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에 이런 차림으로 오는 여자들은 우리 밖에 없을 거다. 슬기는 하나로 바짝 높게 묶은 머리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슬기는 그냥 스키니진에 니트. 나는 평소보다 진한 화장이었지만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모아 정리하자면, 지금 우리는 정말 '안' 섹시했다. 슬기는 폰을 하고,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서 칵테일 메뉴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잠시 돌리면 가끔씩 격렬하게 키스를 하는 남녀들이 보이고… 영 남사스러웠다. 나는 귀 밑에서 바로 끊기는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슬기는 내가 오자니까 끌려와서 이러고 있는 신세지만, 사실 내가 봐도 좀 지루해보였다. 하지만 나는 차마 클럽을 혼자 올 수는 없었기 때문에, 슬기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
공연 준비는 일주일하고도 조금 더 했다. 우리가 하는 공연의 특성 상 그렇게 오래 준비할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이런 클럽 공연은 좀 더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이번 공연은 우리가 스페셜 게스트처럼, 날을 맞춰두고 그 날 밤 작은 콘서트처럼 이뤄지는 공연이었다. 슬기랑 찬열이가 이래저래 무대 구성을 짜고, 종인이랑 세훈이는 하이라이트가 될 춤을 준비했다. 종대는 평소 하고 싶다고 했던 펑키한 락을 준비하는 모양이었고, 백현이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했다. 나는 할 게 없네. 그냥 가운데에 앉아서 히터 온도나 좀 조절해주고, 종인이랑 눈이 마주치면 잘했다고 눈을 크게 떠 줬다.
나는 이런 클럽 공연 때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분야로 도와줬다. 스타일링. 메이크업 박스를 이고지고 가서 애들 메이크업을 해 줬다. 수정이는 생각보다 꾸미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날 때부터 예쁜 애라 그런가보다. 나는 애들이 준비하는 무대를 보고 메이크업 컨셉을 짰다. 물론 말이 거창하지, 그냥 분위기에 맞게 진한 정도를 정했단 거다. 그리고 애들한테 이런 옷들을 가져오라고 말하고, 입혀주었다. 연예인이 아니니 너무 세심한 것까진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남자애들은 대포까지 따라다닐 만큼 팬들이 많은데. 특히 백현이나 찬열이한텐 다들 죽어났다. 세훈이랑 종인이는 약간 세게 생겨서 그런가, 매니아 층이 있는 것 같았고, 종대는 의외로 남자애들이 좋아했다. 슬기도 여자애들이 어마무시하게 좋아했다. 수정이 있을 때도 막 생일 조공 받고 그랬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슬기가 날 툭툭 친다. 언니. 지금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요. 나는 메이크업 박스를 힘겹게 다시 들었다. 내가 누구 좋자고 이 짓을 사서 하는 거지. 스테이지 옆의 작은 준비실에 들어갔다. 옷을 다 입은 남자애들이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가장 가까이 있는 애부터 잡았다.
"변백현. 앉아."
백현이는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미스트를 한 번 뿌리고 파운데이션과 브러쉬를 꺼냈다. 대충 얇게 넓은 부분에만 발라주고 바로 눈화장에 들어갔다. 대신 슬기에게 호수별로 나열된 파운데이션과 브러쉬, 컨실러 키트를 집어서 애들한테 해 주라고 부탁했다. 슬기는 자기도 해 보고 싶었다며 해맑게 키트들을 받아갔다. 다시 백현이한테 집중. 백현이는 속쌍꺼풀이고 언더가 진한 화장이 잘 어울린다. 베이스 섀도우, 음영 섀도우, 그리고 다시 짙은 애쉬브라운의 스틱 섀도우. 그리고 고민하다 화려한 포인트 섀도우를 집었다. 도전하는 의미였다. 평생 사 놓고 쓸 일 없는 섀도우 같아서 좀 후회를 했는데, 백현이한테는 이런 색도 어울릴까? 총알 브러쉬로 언더와 눈꼬리에 네이비 펄 섀도우를 포인트로 넣고 바비브라운 젤 라이너를 집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섀도우 색이 좀 달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무리수 색을 하나 더 집었다. 아이스 블루 펄 섀도우. 정말 쨍한 하늘색 섀도우를 반대쪽 눈 언더에 칠했다.
