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새벽 두 시. 가게의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골목에는 빛이 하나 없었다. 옅은 바람 소리가 조용한 골목 안을 휘저었고 간간이 새벽 비가 한 두 방울 똑 똑 떨어져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는 옅은 노란 불빛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위저드 커피’ 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몇 번 깜빡이다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켜졌다.
통유리로 된 가게 안에는 오래된 듯 먼지가 잔뜩 앉은 오르골, 투명한 유리로 된 화분에 꽂힌 빨간 꽃 몇 송이, 서로를 마주보도록 나란히 놓여진 한 쌍의 커플 인형, 곱게 접힌 갈색의 앞치마, 한 세트인 듯 틀어짐 없이 가지런히 진열된 컵들이 유리창 가까이 놓인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들 가운데에는 하얀 틀의 액자 하나가 있었다. 액자 속의 사진은 오래된 사진인 듯 조금은 빛이 바래 있었다. 사진 속에는 가지런한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남자 한 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위저드 커피 앞에 선 모습이 담겨 있었다.
02
우리 동네에는 이상한 카페가 하나 있다. ‘위저드 커피’ 라는 유치한 이름을 가진 카페는 이름 만큼이나 메뉴들 또한 이상했다. ‘눈물을 멈춰줘’ ‘미안해’ ‘고마워’ ‘첫눈에 반하다’ 음… 대충 이런 것들. 얼핏 보면 어릴적 즐겨 봤던 인터넷 소설에서나 보일 법한 제목들이었다. 읽을 게 없어 메뉴판을 쭉 읽어내리던 나는 괜시리 민망해지는 느낌에 얼굴이 괜히 살짝 달아올랐다. 메뉴 이름이 이렇다보니 주문을 하는 것도 힘든 것 중 하나였다. ‘눈물을 멈춰줘 하나 주세요.’ 라는 말은 언제나 목 언저리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겨우겨우 입 밖으로 나오곤 했다.
읽어 내리던 메뉴판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맞은편 빈자리로 메뉴판을 살짝 밀어놓곤 이미 얼음이 녹고 있는 아이스 커피 속의 빨대를 살짝 입에 물어 커피를 한 모금 쭉 빨아당겼다.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이곳에 왔던 나지만 나는 항상 이런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커피를 시키곤 했다. 커피는 차가운 게 제 맛이지, 하는 합리화와 함께.
아니, 차가운 걸 좋아하는 성격도 있지만 어쩌면 사실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식히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술을 좋아하는 새아빠, 새아빠의 손찌검, 그런 행동에도 새아빠를 감싸고 도는 멍청한 엄마. 몇 번을 뜯어 말리고 울고 불며 매달려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 날은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빗줄기, 우산도 없이 슬리퍼 차림으로 걷던 나, 늦은 시각 불 꺼진 거리 속 유일하게 불이 켜진 가게 하나. 그 곳이 바로 여기였다. 위저드 커피.
그 불빛이 나에게 꼭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홀린 듯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은은한 커피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 듯 텅 비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그 곳이 무언가로 꽉 찬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연노랑색 조명이 은은하게 밝히는 그 곳. 그리고 카운터에서 옅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 한 명.
“….”
“밖에 비 많이 오네요.”
“…아….”
“커피 한 잔 드실래요?”
그 날 남자가 나에게 건넨 커피가 바로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커피였다. 눈물을 멈춰줘, 아이스. 몇 모금 꼴깍이다가 남자가 말하는 커피 이름에 나도 모르게 커피를 입 밖으로 쭉 뿜어냈었다. 참 유치하고도 웃긴 이름이었다. 게다가 이름처럼 이 커피가 눈물을 멈춰줄 거라는 남자의 말이 더 황당했다. 하지만 곧바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참 신기하게도 나는 정말로 눈물이 멈춰있었다. 언제 울었냐 싶을 정도로 서러운 마음 하나 남아있지 않은 채로.
“거 봐요.”
“…….”
“진짜라니까.”
놀란 듯 한 내 표정에 남자는 살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눈이 마주치자 휘어지게 웃어주는 남자의 눈길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앞머리에 맺혀있던 빗물이 톡 흘러내려 나무로 된 테이블 위를 적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볼이 살짝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비를 맞아 꽁꽁 얼어있던 몸이 카페 안의 따뜻한 열기에 아무래도 녹아내리고 있는 듯 했다.
