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껄렁남 김지원 이 쪽 나무 저 쪽 나무 쏘다니며 마실 다니는 참새들. 일본 태풍의 영향으로 조금 거세고 춥긴 하지만 나뭇잎을 날려버려 길 청소 하나는 확실히 해주는 바람. 그들 소리와 함께 섞인 흥겨운 비트가 있었다.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이건 우리 안의 소리. 마더 퍼커 핸즈 업 아 원 츄어 필링 예. 덜컹거리는 웅장한 사운드가 한 남자의 귓바퀴를 돈 뒤 세반고리관을 거쳐 나팔관까지 도달했다. 쩡하니 내리쬐는 가을 햇빛. 거꾸로 쓴 검은색 스냅백 위로 해골이 짱짱하게 박혀있는 금박 헤드폰이 자체 발광을 뽐냈다. 날씨에 어울리지도 않는 박시한 나시티와 똥 싼 바지를 걸치고 힙합 스웩 풍기며 동네 길 한 번 요란하게 걷고 있는 사내는, 아니나 다를까. 김지원이었다. 아파트 앞에서 한빈이 그렇게 도망치듯 헤어진 후, 지원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아닌 지원의 직장 동료 정욱이었다. 그는 지원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역시나 정욱은 지원에게 전화를 걸자 마자 거두절미하고 몸 상태부터 물었고, 괜찮다는 지원의 대답에도 미심쩍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원. 할 이야기 겁나 많으니까 너 당장 검찰청으로 튀어 와. "지금? 아직 복귀도 안 했는데 이 꼴로 어떻게 가냐." 그냥 오라고 하면 좀 와라. 너 이 전화 끊기면 다시 잠수탈 것 같아서 그래. 너 거지꼴하고 다니는 거 검찰청장도 알 거다. 순간 검찰청장까지 아는 건 좀 오바라고 지원은 생각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일단 지원은 아주 의외로, 대한민국 엘리트만 입성할 수 있다는 검찰청에서 일하는 인물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곧바로 법조인의 길을 택해 사법 고시도 껄렁거리며 패스. 그 이후로 꽤나 잘 빠진 길로만 걸어온 그는 서울 지검에 발령난 당일부터 검찰청 내에 소문이 쫙 퍼진 요주의 인물이었다. 세상에 어느 검사가 실컷 멀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채로 해골이 겁나 크게 박혀 있는 헤드폰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출근한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의 유명세를 알지 못하는 지원은 재촉하는 정욱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건성으로 대답한 후 지금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지원의 특별 휴가는 이번 주 내로 끝날 예정이었다. 검사라면 공식적인 공무원 휴가를 제외하고 거의 있을 수 없는 자유로운 휴가가 몇일 동안 허용될 수 있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지원의 부상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물어 있는 왼 팔꿈치 옆의 흉터는, 결코 짧은 상처가 아니었다. 어림잡아 봐도 심하게 찢어진 결과였다. 지원은 길을 걷다 힐끔, 상처를 들여다 봤다. 신기하게 벌써 거의 아물었네. 누군가가 살의를 담고 흉기를 들이밀었던 기억이 여즉 생생했다. 항상 밝은 지원에게도 아찔했던, 그 기억. 검찰청 입구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멈추어 선 지원은 정욱에게 나오라는 메시지를 쏘았다. 어차피 얼마 후 복귀할 곳인데 굳이 벌써 발걸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원은 묵직하게 터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아. 자유가 끝나 간다. 밀린 일감들이 눈에 훤했다. 사건 일지들과 증거 자료들이 한 데 모여 시야를 가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백내장 끼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밤마다 힙합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니까. 마침내 저 멀리서 정욱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욱은 그 새 살이 더 빠져 있었다. 특별 휴가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는 육안으로 3kg정도는 빠져 보였다. 그가 살이 빠졌다는 건 요 근래 나라가 더 흉흉해졌다는 소리겠지. 지원의 속도 덩달아 흉흉해졌다. "김지원!" "박정욱!" 이산 가족 상봉과도 같은 순간에 우는 소리를 내는 건 정욱밖에 없었다. 열심히 같이 우는 척을 해주는 지원과 일을 반으로 나눌 동지가 돌아와 기뻐서 우는 정욱. 둘의 뜨거운 포옹을 보는 사람들이 쟤네 왜 저래 하며 혀를 차댔다. "너 이제 멀쩡해 보인다? 어? 멀쩡한 지 꽤나 오래된 것 같은데. 왜 잠수타고 기어나오질 않아?" "이왕 휴가 받은 거 단물 쪽쪽 빨아야지. 이 바닥에서 이런 기회가 또 있냐?" "기회 주의자 새끼……. 너 피 철철 뽑아내면서 응급실 실려갈 때는 진짜 너 죽는구나 싶었는데." 정욱은 그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원에게도 정욱에게도. 검찰청 내부에서도 경악했던 김지원 피습 사건. 당시 정황을 알 정신이 없어 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옥살이를 하게 된 피고인의 가족 중 한 명이 보복심을 품고 자신의 팔에 칼을 꽂았던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범인은 지원의 몸통을 노렸던 거지만, 꽤나 운동신경이 있었던 지원이 칼을 잡고 옆으로 비껴 낸 덕에 손바닥과 팔이 찢어지는 정도로 그쳤다. 