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11
# 충동적 대답
" 어, 지난번에! 안녕하세요! "
" 아, 안녕하세요. "
정국의 인사에 여주가 퍽 어색하게 대꾸했다. 하하, 이상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도 그럴게 지금 여주가 있는 곳은 생전 처음 와보는 댄스동아리 연습실이었다. 아싸인 여주가 학교를 다니는 3년동안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동방건물의 한 가운데.
후문에 위치한 동방건물은 꽤 큰 편이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있는데도 찾아오느라 애를 먹었다. 가봤자 학과건물, 인문학관, 중도, 기숙사만 돌아다녔던 여주였으니까.
평생 올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동방건물에 오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닌 과제때문이었다.
오티주임에도, 짝꿍이 정해지자마자 받은 성사철의 첫 과제.
〈상대의 일상을 관찰하기>
겁주던 태형의 말과는 달리 의외로 무난한 과제였다.
사실 호석과 함께 듣는다곤 해도 커리큘럼에서 보이던 노골적인 어휘들과 과제가 부담이었지만, 무시무시한 풍문과 다르게 수업은 꽤나 부드럽고 학구적인 편에 속했다.
" 내 수업에 대한 소문을 몇 가지 들었어요.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아마 더 잘알겠죠. 그걸 기대한 학생도 있을테고.
그래서 처음부터 말해두자면, 내 수업은 상대를 알아가는 것. 그 과정 속에서 발현되는 사랑과 성에 대해 부끄럼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목표입니다. "
수업에 입성한 학생들의 묘하게 붕 뜬 분위기를, 교수님은 단정한 몇마디로 단숨에 휘어잡았다.
묘한 강단과 인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 이 수업을 듣고 나면, 여러분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 사랑의 모습이 에로스일 수도, 플라토닉일 수도 있지만요. "
제 커리큘럼에 대해 자신있게 말하던 교수님은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여주는 제 옆에서 수업에 집중한 호석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사랑을 논하는 수업에 사심없는 친구와 듣는다는 건 정말이지 다행이었으니까.
딱히 정해진 형식도, 제한도 없는 과제는 정말 재량껏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여주는 학점관리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호석은 학점 4점대 이하로 떨어지는 법이 없던 모범생이었기에, 민폐를 끼치치 않으려면 여주도 열심히 해야했다.
그래서 호석에게 동아리 연습실까지 오겠다고 했던 여주였다. 워낙 이곳저곳 불리는 곳이 많은 호석에게 따로 시간을 내달라고 할 수가 없었으니까.
일생이 친구라곤 윤기 호석 뿐인 저에 비해, 호석에게는 친구가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대학교 들어와서는 더더욱. 그 많은 친구들 중 하나일 뿐인 저가 과제를 핑계로 시간을 빼앗기에는 스스로 거부감이 들었다.
여주에겐 호석이 아주 특별한 존재였지만, 호석에게 있어 제 존재는 그 정도의 무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호석의 메시지를 보고 떠듬떠듬 들어선 댄스동아리의 연습실은 손때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이곳저곳에 놓여져있는 짐들과 쌓여있는 옷가지들이 동아리 사람들이 이 곳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란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름 인근 축제에 초청될 정도로 이름을 날리는 동아리라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정말이었는지 연습실 한 켠에 트로피만 모아져있는 장식장도 있었다.
이렇게 잠시 둘러 보는 것만으로도 치열한 흔적이 느껴져서, 여주는 공연시즌만 되면 예민보스가 되는 호석이 이해가 갔다.
호석은 잠시 들를 곳이 있어 먼저 가있으란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없었다. 천천히 오라고 답하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혼자 호석을 기다리는 건 꽤나 고역인 일이었다.
누가 들어올까 노심초사하며 쭈뼛거리고 있던 와중에 들어온 정국은 그야말로 구세주같은 존재였다. 사실 겨우 구면인 정국이라곤 해도, 지난번의 그 진상이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던 여주였으니까.
여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짐을 정리하고 있는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가방을 구석에 던지곤 여주를 향해 활짝 웃었다.
" 지난번에 제대로 인사 못드렸죠, 영화과 20학번 전정국입니다! "
" ...영화과요? "
" 넵! 아, 맞다. 호석이형한테 들었어요 선배님이시라고! "
정말이지 금시초문이었다. 여주는 학기초를 가만히 떠올려봤지만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하긴, 신환회가 있어도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말을 섞어보는 같은 학과 사람이었다. 여주는 반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 후배님이셨구나. 제가 학과생활을 잘 안해서 잘 몰라요. "
" 아이, 저두요. 저도 학과생활 안하구 동아리만 해요. 그리고 선배 말 편하게 놓으세요, 저보다 2학년이나 많으신데. "
" 그래도. "
"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제가. "
" ...그, 그럴까 그럼. "
" 넵, 선배! "
정국은 헤헤 웃으며 여주의 앞에 풀썩 앉았다. 앉으며 부스스한 머리가 폭 덮이는 게, 꼭 삽살개같았다.