"눈 떠봐."
백현이가 눈이 간지럽다며 내내 짜증을 냈지만 눈을 떠 보니 또 괜찮은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내 눈에 못 하는 화장들을 다 얘네한테 입혀보는 거였다. 백현이는 아무래도 자기 눈이 어떤 모양이 됐든 그냥 간지러운 게 중요한 것 같았다. 슬기만 뒤에서 박수를 짝짝 치고 있었다. 나는 백현이에게 제발 눈을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박찬열. 찬열이는 눈이 크고 얇기 때문에 눈꼬리 쪽에만 포인트를 주어도 된다. 빠르게 이런저런 섀도우들을 손에 동시에 잡고 칠했다.
차례대로 종대, 세훈이에게 얇게 화장을 입혀주고 마지막 종인이 차례가 왔다. 종인이는 슬기랑 파운데이션 색으로 싸웠다. 대충 듣기론, 종인이가 슬기에게 왜 자기만 이렇게 까만 걸 바르냐고 화를 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런 어두운 색의 파운데이션을 평생 살 일이 없었는데, 종인이 때문에 샀다. 어쨌든 단순하게 슬기가 이겼고, 결국 종인이는 가장 어두운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내가 맡긴 일을 끝낸 슬기는 눈치껏 다른 애들에게 악기 튜닝을 하라며 보챘다. 정신없이 우왕좌왕. 나는 목을 양 쪽에 한 번씩 꺾고 메이크업 박스를 옮겼다.
"종인아. 눈 감아봐."
"이거 얼굴 너무 간지러워요."
"만지면 안 돼. 만지면 내가 한 고생들 다 물거품 돼."
"알았어요. 얼른 끝내요."
종인이는 쌍꺼풀이 깊고, 눈이 진하다. 연하게 해도 괜찮지만, 나중에 춤추는 무대가 있는 걸 생각하면 좀 더 화려한 화장을 입혀도 될 것 같다. 나는 진한 음영 섀도우들을 왼손에 올려두고 브러쉬를 티슈에 닦아냈다. 먼저 베이스 섀도우를 바르고, 몇 단계에 걸쳐 음영을 주었다. 어쩌다 보니 백현이보다 진한 화장이 돼 버렸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글리터 섀도우를 눈두덩이에 올려줬다. 이러니까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이라인을 그려준 후 눈을 뜨도록 했다. 종인이가 천천히 눈을 뜨는 동안 나는 혹시 가루가 눈 안에 들어갈까 면봉으로 근처를 살살 긁어내고 있었다.
"누나."
"응? 간지러워?"
"이렇게 밑에서 봐도 귀여운 것 같아요."
순간 소름이 슥 돋았다. 나는 몸을 바짝 일으키며 눈을 감았다 떴다. 피곤해서 쌍꺼풀이 몇 겹으로 접혔다. 투턱 쩔었으면 어떡하지. 아 살 빼야 되나. 저것도 귀여워보인다는 게 저격인지, 아니면 정말 귀여워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종인이면 진짜 귀여워서일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추한 몰골 보이는 게 달갑진 않았다. 저거 다 콩깍지인 걸 내가 아는데.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진짠데."
"나 늙어서 심쿵사해. 심쿵사."
종인이가 푸스스 웃었다. 저기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애들이 종인이를 불렀다. 나는 종인이의 팔을 잡고 살짝 일으켜줬다. 종인이는 몰래 내 손에 깍지까지 가볍게 끼고 일어났다. 아쉽단 듯 손을 꾹 잡고 풀어주는 것에,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버렸다. 종인이는 유유하게 하얀 옷을 입은 팔로 기지개를 피며 걸어갔다.
