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로망, 클리셰
W. 백빠
도경수; 완전한 사육
그그극. 그그극. 쇠사슬을 긁어대는 지저분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듣기만해도 미간이 찌푸려지는 소리. 가느다란 두 팔목이 쉴새없이 움직이며 작은 잭나이프로 제 발목에 걸어진 쇠사슬을 긁어냈다. 그그극. 그그극. 그녀가 쥔 잭나이프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굳어서 칼 끝에 붙어있던 피딱지가 가루처럼 부서져 바닥에 떨어진다. 순간 X가 이것을 쥐고 누군가의 치부를 찔렀을 모습이 머릿 속에 그려진다. 부서져내린 이 핏가루의 주인은 누구일까. 비릿한 혈내가 알싸히 코끝을 찌르고,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려온다. 잭나이프를 쥐고 쇠사슬을 열심히 긁어내던 그녀의 손이, 그렇게 떨려온다.
" …흐으…. "
결국 방 안을 울리던 지저분한 소리에 그녀의 흐느낌이 섞여져들어간다. 또 다시 붙잡힐 것을 알면서도, 그의 곁을 절대로 떠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녀는 발목에 묶여진 쇠사슬을 날카로운 잭나이프로 긁어내린다. 이제는 더이상 이렇게 살아갈 수 없어, 어떻게든 도망쳐야해, 이러다간 여기서 죽어버리고 말거야… 그녀의 눈물이 발등에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발목에 묶여진 쇠사슬엔 미세한 홈만이 파졌을 뿐, 끊어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오른쪽 복숭아뼈가 빨갛게 물들었다. 힘을 주고 잭나이프로 긁어내다보니 거칠고 딱딱한 쇠사슬이 자꾸 그녀의 복숭아뼈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발등 전체가 발갛게 물들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는다.
철컥.
그때 현관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제서야 배게 밑으로 허겁지겁 나이프를 숨기곤 눈물을 벅벅 닦은 채 침대에 눕는다. 마치, 아침부터 나는 그저 이렇게 누워있었어- 라는 걸 말해주고 싶은 듯. 나는 오늘 하루도 여느 때처럼 네 말에 순종했어, 말하는 듯 말이다. 침대에 눕자 그제서야 오른쪽 복숭아뼈에 시리디 시린 아픔이 느껴져왔다. 짓물이 나기 시작한다. 발목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방문 손잡이가 열리는 소리가 나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X가 들어왔다.
" 아가, 잘 있었어? "
" …. "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상냥한 말투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아 물었다. 잘 있었어?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짓물이 나는 것 같은 제 오른쪽 발목을 이불 안으로 숨긴다. 쇠사슬이 마찰거리는 소리가 난다.
" 오늘 왜 밥 안 먹었어? "
" …. "
당신이 내 발목에 채운 쇠사슬을 끊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녀는 그저 그 말을 머릿 속으로 생각만 한다. 그렇게 말했다간 그의 눈빛은 사나운 짐승처럼 변해버릴테니까 말이다. 그녀가 묶인 방엔 시계도, 티비도, 쇼파도, 옷장도, 그 어떤 가구도 없었다. 침대 하나만이 달랑 놓여있었으며 X가 가져다 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X는 언제나 새벽에 집을 나섰고, 아침, 점심 때에 맞춰 그의 아랫사람들이 밥상을 문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그럼 그녀는 문 앞에서 조용히 밥을 먹었다. 발에 걸린 쇠사슬은 딱, 그 문 앞에 놓인 밥상을 마주하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였다. 저녁에는 항상 X가 집에 들어오며 무언가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 왜 안먹었냐니까. "
" …. "
" 배가 안고팠어? "
" 그냥… 계속 피곤해서 잤어요. "
" 그랬구나. 아, 책들 새로 시켰어. 다 읽은 것 같길래. "
그녀가 이 곳에 처음 올 때부터 이렇게까지 자유가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쇠사슬이 적어도 거실까지는 나갈 수 있던 길이였다. 꽤 긴 쇠사슬에, 집 밖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집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길이가 이토록 짧아진 것은 그녀의 수차례 탈출시도 덕분이었다. 몇가지만 말하자면, 아침마다 X의 부하가 교대로 들어와 그녀에게 밥상을 내주었는데 긴 쇠슬을 이용해 밥을 차려주던 남자의 목을 졸라서 기절시키곤 휴대폰을 찾아 112에 신고한 적도 있었고 부하들이 남자라는 걸 이용해 몸을 대주곤 탈출을 도움 받은 적도 있었으며 현관문 앞에서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번번히 실패였다. X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발악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믿었던 나라마저도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이 현실에 그녀가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X가 책을 새로 시켰다는 말에 기뻐할 뻔 했으니까.