구면일 뿐인 사인데 몇개월은 본 것처럼 편한 기분이 들었다.
"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호석이 형 보러 오신 거에요? "
" 응. 과제때문에. "
" 아! 들었어요. 그거 맞죠 성사철? "
" 응응. "
" 대박이다. 결국은 성공했구나. "
응? 제 대답에 작게 혼잣말하는 정국에게 여주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정국은 잠깐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아, 아녜요. 다른 얘기에요! 퍽 어색하게 대답을 흐렸다.
그에 더 어리둥절해진 표정의 여주를 잠깐 보던 정국은 눈동자를 껌뻑 뜨더니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그 날 잘 들어가셨어요? "
" 응? "
" 호석이 형 완전 뻗었던 날이요. 제가 맡기고도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되게 걱정했거든요. "
" 그냥 거의 질질 끌고 갔지 뭐. 근데 호석이 많이 취하면 원래 그래? "
호석이 인사불성이 되었던 그 날을 떠올리며 여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친하다곤 해도 제가 없는 곳에서, 그것도 술자리에서 호석이 어떤 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날은... 여주는 불현듯 떠오른 호석의 풀린 눈을 머릿 속에서 지우려 도리질을 했다.
" 아뇨, 호석이 형이 원래 술 취해도 잘 버티는데. 그 날이 워낙... 지난번에 기억나시죠. 그 새끼. 김상철. "
그 진상자식 얘기구나.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은 한숨을 폭 쉬었다.
" 그 인간이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은데 지난번에 동아리회장 입후보했다가 광탈했거든요? 동아리사람들이 전부 호석이형을 뽑아가지고. 그 때부터 호석이형 엄청 갈궈요. 술자리는 더 그렇고.
맨날 뭐만 있으면 회장 들먹이면서 돈 내라고 하고. 술자리도 중간에 가는 걸 죽어도 못보고. 진짜 개진상이 따로 없는데,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아무도 뭐라고 말을 못해요.
그리고 사실 호석이형이 그럴 때마다 싫은 티 안내고 턱턱 내니까 이젠 다들 신경도 안써요. 그지새끼들도 아니고. "
정국이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해묵은 감정인 것 같았다. 직접 보지 않았어도 눈에 선연하게 그려지는 그림에 여주는 인상을 구겼다.
어딜 가나 그런 인간들이 꼭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호석을 시기질투해서 밉살맞게 구는 인간들.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누군가가 호석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면 그 무리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번 잘해주다가 한 번 삐끗하면 그걸 가지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표정이 어땠다느니, 돈도 많은 애가 째째하다느니. 친절과 호의를 어디에 맡겨놓은 듯 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는 뒷담화는 항상 건너건너 호석에게까지 닿았고, 그에 상처받는 건 호석의 몫이었다. 그마저도 티 안내고 더 잘해주려 노력하는 호석이었지만.
여주는 괜히 분에 차서 코를 찡그렸다. 김상철, 그 진상자식이 제 눈앞에 나타나면 뺨이라도 날리고 싶은 감정이 일었다.
" 어쨌튼 평소엔 호석이형이 알아서 잘 조절하는데 요즘 들어 그 새끼 지랄이 심해져가지고 제가 좀 전담마크하고 있어요. "
" 고마워. "
" 아이, 고맙긴요. 호석이형이 저한테 해준 게 얼만데. "
" 그래도 호석이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 있어서 다행이야. "
" 저도요. "
" 응? "
" 저 말고도 호석이형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사람 있어서 다행이에요. "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니, 정국은 턱 끝으로 가리키며 선배요, 대답했다.
저를 바라보는 정국의 눈동자가 한없이 진심으로 보여서 여주는 가슴이 크게 일렁였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해본 적이 있었던가. 고등학교 때도 호석의 친구들은 그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제가 느끼고 있는 그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윤기와 이야기할 때는 애초에 호석이 대화주제로 떠올랐던 적이 별로 없었고.
그런데 이렇게 진지하게 호석을 생각해주어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겨우 구면인 아이와.
고맙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간단한 감정은 아니었기에 여주는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빤히 보던 정국이 말했다.
" 알 것도 같네요. 호석이 형이 왜 그렇게, "
거기까지 말하던 정국은 입을 꾹 다물고, 어리둥절한 얼굴의 여주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되묻는 여주에게 정국은 피식 웃곤 선배 머리에 뭐 묻었어요. 말을 돌리며 머리에 손을 뻗었다.
