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나 여기 회사 둘러보고 와도 돼요?"
"빨리 갔다 와."
내 눈치를 계속 보는 비서에 나는 웃기다는 듯 콧방귀를 쳐주었다. 비서는 입이 계속 마르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계속해서 적셨다. 그의 살짝 쳐진 눈썹이 사람을 더 불쌍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문이 열린다는 안내 소리가 들리고 복도로 나섰다. 노란 불빛의 복도는 언제나 봐도 새로웠다. 문 옆벽에 어떤 사람이 기대고 서있었다. 언젠가 한 번 집에서 본 적 있던 송민호의 또 다른 비서였다.
"아, 집사님이셨습니까."
"네. 구... 준회씨 맞으시죠? 도련님 다른 비서."
"아, 네. 김 비서가 오른쪽 팔이라면 저는 왼쪽 팔 정도죠."
구준회의 쓸데없는 말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았다. 구준회도 뻘쭘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복도를 퍼지고 나갔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서로 발끝만 보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을 마주하니 구준회는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단 듯 바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뭔가를 제발 말하기를 바라는 구 비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냈다.
"저 안에 있는 비서 이름이 뭐죠?"
"지금 사장님이랑 같이 계시는 비서 말씀하시는 거죠? 김한빈이에요, 김한빈."
"혹시 김한빈 비서랑 같은 사무실 쓰시나요?"
"네, 비서가 3명이 있는데 셋이 같은 사무실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김 비서가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 보셨나요? 아까."
"네, 사모님한테 전화하는 것 같던데."
아하, 그렇군요오. 나는 이만 구준회, 구 비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구준회는 엘리베이터 앞에 잠깐 서다가 1이라는 숫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김한빈 저 재빠른 자식. 나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김 비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나를 보더니 또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듯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김 비서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뒤적뒤적해서 꺼냈다. 비서는 약간의 혐오와 적의를 가진 눈동자를 지니고 핸드폰을 뻗은 내 손을 보았다. 김 비서는 대충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들었는지 내가 건넨 내 폰을 받아 번호를 하나하나 꾹꾹 찍었다.
여전히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김 비서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쁘게 웃어주었다. 김 비서는 당황한 듯 큼큼 헛기침을 했다. 뒤로 돌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많은지 나에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미운 송민호가 보였다. 나는 김한빈이 찍어준 번호를 저장하고 메세지창을 켰다.
'벌써 김진아한테 말했죠?'
전송 버튼을 누르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좋았다.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리는 알람 소리가 나고 김한빈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한참을 그렇데 핸드폰 액정을 보다가 내가 보낸 내용을 확인했는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동공이 흔들리는 김한빈을 보며 싱긋 웃었다. 김한빈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감감무소식인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먼저 메세지 창을 켜서 새로운 문자를 보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아까 났던 띠링- 하는 알람소리가 나고 송민호는 방해가 되었는지 신경질적으로 김한빈을 쳐다보았다. 김한빈은 내 눈치를 한 번, 송민호 눈치를 한 번 보았다. 저녁 6시. 슬슬 배가 고파 왔다.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아닌데 점심부터 한 판했더니 그런가 보다- 하고 주린 배를 욺켜쥐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꼬르륵 소리가 크게 날 것 같아 일어났다. 일할 때만큼은 너무나도 진지한 송민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송민호는 나를 한 번 보더니 미간의 주름을 풀었다. 대충 저장 버튼을 누르는 듯했다. 송민호는 전에 김한빈이 데스크에 올려놓은 결재서류를 대충 확인하더니 사인을 하고 김한빈에게 던졌다. 김한빈은 날라오는 결재서류 파일들을 겨우겨우 잡았다. 송민호의 큰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약간 공기가 더워 땀이 났는데 송민호의 손은 차가웠다.
나는 송민호의 검지를 쪼물쪼물 거렸다. 하얗고 좀 긴 손가락을 가진 나와는 달리 까맣고 굵은 손마디가 참 인상적인 손이었다. 송민호는 찌뿌둥한 몸을 한 번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김한빈이 일어나는 송민호에게 옆에 있던 옷걸이에서 자켓을 꺼내 송민호에게 건넸다. 송민호도 나와 같이 더웠는지 자켓을 입지 않고 팔에 대충 걸어 들었다.
"저 배고파요. 아까 큰일 한 번 치러서 그런가,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배가 좀 많이 고프네요."
"밥 먹으러 갈까?"
"그러면 저야 좋고요."
"뭐 먹으러 갈까?"
"아무거나 좋아요."
"그런 여자들이 하는 제일 짜증 나는 대답은 집어치우고."
"음... 파스타 먹고 싶네요, 크림 파스타."
그래, 가자. 송민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김한빈은 먼저 달려가 문을 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걸음 속도를 올려 송민호의 옆에 서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딘지 모르게 송민호의 발걸음은 뭔가 들뜬 듯했다. 느긋하게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나서 같이 타려는 김한빈에게 송민호가 눈치를 주었다. 그래도 김한빈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는지 깨갱 풀이 죽어 옆 비상구가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송민호가 전자 화면에 뜨는 버튼을 누르고 나를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드라마에서나 자주 보았던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송민호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점점 다가오는 송민호의 얼굴 뒤로 빨간 빛을 깜빡깜빡대는 것을 보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송민호를 밀어냈다. 송민호는 내 행동에 기분이 나빴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CCTV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송민호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하고 송민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여기 사장인데 저런 걸 뭐 하려 두려워해."