나는 브러쉬를 정리했다. 슬기가 슬쩍 옆에 다가왔다. 언니. 이제 나가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크업 박스를 챙겼다. 뒤에서 작게 자기들끼리 이번 공연에 대한 마지막 점검을 하고 화이팅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걸 흘리듯이 들으며 머릿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을 나열했다. 블루 하와이언? 코스모폴리탄? 좀 가볍게 갈까. 블루 하와이언을 먼저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슬기랑 대기실을 빠져나온 나는 다시 원래 앉아있던 바에 앉았다. 잠시 후 모든 조명이 소등되고, 무대에 불이 켜졌다. BAND :: Teddy Bear. 공연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의 환호성. 나는 청중의 가운데에서 우두커니 무대를 보고 있었다.
로맨스 인 밴드 (Feat. 연하남의 반란)
W. 베브
08
평소엔 나랑 같이 무대에 서는 애들, 그러니까 가족 같은 애들이 무대를 서는 걸 직접 눈으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대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반응이 보인다. 외모를 스캔하고, 개중 좀 아는 사람들은 악기의 종류를 본다. 나는 저런 순간에 무대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잠시 곰곰 생각해봤다. 그냥, 틀리기 싫다. 슬기 왜 저렇게 말이 길지. 이런 생각 했던 것 같은데. 종대가 멘트를 시작하기 전에 늘 짓는, 씩 웃어보이는 그 미소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바텐더를 불러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다.
옆을 돌아보자 슬기는 박수까지 치며 열혈 청중이 되어 있었다. 주변을 좀 더 넓게 살폈다. 한겨울에 탑이랑 핫팬츠만 입고 나온 여자들이 노량진 수산시장에 널린 꼴뚜기처럼 많았다. 나는 천쪼가리만 치덕치덕 붙이고 나온 저 여자들이 종인이를 쳐다본다는 게 내심 못마땅했다. 저런 거 입어봤자 얼마나 더 섹스어필을 한다고 굳이 저런 딱 달라붙는 옷을 왜 입어. 저런 걸 입고 애써 레드 립이며 굵은 웨이브 컬을 넣어도 하나도 안 섹시했다. 나는 괜히 내 단발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평생 섹시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저 여자들을 보니 이런 초딩 같은 옷차림을 개선할 필요성이 좀 느껴진다. 괜히 우울하게 가슴을 한 번 내려다봤다.
"안녕하세요, 테디베어의 보컬,"
"테디베어의 비주얼 변백현이에요!"
슬기가 없어, 대신 리더 역을 맡은 종대가 드디어 멘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첫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백현이가 튀어나와 마이크를 뺏었다. 쟤넨 맨날 덤앤더머처럼 놀더라. 나는 칵테일을 쭉 빨아들였다. 나는 그냥 우리 예쁜 종인이나 보기로 했다. 종인이의 시선이 거칠게 흔들렸다. 나 찾나? 나는 종인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아 언니 뭐해요?! 슬기의 시야를 가렸는지, 슬기가 짜증을 담아 물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종인이가 날 보고 웃었다. 내 새끼 예쁘다.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데, 종인이가 웃는 걸 본 여자들이 수군댄다. 어머, 쟤 저 키 큰 애 뭐야? 우리 보고 웃는 거야? 좀 귀엽다. 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 여자들에게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내 새끼는 너 보고 웃는 거 아니거든, 빠가년들아! 라고.
"…그럼! 첫번째 곡을 시작하겠습니다."
찬열이가 가볍게 스틱으로 카운트를 넣었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칵테일을 홀짝였다. 종인이의 손 끝만 보았다. 그리고 내가 칠해준 눈. 종인이는 간헐적으로 다리를 떨었다. 사람들의 함성, 반짝이는 조명, 어지러운 분위기, 시끄러운 비트, 그 사이에서 나는 종인이만 보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아이돌 덕질을 하는 지 알 것 같아.
