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이 빠른 바비는 수술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맞은 편에 앉은 바비와 함께 밥을 먹는데, 바비의 젓가락이 반찬이 아닌 밥그릇을 향한다. 뭘 하나 싶어서 한 입 떠먹곤 물끄러미 바라보니 밥 속에 있는 콩을 하나씩 집어서 다른 그릇으로 꺼내고 있다.
" 뭐 해요, 지금? "
" 콩 걸러냅니다. "
" 콩 못 먹어요? "
내 물음에 바비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못 먹는 건 아니고 싫어합니다.
뭐야, 지금 편식 하는 거에요? 예상치도 못한 모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비를 바라보는데,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켜서 부끄러워 할 줄로만 알았던 바비는 생각 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콩은 좀….
" 어린 애도 아니고 콩을 왜 안 먹어요. "
" 씹히는 느낌이 싫습니다. "
" 그럼 나 다 줘요. "
난 콩 좋아해요! 베시시 웃으며 말하자 바비가 잠깐 망설이다가 빼낸 콩들을 다 내 밥그릇 위로 올렸다. 생각치도 못한 바비의 귀여운 모습에 흐, 하고 절로 웃음이 나와서 괜히 바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볼과 이마에 있었던 상처들은 어느새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고, 바비는 다시 새하얀 아기 같은 피부로 돌아왔다.
한참을 그렇게 나는 바비 구경, 바비는 콩 걸러내기에 빠져 있는데 식탁 위에 올려둔 바비의 휴대폰에서 짧은 알람이 들려온다. 콩을 옮기는 것을 멈추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바비가 휴대폰 잠금을 풀어 메세지를 확인했다. 문자를 읽는 바비의 표정이 묘한 것도 같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 왜요. 무슨 문자에요? "
" 회장님이 잠깐 오라고 하십니다. "
" 아빠가? "
아빠가 바비를 왜 불러요? 내 물음에 바비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아빠는 여러모로 바비를 마음에 들어하는게 보였다. 툭 하면 바비를 아빠 곁으로 데려갈 거란 말 때문에 어쩌면 K가 서운해 할 것도 같은 정도였다. 뭐, 마음에 드는 건 마음에 드는 건데… 오늘은 왜 부르는 거지. 괜히 신경이 쓰여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바비가 식탁 위의 휴대폰을 챙겨 들곤 몸을 일으켰다.
" 다녀오겠습니다. "
" 네. 다녀 와요. "
고개를 끄덕이곤 바비를 멀뚱히 올려다 보자 금방 걸음을 옮길 것 같았던 바비가 잠깐 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마이 안 주머니에 넣곤, 그 손으로 내 머리를 한 번 헝크러트린다.
" 꼭 강아지 같네. 눈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는게. "
갑작스러운 바비의 손짓에 뭐에요, 하고 싫지 않은 소리를 냈더니 바비가 웃으며 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아빠가 계실 회사로 향하기 위해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문 밖으로 바비가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그 모습만 바라보다가 다시 밥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쥐는데 시선이 닿은 곳에서 또 괜히 한 번 웃음이 났다.
여기 이렇게 왕창 올려진 콩들은 뭐야, 정말로.
그렇게 처음으로 아빠에게 바비가 불려간 그 날 이후로, 바비는 꽤나 자주 아빠의 호출을 받았다. 아빠에게 갔다가 돌아올 때의 바비 표정은 다양했다. 어떤 날은 웃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날은 처음 봤을 때 처럼 딱히 그렇다 할 표정이 없이, 딱딱하기만 했다.
아빠랑 무슨 말 했어요?
아빠가 무슨 말 해요?
오늘은 아빠가 왜 불렀대요?
뭐라고 물어도 바비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가끔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리기도 했다. 둘이 무슨 비밀 만드는 거에요. 내 칭얼거림에 바비가 어깨를 으쓱 했다. 글쎄요.