" …이상하네, 오늘. 기분 안좋은 일 있었어? "
" 아니요. "
" 어디 아파? "
" 안 아파요. "
더불어 X, 당신에게도. 그녀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끔찍했다. 절대로 용서되고 받아들여지면 안되는 현실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어쩌면 이 순수한 복종의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또 다시 도망을 시도한 것이었다. 일종의 자가계몽이었다. 일깨워야만하는 사실들을 다시 일깨우기위해. 때 마침 방 문 언저리에 떨어져있었던 잭나이프는 그녀의 의지에 기름을 부어버렸고.
" 읽을 책이 없어서 심심했어? "
" 아니에요. 평소랑 똑같아요, 저. "
" …아닌 것 같은데. 아, 나 오늘 너가 좋아하는 거 사왔어. "
X는 오늘 그녀를 위해 초밥을 사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부엌 테이블에 둔 초밥을 가져오려 침대에서 일어선 그때 X는 하얀 이불 사이 빨간 흔적 하나를 발견한다.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놓인 자리였다. 이제보니 그녀의 발등이 바알갛게 부어올라있다. X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오른쪽 발목을 덥석 잡아 들어올리니 철컹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동시에 그녀의 작은 신음이 들려온다. 으읏-. 비릿한 피 냄새가 코 끝을 배회한다. 자세히보니 그녀의 발목을 감싸고 있는 쇠사슬엔 작은 홈이 파져있었다. 그는 문득 몇일 전 잃어버렸던 잭나이프를 생각해낸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에게 얼마 안가 들켜버렸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놀라지도, 절망하지도 않은 얼굴로 그저 X를 바라볼 뿐이다.
" 도망치려고 했구나, 아가. "
" …이제 나가고 싶어요. "
" 왜 그래, 심심해서 그래? "
" …아니요, 아니에요. "
" 책 더 시켰다고 했잖아. 티비라도 넣어줄까? "
" 지쳤어요… 그만하고 싶어. 날 놔줘요…. "
" 아니면 밥이 맛 없어? 또 뭐가 문젠데, 응? "
" 날 이제 그만 내보내줘…. "
X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도망치려 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잠식시킨다. 마치 데자뷰처럼 지금의 현실 위로 덮어씌워지는 옛날의 기억들. 이럴때마다 모든 것이 돌아버릴 것 같다.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시도하고, 실패하고, 도망치고, 붙잡히는 그 무의미함.
" 아가, 잭나이프는 어디에 숨겼어? "
" …. "
" 이리줘, 위험해. "
" 그런거 없어요. "
" 얼른. 나 화내기전에. "
그녀가 묵묵부답으로 X를 바라본다. 나는 네게서 도망칠 수 없다. 나는 네게서 도망칠 수 없다. 몇 번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 X는 화를 참고 있는건지, 애써 덤덤하고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잭나이프를 숨긴 베개 밑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후면 또 다시 걸릴거면서. 그는 그녀의 오른쪽 복숭아뼈를 살살 쓰다듬다가 점점 그 발목을 쥔 손길에 힘을 준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결국 X의 눈빛은 변해버린다.