03
오늘도 역시 새벽 두 시의 위저드 커피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다. 이 넓은 카페가 꽉 찬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내는데 패딩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에서 짦은 알람 소리가 울렸다. 풀어낸 목도리와 패딩을 한 쪽 옆으로 밀어놓고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던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굳어졌다.
‘올 때 소주 두 병만 사오렴, 네 아버지 드시게 -엄마-’
“하아….”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열 아홉의 고등학생에게 소주 두 병을 무슨 재주로 사오란 말이지? 아니, 어쩌면 엄마는 내가 아직 열 아홉살이라는 걸 알고는 있을까. 입을 괜히 꾹 한 번 다물었다가 휴대폰을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데, 갑작스레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그 때 그 남자가 손에 트레이 하나를 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은 남자가 내 앞의 테이블로 라떼 한 잔을 내려놓았다.
“저 아직 주문 안….”
“알아요.”
“네?”
“늘 눈물을 멈춰줘만 마셨잖아요. 오늘은 다른 것도 마셔보라는 의미로 주는 서비스.”
“아….”
남자의 말에 멍하니 남자를 바라만보자 남자가 트레이를 제 품에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아이스로 마시는 거 같아서 이것도 아이스로 가져왔는데, 괜찮아요?”
“네? 아, 네.”
“그럼 맛있게.”
고개를 까딱이며 돌아서는 남자를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저기!” 하고 남자를 불러세웠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겨우 짜내어 물었다. “이 커피는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물음을 끝내지도 못 한 채로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가 웃으며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첫눈에 반하다.”
“…….”
“마셔봐요. 첫사랑처럼 달콤할 거예요.”
말을 마친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카운터로 돌아갔다. 남자의 대답에 이유 없이 볼이 살짝 달아오른 나는 엉거주춤 앉은 자세를 고쳐 앉고 남자가 내려놓은 커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안에 놓인 빨대로 아직 채 섞이지 않은 듯 한 라떼를 천천히 저었다. 조심스레 빨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쭉 빨아당기자 달콤한 커피가 입 안을 확 감쌌다. 순식간에 온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이, 기분 좋은 달콤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자 카운터 쪽에서 피실 피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마른 행주로 하얀 접시를 닦다 말고 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뭔가를 들켜버린 듯 한 기분에 나는 재빨리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몇 번 이 카페를 오면서 느낀 것은 이 카페가 굉장히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잔잔하게 가요와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고는 있었지만 손님도 하나 없는 새벽의 카페는 아무래도 집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밀린 공부를 하기에 딱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온 가방에서 수학 참고서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 앞에 놓여진 커피를 살짝 옆으로 밀곤 참고서를 폈다. 그리고 미리 꺼내둔 샤프를 손에 쥔 다음 연습장에 천천히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집중했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집중력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내 귀로 조금씩 카페 안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아는, 혹은 굉장히 좋아하는 노래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늘 휴대폰에 넣어두고 듣던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수학 문제를 풀며 그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scene, 널 담았던 공간, 사랑이 필요해….
사랑이 필요해, 라는 가사를 입모양으로 따라 부르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나는 카운터 쪽에서 날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눈을 접어 웃으며 입모양으로 내게 뭐라고 말해왔다.
‘난 네가 필요해.’
말이 끝나자 남자는 흐, 하는 웃음을 흘릴 것처럼 웃어보이곤 다시 접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남자가 한 그 말이 내가 부르던 노래 가사의 바로 다음 가사라는 걸 알면서도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04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은 가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 다짐을 하고 영어책을 두 권 챙겨서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평소와 다르게 골목에는 노란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위저드 커피 앞으로 걸어가 유리문을 한 번 흔들어보는데, 가볍게 흔들린 종소리만 울릴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페 앞에서 물끄러미 유리창 안의 그 카페 내부를 바라보고 서있자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 분명 어제까지도 왔던 곳인데 카페 내부는 오랫동안 비어있었던 것처럼 먼지가 한가득 쌓인 듯 한 느낌이 풍겨왔다. 이리저리 구경하던 내 시선이 카페 앞에 놓여진 액자 속의 사진에 머물렀다. 내가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웃는 모습으로 사진 속에 담긴 그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자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운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못 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어깨에 맨 백팩의 끈을 다시 고쳐메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05
이유 없이 마음이 허전한 날이 있다. 웬일로 술을 마시지 않은 새아빠가 내게 ‘우리 딸’이라고 부르는 게 듣기 싫어서 집밖으로 나온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가 별안간 위저드 커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이 아니라 늦은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저드 커피는 벌써부터 불이 켜져 있었다.
