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변백현; 몸 파는 누나 上
늦은 새벽. 술 냄새와 온갖 종류의 향수향이 비릿하게 진동하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가로등 하나 없는 좁은 골목길을 올라나갔다. 옹기종기 붙어 숨쉴 틈을 주지 않는 이 길이 나는 끔찍하게도 지겨웠다. 매일 반복되는 이 생활 또한.
허벅지 안쪽을 한참 지분대던 대머리의 손길이 다시 생각났다. 마지막까지 내 입에 술을 꾸역꾸역 쳐 넣으며 기름이 번들번들한 입술로 과일을 먹여주던 대머리의 입술도. 우욱, 잠시 골목길 옆 벽을 짚고 서서 숨을 가득 들이쉬었다. 구토가 치미는 느낌. 얼른 집에가서 깨끗한 물로 더러운 몸뚱아리를 씻어내고 싶었다. 기력 없는 내 몸을 채찍질 하며 분주히 다리를 움직였다.
서서히 어둠 속에서, 나의 안락한 보금자리인 작디 작은 빌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의 가로등만이 빌라 옆을 비추고 있었다. 빌라 입구엔 항상 누군가 음식물 쓰레기를 투기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도둑고양이들이 한 데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도둑고양이들보다 더 익숙한 실루엣이 가로등 빛에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변백현이었다. 내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나아가던 왼쪽 발목이 다시 욱씬거려오기 시작한다. 후유증이었다. 너의 후유증.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뼈저린 고통과 외로움에 파묻혀있을 쯤이었다.
돈은 급했고, 할 줄 아는 건 없었고, 결국은 내가 자발적으로 뛰어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청난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사랑 없는 섹스. 하루하루 날이 가면 갈수록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름답게 피어있었다는 사실은 시들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언제나 남자를 만나고, 애무를 받고, 섹스를 했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 없는 정신적 애정 박탈감은 날 짓눌러 죽도록 만들었다. 이 세상에 나뿐이라는 고독함 속에서 매일을 버텨가고 있을 때 쯤, 니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항상 출장을 나가는 집이 있었다. 으리으리한 아파트였고, 페이도 다른 사람보다 굉장히 쎘다. 사실 성교라는, 어찌보면 간단한 것 같은 행위에 그만한 돈을 주는게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 남자는 항상 나를 부를 때마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쥐어주었다. 나는 그 남자에게 헌신적으로 몸을 바쳤으며 남자는 내게 돈을 바쳤다. 내 첫 단골이었다. 그리고 너는 내 첫 단골 손님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었다. 사실 지나가다 몇 번 마주치면서 호기심이 생겼던 것은 사실이다. 내 단골 손님이라는 사람은 돈이 많았지만 그만큼 늙어있었다. 젊음을 돈에 투자한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렇지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이런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너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저 궁금, 에서 끝내야만 했다.
그 날은 내가 술을 좀 마셨었다. 이 더러운 직업에 대해 꽤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도저히 아저씨와의 섹스는 불가능할 것 같아 조금 많이.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봉투를 받고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집에서 빠져나오는데 복도 창문 쪽에서 담배를 태우던 너와 딱 마주쳤다. …저 얼굴에 담배라니, 안 어울리네. 가방을 고쳐매며 엘레베이터로 향하는데 너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주친 적은 많아도 말은 단 한번도 나눠본 적 없었는데.
" 그렇게 몸 쓰고 밥은 먹고 다녀요? "
…목소리가 좋았다. 나긋나긋했다. 다정했다. 오랜만에 듣는 걱정이었다. 나는 외로웠고, 너는 날 걱정해줬다. 그러나 나는 무시하고 가려고했다. 한심하다고 생각할 진 모르겠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룰은 바로 사랑하지 않는다, 였다. 나를 위해서도, 상대방을 위해서도. 그래서 나는 듣고도 모른 척, 지나가려 했다.
" 나 지금 저녁 먹을건데. "
너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자정을 막 지나는 시간에 저녁이라니,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너는 그런 내게 나보다 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같이 먹어요. "
외로움에 사무치던 심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너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에게 밥을 먹고 가라던 네 눈빛은 장난스러웠지만 진지했으며, 가벼웠지만 처량했다. 어쩌면, 너는 내게 뭔가의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너와 나는 만남을 지속해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난 그저 장난이라고 치부했었다. 그냥 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 했다. 너는 나에게 뭔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이름이 변백현이라는 것, 그리고 니가 나보다 어린 돈 많은 명문가 자제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너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마 이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있어 그 이상의 것은 필요치 않다고 결론 지었었던거겠지.
