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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최연준 차례 ::

+많은 분들에게 혼동을 드려 덧붙입니다. 본편과 완전히 다른 글입니다.

저는 글 초반에는 미친연애를 듣고 끝에는 행복하지마를 들었습니다 :)

기울어진 글씨는 '스페인어' 입니다.

1.

최연준은 흐물거리는 젤라또만 스푼으로 푹푹 찔러댔다. 이탈리아도 아닌 스페인 주제에 젤라또는 드럽게 많이 팔았다. 최연준은 그 좋은 먹성으로도 젤라또를 한 스푼도 떠 올리지 않았다. 레귤러 사이즈에 담긴 은근히 큰 젤라또는 요구르트 맛이었다. 라벨을 보아하니 최연준이 사는 빌라 근처에서 산 듯싶었다. 최연준이 젤라또가 완전히 녹아내려서 더 이상 찍을 것도 없을 때가 돼서야 스푼을 내려놓았다. 녹아버린 요구르트 맛 젤라또에 비치는 아주 흐릿한 모습에 컵을 잡고 빙빙 돌렸다. 젤라또가 고체도 아니고 액체도 아닌 그 어중간한 경계에서 흐물거렸다. 최연준은 다 녹아버린 젤라또를 막걸리 마냥 들이켰다. 원샷을 때린 요구르트를 입에 잔뜩 넣고 꿀꺽 삼켰다. 최연준은 옆에 있는 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빌라 근처에서 파는 젤라또 중에서 요구르트는 최연준이 뽑은 최악의 젤라또였다. 과도한 발효였다. 냄새를 맡기만 해도 그 속이 매스꺼웠다. 최연준은 젤라또 옆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Levántese y come!'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일어나서 먹어! 정도 되려나. 최연준은 그 포스트잇을 구기지 않으려 아주 살짝 손에 들고 지갑 맨 뒤에 넣었다. 있는지도 잘 모를 것 같은 아주 작은 수납공간은 이 작은 포스트잇을 구기지 않고 보관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색깔만큼이나 모양도 다양한 포스트잇을 지갑에서 전부 빼내고 한 장, 한 장 정갈하게 붙였다. 아주 작은 포스트잇이었지만 그 안에 적힌 글이 하나같이 얼마나 짧던지 포스트잇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멘트도 다 비슷비슷했다. 먹어, 일어나면 먹어, 나 먼저 가, 이따 봐. 'Estoy molesto'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넘겨보던 최연준이 중얼거렸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친절히 번역을 자처하겠다. 아까 그 말은 ' 존나 짜증난다.' 라는 뜻이다.

2.

"¡ Daniel, rápido! rápido!"

다니엘, 빨리! 빨리!

최연준은 어깨 한 쪽에 길게 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바닥에 던졌다. 전공 책과 잡다한 이것저것들이 들은 가방은 무겁게 떨어지면서 미끄러졌다. 최연준은 목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키가 제일 큰 마떼오가 최연준에게 조끼를 던졌다. 최연준이 빨간색 조끼를 손으로 잡고 머리를 밀어 넣었다. 타국에서 농구라는 스포츠 하나만 가지고 친해진 친구들이었다. 최연준만 유일한 아시안인 이 농구팀은 처음에 최연준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연준은 아시안임에도 팀에서 세 번째로 키가 컸으며 -농구는 한 팀에 5명이다- , 농구를 꽤 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학교에서 인기도 많아. 최연준도 안다. 지가 킹카라는걸. 그래서 이들의 눈에는 서양 여자애들이 아시안한테 환장하는 게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얼마 정도로 심했냐면 이렇게 농구를 하다 티를 들어 올려 땀이라도 닦는 날엔 바닥에 여자애들의 코피 자국이 만연했다. 이 녀석들이 인종차별 자라는 소리가 아니라, 아시안을 이렇게까지 가깝게 만날 기회가 아예 없던 남미 친구들에게 최연준은 뭐랄까, 파도 파도 궁금한 미지의 사나이였다. 그래서 최연준은 남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았다. 흔히들 말하는 파워 인싸가 맞다. 어딜 가나 빠지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다들 친해지고 싶어 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꼬레아에서 온 까벨로 아줄(파란 머리). 최연준은 키가 이미터는 될 것 같은 상대편 선수들을 이리저리 제치고 골대에 골을 넣었다. 여자애들의 함성이 터졌다. 마르꼬가 최연준의 머리를 꾹 누르면서 마구 헝클어트렸다. '¡ Buen tiro!! Daniel!' 나이스 샷!! 다니엘! 최연준은 씨익 웃으면서 인중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최연준이 넘어졌다. 상대팀 발에 걸려서. 의도적으로 태클을 걸은 게 맞았다. 주장인 호르헤가 상대팀 주장과 말싸움이 붙었다. 경기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자애들의 표정은 마치 본인이 더 아픈 것 같았다. 최연준은 살이 아주 제대로 쓸렸다. 무릎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다른 데 다친 곳이 없다 살펴보던 최연준은 고개를 들었다. 무릎 말고는 멀쩡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마자 익숙한 인영이 저 멀리서 지나갔다. 최연준이 같이 골라준 원피스를 입고, 당고 머리를 한 채로 남자와 팔짱을 낀 채로 걸어가는, '¿Estás bien?' 괜찮아? 시몬이 넋이 나간 최연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연준은 'Estoy bien.' 괜찮아 만 연신 중얼거리면서 시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Puedes jugar?' 경기 뛸 수 있겠어? 최연준은 반쯤 돌아간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놨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싸움에서 승자는 호르헤였던 모양인지 점수가 일 점 올라있었다. 그리고 최연준은 경기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도 최연준은 어김없이 MVP를 탔으며, 경기에서 이겼다.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크게 질렀다. 최연준은 평소완 다르게 잔뜩 굳은 얼굴로 응원단에게 인사를 짧게 하고 가방을 급하게 챙겨서 집으로 내달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국 이케아에서 사온 소파에 털썩 내려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격한 몸싸움 후에 다시 미친 듯이 뛰어온 탓에 가슴이 크게 움직였다. 최연준은 코만으로 숨을 쉬기 벅찬지 입을 벌렸다. 몸은 나른한데 신경이 곤두서있어 잠이 오질 않는다. 들뜬 숨만 계속 뱉어내고 숨을 진정시키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숨이 멈췄다. 최연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현관을 열었다. 같이 고른 원피스에 당고 머리를 한 여자가 서 있었다.