아빠에게 불려가는 시간이 많은 만큼 늘어난 것이 또 있다면 내가 K와 보내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바비를 툭하면 불러 가는 걸로도 모잘라서 하루씩 빌려가기도 했다. 덕분에 의도하지 않게 K와 있는 시간이 길어진 나는 바비가 아닌 K에게 칭얼거렸다. 아빠가 바비 왜 데려가는 거에요? 내 물음에 K도 바비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으쓱 했다. 글쎄요.
…뭐야. 다들 모른다 이거에요? 괜히 나만 바보가 된 거 같은 느낌에 입술을 삐죽였다.
* * *
꽤나 친분이 있는 그룹에서 열린 연말 파티 때문에 오랜만에 드레스라기 보단 원피스에 가까운 옷을 꺼내 입었다. 발목은 다 나은지 오래라 현관에 서서 전처럼 높은 구두를 꺼내 신을까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샌가 내 옆에 온 바비가 높은 건 안 됩니다,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 어, 왔어요? "
웃으며 바비를 바라보는데 오늘따라 바비의 느낌이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늘 입던 검은 정장은 어디 간 건지 오늘의 바비는 하얀 셔츠에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남색 마이를 입고 있었다. 딱딱한 평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느낌에 놀란 것도 잠시, 멍하니 바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 머리 내렸네요? "
내 말에 바비가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제 앞머리를 한 번 만지작 거린다. 그냥, 뭐. 멋쩍은 듯 웃는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설레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바비가 피식 웃으며 제 신발을 신었다. 그제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곤 신발장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은 굽이 낮은 구두를 꺼냈다. 꺼내면서 힐끔, 바비를 바라보니 이 정도 구두는 괜찮은 건지 바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눈치를 보십니까. "
" 그야, 높은 거 신으면 바비가 혼낼 거잖아요. "
웅얼거리듯 하는 내 대답에 바비가 인정하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조심스레 구두를 신고 바비의 옆에 서자, 바비가 내 손목을 살짝 잡아온다.
손을 잡아 준 게 아니라는 찰나의 서운함, 그리고, 그래도 손목을 잡았다는 작은 설레임. 두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사소한 거에도 금방 웃음이 나는 탓에 작게 미소를 띄고 바비를 바라보았더니, 바비가 저번에 날 끌고 갈 때와는 다르게 아프지 않게 내 손목을 고쳐 쥐곤 말했다.
" 갑시다, 아가씨. "
바비의 말에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파티장은 생각 외로 굉장히 컸다. 작은 회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큰 파티장의 규모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오랜만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샴페인 잔 하나를 들곤 웃으며 파티장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인사도 나누고.
느즈막히 도착한 아빠를 발견하곤 그 곁으로 다가갔다. 아빠와의 짧은 인사도 잠시,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바쁘다. 딸이라며 소개하는 그 말이 끝나고 나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라고 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인사만 하다가 조금 숨을 돌릴 때 쯔음, 당연히 내 옆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비가 없다. 얼레? 바비가 어디 있나 싶어서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 그를 찾는데, 아침에 본 남색 마이가 저 멀리 서있는 것이 보인다.
어, 저건 뭐야….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서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는데 내 옆에서 내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긴 아빠가 낮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 온다.
" 둘이 잘 어울리지? "
" …응? "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금 바비는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본 사이는 아닌 건지 여자는 바비에게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뭔가를 쉴 틈 없이 이야기 했고, 약간은 등을 지고 서있는 바비의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히 그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빠를 바라보며 지금 바비,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에요? 하고 물으니 아빠는 뭐가 그렇게 뿌듯한 건지 씩 웃으며 답을 해온다.
" J 그룹 딸인데 짝이 없다고 해서. 바비가 괜찮은 사람인 걸 알아서 얼마 전에 소개해 줬어. "
" …소개? "
" 선 본 거라고 해야 맞으려나. 몇 번 만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잘 되 가고 있는 것 같아. 딸, 저 J 그룹 아가씨 예쁘지 않아? 바비도 그렇고 선남 선녀인 것 같은데. "
물론 아빠 눈엔 우리 딸이 더 예쁘다만.