그녀의 발목을 끊어낼 듯 쥐다 아픔에 자지러지는 그녀의 머릿채를 낚아챈다. 손아귀에 가득 쥔 그녀의 머릿칼. 그와중에도 그의 짐승같은 눈빛에선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이게 내가 너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겠지, 아마. 날 가둬놓고 묶어두는 주제에 상처받은 얼굴을 한 너. 그는 그녀의 봉긋한 가슴 둔덕을 강하게 쥐어짜듯 잡았다.
" 아, 아윽!! "
" 씨발,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줘. 어..? "
" 아파…아으! 아프다구! "
" 대답해. 뭘 더 어떻게 해줘야되냐고, 씨발...!!! "
X는 괴로워했다. 우악스런 손길로 그녀의 속옷을 벗겨내고, 은밀한 곳을 괴롭히고, 거칠게 범해내면서도 그 끝엔 언제나 괴로움이 남았다. 어쩔 땐 그녀의 위에서, 그녀를 껴안고 눈물까지 흘려대는 날이 있었다.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같이, 엄마의 젖을 그리워하는 아이같이 그녀의 품을 원하고, 찾아들고, 의지하는. 그리고 항상 일방적인 섹스가 끝난 후엔 그는 중얼거렸다. 사랑해, 사랑해… 날 떠나지마, 사랑해…. 정신병자 같기도 했다. 다정했다가도 그녀의 몸을 게걸스레 범하고 사랑한다고 중얼대는. 그러나 그것이 상처때문임을 알기에, 그녀는 도저히 그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오늘도 한없이 강제적이었던 관계 이후, 그는 그녀를 껴안고 말했다. 제발 내 곁을 떠나지마, 내 옆에 있어, 날 사랑해줘…. 결국 배게 밑에 깔린 잭나이프를 발견한 그는 조용히 챙겨가버렸고 나는 잠결에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 …아가, 나 다녀올게. 오늘은 얌전히 있을거지, 응? "
조금 깨어난 신경. 오늘따라 더 발목이 무겁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체도 더 자유롭지 못한 느낌. 아니나다를까 그녀의 손목엔 침대와 연결된 투박한 수갑이 채워져있었고 발목 두 쪽 모두 쇠사슬이 걸려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니 내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벌이야. 어제 잘못했잖아. "
" …. "
" 저녁에 봐. 사랑해. "
그녀는 한번도 그의 사랑해, 란 말에 대답을 해 본적이 없었다. 일방적인 사랑 고백, 그러나 X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가 나간 방에는 더욱 더 고요한 침묵만이 남는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고 단단히 묶여진 듯한 몸에, 그녀의 머릿 속엔 저와 X가 처음 만나던 때가 흐리멍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뒤척인다. 그녀의 두 팔과 다리를 죄여오는 쇠붙이들보다 더 무거운 과거의 편린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 …으우… 으… "
두 팔이 등 뒤로 돌려져 밧줄로 묶여있다. 다리 또한 마찬가지. 입에는 둥근 재갈이 물려있고 눈에는 안대를 끼워놔 아주 작은 빛조차도 감지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 귀에는 헤드셋이 끼워져있고 다섯곡의 노래가 연속으로 반복재생 중이다. 귀에서 다섯곡의 노래가 끝나고 다시 첫번째 노래가 흘러나올 때까지 몸부림도 쳐보고 있는 힘껏 소리도 질러보고 울어도 보고 화도 내보고 밧줄을 있는 힘껏 당겨도 보고 두 다리를 허공에 쳐올리기도 하고 수많은 발악을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제 풀에 지쳐 쌕쌕 숨을 쉬며 내가 눈을 뜨기 전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내본다.
