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한 달 정도는 정말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일상이 지속됐어.
합동연습이 있을 때도 전정국은 나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았고, 김태형씨는 연극부 나갔대.
댄스동아리 겸하고 있다니까 단장선배가 보내줬나봐.
하긴, 이제 나를 감시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가는 게 당연한거지....
그래도 말 좀 해주지...
그리고 정국이는 나랑 커플로 엮어서 춤추게 해달라고 했던 것도 빼달라고 해서 나는 다른 선배랑 추기로 했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허전하고, 왠지 아싸가 된 것 같은 느낌 빼고는 모든 것이 지극하게 평범하고 편안했어.
그렇게 지내다가 지금은 다른 학교라서 잘 만나진 못하지만 나름 학창시절에 친하게 지낸 친구 하나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고 해서 병원에 갔어.
입원한 친구랑 옛날 얘기?도 하면서 깔깔대고 웃다가 저녁시간쯤 나왔을거야.
병원 로비를 지나는데 뭔가 웅성거리더라고.
'저기 김태형 아니야?"
'김태형이 누군데?'
'그 HM그룹 재벌4세!'
'아 그 잘생긴 재벌? 맞네 맞아. 나도 기사같은데서 사진 본 거 같아'
'대박. 사진 찍어서 올릴까?'
김태형씨???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만 듣고 뒤돌아봤는데 진짜 있더라고.
"김태형씨..!"
"아...여긴 어떻게 왔어?"
"저는 친구 병문안왔어요."
"그렇구나. 잘 가"
"네..."
왜 왔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건 실례일 거 같아서 못 물어봤어.
근데, 왠지 이렇게 헤어지는 건 너무 어색한 듯 싶어서 내가 뒤돌아서 제안했지.
"차 마실래요?"
"왠일이예요?"
"그냥..."
"가요."
다행히도 흔쾌히 가자고해서 나도 편한 마음으로 갔어.
바로 근처 병원 상가에 카페가 있었거든.
둘 다 따뜻한 커피 시켜놓고 호호불어 마시고 아무 말도 없었어.
사실 뭐 딱히 할 얘기가 없긴 했지.
"...댄스동아리는 안힘들어요?"
"네. 재밌어요"
"빨리 무대 보고싶다"
"나도 빨리 무대 보여주고 싶다"
...또 그게 끝이었어..ㅋㅋㅋㅋㅋㅋ 하긴 우리 사이에 어떤 얘기들이 오가겠니..
"내가 왜 병원에 왔는지는 안궁금한거야?"
대뜸 물어봐서 사실 조금 놀랐어.
"왜..왜 왔어요?"
"어차피 우리 이제 사귀지도 않을거고, 그 쪽이 어디가서 헤프게 말하고 다닐 사람 아니니까 말할게. 나 정신과 다녀"
"ㅈ..저...정신과요?"
"응."
"왜인지...물어봐도 되나요?"
"불안장애가 좀 있어서."
"불안장애가 왜..."
"외상 후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더라고. 두통이 너무 심하고 구역질이 자꾸 나길래 병원 빙빙 돌다가 결국에 도착한 곳이 정신과이고."
"나랑 살 때 크게 다친 적 없잖아요."
"...... 이왕 말하는 김에 뭐 시원하게 털어놓지 뭐.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기도 하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니야. 나 회사 관둔 이유가 그것 때문이거든."
그러고보니까 회장님께서 원래 무조건 현장경험을 중시하셔서 후계수업을 꼭 듣게하고 실무에도 꼭 참석시켰는데 어느 날 이후로 안하긴 했어.
"일이 있었구나..."
"바이어들한테 강간을 당했어요. 남자로써 수치스러운데 그만큼 난 그쪽한테 솔직하고 싶어서 말하는거야. 피하지말고 들어 지금은."
너무나도 놀랐어. 김석진 선배한테 얼핏 듣긴 했지만, 남의 얘기였지 내 옆사람이 당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내가 입을 막자 피식 웃더라.
"미안해요..당황해서.."
"안 놀라면 그게 더 웃기지. 그래서 한번 자살시도를 하려고 했어. 근데 태린이가 생각나서 죽을 수가 없어서...그래서 살았어."
"....."
"아버지가 뒤늦게 사실을 아시고 가해자들 다 감옥으로 보냈어. 다행히도."
그러고보니 정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김태형씨가 속박에서 벗어난 게 보였거든.
그 뒷 이야기를 듣고나니 내가 잘못한게 너무 많이 기억났어.
그 아픈 사연을 속에 품고 나를 대하기가 얼마나 불편했을까.
내가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어.
"오래묵힌 비밀 풀어놔서 속은 시원하네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해줘서 고마워요 김태형씨."
"반말한다면서"
"아무래도 반말하는게 너무 어색해요"
"뭐야~"
"진짜 어색해요 ㅠㅠㅠ"
"알겠어. 나는 반말이 편하다~"
"그래요 나한테 반말하는 걸 허락해줄게요"
"허락안해줘도 나는 반말 쓸건데?"
"흥"
"ㅋㅋㅋㅋㅋ귀엽다. 부모님 강요없이 만나니까 진짜 좋아"
"집이 아닌 곳에서 만나니까 편하긴 하네요."