늘 같이 무대를 서는 편이었지, 이렇게 무대를 보는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보는 내 남자친구의 모습. 종인이는 무대 중간중간, 정말 이 쾌감을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반짝이는 글리터가 쨍하고 조명을 받아 빛났다. 가장 반하기 쉬운 모습인데, 오히려 이제야 처음 본다. 가장 가까이 있던 모습인데.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곡은 클라이막스로 치닫기 전 잠시 죽는 부분이었다. 종인이의 어깨가 이완됐다.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종인이는 신중하게 손 끝을 튕겼다. 잔잔하게 고조되는 분위기. 그리고 찬열이가 클라이막스를 터뜨렸다. 쾅! 크게 터지는 드럼 심벌과 함께 종인이가 폭주하듯 세게 연주했다.
아.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멈췄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눈이 새빨갛게 달았다. 새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 되돌아보면 늘 사랑이라고 정의했지만 쟤 괜찮다. 쟤 좋은데? 쟤랑 사귀면 좋겠다... 정도의 수준이었던 마음이, 오븐 속에서 터져버린 베이킹파우더처럼 수십제곱으로 불어났다. 정말 이젠 사랑이라고 명명해야겠다. 나는 멍하니 칵테일 잔을 세게 쥐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머저리 같은 생각을 했다. Fall in love. Crush on you. 이런 영어 단어들을 배열했다. 실없는 단어들이 줄에 꿰인 굴비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심장이 입으로 왈칵 토해질만치 세게 뛰었다.
오늘도 술을 마신다. 사람은 술고래다. 사람이 술이 되고 요만한 사람 배에는 저만한 술이 다 들어간다. 나는 또 지루하게 오세훈이 말아준 소맥을 홀짝였다. 찬열이랑 종인이는 곱창을 뒤집고 있고, 오세훈은 자기가 어떤 비율로 소맥을 말았는지를 떠들고 있고, 김종대는 슬기랑 오늘 공연의 후기를 말하고 있고, 변백현은 오세훈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 사랑에 빠진 날에 곱창에 소맥이라. 참 어이가 없어 콧방귀가 자꾸 터졌다.
공연이 끝나고 한참 멍하니 앉아있다가, 슬기가 흔들어 깨워서 정신을 차렸다. 아이들은 신나게 공연을 잘 마친듯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멍하니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있는 나를 보고 종인이가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세훈이랑 한 댄스 무대 의상이었다. 내가 짜 줬던 의상인데. 세훈이랑 춤을 언제 췄지? 첫 공연을 보고 내 생각에 빠져있느라 그냥 흘려보낸 것 같다. 종인이는 내 손에 들린 메이크업 박스를 뺏어들었다.
「무겁죠. 내가 들게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종인이의 카키색 야상을 집어서 한쪽 팔씩 끼워줬다. 그랬더니 또 웃는다. 입모양으로 '왜?'하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결혼한 것 같다. 출근길 배웅해주는 부인.」
말을 말자. 그냥 웃자 종인이가 좀 더 웃다가 문득 물었다.
「맞다. 나 춤 추는 거 처음 봤죠.」
「…….」
「어땠어요?」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했다. 씨발 나년은 왜 그걸 놓쳤지. 뭐라고 하지. 아.. 어떡하지. 나는 잠시 그러다가 이내 그냥 활짝 웃었다.
「멋있었어! 짱!」
「별로였나봐요. 뜸을 들이네.」
「아니야!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서 그래!」
「그럼 내가 중간에 뽀뽀 날린 것도 봤어요?」
「…어?」
「…누나 내 무대 안 봤구나.」
내가 무려, 종인이를 삐지게 했다. 종인이는 한 번 입꼬리를 비틀더니 이내 좀 웃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앞에 걸어나가는데, 저게 괜찮은 사람의 행동일 리가 없다. 종인이는 찬열이한테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날 놓고! 저건 분명히 삐진 거다. 그러더니 내 옆에 앉지도 않았어. 진짜 삐졌나봐. 아니, 일단 나부터 죽어야지. 나년 진짜 빠가사리.. 나 왜 살지.. 나는 역시 연애를 하면 안 돼 난 썅년인가봐... 나는 그 생각을 다시 하며 다시 소맥잔을 들었다. 먹고 뒤져버릴래… 눈을 꾹 감고 잔을 기울이는데, 팔목이 잡혔다. 눈을 반짝 떴다.