" 백현아아…, 이리와서 누나 안아줘어. 얼른. "
" 밥부터 하고요, 배고프다 그랬잖아요. "
" 응, 백현이 입술이 고프다. 얼른. 응? 뽀뽀해줘. "
" 누나가 아니라 애기네. 자 뽀뽀. "
그래서였을까,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즐긴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치유받았다. 깨끗한 너를 나라는 잿더미에 빠트린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 곧 끝날 거니까, 이러다 말거니까. 우리는 서로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알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이러다 금방 끝날거야.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부족한 걸 충족해주고 위로해주다가 끝내버리면 되는거야. 라고 맘 편히 생각했다.
" …오늘은 좀 늦었네요. 기다렸는데. "
" 미안, 백현아. 많이 기다렸어? "
" 그 새끼랑은 떡만 치면서 뭐가 그렇게 오래걸려요. "
" …뭐? "
" 설마 나랑 있을 때처럼 그 새끼한테도 아양떨고 애인인 척 해요? "
" …백현아. "
" 대답해봐요. 누나한테는 나나 옆집 새끼나 똑같은 놈이야? "
" 당연히 아니지. 둘이 어떻게 같아. "
" 그래, 아니야. 누나는 날 사랑하잖아요. 날 좋아하잖아. 응? "
그러나 그것은 마냥 깊어지기만 했다. 너는 내가 없는 시간이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나를 옆에 붙잡아두려고 했다. 분명 나는 몸을 파는 여자라는 걸 알면서도 시작한 관계가 분명한데도 너는 그것을 알지 못했던 사람처럼 내가 다른 사람과 잔다는 사실을 점점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는 날 사랑하고 말았다. 날 사랑하고 있었고, 그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나는 두려워졌다. 우리는 절대로 사랑이 되어선 안되는 사이었다. 애정도, 사랑도 아닌 그저 서로를 달래주는 그런 사이여야만 했다.
" 누나, 그거 그만두고 나랑 살아요. "
" …. "
" 내가 구해줄게요. 응? "
구해준다. 너는 내게 구해준다 말했었다. 너는 어렸고, 나는 알고 있었다. 구함, 을 받아야할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점점 더 타락 속으로 빠지는 너 자신을 구해야한다고. 나는 천천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옷을 챙겨입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끝내야 할 때구나.
" 누나, 어디가요. "
" 가야돼, 나. "
" 대답 하고 가요. "
" 잘 있어. "
짧은 미니원피스까지 입는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지퍼를 끝까지 올린 나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챙겨 그의 집에서 빠르게 나와버렸다. 그 와중에도 누나, 내일 봐요 하며 내 등에 대고 말하는 너가 나는 우스웠다. 그리고 내 자신도 우스워졌다.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는데도, 모든 걸 외면하고 떠나야하는 내가.
그 날 이후, 그 아파트에 살던 단골은 새로 온 어린 여자아이에게 넘겨주었다. 웃기게도, 너와 나의 연결고리는 니가 그리도 싫어하던 옆집 새끼 외에는 없었다. 내가 더이상 출장을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볼 수 없었으니까. 너는 내 휴대폰 번호도, 내가 일하는 술집도, 내 집 주소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자꾸 생각나기 시작했다. 니 손길, 니 말투, 니 애정, 금방 사라질거라 믿었던.
생각하면 안돼, 속삭였지만 문득 무의식 중 나타나는 너의 얼굴은 막을 수가 없었다. 자꾸 너가 떠오르고 보고싶고 생각났지만 나는 꿋꿋히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우겼다. 아니라고 부정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너가 흐지부지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어울리는 사이도 아니었고 어울려서도 안되는 사이였기에 너가 조금씩 잊혀진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줄로만 알았다.