나는 그 날도 아르바이트를 가고 있었다. 건전한 아르바이트는 아니었다. 고급 술집에 나가는 일이었는데, 시간당 만이천원을 받고 일했다. 조금 짧은 옷에 수수한 화장, 손님들의 옆에 가서 술도 따라주고 대화도 해주는, 뭐 그런 알바였다. 허벅지 안 쪽을 지분대도 딱히 화낼 수 없는 그런. 그래도 몸을 대주는 건 아니니까- 로 내 자신을 애써 다독일 즈음, 나는 X를 만나게 되었다. 여섯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었는데 각자 여자를 한명씩 불렀고 어쩌다보니 내가 X의 옆에 앉게 되었다. 너는 나에게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첫 만남의 기억에선 너는 내게 굉장히 냉담했었다.
" 술도 많이 안 마시나봐요, 이렇게 노는거 싫어해요? "
" …. "
" …대답도 하기 귀찮은가보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내가 말하는 거 듣기만 해요. "
" …. "
" 듣다가 흥미로운 주제 있으면 입 열어도 되요. 알겠죠? "
서비스의 일종이었겠지만, 나는 그날따라 더 말이 많았다. 아마 그날이 부모님의 기일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말이 없는 X의 옆에서 이것저것 말하다가 어쩌다보니 내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는 듣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었고 난 평소 내 속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아무도 없었기에 맘 편히 그의 옆에서 혼자 주절댔던 것이다. 내가 가난했던 것부터, 아빠와 엄마가 8년 전 동반 자살을 한 것,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 이유, 등등… 그렇게 주절대다 문득 X의 시선이 나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아, 너무 내 얘기만 했나. 미안해요, 다른 얘기 할까요? 음… 아! 어제 제가, "
" 계속 해. "
" …네? "
" 니 이야기. "
" 어…, 지루하지 않아요? "
" 아니, 전혀. "
그는 내 두서없는 이야기에 흥미를 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기에 그랬던 것 아닐까 싶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얘기를 듣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그는 간간히 나를 찾아왔다. 내게 무엇을 느꼈던 걸까. 그는 내게 점점 의지하기 시작했고 찾아오는 날이 더 많아졌다. 내 몸을 탐할 때도 있었지만, 그가 섹스를 하는 목적은 육체적 욕망이 아닌 정신적 치유을 위해서였다. 애정결핍이 심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느껴졌다.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그에겐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었다. 점차 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는 알바를 그만 두라는 강요까지 받았고, 더 후에는 같이 살자는 강요까지 받았다. X는 나를 소유하려들었고 끈질기게 집착해왔다. 무서워진 나는 말없이 다른 곳으로 아르바이트를 옮겼다.
그러나 그 다음 날 X는 태연하게 날 찾아왔다.
" …어떻게 여길…. "
" 피하면 피해질 줄 알았어? "
" 무서워요, 그쪽. 다신 찾아오지 마요. "
" 그런 말 하지마.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해. "
" …그쪽은 저한테 손님,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에요. "
" …. "
상처받은 눈의 무표정. 그는 말 없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퇴근 하는 길, 건장한 남자 세명이 날 붙들곤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난 이렇게 어딘지 모를 곳에 감금 되어있었다. 무서워졌다. 귓가에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마저도 내 솜털 하나하나를 곤두서게 만들었다.
같은 노래를 수백번은 들었을까, 잠이 수십번은 들었다 깼을까, 갑자기 헤드셋을 벗겨내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귀가 허전했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이 눌린 것을 보니 누가 걸터앉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익숙한 향수냄새, 아마 그것은 X일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아무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내 귀에 조용한 목소리가 닿는다.
" 안녕. "
" …. "
" 도망도 안가고 얌전히 잘 있었네. 잘했어. "
미친새끼. 이렇게 온 몸을 꽁꽁 묶어놓고, 눈과 귀, 입까지 모두 막아놓고….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 나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싶었지만 참아보았다. 그는 내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으며 계속 속삭였다.
" 입에 물린 거 불편하지? "
" …. "
" 풀어줄까? "
안 그래도 몇 시간동안 계속 재갈에 의해 벌려져있던 턱이 얼얼했다. 일단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자유를 찾아내야했던 나라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대신, 내가 말하라고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면 안돼. 알겠지? …소름이 돋는다.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천히 뒤에 있는 스냅을 풀어 재갈을 벗겨주는 그였다. 벌려져있던 턱이 닫히니 하관이 시려왔다. 그가 내 턱 주변을 무언가로 닦는다. 아마 재갈 때문에 차마 삼키지 못하고 흘려낸 내 타액일 것이다.