아빠의 말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발끈해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괜히 나오려던 말을 꾹꾹 눌러 삼키곤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진 못하는 듯 입술이 절로 삐죽여진다. 우리 아빠는 정말 딸바보가 아니라 그냥 바보인 게 틀림 없어. 어쩜 이렇게 딸 마음을 몰라요, 진짜.
" 아빤 바보야. "
" 어? "
" 바보! 아빤 바보야. 진짜로. "
아빠에게 칭얼대자 아빠는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로 날 내려다 보고 있다. 진짜 바보…. 할 수 있는 말이 이것 밖에 없어서 자꾸만 바보, 바보 하고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다시 바비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뭔지 모를 감정이 끓는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괜히 바비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이야기를 마친 건지 바비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 거리다가, 나와 아빠를 발견하곤 이쪽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바비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또 심통이 났다. 자연스레 바비가 내 옆으로 와서 섰고, 그에게서 바비 특유의 향기가 풍겨와 내 코를 간지럽혔다. 그 향기를 맡으니 더 울적해지는 기분이 든다.
뭐야… 선을 왜 봐. 뭐라고 칭얼대고 싶다가도, 생각해 보면 바비랑 나랑은 연애를 하는 사이도,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는 생각에 선을 보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키스, 그리고 내게 하는 행동, 말, 모든 것들이 설렜지만 바비가 날 좋아한다고 확신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었다. 내 경호원이 날 경호하는 게 아니라 왜 선을 봐요. 나 경호 안 하고 왜 연애 하려고 해요, 이 정도의 칭얼거림.
바비가 아무 말 없이 퉁해져 있는 날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 시선마저도 짜증났다.
아빠는 뭐가 그렇게 흐뭇한지 바비를 바라보곤 짧게 인사만 건넨 뒤에 또 다른 사람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아빠가 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선 바비를 힐끔 바라보다가. 속상한 마음에 한 모금씩 입을 축이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꼴깍, 꼴깍 다 마셔버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바비가 놀란 듯 아가씨, 하고 불러왔다. 그런 바비의 부름도 못 들은 척 옆 테이블에 놓아진 주인 없는 샴페인 잔을 하나 더 들어 그대로 또 꼴깍 꼴깍 다 마셔버렸다. 세 잔의 샴페인을 비울 때 쯔음, 바비가 내 손목을 살짝 쥐어왔다.
" 갑자기 왜 그렇게 급하게 마십니까. "
" 놔요. "
" 취하십니다. 그만 드세요. "
안 취해요. 내 말에도 바비는 내 손목을 놓을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술이 들어온 탓에 약간은 긴장이 풀어진 눈으로 바비를 흘겨보듯 올려다 보는데, 바비가 안 된다는 의미인지 고개를 젓는다.
알았으니까 이거 놔요. 바비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곤 다른 손으로 괜히 그 손목을 문질렀다. 씨이….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기분이 들었다. 샴페인도 못 마시게 하고. 자긴 다 마음대로 하면서. 선도 보고, 연애도 할 거고, 그렇잖아…
굽이 높은 구두를 신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취기가 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차가운 물에 손이라도 담글까 하는 마음으로 바비를 두고 걸음을 옮기는데 바비가 갑작스럽게 내 팔을 잡아 왔다.