" 언니! 5번방이 아니라 3번방으로 가라는데요? "
" 에? 갑자기 왜? "
"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갑자기 언니 급하게 찾으면서 3번방으로 가라고 하시던데. "
" 이상하네. 5번방 예전부터 예약되어있었는데. "
" 보나마나 돈 때문이겠죠, 뭐. 3번방에서 언니랑 있으려고 돈 엄청 바쳤나보네. "
순간 너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너이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너이기를 바랬다. 무슨 수로 나를 찾아와,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돈이 많으니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주 만약 너라면, 그게 너라면… 끊어져야 할 실이 아슬아슬 한 올을 남겨두고 이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전신 거울앞에서 얼굴을 확인하고는 옷 매무새를 만졌다. 오늘따라 천박해보이는 나. 느릿한 걸음으로 3번방으로 향했다.
" …. "
" 드디어 찾았네. "
그리고 아니길 바랬던, 아니 맞길 바랬던 소망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변백현, 익숙한 듯 낮선 그 얼굴이 나를 반기었다. 처음으로 보는 정장의 차림이, 난 우습게도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너가, 너처럼 멋있고 반듯한 아이가 이 곳에 왔다는 사실이 나는 싫었다.
"…뭐하는거야, 변백현. "
" 조금 힘들었어요. 그래도 누나니까. "
" …. '
" 서있지말고 여기 앉아요. "
오랜만에 마주한 너는 뭔가 변해있었다. 분명 그때처럼 순한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있지만, 그때의 너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너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너는 내가 느릿거리는게 답답했는지 내 손을 잡고는 네 옆에 우악스럽게 앉혔다. 어딘가, 이대로 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옆에서 날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너에게 말했다.
" …돈은 다시 돌려줄테니까, 그대로 나가. "
" …. "
" 그리고 절대 여긴 찾아오지 마. "
니가 나를 만나기 위해 냈던 돈이 얼마든, 그 액수가 얼마나 많던 한 장도 빠짐없이 다 돌려줄테니까 다시 나가. 여길 나가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다, 이게 다 널 위한 일이야. 더 이상은 할 말도 없었고, 해서도 안됐기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너가 내 손목을 다시 잡고는 강한 악력으로 자리에 앉혔다.
" 좆같은 소리하지 마. "
" …백현아. "
손목에 느껴지는 통증 보다도, 너의 입에서 나온 험한 말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변백현은, 예전에 순하기만한 강아지같은 아이가 아니었다. 마주보고 있는 눈빛만으로도 내 등골엔 소름이 작게 돋아올랐다. 별안간 놀라 아무말도 못하는 날 보며 네가 입을 열었다.
" 생각해봤어. 누나가 내게서 도망친 이유가 뭘까. "
" …. "
" 나는 누나를 사랑했고, 누나도 나를 사랑했는데 왜 도망쳤을까. "
" …난 너를 사랑하지 않, 아윽! "
"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거야. 왜 누나가 도망쳤는지. "
" 아으.. 윽.. 아파, 백현아.. "
" 그래서 내가 누나를 찾아오려고. 매일매일, 여기로. "
내가 말하려하자 백현이가 잡고 있던 내 손목에 더 큰 악력을 쥐었다. 이대로 가다간 멍이라도 들 것 같았다. 손목을 빼보려 팔을 비틀어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아파왔다. 백현아아..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내가 아파하는 얼굴을 보자, 너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지면서 힘이 조금 풀려지다가 내 손목을 놓고는 내 뺨을 쓰다듬는다.
" 나는 누나의 사랑을 원하는데, 누나가 줄 생각이 없다면. "
" …. "
" 내가 돈 주고라도 살게요. "
" …. "
" 옆집 새끼보다 훨씬 많이줄게요. 응? "
변백현은 미친게 분명했다. 어떻게 예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항상 다정한 말만 내뱉던 니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너의 말에 치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변백현 넌 미쳤어. "
" …. "
" 다신 찾아오지마. "
도저히 네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고 그게 나는 너무 괴로웠다. 순식간에 문으로 걸어나갔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큰 방안에 울려퍼졌다. 내가 문을 열려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데 너가 내 어깨를 거칠게 붙잡아왔다. 그 강한 힘에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넘어졌고 덕분에 왼쪽 발목을 시큰하게 접질렀다. 너는 일어서지 못하는 내 위에 올라타 내 턱을 우악스레 잡아와 제 눈과 마주치게 했다.