" 아기같네. 앞으로 아가라고 불러야겠어. "
" …. "
" 말 잘 듣는다고 약속하면 안대도 풀어줄게. 아가, 말 잘 들을거야? "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천천히 내 안개를 벗겨냈다. 순식간에 파고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조심 눈을 뜨자 시야엔 X의 실루엣이 보였고 그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져갔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 눈에 생생히 들어찰 때 쯤, 나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뇌를 거치지도 않은 말들을 마구 뱉어냈다.
" 사, 살려주세요, 이거 풀어주세요, 이거 범죄에요, 이러면 안되잖아요…! "
" 쉿. 말하라고 할 때까지 말하면 안된다니까. "
" 이거 풀어요..!!! 지금 이게 뭐하는건데..!! 당신 신고할거야, 당신 범죄라고 이거!! "
" 아가, 말 잘 듣는다고 약속했잖아. 거짓말 한거야? "
" 미친, 이거 풀으라고!!!! 풀어, 당장!!!!! "
무작정 악을 쓰자 X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턱, 내 목을 잡았다. 그러더니 힘을 가득 주고는 숨통을 죄이기 시작한다. 나는 발악을 하다가도 목을 조르는 바람에 컥컥대며 말문이 막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정말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고 눈 앞이 새하얘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즈음 그는 손을 놔주었다. 덕분에 그는 조용해진 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
" 쉿. 말 잘들어야 착한 아가지. 응? "
" …. "
" 조용하니까 얼마나 예뻐. "
기진맥진한 내 얼굴 이곳 저곳, 그는 키스를 남긴다. 그는 점차 내 위로 올라온다. 등 뒤로 팔을 묶어놓은 바람에 손목이 등에 눌려 아파왔다. 그는 내 사타구니 살짝 아래쯤 올라타 끊임없이 내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무언가를 강렬히 갈망하는 입맞춤. 그는 아직도 시야가 몽롱한 내 눈가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 옆에 있어야해, 너는… 내게서 도망치지마, 날 떠나면 안돼, 사랑해, 사랑해…
그녀는 조용히 눈을 떴다. 아직도 생생한 첫 날의 기억. 그가 자신에게 속삭이던 그 말들을 그녀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X를 인정하기 시작할 즈음 그녀의 신체는 자유로워졌다. 오른쪽 발목에 걸린 길고 긴 쇠사슬 이외에는 무엇도 없었다. 거실에 나가 티비도 볼 수 있었고, 창문 밖도 볼 수 있었고 밥도 해먹을 수 있었다. 오늘이 몇월 몇일인지, 지금이 몇시인지도 알 수 있었고. 그러나 그녀의 수많은 탈출 시도는 그녀의 쇠사슬의 길이는 짧아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벌이란 걸 받을 때면 후회하게 된다. 도망을 시도했단 걸. 오늘 하루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보내야했다. 밥도 먹지 못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화장실도 못가고 그저 침대에 누워 잠과 생각만 해야하는 하루. 그가 침대에서 아예 움직일 수 없는 벌을 줄 때면 난 그냥 얌전히 있을걸, 말 잘 들을걸… 하고 후회한다. 이렇게 누워있다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고, 무료함에 참을 수 없어지고, 사람이 그리워지고, 사랑이 그리워지고, 결국엔 X가 보고싶어진다. 혹시 나는 사육 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잠에 들고 깨어나고, 잡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에 들고, 억지로 시간을 일분 일분 보내본다. 외롭다. 무섭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맘 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다신 도망갈 생각 하지 않을래, 얌전히 말 잘 들을래, 그냥 순종하며 살래… 일주일 뒤면 또 잊고 다시 탈출할 방법을 강구하겠지만 그녀는 지금 너무 외로웠다. X가 보고싶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드디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얼마 지나지않아 방문 손잡이가 돌려진다. X, 아주 오래고 오랜 기다림 끝 그가 드디어 돌아왔다. 그녀는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눈물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 아가, 잘 있었어? "
" …흐으, 흐…. "
" 응, 우리 아가 왜 울어. 무서웠어? "
그가 다정한 말투로 그녀의 옆에 가 걸터앉는다. 울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는다. X, 보고싶었어, 그리웠어… 다신 도망치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거 제발 풀어줘… 책이라도 읽게 해줘, 날 이렇게 내버려두지마.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녀는 침대에 연결되어있는 수갑을 가르키며 말할 뿐이었다.