" 어디 가십니까. "
" 화장실 갈 거에요. "
내 말에 바비가 잡은 팔을 스르륵 놓았다. 그런 바비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곧바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안에서 나오는 누군가와 갑작스럽게 살짝 부딫혔다. 넘어질뻔 한 몸을 지탱하곤 앞을 바라보자 아까 바비와 얘기하던 그 여자가 날 내려다보며 서있다. 반 뼘은 더 큰 것 같은 여자는 날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 뭐야, 지금. 나 쳤어요? "
" 죄송해요. 안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는 줄 몰랐어요. "
내 사과에도 뭐라고 짜증을 더 내려는 듯한 표정의 여자가 갑작스럽게 아, 혹시 ---? 하고 물어온다. 내 이름을 묻는 여자에게 아, 네, 하고 짧게 대답했더니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든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았다. 아니, 사실 누그러든 표정이라기 보다는 뭔가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 그럼 혹시 그 쪽이 WC 그룹, 아가씨? "
" 네? "
" 내 생각이랑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 어리단 얘긴 들었는데. "
이렇게 애 같은 이미지일 줄이야.
비꼬듯 얘기하는 말투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곤 네? 하고 되물으니 여자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넘어온 내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쓸어 넘겨주며 다정한 말투로 말해 온다.
" 스무살이라면서? "
" 네? 아, 네. "
" 너무 남자한테 의지하고 그러진 마. 벌써부터 꼬리치고 그러는 것도 안 좋다, 너. 더군다나 별 볼일 없는 네 경호원한텐 더더욱. "
이왕 꼬실 거면 대기업 아들을 꼬시는게 더 낫지 않겠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게 나즈막히 뱉어대던 여자가 제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곤 옷 매무새를 다시 만졌다. 걸음을 옮겨 그 곳을 벗어나려는 그 여자의 팔을 순간적으로 붙잡았다. 뭐야? 앙칼진 목소리로 날 째려보듯 뒤돌아 보는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그리고는 터져나오듯 숨을 뱉었다.
" 방금 뭐라고 했어요? "
" 이거 놔. "
" 꼬셔요? 누가, 누굴? "
" 놓으라고 했지. "
" 방금 한 말 무슨 말인지 설명해 줘요. "
팔을 잡은 내 손을 거칠게 떼어낸 여자가 그 곳을 문지르며 날 째려보았다. 질 수 없는, 괜히 억울한 느낌에 나도 덩달아 여자를 쏘아보듯 올려다 보는데 여자가 한 쪽 입꼬리만 올린 채로 피식 웃더니 몸을 돌려 날 마주보았다.
" 들은 그대로야. 무슨 생각으로 너네 회장님이 그 남자를 소개해 준 건진 모르겠지만, 너 같은 애들 뒷처리나 하는 그런 별 볼일 없는 경호원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야. 혹시 몰라서 너에게도 충고해 준 것 뿐야. 너 같이 귀한 딸이 그런 경호원에게 빠지진 않을까, 하는 그런 걱정이라고. 철이 없어도 좀 없어 보여야지. 너 하고 있는 꼴을 보니까. 언니 말 알아들었니? "
참을 수 없는 화가 차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살짝 떨렸다. 지금 말 다 했어요? 떨리는 내 목소리에 피식 웃은 여자가 다시 한 번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고, 나는 다시 그 여자의 팔을 잡았다. 또 닿아오는 내 손이 불만인 건지 여자가 이번에는 한 번에 내 팔을 떼어내곤 내게 소리를 쳐온다.
" 손 대지 말라고 했지? "
" 방금 한 말 사과 해요. "
" 어디서 눈을 똑바로 치켜 뜨고 쳐다보는 거야? "
" 사과 하라구요! "
그리고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자의 손이 내 뺨을 때렸다.
얼얼한 느낌. 돌아간 고개. 순간적으로 멍한 느낌에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레 맞은 볼을 부여잡곤 여자를 흘겨보는데, 제 손이 아플 만큼의 강도로 날 때린 건지 손목을 잠깐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웃어왔다. 어린게 싸가지도 없구나, 넌.
억울했다. 다짜고짜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건 대체 뭐야. 화가 머리까지 차오른 느낌에 뭐라고 소리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볼을 감싸고 있던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살며시 치우고 제 손으로 내 볼을 감싸 왔다.
