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캐해석
1.
김현진은 원래 그랬다. 본능적이라 해야 하나. 원체 활달하고 얼굴 예쁘고, 잘하는 것도 많고. 좋게 눈에 띄는 애다 보니, 그게 밉보이진 않았다. 현진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자애한테 반하기 전까진. 뭘 모르는 사람도 번뜩 깨우쳐질 만큼 현진은 그렇고 그런 티를 냈다. 걔가 혜주를 발견한 게 3학년 때 일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김현진 이미지가 문제가 아니라, 혜주가 불쌍하도록 시달린 게 짧아서 다행이라고. 혜주를 두고 고등학교에 올라온 현진은 중학교 시절 첫 이미지를 여기서 그대로 쌓고 있었다. 일단 그걸 박채원이 안다는 존재감부터가.
그 꼴을 두 번째 보는 채원은 우습기도 했지만 불안함이 더 컸다. 다음 단계도 반복할까봐, 여기서도 자기가 치다꺼리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채원은 현진이 하필이면 자기랑 친한 후배를 물었다는 것에 짜증이 깊었다. 지난 1년간 폭주하는 현진을 달래느라 고생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소란이 없도록 여학생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딴 데서 벌어지는 일이야 철저히 고굽척할 생각이었지만, 자기네 반에서 누군가 찍혔다간 소환될 게 백 퍼센트였다. 여러 모로.
2.
그중에 가장 눈에 띈 게 전희진이었다. 눈이 나쁜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경을 쓰면 인상이 너무 둥글거려 혜주랑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맨눈으로 앉아있으면 꼭 가서 공부하자고 졸랐다. 그러면 하자는 대로 하긴 하는데... 어지간히 이상해 보였는지 채원이 그렇게 말을 걸어도 희진이 친하게 지내는 애들은 따로 있었다. 같이 놀다 현진에게 보일 일 없으니 그것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안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희진이 채원의 동창이자 현진의 동창인 나재민이 좋다면서 들러붙은 거다. 김현진의 지랄을 피하게 하려면 미리 짝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네. 그 생각으로 그렇고 그런 얘기도 다 들어주고, 채원은 자기 딴엔 밀어줬다. 너 싫다는 말은 안 믿을 수 있어도 너는 싫은데 얘는 좋대, 보여줘버리면, 그건 힘들겠지. 그렇게 되면 현진의 눈에 걸린대도 일이 크게 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근데 희진이 나재민이랑 사귀고선 안경을 안 쓰려는 게 문제였다. 체육복도 안 입고. 옆 반 드나든다고 자꾸 나돌아다니는 것도. 채원은 현진이 자기네 과에서 재미 볼 게 많기를 매일매일 기도했다.
3.
기도는 무슨 기도.
“체육복 좀.”
그때부터 불길했다.
“여기 있어. 갖고 올게.”
“아 다리 아파.”
“바닥에 앉아.”
전희진 있는 교실에 들어오지 말란 소리다.
채원은 어쨌든 최선을 다했다. 경계심을 들키지 않으려 짜낸 최대한 평범한 표현이었다.
“어, 채원아! 나재민이 너랑 먹으라고 바나나우유 사줬어.”
“나재민?”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희진은 안경도 체육복도 없이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평범이고 자시고 매점에서 새 체육복을 사다 바쳤어야 했던 거다.
위험은 경계하는 게 아니다. 피하는 거지.
4.
“어.. 너도 먹을래?”
그렇게 주기 싫은 얼굴로?
희진은 현진이 나재민 이름을 물은 게 찝찝하단 티를 냈지만, 문제는 짚는 것과 정반대에 있었다. 현진이 차분하게 늘어진 희진의 머리카락을 넘겨 이름을 드러냈다. 아 이거. 나재민이 자기한테 이랬다고 나 돌기 직전까지 재연한 거잖아. 채원은 원치 않은 순간에 원치 않은 조합으로 보게 된 그림이 골치 아팠다. 딱 걱정하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라.
“나재민이랑 친해?”
“아... 남자친구.”
“남자친구?”
“응. 왜?”
지금 견제할 때가 아닌데. 희진은 자기 이름을 확인한 걸 뭔 도전으로 알아들었는지 여전히 요점을 잡지 못하고 엉뚱한 고집을 부렸다. 표정부터 말투까지, 다리 짚은 자세까지 그랬다. 그 꼴을 보던 현진이 웃기 시작했다.
“너무 안 어울려서.”
“뭐?”
“니가 아까운데.”
허구한 날 남친 인기에 신경 쓰던 애한테 저런 말을 한다. 애써 기를 세우던 희진이 불쌍하리만치 삐걱댔다. 이건 혜주보다 안쓰럽네. 남자친구 못 만들게 막아야 했다. 그랬으면 안경도 체육복도 지켰겠지... 그리고 저 애잔한 감정도. 채원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놓고 재미있단 얼굴을 하고 있던 현진이 채원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도 중학교 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혜주의 다채로운 기겁이 채원의 머리를 스쳤다. 채원은 자책을 그만뒀다. 저 불도저 같은 성격을 혼자서 막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현진이 다시 희진에게 시선을 돌리고 친절하게 결론을 짚어줬다.
“너도 알지. 네가 아까운 거.”
“... 뭔 상관이야.”
“걸리면 꼰지른다. 헤어져.”
5.
이 학교에 김현진의 전적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 현진과 채원, 그리고 재민뿐이었다. 하필 그 셋이 다 엮이게 됐다. 희진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나재민이 아니었어도 현진이 그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었을까? 아는 사람에게 감정이 더 크기 마련이다. 이제 소용없지만, 채원은 수업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남친 이름 성씨라도 떼고 부르지 그랬냐고.
[설마 김현진이야?]
채원은 그 문장을 보자 앞으로의 피로가 느껴지는 듯해 미간이 저절로 찌그러들었다. 모른 척할 자유도 없는 처지가 개탄스러웠다. 그럼 김현진 말고 누군데. 당연히 알면서도 1프로에 기대고 싶은 마음 그거 뭔지 아는데, 자기는 100프로로 목격한 사태에 남이 설마 소릴 붙이니 재수가 없다. 손끝에 짜증을 실어 화면을 꾹꾹 눌렀다.
[직접 물어 김현진한테]
[캡처해서 신고할까봐]
채원은 화면을 꺼버렸다. 지긋지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