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빈이 한참 동안 홀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쯤, 진환이 노곤한 목을 두어 번 꺾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진환은 그리 긴 시간 동안 한빈을 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에 대해서 알 건 다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한빈이 느끼고 있을 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매번 뺀질거리고 온 세상 만사 귀찮다는 듯 살고 있는 한빈이지만 제 작품에 대한 커리어 하나 만큼은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한빈에게 때 아닌 표절 논란은 조금 허무하기까지 할 테지. "서글프냐?" "그럴 리가." 엄청 서글픈 표정이구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환은 놀리듯 말하면서도 손으로는 한빈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풀 죽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였다. 그러나 한빈은 이내 그 손을 탁 소리나게 쳐냈다. 역시 진환은 가만히 있어도 구박받고 위로해줘도 구박받는 천하의 동네 북이었던 것인가. 한빈은 진환의 확신섞인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이 허무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저 귀찮고 짜증이 날 뿐이었다. 어제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귀에는 여전히 그 망할 놈의 힙합 비트가 웅웅대는 것만 같았고, 창밖으로 내리쬐는 따사롭다 못해 따가운 햇빛은 그대로 온몸에 투척돼 계절에 맞지 않는 더위를 유발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덤 하나 더 얹은 격이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지경이었다. 어쩌면 어제 그 놈을 만난 게 악재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하는 한빈이었다. 그러고 보면 또 그럴 듯한 게, 오늘 아침에도 김지원이라는 놈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 상또라이 같은 층간 소음 유발자를 의도치 않게 두 번이나 만났으니. 어젯밤 울려퍼졌던 힙합이 내 평생 운을 갉아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21세기 IT강국 대한민국 한가운데의 스마트 시대를 살아가는 한빈은 남몰래 휴대폰으로 ㅇㅇ데일리를 검색했다. 댓글 테러라도 왕창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생전 상판대기 한 번 못본 기레기가 자신의 이름을 빌려 파격적인 기사레기를 만든 게 못마땅했다. 더럽게 건드릴 새끼가 없었나. 왜 나를 건드려? 가만히 있어도 난리고 바깥으로 나대도 난리인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한빈은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두드리던 휴대폰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까짓 일로 늘어지면 김한빈이 아니지. 눈깔을 번쩍이며 어금니가 부서져라 갈아대는 한빈을 저 멀리서 지켜보던 진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니 근데 형 아는 사람은 왜 이렇게 안 와?"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 들렀다 온다더니. 일이 좀 늦어지는가 보지." 진환은 명색이 출판사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한빈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을 걸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한빈은 평소처럼 무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진환은 스스로의 기분 탓 덕에 한빈이 엄청나게 분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손가락 다섯 개 사이로 컴퍼스 바늘을 꽂아넣는 기분이었지만 꾹 참고 한빈에게 슬그머니 제안 하나를 해보였다. "술 한 잔 하러 갈래?" "대낮부터 무슨 술이야. 별로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에 마셔야지. 그리고 너보단 잘 마셔 임마." 오늘 같은 날……. 표절 시비 붙은 날……. 뒷말은 아련하게 생략한 진환이었다. 한빈은 특유의 멀뚱한 시선으로 진환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형이 저를 위로해주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다. 100% 자신은 잘못이 없는 일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저는 지금 출판사의 수익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이 내심 진환에게 미안한 한빈이었다. "근데 술 먹고 또 테이블 위에서 꼬튕춤 추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형 너 내가 그 일 입밖에 내뱉지 말라고 했지 않냐." 김한빈 희대의 사건. 한빈은 평소 술을 정말 못했다. 이렇게까지 못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입에 대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술고래와 정반대인, 일명 술멸치라고 불리었는데 한빈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술멸치 답게 제일 빨리 취하고서 테이블 위에서 꼬튕 춤, 일명 꼬추 튕기기 춤을 시전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였다. 