조심스레 유리문을 밀자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에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날 발견하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씨익 웃는 남자가 선 카운터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그 앞에 섰다.
“어서와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걸로?”
“이거….”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카운터 위의 메뉴판에 적힌 ‘첫눈에 반하다’를 가리키자 남자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입에 맞았나보네요. 저번에 줬던 거.”
“되게 달콤했어요.”
“그래요? 아무래도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보다.”
“…네? 저요…?”
저요? 하는 물음과 함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커피 사실 별로 달콤한 커피는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달콤해지거든요.”
“에이…. 거짓말 마세요.”
“정말이에요.”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에이, 하고 말하자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으쓱였다. 그리곤 몸을 조금 숙여 내게로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갑작스레 다가온 남자의 행동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
“정말로?”
남자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입만 꾹 다물고 있자 남자가 피실 피실 웃음을 흘리며 내게서 멀어졌다. 그제서야 숨을 내뱉으며 작게 “몰라요.” 하고 대답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몰라요?” 하고 되물어왔다. 그런 남자를 힐끔 올려다보곤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제는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제요? 갑자기 어제는 왜요?”
“어제, 문 안 열었길래….”
내 말에 남자는 이해했다는 듯 “아아.” 하는 소리를 뱉곤 말을 이었다.
“좀 아팠어요.”
“아파요?”
“네. 많이 아팠던 건 아닌데 몸이 좀 안 좋아서 어제는 쉬었어요. 지금도 다 나은 건 아니지만 괜찮아지긴 했고. 어제 왔었어요?”
“그냥, 뭐….”
어물쩡거리는 내 대답에 남자가 피실 웃었다. 그리고는 그 큰 손으로 갑작스레 내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놀란 내가 움찔거린 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자 다시 손을 거둔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자리에 가 있어요. 커피 다 만들어지면 자리로 가져다 줄게요.”
그런 남자의 말에도 이미 몸이 굳어버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한 번 까닥였다. 그의 손이 닿은 곳에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06
“또 왔네요.”
나를 발견한 남자가 앉은 몸을 일으켜 나를 반겼다. 그런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남자가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뭘로 줄까요?”
“저기….”
“응?”
“오늘은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녜요.”
“그럼?”
그럼? 하고 의아한 듯 되묻는 남자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봉지를 내밀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봉지를 받아든 남자는 봉지 안에 담긴 내용물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뭐에요. 감기약에 소화제에… 그러니까, 이게 다 약이에요?”
“아직 다 나은 건 아니라고 그래서 산 건데, 어디가 아픈 건지 몰라서….”
내 대답에도 뭐가 웃긴 건지 한참 피실 피실 웃으며 약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아녜요.”
“아. 받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이거 선물로 줄게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남자가 갑작스레 카운터 아래 바구니에 담긴 포춘쿠키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내게 내밀어왔다.
“집에 가서 열어봐요.”
“포춘쿠키에요?”
“응.”
물끄러미 그 쿠키를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손 위에 놓여진 포장된 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내게로 닿아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자꾸만 귀에 열이 올랐다.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유리 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왔다.
07
헐레벌떡 집 안으로 들어온 나는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밖에서는 또 술을 마시고 들어온 새아빠가 인사도 하지 않냐며 큰소리를 냈지만 애써 그 소리를 무시하곤 메고 있던 가방을 침대 위로 던진 뒤 바닥에 주저 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쿠키의 포장지를 건들자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기고 쿠키를 열자 하얀색 길다란 종이가 쿠키 가루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키를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를 집어든 나는 종이에 적힌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당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참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종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내 손가락이 닿은 곳의 종이가 조금씩 구겨졌다. 그러다 문득, 종이의 뒤쪽에서도 보이는 검은색의 글씨를 발견하곤 종이를 뒤집었다. 그 곳에도 검은색으로 다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조금 전과 같이 소리내어 글자를 읽은 나는 전에 느낀 그런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겨우 다섯 글자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종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08
남자는 제 앞에 놓여진 약봉지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텅 빈 카페의 정적을 깨고 퍼졌다. 남자가 앉은 쇼파의 끝에서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던 회색 고양이가 몸을 일으켜 쭉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남자를 향해 말해왔다.