" 괜찮아? 많이 아파? "
이 곳으로 뛰어온 건지 바비의 올려진 머리가 조금은 헝크러져 있다.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괜찮아? 하고 묻는 바비의 모습에 화도 났지만 괜히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내 볼을 잠깐 어루만지던 바비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딱딱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 지금 이게 뭡니까. "
" 네? 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
그쪽 아가씨가 먼저 예의 없게 굴었어요. 정말이에요. 조금 전까지 날 보며 비릿하게 웃던, 바비가 제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던 그 여자는 어디가고 꼭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말투와 목소리로 여자는 답을 해왔다. 그런 여자의 말에 바비가 하, 하고 짧게 한 숨을 쉬더니 여자의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로 날 끌고가듯 걸음을 옮겼다.
꼭 저번과 같은 상황이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로 바비의 손에 이끌려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말하지 않아도 바비가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계단 쪽으로 날 데리고 온 바비가 그제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날 마주보고 서선 인상을 가득 쓴 채로 날 내려다 본다.
" 괜찮아? "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여자랑 선 봤으면서 왜 그 여자 편이 아니라 내 편을 드는 거야. 진짜, 그런 여자 뭐가 좋다고 몇 번을 만난 거에요. 그 여자는 바비를 그렇게 밖에 생각 안 하는 그런 여잔데.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며 괜히 바닥만 바라보자, 바비가 손을 뻗어 내 턱을 잡곤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여자에게 맞은 뺨 쪽으로 시선을 옮겨 내 빨개진 볼을 살폈다.
" 부었잖아. "
" ……. "
" 거기서 왜 그렇게 가만히 맞고만 있어? "
화를 내듯 나온 바비의 말에, 그리고 화가 난 바비의 표정에 꾹 참고 있던 내 화도 덩달아 터져버렸다.
" 소리 지르지 마요. "
" …뭐? "
" 나 그쪽 아가씨에요. 내가 이렇게 맞고 있을 동안 바비는 뭘 했어요? 내가 이런 일 안 당하게 하는게 바비 일 아니에요? "
내 말에 약간은 흔들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바비와 눈을 마주했다.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바비도 피하지 않았다.
이미 터져버린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것도, 이미 입 밖으로 나와버린 뒤였다.
" 저 여자랑 선 봤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 "
" …너, 어떻게 알았어? "
" 지금 그게 중요해요? "
왜 말 안 했냐구요. 터져나오듯 쏘아대는 내 말에 바비가 짧게 한숨을 쉬곤 내 턱을 쥔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갑갑한 건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당기곤 셔츠의 맨 윗 단추를 하나 풀어냈다.
" 말 해야 할 필요를 못 느꼈으니까. "
필요를 못 느껴? 바비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눈가에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쭉 흘렀다.
" 필요를 못 느껴요? "
" ……. "
" 진짜, 그게 대답이에요? "
" ……. "
" 좋아한댔잖아요. 내가 바비 좋아한다고 그랬잖아요. 바비는 나 좋아하는 거 아니였어요? 지금까지 나한테 했던 건 다 뭐에요, 그럼? "
" ……. "
" 저 여자랑 몇 번 만났다면서요. 잘 될 거 같았으면 내가 마음을 접을 수라도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내 말에 대답 없이 날 바라보기만 하는 바비의 모습에, 울먹이며 주먹으로 바비의 가슴을 툭 쳤다.