" 뭐하냐 니네. "
정국의 손 끝이 여주의 머리에 닿을 무렵, 문이 열리고 호석이 들어왔다. 다급하게 온 듯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 호석이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시 돋친 듯한 호석의 낮은 목소리에 정국은 어, 이건, 말을 더듬으며 뻗었던 손을 순식간에 거뒀다. 한껏 살벌해진 분위기였지만 여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 호석과 시선을 맞췄다.
호석의 시선이 느리게 여주에게 닿았다.
" 와 땀 봐. 뛰어왔어? "
" ...응. "
" 천천히 오래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정호석. "
" 네가 기다리고 있잖아. "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호석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여주는 그 위를 덮고 있는 앞머리를 올리곤 미니선풍기를 틀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호석은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진짜, 미련해가지고. 불퉁하게 말하는 여주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오자 파도처럼 덮쳐왔던 불쾌함이 가시는 것 같아 호석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 많이 안기다렸어? "
" 어. 정국이가 있어가지고 괜찮았어. "
" ...정국이? "
" 응. 정국이가 같이 놀아줬거든. "
" ... "
어느샌가 성씨도 떼어진 채 편하게 불리는 정국의 이름에 호석의 얼굴이 다시 험악해졌다. 여주 등 뒤에서,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런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여주는 둘의 속도 모르고 그저 이마의 땀을 식히기에 혈안이었다. 위잉위잉 돌아가는 선풍기의 바람소리만 애꿎게 적막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 형, 어,얼른 연습하시죠! 저 연습 끝나고 급하게 갈 데 있어요! "
적막을 깬 건 정국이었다. 정국은 호석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연습을 재촉했다.
어딘가 조급해보이는 정국의 행동에 여주는 의아했지만, 본격적으로 호석을 관찰해야했으므로 선풍기를 넣어두고 노트를 꺼내들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국을 보는 호석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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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늦여름의 저녁은 고즈넉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이곳 저곳 베어있었지만 흘러오는 미지근한 바람은 적당히 더위를 가시게 만들어주었다.
이젠 열대야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밤은 없겠지 싶어서 여주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해에 시선을 걸어두었다. 제 걸음에 맞춰 들리는 발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들렸다.
더할 나위없이 로맨틱한 늦여름의 풍경이었다.
어째서인지 학교를 벗어나 큰 길까지 걷는 내내 호석은 말이 없었다.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잠깐 보거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듣기만 했던 호석의 춤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라서, 한 순간도 눈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열렬히 춤을 추는 모습이 생경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같았다.
항상 햇살같이 밝고 따스한 호석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내내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중간중간 실수를 할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표정이 구겨지는 모습에도, 이상하리만치.
정국의 말에 따르면 두시간을 쉼없이 연습했다던데 여주의 체감상 삼십분도 안되는 시간같았다. 뭐에 홀린 듯 빠져서 봤으니까.
결국 관찰하며 이것 저것 노트에 적어야 했지만 연습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적지 못한 여주였다. 아니, 한 문장만 빼고.
'춤추는 정호석은 멋있다'
뒤의 약속을 취소했다던 호석은 여주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다. 지금껏 기숙사에 살던 여주는 학교에서 호석을 만나도 금방 헤어져야했는데, 이젠 같은 쉐어하우스에 살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여주는 자연스럽게 호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뭔가 어색한 기분이었다. 중학교때까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윤기와 함께 하교하는 길은 어땠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별다를 게 없었는데, 호석은 조금 달랐다.
함께 가도 몇 걸음은 앞서 걷던 윤기에 반해 호석은 느린 제 걸음을 맞춰 함께 걷고 있었다. 그래서 호석의 옆모습이 제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던 모습의 여파때문인가, 여주는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그 때 호석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 정국이랑 무슨 얘기했어? "
여주가 문득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호석은 걸음을 멈춘 채였다.
처음 동아리방을 들어서자마자 필요이상으로 가까웠던 정국과 여주가 연습 내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호석이었다.
그 때문에 더욱 예민해져 작은 실수를 반복했었고. 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주는 그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 너 얘기. "
여주가 아주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여주는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호석의 이야기를 하던 정국과는 오래 본 사이처럼 편했다.
그랬기에 호석의 질문은 이상했다. 무슨 이야기랄 것도 없이 전부 호석의 이야기였으니까.
호석은 예상치 못한 답인 듯 어?, 되물었다.
" 걔랑 할 얘기가 뭐가 있어. 공통주제가 너밖에 없는데. "
" ... "
" 근데 걔 너 되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 "
" ... "
" 정호석 질투나네~남자한테도 인기 많고. "
여주는 장난스레 호석을 쳤다. 아까는 영문 모르게 냉하더니, 급속도로 느슨해진 호석이 작게 웃었다. 평소같아진 호석의 얼굴에 여주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방금까지도 연습실에서 생경하던 호석의 눈빛이 떠올라서 이상하게 어색했는데, 역시 기분탓인 것 같았다.