"누나. 많이 마시면 속 아파요."
"……."
"충분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그니까 그만 마시라고."
종인이가 어느샌가 비어있던 내 앞자리로 끌어앉아 내 손에서 잔을 뺏어갔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종인이를 올려다보았다. 종인이는 내게 잘 구워진 곱창 몇 개를 좀 더 작게 썰어 접시에 놔 준 뒤에 나랑 눈을 맞췄다. 종인이는 아직 지우지 않은 화장 탓에 아직도 눈두덩이 반짝였다. 나는 멍하니 종인이만 쳐다보았고, 나를 조금 기다리던 종인이는 결국 제가 곱창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내 무대 못 본 건 괜찮아요."
"……."
"누나가 무슨 일이 있었겠지. 응?"
"……."
"난 괜찮으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아."
"그리고 누나, 자꾸 주량 믿고 마시는데. 안 취하는 거랑 다음 날 속앓이하는 거는 별개예요."
계속 듣고 있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얜 이 상황에서도 나를 위해주네. 이건 애인으로서 내가 잘못한 건데, 충분히 화낼 수 있는데도 내가 상처받을까 참고 있었다. 내가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참을 수 있었을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종인이는 내가 고개를 숙인 게 눈물이 나서 그런 건줄 착각했나보다. 내 앞에 휴지 몇 장을 겹쳐주고 주섬주섬 짐을 옮겼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종인이는 핸드폰을 찾으면서 말했다.
"누나."
"……."
"집에 갈까요."
시각이 어느덧 열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이가 외투를 걸치고 먼저 일어서자 백현이가 물었다.
"어? 너 집 가게?"
"아… #○○누나 데려다주러요."
나는 그냥 먼저 가게를 빠져나왔다. 중간에 찬열이랑 눈이 마주쳤다. 왜? 입모양으로 묻는 것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힘이 쭉 빠졌다. 이 좆같은 메이크업 박스는 무겁고, 영 짐이었다. 짜증이 난다기보단 무기력했다. 터덜터덜 가게 문을 열자마자 대뜸 담배 연기를 얼굴에 쐬었다. 기분이 잡치려는 걸 간신히 참고 주머니 안에서 만져지는 립을 손 안에서 굴렸다. 바르기는 귀찮았고, 그런데 바르고 싶다 보니 손 안에서 빙글빙글 굴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립 마에스트로. 쨍한 레드 립이었다.
종인이가 뒤에서 턱 하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흘끗 어깨에 얹어진 손을 보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와글와글 시끄러운 점포들을 지나고 차츰 사람들이 적어졌다. 조용한 거리에 쌩 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종인이가 나를 잡고 제 뒤로 숨겼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다 보니 종인이 등에 머리꼭지까지 다 가려졌다. 거짓말처럼 바람이 쏙쏙 피해갔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종인이의 허리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누나. 뭐예요."
"길거리에서 차마 머리는 못 박겠고, 나름의 사과."
"저 지금 심장 바닥까지 떨어졌어요."
"왜?"
"설레서."
푸스스 웃었다. 종인이가 내 손을 제 배 위로 모아서 잡았다. 그러고보니 종인이는 허리도 이렇게 얇구나.. 멍청한 생각을 하며 뒤뚱뒤뚱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백허그를 풀었다. 종인이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선 부끄러웠다. 내가 입을 열지 않으니 종인이가 오늘 공연 얘기를 자세히 늘어놓았다. 그걸 들으며 버스에 올라타고, 계속 듣다 보니 집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고개를 간헐적으로 끄덕이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래서? 좋았어? 이런 물음을 툭툭 던지면 종인이가 반응했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집에 바로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계속 가로등 밑에 서서 대화했다. 그러다 문득 핸드폰을 보자 벌써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종인아. 열두 시 넘었는데. 차 끊겼을까?"