그렇게 김태형씨의 뒷 이야기는 그냥 가볍게..그 상황에서는 가볍게 넘어가는걸로 마무리 지었어.
"우리 집 놀러와요. 그것도 허락해줄게"
"진짜???"
"네. 근데 너무 자주는 말고. 김태형씨 여자친구 생기기 전까지만."
"그래 좋아."
"전 가볼게요. 날도 추운데 빨리 들어가세요.약 꼬박꼬박 챙겨먹고"
"알겠어."
그렇게 기분좋게 헤어졌어.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김태형씨한테 짐이었던 것 같아.
그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도 안되고, 김태형씨니까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끝까지 버틴거지 싶어.
대견해.
"선배 안녕하세요"
"안녕 오랜만이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했어.
그토록 별로였던 전정국도 안보다가 만나니까 반갑더라
"커피마실래요?"
"그래 가자 누나가 살게"
"좋아요!"
카페가서 커피를 홀짝이면서 그냥 어색하게 있다가 내가 먼저 말문을 텄어.
"공부는 잘 돼?"
"저 장학금받아요 선배"
"정말?"
"그럼요"
"집도 부자인데 장학금도 받고 잘.... 엄친아네 엄친아"
잘생겼다고 말하려다가 그럼 또 어떤 구설수에 휘말릴지 몰라서 그 말은 아껴뒀어.
"그 엄친아 선배가 데려가면 되겠네"
"너 또 그 소리...!!"
"나 이제 선배한테 들이대도 돼요."
"왜?"
"태형이형이랑 약속했어요. 딱 한 달만 선배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살다가 그 뒤엔 내 맘대로 하기로."
"아니 누구맘대로 그런 약속...."
"태형이형 아니었으면, 나 선배 어떻게든 그 때 내가 데려갔어요."
"...."
"내가 진짜 좋아하는 형이 나한테 부탁한거니까 꾹 참고 들은거지."
"야..."
"선배도 이제 내가 눈에 좀 들어오는 것 같네요"
"그런거 아..."
"아니라고 해도, 내가 예고하는데 선배는 내가 찜했어요."
저렇게 정색하고 말을 뱉어놓고선, 말이 끝나자마자 웃는게 다중이같았어.
물론 잘생겼지. 잘났고, 나로썬 참 복받은 일인데 그래도 나랑 전정국은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아무리 해줘도 저 황소고집 전정국은 들을 생각을 안하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주변에 전정국한테 치대는 여자들은 쌔고쌨어.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가끔 보면 대학탐방 온 여고딩들도 오빠오빠하면서 달려들고.
분명 내가 힐끔거리면서 새내기♥ 할 때도 이미 전정국의 팬은 아주 많았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그들 중 한명이었고, 눈에 띌만한 사람도 아니었어.
남자는 여자의 첫인상이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한다는데 내가 서글서글하게 생겼나?
"오늘 나랑 놀래요?"
"너가 자꾸 나한테 들이대니까 이것도 수작인 것 같은데"
"수작은 아니고...작업?"
"그거나 그거나..."
"놀자~"
아까부터 자꾸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져서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보니, 여자들이...나를 쳐다보는...눈초리가...
전정국한테 문자로 대답했어.
[여기서 내가 너한테 그래 놀러가자. 라고 했다간 이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그럼 이걸로 대답해요. 놀러갈래요?]
[김태형씨랑 같이 가자 그럼.]
[그건 내가 싫다]
[그럼 나도 싫은데?]
[작업걸려고 하는데 왜 형을 데려가요]
[난 너의 작업에 걸리고 싶지 않아 ㅎㅎㅎ]
[튕기지말고 지금 가요. 셋 센다.]
"하나, 둘, 셋"
"...!!!!"
손목이 아작날 뻔 했다. 전정국이 내 손목을 잡고 카페에서 후다닥 나갔어.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진짜 1차 손목탈골 2차 팔꿈치탈골 3차 어깨탈골 되는줄 알았다...
차는 드라마같이 삐까뻔쩍하더라고 파란색깔차.
난 차이름 뭔지 몰라서 그냥 색깔만...
"이게 뭐하는거야 지금?"
"김태형을 데려가느니, 차라리 미녀 여대생 납치한 납치범이 되는게 낫겠어요"
"너 진짜....!"
"안전벨트 꼭 매요. 나 난폭운전 전문이니까"
말뿐인 줄 알았던 건....나의 큰 오산이었어. 이 새끼 진짜 살벌하게 운전해...
"야...!!!! 좀 천천히 가!!!!"
"운전에 있어서 내 신조가 하나 있어요. 모든 도로를 아우토반처럼"
"미친거야...이건 미친거야!!!!!!!!"
차 문 쪽 위에 손잡이 달린 거 알지? 나 그거 뜯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꼭 쥐고 목적지까지 달렸다....
그 바람에 목적지가 어디인지 묻지도 못했어...
이정도로 달렸으니....벌금 엄청 물겠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맞다 얘도 재벌이지....후....
암튼...나랑 전정국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로 놀러오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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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초록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성실하지 못해서(ㅜㅜㅜ)글도 늦게 올리고, 댓글에 답글다는 일도 적지만,
제 글을 재밌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을 어마어마하게 사랑한답니다♥
그럼 이번편도 재밌게 읽어주시고 오늘도 행복하세요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