“그만 좀 만지작거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잖아.”
그런 고양이의 말에 남자가 피실 웃으며 약이 담긴 봉지에서 손을 뗐다. 괜히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엽다. 이런 약은 제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를 생각해준 여자가 참 귀여웠다. 손은 뗐지만 시선은 떼지 않고 약봉지를 바라보는 남자를 지켜보던 고양이가 얕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여자를 자꾸 떠올리지 마.”
“어떻게 알았어?”
“종일 그 약봉지만 쳐다보고 있는데 모르냐, 그럼.”
언짢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고양이는 다시 제가 조금 전 누워있던 쿠션 위로 몸을 올렸다. 제 꼬리와 몸을 조심스레 말아 누운 고양이가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법사는 마력을 잃는다. 알고 있지?”
“알아.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야?”
피실 웃으며 되묻는 남자의 말에 고양이가 하품을 쩍, 하고는 졸린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냥, 뭐. 네가 잠깐 잊은 거 같아서.”
말을 마친 고양이는 “나 잘 거야. 한 번만 더 그 봉지 소리로 잠 깨우면 죽여버릴 줄 알아.” 하는 거친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런 고양이를 보던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제 손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해본 남자가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실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09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새벽이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순식간에 바닥을 적셨고, 나무를 적셨고,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로 거리로 나온 나를 적셨다. 머리카락을 타고 볼 위로 흐르는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것 때문에 볼에 난 붉은 상처가 더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세게 내리는 빗물이 너무나도 아팠다. 아니, 어쩌면 마음이 아팠던 걸지도 몰랐다. 힘없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던 나는 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위저드 커피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꼭 여기 처음으로 온 그 날만 같았다. 골목에는 가로등조차 없어서 아무런 불빛도 없었고, 빛이라면 오직 내 앞의 이 카페에서 새어나오는 연노랑 불빛 하나 뿐이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여느 때처럼 종소리가 울렸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발견하고 살짝 웃은 남자는 내 볼 위의 상처를 발견하고 얼굴을 살짝 굳혔다. 어째서인지 옆에 놓여져 있던 수건을 잽싸게 잡고 내게로 다가온 남자는 커다란 수건을 펼쳐 순식간에 내 몸을 감쌌다.
“울지 말아요.”
“…흐으….”
“울지 마.”
남자의 말에 나는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내 울음소리에 나를 감싸고 있던 손으로 나를 당긴 남자가 제 품에 날 안아왔다. 빗물에 젖은 내 옷때문에 수건이 젖었고, 그런 수건과 나를 품에 안은 남자의 유니폼도 젖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흐느끼던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맞았어요.”
“…….”
“새아빠가 때렸어요. 나를 만졌어요. 내 몸을 더듬고… 손이 옷 안으로 들어오길래… 밀어냈는데, 그랬는데….”
“…하.”
“엄마도 봤어요. 근데… 말리지 않았어…. 그런 새아빠를 말리지도 않고 날 쳐다만 봤어요.”
“…그만 말해요.”
“나는….”
말을 이어가려다 목이 메어오는 느낌에 숨을 잠깐 참았다. 겨우 울음을 삼켜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내 말에 남자가 나를 조금 더 꽉 안아왔다. 말을 마치자 북받치는 설움에 다시 한 번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우는 중간 중간 남자의 깊은 한숨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한참 눈물을 흘려내던 나는 남자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리곤 눈물이 잔뜩 묻은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나는 손에 꽉 쥐고 있던 것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
남자는 내가 내민 종이로 시선을 돌려 바라보았다. 가장자리가 젖어버린 하얀색 종이, 그 위에 적혀진 다섯 글자. ‘같이 갈래요?’ 그 종이에게서 시선을 돌린 남자가 다시 내게 눈을 맞춰왔다.
“…같이 가요.”
“어?”
“데려가줘요.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너….”
“…부탁해요….”
눈물이 차올라서 흐느끼며 나온 내 마지막 “제발….”이라는 간절한 부탁에 남자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곤 눈물이 흐르는 내 볼의 상처 위로 아주 살짝 손을 얹은 남자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
“데려가 줄게.”