" 나 혼자 좋아하게 만들어 놓곤 맘 정리도 못하게 하고…. "
" ……. "
" …바비는 내 짝사랑이 우스워요? "
내 말에 잠깐 멈칫한 바비가 내게로 손을 뻗어왔다. 그런 바비의 손을 쳐내자 바비의 손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아까 여자에게 맞은 볼이 욱씬거리는 느낌에 손으로 살짝 감싸쥐자, 열이 잔뜩 오른 볼이 따끔따끔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유일하게 드는 생각은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 뿐이었다. 싫었다. 이렇게 바비에게 화를 내게 될 줄도 몰랐고, 이런 일이 일어날 줄도 몰랐고… 아마도 아까 왕창 마신 그 샴페인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바비도 입을 꾹 다물었고, 나도 아무런 말 없이 흐르는 눈물만 닦아냈다. 파티장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곳은 숨 막히게 조용하기만 했다. 꼭, 파티장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 누가 짝사랑이래. "
침묵을 깨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다정한 바비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을 올려 바비를 바라보았다. 이마를 덮은 머리가 갑갑한 건지 바비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자, 안 그래도 헝크러져 있던 앞머리가 더 헝크러졌다. 그방 다시 내려와 이마를 덮는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바비의 눈빛이 조금은 변한 것도 같다. 그 눈 속에 담긴 건 화가 아니었다.
" 저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
" ……. "
" 선 본 거 맞아. 그게 다야. 회장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인데 어떻게 그냥 거절해. "
" 그치만……. "
" 그치만? "
" 웃고 있었잖아요, 저 여자랑…. "
" 그럼 웁니까, 거기서. "
바비의 마지막 말과 함께 멍하던 내 시선이 바비와 딱 마주쳤다.
" 이렇게 말할 건 아니였는데. "
" ……. "
" 참을 만큼 참았어. "
참을 만큼 참았다는 말과 함께, 바비가 나를 당겨 품 안에 안았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바비의 향기가 강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폭 안긴 바비의 품에서 콩닥, 콩닥 하는 규칙적인 심장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 소리일까… 아니면, 어쩌면… 바비의 심장 소리일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 품에 안겨 몇 번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을 때 즈음, 심장 소리보다 더 두근거리는 바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아해. "
짝사랑 아니야.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해.
확인시켜 주려는 듯 한 번 더 좋아해, 하고 중얼거린 바비의 목소리에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엉엉 울며 그의 품에 고개를 묻자 바비가 내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무슨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걸까. 좋아서 눈물이 나는 걸까.
서운하기만 했던 바비의 향기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지금 맡으니 참 기분 좋은 향이였다. 엉엉 울며 팔을 뻗어 바비의 허리를 끌어 안자, 바비가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속에서 서운한 마음을 다 씻어내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 * *
바비는 익숙한 듯 운전석에 앉았고, 나 역시 익숙한 듯 바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깁스를 풀지 않은 탓에 한 손으로 운전을 하는 그 모습마저도 멋있어 보였다. 힐끔, 또 힐끔. 자꾸만 눈길이 가는 바비를 바라보는데 조금 전 바비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좋아해.' 혹시나 꿈은 아닐까 싶어서 팔을 한 번 꼬집어 보는데, 얼얼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짧은 소리가 뱉어졌다. 운전을 하다 말고 내 목소리에 바비가 날 힐끔 바라보았다.
" 뭐 하십니까. "
" 그냥. 혹시나 꿈은 아닐까 해서요. "
내 말에 픽 웃은 바비가 짧게 답을 해온다. 꿈 아닙니다. 그 목소리에 다정함이 잔뜩 묻어있는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피었다. 앞을 향한 바비의 시선, 그리고 바비를 향한 내 시선. 물끄러미 바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그를 향해 물었다.
" 정말 나 좋아해요? "
" ……. "
" 응? "
" 좋아합니다. "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합니다, 하고 짧게 답을 해오는 바비의 모습에 흐, 하는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차가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춰 서자, 바비가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날 보곤 또 볼을 한 번 톡 쳐 온다.
" 손 잡고 싶은데. "
" …싶은데? "
" 손 잡으면 운전을 못 해. "
다친 팔을 들어보인 바비가 씩 웃어 온다. 한 층 더 다정해진 목소리, 그리고 날 다정하게 바라보는 저 눈빛에 심장이 쿵쿵거린다. 우리 연애 하는 거에요? 망설이다 묻는 내 질문에 바비가 어깨를 으쓱 했다. 글쎄요.