" 풀어줘요, 이거, 풀어줘요… 흐으, 이런거 하지마아… "
" 그러게, 잘못 안했으면 벌도 안받았잖아. "
" 이런거, 흐으, 이런거 너무 싫어, 싫어요, 풀어줘요…흐끅, 흐으… "
" 앞으로 나쁜 짓 안할거야? 약속해. "
" 응, 응, 안해, 안할거야, 안해요, 풀어줘, 얼른. "
그가 살풋 웃으며 자켓 안쪽에서 열쇠를 꺼내든다. 수갑을 풀고 왼쪽 발목까지 풀어주자 그녀가 X를 와락 안는다. 아마 침대에 하루종일 혼자 누워있으면서 꽤 많은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꼈던 것이 분명했다. 여기 버려지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부터 다신 X가 이 곳을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까지. 물론 그에겐 그녀를 버릴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저 그는 가끔 그녀에게 벌을 주면 자신을 애타게 갈구하는 그녀가 좋았다. 나처럼 너도 나를 갈망하는 것 같아서.
" 응, 오늘 하루종일 힘들었어? "
" 책도 못 읽, 흐… 흐끅, 못 읽고, 밥도 못 먹고… "
" 저녁 사왔어. 니가 좋아하는거. "
어제 니가 못먹었던 초밥. 이제서야 안도감을 느껴가는 그녀는 점차 울음을 그쳐간다. X가 돌아오자 두 손이 풀리고 왼쪽 발목이 자유로워지자 그녀는 뒤늦게 생각한다. 나까지도 미쳐가고 있는게 분명해. 그녀는 그의 옆에서 끊임없이 확인받고 있었다. 끝내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X는 하얀색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왔고 침대 옆에 잠깐 둔 채 그녀의 눈물 자국을 닦아주다 발간 눈가를 쓰다듬는다.
" 아가, 또 나쁜짓 하면 그땐 나 화 많이 낼거야. "
" …응. "
" 너는 영원히 내 옆에 있어야 돼. "
" …. "
" 넌 내 전부야, 너는… 너는 내 옆을 떠나선 안돼. 어디로 가선 안돼, 날 벗어나면 안돼. "
그녀는 그에게 친구였다. 연인이었고, 엄마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의 옆에 한자리에서 꿋꿋히 있어주는 사람은 그녀, 단 한사람뿐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는 X의 집이었고 X의 세상이었고 말했듯 X의 전부였다. 그가 그녀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도피할 수 있는 쉼터로. 너는 내 곁을 영원히 떠나서는 안돼… 그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녀는 울고 싶어졌다. 그녀는 사랑해, 란 말에 한번도 대답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그녀는 그 말에 대답을 할까, 하고 생각한다. 나도 사랑인걸까? 나도? 내가 그를? 헷갈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X가 그녀를 완전하게 사육해내고 만 것이다. 완전한, 사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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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NUMB
맞아요, 저 변태라니까요?ㅎ 글 안에 경수란 이름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왜냐면 경수한테 미안하니까.. 미안해.. 이런 나라서..
암호닉은 따로 받고 있진 않지만 앞에 달아주시면 기억은 해두겠습니다. 나름 기억력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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