"어… 벌써요? 끊겼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걸어가지 뭐."
내 감한테 물었다. 지금 종인이를 보내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걸으면 얘 술도 마시고 공연도 하고 힘들 텐데, 한 시간이나 걷게 한다는 건… 그 쪽 길 완전 으슥하고 무서운데… 멀쩡한 이십대의, 심지어 덩치도 산만한 남자애를 세워두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던 나는 결국 결론을 내렸다.
"너 부모님이랑 같이 산댔나?"
"저요? 아뇨. 본가는 전라도 쪽인데."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갈…"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이 말이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 지 모르겠다. 나 혼자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손사래까지 치며 변명했다.
"아니. 그니까. 시간이 늦었고, 너는 오늘 힘들 테고, 그러니까…"
"그래도 돼요?"
"내가 안 될 게 뭐가 있어?"
"알았어요. 들어가요."
-
빌라 계단을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속 갈등했다. 그저께 대청소를 하긴 했는데, 내가 오늘 잠옷 바지랑 속옷을 치워두고 나왔던가? 설거지는 했었나? 화장대 분명 개판일 텐데. 아. 화장실에 생리대랑 예전에 남자친구 있던 시절 쟁여놨던 콘돔, 그런 거 치워야 되는데. 하다 못해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라던가. 거실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엔 대체 무슨 창이 마지막으로 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3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머리를 굴렸다.
"누나. 어디예요?"
"여기. 301호."
"비밀번호."
"어..."
생각해보니 집 비밀번호도 종인이 생일이었다.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일들이 왜 이렇게 몰려오지? 나는 입술을 씹다가 종인이를 돌아봤다.
"저.. 종인아?"
"네."
"미안한데, 잠깐만 눈 감고 기다릴래? 금방 나올게."
"알겠어요."
재빠르게 940114를 누르고 집에 뛰어들어갔다. 아 시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대로 종인이를 맞았다간, 정말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어야 했을 판이다. 나는 일단 빨래를 몽땅 걷어 빈 방에 몰아넣었다. 저긴 빈 방이자 창고로 쓰이는 방이었다. 안 열어보겠지. 화장실에 있는 잡다한 것들도 모두 던져넣었다. 설거지는 다행히 없었다. 대충 쓰레기를 모아서 쓰레기 봉투에 집어넣고 베란다에 내보냈다. 방에 있는 속옷 같은 건 옷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남친의 흔적을 뒤졌다. 있을 리가 없지만 한 번 더 훑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이불을 예쁘게 정리하고, 방문을 받치는 곰인형을 예쁘게 놓았다. 화장대도 대충 잘 세워두고, 거실 테이블도 서랍에 모든 걸 다 쑤셔넣었다. 소파를 팡팡 쳐서 정돈한 뒤, 신발장에 있는 신발들을 발로 슥슥 밀며 문을 열었다.
"종인아!"
"뭐 그렇게 숨길 게 많아요? 나 말고 남자친구 하나 더 있지?"
궁시렁대는 종인이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집 안에 들였다. 눈으로는 대충 집 안을 훑고 있었다. 한 쪽 벽에 그림액자를 걸고, 밑에는 조화 화분을 놓고, 이런저런 장식품들을 놓은 공간이 있다. 안방 앞이자 현관과 바로 마주하는 곳이었는데, 평소 분위기가 나는 걸 좋아해서 늘 은은한 조명을 켜 놓았다. 또 현관 앞에도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예쁜 스탠드가 붙어 있었다. 모아 정리하면, 내가 보기에도 꽤 여성스럽고 괜찮은 것 같았단 거였다.