신호가 바뀐 건지 바비가 손을 다시 핸들로 옮겼다. 그리고는 멈춰 있던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게 뭐에요. 애매한 바비의 답에 칭얼대듯 말하자 바비가 웃으며 잠깐 날 바라보았다가 금방 시선을 돌렸다.
" 무슨 말을 원하시는 겁니까. "
" 그거야…. "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알면서 묻지 마요. 내 말에 바비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자꾸만 웃고 있다.
" 우리 연애 할까? "
" ……네? "
" 우리 연애 하자. "
" ……. "
" 뭐, 이런 거 말입니까. "
뭐라고 답을 하려다가 이어지는 바비의 마지막 말에 김이 쭉 빠져버렸다. 뭐에요, 진짜로 하는 말인 줄 알았잖아. 칭얼대는 내 말에 바비가 잠깐 날 힐끔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운전에 집중했다. 씨이…. 날 놀리는 듯한 기분에 입술을 삐죽이곤 바비 쪽이 아닌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을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차가 갓길로 빠지더니 이내 멈춰섰다.
여긴 집이 아닌데…? 뭔가 싶어서 바비를 바라보니 핸들에서 손을 뗀 채로 바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 왜 여기…. "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내 턱을 잡더니, 제 입술을 내 입술에 짧게 붙였다가 떨어졌다. 뭐, 뭐에요?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는 내가 마냥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바비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연애 할까? "
" ……. "
" 아니다. "
" ……. "
" 연애 하자. "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척, 날 잡은 손을 조심스레 놓더니 다시 핸들을 잡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킨다. 멍한 기분에 아무 것도 못하고 그 대로 굳어서 바비만 바라보는데, 바비가 갑작스럽게 제 옆에 놓여져 있던 휴대폰을 내 무릎 위로 살짝 던졌다. 그제서야 정신이 깨어난 내가 뭐에요, 하고 묻자 바비가 날 힐끔 바라보곤 말해온다.
" 바꾸세요. "
" 네? "
" 아가씨라고 저장된 이름. "
" …뭘로 바꿔요? "
" 애인으로. "
♡
안녕, 제 이쁜이들! uriel 입니다
8화에서 슬럼프라고 징징대는 제게 참 좋은 말들로 절 다독여주신 많은 댓글들! 정말 한 분도 빼놓지 않고 다 읽고 기억하고 있어요, 이 분은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구나, 저 분은 저렇게 말해주시는 구나 하고..♡
독방에서 만난 콘들도 여럿 보이고! 늘 제게 이래저래 힘을 내게 해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에 슬럼프 아닌 제 슬럼프는 금방 극복이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은 그거였던 거 같아요, 제가 원하는 대로 지원이를 풀어내라고 절 응원해주신 분! 제가 풀어내는 지원이는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고 해주신 제 독자님! 덕분에 지원이의 모습을 쓰면서 부담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9화, 오늘 편 까지가 시험 기간동안 틈틈히 생각해 뒀던 이야기 들이에요
미리 생각을 해두고 나눠둔 덕분에 한 달의 텀 뒤로 돌아온 4화 부터는 분량이 좀 많지 않았나 싶어요!
10화부터는 또 어떻게 써야 하나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할 거란 생각에 두근두근, 도키도키..!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건 늘 설레요 설레~♡
오늘은 암호닉 정리가 없습니다! 신청은 늘 최신 글에! <> 안에 넣어서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제가 빠트렸던 제 사랑 이쁜이들은 다음 화 암호닉 정리에서 꼭꼭 넣어드릴게요 ㅠ_ㅠ 더불어서 새로 신청하시는 분들도 모두!♡
오늘 편도 좋아해주셨음 좋겠어요!
독방에 놀러나 갈까봐요 흐흐, 임무를 마친 것 같은 뿌듯한 기분 ㅎ_ㅎ♡
오늘도 좋은 밤! 좋은 저녁! 사랑해요 이쁜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