" 씨발, 그럼 나더러 뭘 어떻게 하라고..! "
" …아으…. "
" 니가 줄 생각이 없으니까 내가 돈주고 사겠다는데, 그것도 싫어? "
" …너 진짜…. "
" 그래, 나 미쳤어.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으니까, 씨발, 어떻게 좀 해봐!! "
" …. "
" 사랑했잖아.. 어? 사랑했잖아요, 누나.. 나한테 왜 그러는데..!! "
그리고 너는 곧 이어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나를 원망하는 눈빛같기도 했다. 누나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사랑하게 만들었잖아. 이제와서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괴로웠다. 마치 날 사랑했다고 솔직하게 얘기해,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 누나는 날 사랑했어요. 내가 알아, 누나는 날 사랑했어. "
" ...백현아. "
"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요, 누나.. 그러니까, "
" …. "
" 나 버리지 마요. 응? "
지금 내게 애원하듯 말하는 모습은 그때의 변백현 같기도 했다. 아까의 그 무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변백현은 없어져있었다.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내게 말하는 너의 모습은 처량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걸까.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죄책감이 내 목을 조여온다. 차가운 바닥 위 네 밑에 깔려있는 내게 자기를 버리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는 너에게, 나는 한가닥 남은 이 실을 끊어버려야만 했다.
" …백현아. 나는. "
" …. "
널 사랑한다고도, 사랑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내 대답은 어떤 식으로나 너를 엄청난 절망과 후회에 밀어넣을게 분명했으니까. 넌 분명 나를 사랑하게 된 걸 후회하게 될거야. 너의 밑에 깔린, 접지른 내 왼쪽 발목이 진득하게 아파온다. 마치 너와 내 사이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이 꽤나 볼만하다. 비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고, 눈동자에 아픔이 서려 쎄하기도 하고, 날 걱정하듯 다정하기도 하다. 나는 너에게 그저 이런 말 밖에 해줄 수 없다.
" 그냥 잠깐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해. "
그냥, 잠시 사랑에 대해서 배웠던. 니가 더 좋은, 더 많은 사랑을 하기 위해 거쳐간 성장통이라고. 그땐 아팠지만 막상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니었어, 하게 되는. 너와 내가 사랑이기엔, 우리는 너무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행복하지도 않을거야. 내 말 뜻이 충분히 전해지길 생각하며 너를 바라보는데, 너는 오히려 싸늘한 무표정이 되어버린다. 성장통이라고?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그저 성장통이라고- 하며 너의 사랑을 성장통으로 치부해버린 내가 밉다는 듯이.
너는 내 왼쪽 다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손가락들에 몸을 흠칫 떠는데, 접지른 발목을 콱 움켜쥔다.
" 아악!!!! "
비명이 커다란 방을 쩌렁쩌렁 울렸고 내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강렬한 고통에 눈 앞이 뿌얘진다. 너는 아파하고 있는 내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으로 나직히 속삭였다.
" 성장통이 아니면. "
" …. "
" 잠깐의 성장통이 아니면 어쩔래. "
" …. "
" 사랑이면, 어쩔거냐고.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리없는 두려움이 내 온몸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이제서야, 너가 왜 내게 말을 걸어왔는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니가, 부족한 것 뿐인 내게 말을 걸어왔는지 알 것 같았다. 너와 내 사이엔 단 하나의, 하지만 모든 것을 어우를만한 공통점이 있었다.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 사람이라는 것.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란 건 받아본 적 없고, 살아가는 내내 외로움과 고독을 꼬리에 단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이.
나는 암묵적으로 네 말에 동의했다. 성장통이 아닌, 사랑이라는 사실에.
그러나 사랑이어서는 안되는. 나는 너를 끝까지 끊어내야만 했다. 나 또한 너를 보면 흔들릴 것 같았기에 내 시큰거리는 왼쪽발목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며, 최대한 네 눈에 띄지 않으려 도망다녔다. 또 다시 너에게서 도망쳤다. 하지만, 너는 불현듯 다시 내 앞에 나타났고 내 눈보다 더 선명히 기억하는 왼쪽 발목이 욱씬 거리며 반응했다. 성장통이 아니었던, 깊이 상처남은 내 왼쪽 발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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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Crazy in love
下편에서 계속 됩니다. 찬열아저씨 번외는 언젠가..(무책임) 단편 시리즈라 암호닉은 받지 않지만 신청하시면 기억해두겠습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