종인이를 소파에 앉혀두고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러 갔다. 대학생 주제에 돈 지랄 같아 보이겠지만, 내가 스타벅스 덕후인 걸 아는 우리 어머니께서 친히 보내신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있으니 집에서는 감사하게 쓰고, 밖에선 스타벅스 죽순이로 사는 것이었다. 나는 컵을 두 개를 꺼내 하나는 물을 담고, 하나는 데운 우유를 담았다. 바닐라 시럽을 들고와 샷과 함께 넣으면 바닐라 라떼였고, 물에 샷을 넣으면 아메리카노였다. 하늘색과 분홍색의 땡땡이가 박힌 컵은 지나치게 유아틱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요."
일단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종인이가 티비를 틀어놓았는지 조그맣게 소리가 들렸다. 내가 늘 틀어놓는 영화 채널. 나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나 씻고 올게! 그러자 종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편하게 갈아입었다. 루즈한 흰 색 박스티랑 레깅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집에서 외출복을 오래 입고 있는 걸 못 버텨한다. 옷을 걸어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화장도 지웠다. 세수를 마친 뒤에, 얇게 다시 피부화장을 했다. 남자친구한테 예뻐보이고 싶은 욕구는, 아무리 성격이 여성성과 관련이 없다는 나라 할지라도 당연한 것이었다. 피곤했지만 눈썹도 애써 다시 그렸다. 눈화장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립밤을 바를까 하다 말았다. 어차피 커피 마실 건데.
다시 거실로 나가서, 아직도 스모키 눈화장을 한 종인이에게 리무버를 묻힌 솜을 두 개 가져다주었다. 소파 옆에 앉아서 톡톡 치며 누우라고 하고, 종인이가 착한 강아지처럼 말을 듣는 것에 신이 나서 눈을 감겼다. 종인이가 소파에 쭉 길게 눕고, 나는 종인이의 허리쪽ㅡ소파 위ㅡ에 낑겨앉았다. 종인이의 눈 위에 화장솜을 얹고 녹을 때까지 잠깐 기다리는 동안에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입 더 마셨다. 그리고 머그를 내려놓은 후 솜을 문질러서 닦아준 뒤 대충 마무리해줬다. 눈을 뜨게 하자 종인이가 살짝 몸을 위로 당겨서 세웠다. 문득 늘 궁금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아무 필터링 없이 그대로 물었다.
"종인아."
"네."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야?"
에? 하는 표정으로 종인이가 날 쳐다봤다. 나는 정말 평소에도 궁금했다. 왜 존댓말을 아직도 쓰지? 야야 거리면서 반말 찍찍 뱉는 건 그것 나름대로 또 빡치겠지만, 이렇게까지 존대를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냐면 여자친구잖아? 선배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애인이잖아, 나는.
"반말해도 돼요?"
"그럼?"
"아니, 난 누나 기분 나쁠까봐."
"야. 너랑 나랑 무슨 열 살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여자친구한테 존대를 써?"
말을 끝내고 또 커피를 한 입 마셨다. 그런데 머그를 내리니 종인이의 표정이 영 수상하다. 왜 저렇게 웃고 있지? 눈꼬리가 휘어지며 눈가에 세 개의 주름이 지고,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광대는 볼록 튀어나온 얼굴. 문득 또 사랑이 느껴졌다. 아 떨려. 물론 그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질 않을 거다. 그냥 입술을 삐죽이며 저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이겠지.
"너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종인이는 대답을 않고 웃다가, 갑자기 훅 다가와서 나를 제 상체로 엎어지게 했다.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난 늙어서 자꾸 이러면 심장마비 온다고 몇 번을 말해도 먹히질 않는다. 종인이의 얼굴이 정말 가까웠다. 나는 순간 숨이 멎었다. 이거 좀 위험한데? 종인이의 선한 웃음이 한 15센티 자 하나 낑길 거리에 놓여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종인이의 얼굴이 훌쩍 가까이 닿았다. 코 끝이 맞닿고 말랑한 게 닿았다 떨어졌다.