사건은 이러했다. 김한빈은 그 날, 유독 자신도 모르게 흥에 취해있었다. 진환이 그렇게 회식에 좀 나오라고 성화할 때는 집에 콕 틀어박혀 말 그대로 방콕질을 해댔으면서 정작 한 번 딱 참석하자 그대로 정신줄을 놨다. 술 몇 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업텐션 하이텐션 갈갈이 끌어 모은 한빈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었다. '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그래도 목소리 하나는 얌전했었다고 전해 내려졌다. 밀폐되었다고 표현해야 맞을 구석진 술집. 아. 아니나 다를까. 술 마신 지 얼마나 됐다고 꼴아버린 한빈이었다. 사실 진환도 꽐라 되기 일보직전이었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는 지라 테이블 위로 엎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애가 작가라는 게 다행이었다. 책 낯만 팔렸지 자기 얼굴은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그닥 많지 않으니. 여기서 주정을 피워도 이 애가 신인 작가 김한빈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겠지, 암. 한빈의 주정은 대단했다. 가만히 엎드려 자는 것 같다가도 경련을 하며 일어나 정체불명의 권총 댄스를 춰대고, 조금 있다가는 꼭짓점 댄스까지 추려는 걸 진환이 겨우 막아냈다. 아니 이 애는 전생에 술 먹고 춤추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형." 진환은 귓가에 울리는 또렷한 목소리에 다시금 몸을 곧추 세웠다. 웬 일로 마치 술이 깬 것처럼 단정한 음성이… "나 안 취했다고."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너 백퍼센트 취했구나. 진환은 알딸딸한 정신을 부여잡고 한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아등바등댔다. 김한빈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간다. 무시무시한 으름장을 쳐도 인사불성인 한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진환은 본인 나름대로 한빈의 스트레스를 풀어줬다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는 중이었다. 작가에게 표절 논란이란, 그 정도로 막대한 충격과 피해를 안겨 줄 수 있는 불행한 일이니까. 자고로 이런 유언비어 사건은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한빈을 구설수에 오르게 만든 기사 사이트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미루어 짐작했다. 신인 작가 한 명 몰락시키는 자극적인 기사로 조회수 좀 올리려는 속셈일 확률이 가장 컸다. 진환은 한 손으로 한빈을 부축하고 또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서 아까 전 울렸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약 10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형 부른 곳 다 와가요. 그러니까 지금 쯤이면 거의 다 왔다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진환이 메시지를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 문을 열고 당차게 들어오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진환이 형." 분명히 멀끔히 정장을 차려 입었건만 어딘가 모르게 껄렁해 보이는 자태. 해맑게 웃으며 어정쩡하게 테이블 옆에 서 있는 진환에게 한 손을 흔드는 사내는 분명 낯이 익다. 진환도 그제서야 한 시름 놓은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이제 왔냐?" "뭐야. 진짜 술 마시고 있었네. 속도 편하다." "속 편하다니. 김 작가 스트레스 풀어주려고 온 거지. 그나저나 김지원 오랜만이다. 얼마만에 보는 거야." 한빈은 비몽사몽한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고 찌그러져 있었다. 한 마디로 사태 파악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 술집 문을 열고 기어들어온 껄렁한 사내는 그였다. 미국 이름 바비. 현재 구로동 화신 아파트 한빈의 집 위층에 거주 중. 그리고 표절 시비와 네티즌의 비난 방석에 오른 한빈을 도울 구세주. 법 적으로 빠삭한 애. 실눈 바로 그 남자. "김지원 너 이제 휴가 끝나가지 않냐?" "그렇지. 사실 예전에 복귀했어야 했는데 더 쉰다는 명목으로 늦장 부리는 중이었거든." 진환과 짧은 안부인사를 나눈 지원은 테이블 위에 엎어진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진환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김 작가? 묻는 말에 진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얘가 걔. 지원 또한 한빈을 알아보지 못한 채였다. 진환에게도 그저 김 작가라고 들었기에 더욱 그랬다. 지원은 이 참에 테이블에 합석했다. 한빈은 어쩐지 경련을 일으키지 않고 잠잠했다. 진짜 원수끼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저절로 알아본다더니. 한빈은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지원을 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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