짧게 말을 마친 그는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내 머리 위로 덮었다. 내 눈까지 모두 덮어버린 수건에 시야가 가려진 순간,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눈 감아요.”
10
새벽 두 시. 가게의 불이 모두 꺼진 어두운 골목에는 빛이 하나 없다. 옅은 바람 소리가 조용한 골목 안을 휘저었고 간간이 새벽 비가 한 두 방울 똑 똑 떨어져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에는 또 다시 옅은 노란 불빛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위저드 커피’ 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몇 번 깜빡이다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켜졌다.
통유리로 된 가게 안에는 가볍게 먼지가 앉은 오르골, 투명한 유리로 된 화분에 꽂힌 빨간 꽃 한 송이와 꽃에서 떨어진 꽃잎 몇 개, 서로를 마주보도록 나란히 놓여진 한 쌍의 커플 인형, 곱게 접힌 갈색의 앞치마와 그 옆의 하늘색 앞치마, 한 세트인 듯 틀어짐 없이 가지런히 진열된 컵들이 유리창 가까이 놓인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들 가운데에는 하얀 틀의 액자 하나가 있었다. 액자 속의 사진은 오래된 사진인 듯 조금은 빛이 바래 있었다. 사진 속에는 가지런한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남자 한 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위저드 커피 앞에 선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남자와 손을 꽉 잡은 채로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 또한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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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uriel입니다 꽤 오랜 시간 못 온 거 같아요 그렇죠? 아가씨 下편을 들고와야 하는데 막상 들고온 건 또 다른 단편 한빈이 입니다, 엉엉
이름이 꽤나 유치해요 위저드 커피.. 위저드 베이커리를 떠올리며 쓴 글이라 그렇기도 하고, 마녀가 아닌 마남(???) 컨셉인데 마남이란 단어는 없더라구요 결국 남자 마법사, 결국 위저드.. 뭐 그래서 위저드 커피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 bgm도 들으면서 쓴 게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노트북 사정이 매우 매우 좋지 않아서 음악 파일 넣는 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에요 안타깝지만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들어주시면 참 좋을 것도 같습니다 흐흐 ♡
오랜만에 애들 봤는데 인가도 그렇고 애들 이쁘고 난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독방은 안간지 꽤 된 거 같아요 애들 근황도 전처럼 막 찾아서 보진 못해도 어떻게든 내새끼들 잊지 않으려고 겨우겨우 따라잡고 있는 중인데 바쁘다보니 막 벅차기도 하고 그래요 근데 어째서 앨범에 솔직하게가 없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요 대체 이유가 뭐길래!! 대체!!!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을!!! 솔직하게를!!!!!!!!!!!!! 솔직하게 노래 너무 좋아요.. 제 최애 곡이에요.. 이상한 아쟁소리 같은 것도 너무 좋고 애들 랩도 노래도 너무 청량해요.. 뭔가 탄산수를 때려부은 것 같은 그런 청량함이.. 20살이 된 고민과 인생에 대한 고민과 사랑과 모든게 담긴 곡이라는 저의 끝없는 애정이 담긴 평.. ㅎ....ㅎ.ㅎ..ㅎ... 근데 어째서 없죠? 어째서!?!?!?? 아 저 왜 푸념.. 아무튼 그렇다구요 갑자기 슬퍼서 저도 모르게 푸념을 ㅎ..ㅎ
아무튼 청량한 한빈이 사진이 참 좋습니다! 노트북 박살로 사진도 한 장 없는데 저 사진만 몰래 독방에서 주워왔어요 중간중간 어울리는 한빈이 사진이 있다면 주셔도 좋습니다! 수정해서 넣도록 할게요! 아무쪼록 이번 글도 잘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
아아, 그리고 저번 글에서 기억하냐고 물으시던 분들 ㅠㅠㅠㅠㅠㅠ 무려 반년은 넘게 지난 그 때에 나눈 얘기가 뭔지도 기억할 정도로 제게는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분들인데 어떻게 잊겠어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분도 잊지 않았어요! 정말로요! 잘 지내고 있어요? 방학이에요? 떡국은 먹었어요? 올 방학 계획은 뭐에요? 아, 정말 한 사람 한 사람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아요 아무쪼록 잘 지내길 바랍니다 내 이쁜이!
사랑해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