얼이 빠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심쿵이고 뭐고, 단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영혼이 나간 날 본 종인이가 또 웃었다. 그리고 내 이마에 꾹 깊게 입을 맞췄다.
"여자친구한텐,"
"……."
"이런 거 좀 해도 괜찮지?"
나는 거의 10초간을 뜸들였다.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냥, 아니, 이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데. 이 감정을 도저히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냥 심장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진도 8.0의 강진이 세상을 뒤흔들고 옆에선 핵폭탄이 터지고 지구가 폭발하고 내가 튕겨져 나가는 기분. '고작 뽀뽀'로 이 정도라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고작 뽀뽀'가 나에겐 정말 이랬다. 나는 겨우겨우 입을 떼었다.
"나 죽는다니까. 심쿵사로."
종인이가 또 푸스스 웃는다. 뭘 웃어? 짜증내며 배를 톡 치며 일어나자 또 날 쭉 끌어당긴다. 이번에는 내 옆통수를 꾹 눌러 제 가슴에 푹 닿게 했다.
"나도 진짜 떨리고 있어."
"……."
"아, 어떡하지. 진짜. 좋아서."
도발적인 연하남은 누나를 심쿵사시킨다. 심지어 반말하는 연하는 더더욱…. 나는 그런 생각을 멍하니 하며 종인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쿵쿵쿵쿵! 왜 이렇게 빨리 뛰지. 사실 나도 너랑 정박자로 함께 뛰고 있을 거란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나도 너랑 똑같은 템포로 피가 펑펑 쏟아질걸.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 * * *
변명 좀 해도 되나요?
일단 박고 시작할게요. 죄송합니다.
~김베브의 변명 타임~
제가 글은 다 써 뒀는데, 정렬이나 그런 걸 컴퓨터로 해야 하거든요..
컴퓨터를 A/S 맡겨서... 글은 있는데 올리질 못해... 네 그래서 늦었어요.......
저 늦은 이유 변명할 때마다 쥐구멍 ㅜㅜ.. 그냥 죄송해요 늦게 와서..
애들이 한 화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현이 : 2015 서가대 ㅠㅠㅠ
찬열이 : 골디여 골디.... 골디.........골딘줄 알고 독방 엄청 뒤졌는데 마마였네여 전 커튼 옷 입은 날로만 기억해서.. 고멘네..
조니니 : ㅋ.. 이거 언젠지 기억이 안나네요 무슨 결산 무대였나.... 아무튼 저 날 엄청 좋아서 무작정 저장했는데..
그래요 제가 이그죠 스모키 메이크업 덧쿱니다.
매일매일 시상식 메이크업이었으면 좋겠어여 8ㅅ8
저 사실 화장 잘 못하는데 그냥 이거 보고 설명했어요... 화장품 브랜드 ㅇㅣ름 이런 건 그냥 비싼 브랜드예요
여주의 부르주아함을 느끼시라고...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행복한 하루하루 되세요! (상담원 말투)
p.s. 맞다 저 내일 생일이에여! 6v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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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윤아얌♡♡Moo♡♡애니♡♡딱풀♡♡챠밍♡♡체리♡♡하루♡♡검은봉지♡♡홈마♡♡기린뿡뿡이♡
♡푸우곰♡♡로운♡♡모찌♡♡앰브로시아♡ ♡마름달♡
암호닉을 신청해주실 땐 [] 괄호 안에 넣어서 신청해주세요!
그리고 예전에 쓰시던 것도 [] 괄호 안에 넣어서 말해주세요. 한 번만 해 주시면 리스트에 올릴게요!
안 그러면 제가 까먹고 가끔 안 올려서 ㅠㅠ... 처음 한 번만 [] 괄호 안에 가둬서 신청해주시면.. 감사합니당!
혹시 제가 암호닉을 빠뜨렸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시지 마시고 댓글 다시 달아주세요 ㅜㅜ
ex) [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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