"그래도... 직원들 들어오면 어떡해요."
"그건 걱정 마, 여기에 아무도 못 타니까."
송민호는 그러더니 내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두 입술이 벌어지고 서로의 혀가 만났다. 송민호의 혀가 내 입안을 부드럽게 지나갔다. 송민호는 탄탄한 팔로 내 허리를 감쌌고 나는 목을 감았다. 쪽쪽대는 야릇한 소리가 둘만 있는 이 공간에 울려 퍼졌다. 살짝 입을 떼 코를 댔다. 키스하는 것도 좋지만 항상 연애하기를 꿈꿔 오며 해보고 싶었던 자세였다. 얼굴을 딱 붙인 채 코와 이마만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거. 아무리 불륜이라고 하지만 내가 하니 로맨스였다. 가슴 간질거리는 설레임에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송민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은 찬데 몸은 따듯했다. 항상 짜증 나기만 했던 송민호의 사무실이 가장 맨 꼭대기 층에 있다는 사실이 오늘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이런 일도 하게 시간도 만들어주고 말이야. 띵 - 문이 열리고 퀴퀴한 주차장 냄새가 훅 퍼졌다. 나는 여전히 송민호에게 안겨있던 채로 송민호의 차로 향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나를 제치고 송민호가 차에 올라탔다. 보조석을 가리키며 누구 하나 죽이려고 미소를 짓는 송민호에 차를 빙 돌아 보조석에 올라탔다. 역시 좋은 차라 승차감이 남다르단 말이야.
시동을 거려는 참에 송민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보통 벨 소리와는 다른 벨 소리. 김진아가 전화를 하면 송민호의 전화기에서 울리는 벨 소리였다. 송민호는 발신자를 한 번 보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고개를 두어 번 살짝 끄덕였다. 송민호는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오빠아-! 찌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 울렸다. 송민호도 별로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너무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한편으로는 질투도 생겼다.
그래, 그래만 계속 말하던 송민호가 핸드폰을 거치대에 걸었다. 송민호는 한숨을 쉬고 나에게 미안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나한테 미안하다는 듯이 쳐다봐요?"
"김진아가 우리 레스토랑 온다는데..."
"괜찮아요, 같이 식사하면 좋죠, 뭐."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식욕도 막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송민호는 내 표정을 한 번 살피고는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았다. 끼익- 대는 마찰음 소리와 함께 차가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6시 즈음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려는 사람들과 소음이 가득했다. 내가 옛날에는 저런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말이야. 잠시 옛 생각에 빠져 한참을 거리 밖을 보고 있을 때쯤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내가 앉아있던 보조석의 문을 열었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살짝 쌀쌀한 바깥공기에 단추를 잠갔다.
나는 송민호의 옆에 서서 졸졸졸 우리를 안내하는 웨이터를 따라갔다. 이미 김진아는 자리에 앉아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썩을 년, 다 알면서 왔겠지. 다 알면서. 송민호는 김진아의 옆자리에 앉았고 나는 송민호의 건너편에 가 앉았다. 송민호가 살짝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크림 파스타하고 오늘 특선 스파게티랑 샐러드, 이렇게 주문할게요."
웨이터가 우리 셋 곁을 떠났다. 김진아를 살짝 보니 약간 울었는지 눈이 조금 부어 있었다. 김진아는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기쁜 얼굴로 까만 폴라로이드 같은 것을 꺼냈다. 식탁에 자랑스러운, 뿌듯한 표정으로 올려놓았다. 젠장, 초음파 사진. 송민호도 기뻐 보였다.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김진아를 송민호는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김진아는 나를 굉장히 의식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나를 흘겼다. 기분이 나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무의미하게 전화번호부를 넘겨보던 중 눈에 띄는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강승윤'
나는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송민호에게 물었다.
"여기에 강승윤 초대해도 돼요? 한 명 더 있는 게 덜 심심하고 좋잖아요."
"승윤 씨라면 그때 병원에서 봤던 그 의사 분 맞... 지?"
"응, 그 사람 맞아. 도련님, 불러도 돼요?"
밀당의 긴장감과 스릴이 몰려들었다. 송민호는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 김진아는 어서 부르라며 나를 재촉했다. 다이얼 버튼을 누르고 강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가 여보세요, 하는 강승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더 올려 말했다.
"여기 민호씨랑 진아씨랑 나랑 레스토랑에 있는데 일 없..."
"태현아?"
"없다면 올래?"
송민호가 식탁 아래로 내 다리를 퍽퍽 찼다. 밀려오는 아픔에 입술을 꽉 깨물고 괜찮은 척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에 질세라 송민호의 다리를 퍽퍽 걷어찼다. 곧 가겠다는 강승윤의 말을 듣고 전화를 껐다.
"곧 온대요, 강승윤."
이제 본격적인 밀당의 시작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