" 너 동아리에서 어땠는지 다 들었어. "
" ... "
" 지난번에 너 데리러 갔을 때 만났던 진상새ㄲ, 아니, 여튼 너네 동아리 사람 얘기도. "
" 상철이형? "
" 넌 그 사람을 형취급해줘? 아, 진짜. "
호석의 입에서 '형'소리를 들으니 여주는 갑자기 열이 뻗치는 기분이었다. 그 날 봤던 상철의 행동은 도저히 형이라곤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여주는 가까이 걸어와 호석의 한쪽 어깨를 잡고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호석아. 그런 인간한텐 친절하게 굴지 좀 마. "
" 응? "
" 너도 알잖아. 잘해주면 더 기어오르는 거. "
" ... "
"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좋은 사람일 필요 없어. 굳이 안그래도 넌 좋은 사람이니까. "
호석은 가만히 여주를 바라봤다. 티끌없이 맑은 눈동자 속에 자신이 담겨있었다. 마지막 말에 힘을 준 여주에게서 확신이 느껴져서 호석은 공연히 가슴께가 답답했다.
좋은 사람. 그건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호석은 어깨에 올려져 있는 여주의 손을 천천히 떨어뜨렸다. 느리게 떨어지는 제 손을 따라가던 여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호석으로 향했다.
" 고마워. 내가 알아서 할게. "
여주는 허전해진 손을 말아쥐며 입을 내밀었다.
" 뭐 맨날 알아서 한대. "
불만스러운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항상 이런 식었다. 심연에 다가서는 것 같으면 다시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는.
귀가 먹먹해질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해도, 매번 호석은 따스하게 웃으면서 저를 밀어내곤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것처럼.
" 삐졌어? "
불퉁한 여주의 말에 호석은 다정하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여주는 그 시선을 피했다.
" 내가 왜 삐져. 안삐졌어. "
" 거짓말. "
" 하. "
" 진짜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서 그래."
" ... "
" 네가 신경 쓸 사람 아냐. "
" 그래. 너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나도 알아서 할게~!! "
몇 번 겪었던 일이었지만 여주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호석과의 거리가 느껴지는 것 같았으니까.
항상 따스한 모습으로 제 곁에 있으면서도, 이럴 때는 꼭 호석이 요원했다.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처럼.
괜히 울컥해서 여주는 한 번 호석을 노려보곤 앞서 걸었다. 여주야, 호석이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지만, 얼굴만 보면 또 풀릴 것 같아서 여주는 뒤돌아보지않았다.
그 때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호석의 벨소리였다. 쫓아오던 호석의 걸음이 멈췄지만, 여주는 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 이름이 들리기 전까진.
" 네, 상철이형. "
여주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호석을 쳐다봤다. 호석이 곤란한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 회식이요? 갑자기. 동아리 애들 다 있어요? "
여주는 빠른 걸음으로 호석에게 다가와 성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상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 애들이 다 너 보고 싶대잖아~! 너가 없으면 술맛이 나겠냐 "
" 형. 저 오늘 안될 것 같은데. "
" 야, 동아리 회장이라는 게 애들 있는데 안오면 돼? "
" ... "
" 너 온다고 하니까 1학년도 온대잖아. 1학년 애들은 동아리 회장이 챙겨야지 안 그냐? "
" ...어딘데요. "
어디냐고 묻는 대답에 여주는 순식간에 호석의 손에서 전화기를 채갔다. 호석이 놀라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저기요, 저 호석이랑 약속 있는 사람인데요. "
" 에? "
" 오늘 호석이 못가요. 그렇게 아세요. "
" 누구신데요? "
" 그걸 알아서 뭐하시게요. "
" 목소리가, 지난번에 그 분인 거 같은데? "
" ... "
" 쉐하친구분 맞죠? 왜요, 정호석이 가기 싫으니까 대신 좀 말해달래요? "
" 뭐요? "
" 아니, 여기 호석이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있는데 친구가 방해하면 쓰나? "
전화기 건너에서 킬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야, 줘. 호석이 제 손을 잡았지만 여주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말 호석이 오길 원해서가 아니란 게 느껴져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호석이 연애사업 방해하실 거 아니면 얼른 바꿔요 친구분~ "
조롱하듯 대꾸하는 상철의 말에 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 그럼 더더욱 못보내요. "
" 뭐라구요? "
그리곤,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뱉고 대답했다.
" 저, 정호석 여자친구거든요. "
*****
일주일만에 왔는데 분량이...짧아요...크흡....
하지만 금방 또 돌아오겠습니다 이번엔 일주일을 넘기지 않을 거에욥
다음에 올 땐 더 길게 오겠숩니다,,,다음 회차엔 윤기 나오니까,,,어남윤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시길...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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