 천국에서 시작된 하나의 룰이었다. 하루에 세 번 이상 잔소리 하면 무조건 뽀뽀. 그것은 정확히 그 날 하게 된 네 번째 잔소리였다. 이제는 별다른 반항 없이 우현의 입술을 받아낼 줄 아는 성규가 잠깐동안 눈을 감고 나면 얼굴 앞에 가까이 떨어진 우현이 소리내며 웃었다.
"같이 살고 있다는 거 티내는 거야."
"뭐래. 미친놈이."
"여기 옥탑방 주인, 개새끼랑 같이 살고 있어요."
하면ㅡ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거니까 하나님도 다 알 수 있을걸. 그렇게 말하며 웃던 우현의 배에 성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낯간지러운 말 하지 좀 말라고. 눈꼬리를 올려 씩씩대던 성규가 제 눈에는 여전히 쓸데없어 뵈는 개집의 지붕을 발로 걷어 찬 후에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래도 전보다는 표정이 다양해진 사람이다. 복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킥킥거리는 웃음을 터뜨린 우현이 잔바람에도 삐걱대는 평상을 지나, 방금 전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닫힌 도어락을 위로 올리고 삑삑삑삑,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그 번호를 지나면 문이 열렸다. 벌써 거실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져 빨간색 동그라미로 가득 찬 달력을 챙겨 들던 성규가 고개를 꺾어 우현을 노려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나 빨리 닫아. 추워."
두 번째.
혹은 마지막 천국에서 맞는 시간들은 너무나도 달콤해서 가끔은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나의 천사에게.
이게 설마 니가 떠난 후로 꾸고 있는 긴 꿈은 아닌 건지를.
ㅡ만약에 꿈이라면, 나는 평생을 꿈 속에서 살아도 그 곳은 천국이니까. 어찌됐든 행복하겠다는 말과 함께.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