물론 그렇게만 해도 심한 상처였지만. 지원은 범인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원 자신은 검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들 가족의 무너지는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특휴를 낸 후 집 안에만 틀어박혀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의 위치. 앞으로의 행방. 목적지. 새벽 감수성에 푹 젖기도 하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 꼭 출근할 테니까 그 때까지만 살아있어라." 정욱은 어찌 그리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지 아예 길바닥이 눈물 바다가 될 기세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원과 같은 부서에 있는 정욱이 출근하지 않는 지원을 대신해 일을 도맡아 했을 테니까. "넌 안 나오면 너 죽고 나 죽는 줄 알아……." 거의 절규에 가까운 정욱의 목소리는, 대한민국 야근인들의 가슴을 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척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환영 속에 갇힌 것처럼 몽롱했다. 검은색 실뭉치가 둥둥 하늘에 떠다니고 있었고, 그것은 곧 거센 바람에 풀어헤쳐졌다. 한 갈래로 흩어지는 실들은 바람 따라 날아가다가도 다시 방향을 틀어 제 쪽으로 넘실넘실 건너왔다. 마치 용트림을 하는 듯한 모습에 감탄을 하는 사이, 풀어헤쳐진 실뭉치들은 곧 무언가로 변한다. 뭐로 변하는 거지. 이상하네. 한빈이 인상을 찌푸리고 집중했다. 실이 가위로 잘라졌다. 그러자 길다랬던 실타래들은 어디가고 두 도막의 실 밖에 남지 않았다. 어, 저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뭐더라 저게. 한빈은 끙끙대며 머리를 굴렸다. 뭐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누구 눈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한참 개꿈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한빈이 꿈의 절정에 이르러 번쩍 눈을 떴다. 아 시발 꿈. 어쩐지 더럽게 기분 나쁜 꿈이었다. 다시는 꾸고 싶지도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꿈. 왜 하필이면 실눈처럼 생겨가지고는. 꿈벅꿈벅. 술과 잠이 덜 깬 눈이 멍하게 제 앞을 훑었다. 갑자기 눈을 뜬 탓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흐릿했다. 주위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유독 시끌벅적하게 들렸다. 목이 말랐다. 술을 그렇게 들이 부었는데도 갈증이 나니 그와 동시에 짜증도 함께 났다. 그래서 말에 신경질이 섞였다. "……진환이 형. 물." 제 말이 끝나는 동시에 순간 소곤거리는 소리가 멎은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인 걸까. 한빈은 술김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을 달라고 아이처럼 재촉했다. 제 앞에 누가 양반다리를 하고 떡 하니 앉아있는 지도 모르고 태평히 물만 찾아댔다. "……." 지원의 실눈이 크기를 키워갔다. "어." 아니, 이게 누구야. 지원은 눈을 비볐다. 눈을 세차게 비볐다. 어찌나 세게 비볐는 지 붕어처럼 부어오른 눈을 다시 제대로 떠 앞의 김 작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진환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을 비비는 원맨쇼를 해대는 지원이 왜 그러는 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물론 술 주정하는 거 처음 봐서 그런가, 하는 김진환 전매특허 헛다리를 짚는 것을 잊지 않은 채로. 지원은 숨을 헛 삼켰다. 아무리 봐도 제 아래층 사는 예민한 한라봉임에 틀림없었다. 그럼 설마 작가일 한다는 게 김진환 출판사에서 일 한다는 거였나. 그럼 인기 신인 작가도 이 사람이고. 표절 시비에 휩싸인 것도 이 사람이고. 세상은 좁다더니 뭐 이렇게 좁을 수가. 다시 봐도 기막힌 우연의 일치에 지원은 멍하니 정신줄을 놨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긍정맨 지원 답게 당황을 탄 것도 잠시. 취한 한라봉이 술을 깨면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했다. 지원은 왜 혼자서 쪼개냐는 듯 눈짓으로 묻는 눈치 없는 진환에게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나 얘 알아." "뭐?" "우리 집 밑층 살아." 한라봉. 여기서 만날 줄이야. 지원은 참지 못하고 배꼽 잡고 바닥에서 뒹굴었고, 한빈은 여전히 물 달라고 난리였고 아직 상황 파악을 마치지 못한 진환은 고개만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이 총체적 난국 속에서 정상인은 찾아보려야 찾아볼수가 없었다. 한빈보다 출판사에 좀 늦게 들어와 그의 주정을 보지 못했던 작가 동기들이 예상했던 바 중 마지막은 정말 맞았다. 술 마시면 미친 개가 되는 것. 그런데 어쩐지 미친 개가 아니라 물 먹는 하마라고 정정해야 되지 않나 싶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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