3.

최연준은 이 여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한국 사람이지만, 소피아라고 불렀다. 모두가 소피아라고 불렀고, 최연준도 소피아라고 불렀다. 아니 뭐 가끔 소피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피아는 최연준과 같은 파란 머리를 한 상태였다. 최연준이 머리에 물을 들이고 얼마 안 있어 색이 예쁘다면서 최연준이 뿌염을 하러 갔을 때 같이 물을 들인 탓이었다. 머리색보다는 옅은 하늘하늘한 파란색 프릴 원피스를 입고 집으로 들어섰다. 최연준은 몸을 살짝 비꼈다. 치마 끝단이 살랑거렸다. 최연준은 많이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숨소리를 내면서 따라 들어왔다. 소피아가 들고왔던 종이백에서 커다란 맨투맨과 레깅스를 꺼냈다. '준.' 소피아는 최연준을 저렇게 불렀다. 맨 마지막 글자만 똑 떼서. '원피스 지퍼 좀 내려줘.' 최연준은 급격한 혈액순환으로 빨갛게 변한 손으로 작디 작은 지퍼를 잡았다. 최연준의 뜨거운 손이 소피아의 찬 등에 닿았다. 지퍼가 끝가지 내려가고 소피아의 등이 활짝 열렸다. '나 옷 갈아입을 건데. 보게?' 소피아는 이미 흘러내릴 듯한 원피스를 잡고 말했다. 최연준은 바보같이 '아.' 하면서 뒤를 돌았다. 원피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최연준은 괜히 땀을 닦았다. 실은 아까 마른지 오래였다. 최연준은 티를 들어 이마를 닦았다. 티가 올라가 보이는 살짝 굽힌 등에 시원한 손이 닿았다. 손이 점점 옆구리로 움직였다. '너 되게 뜨겁다. 녹겠어.' 최연준은 뒤를 돌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소피아는 최연준의 앞까지 왔다. 손이 티 안으로 들어가 등허리를 지분거렸다. '너 손도 뜨겁지.' 소피아가 벌건 최연준의 손을 옆구리에 올렸다. 최연준의 손은 티 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브래지어 끈이 손가락에 닿았다. '후크 앞에 있는데.' 최연준의 등에 있던 손이 떨이지고 가깝게 붙어있던 거리가 살짝 멀어졌다. '씻고 와.'

최연준은 옷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왔다. 옷을 벗어던지고 물을 틀었다. 찬 물을 온몸에 적셨다. 최연준의 파란 머리가 젖어들어갔다. 최연준은 샤워를 조금 천천히 하는 버릇이 생겼다. 원래는 10분 안에 다 끝내는 편이었지만 소피아는 본인을 좀 배려하라면서 늦게 나오라고 투정을 부린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가만히 맞고 있는 시간이 늘었다. 느리게 씻고 나오는 게 배려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연준은 그 뒤로 사워 시간을 배로 늘렸다. 최연준은 군말없이 모든 의견을 수용했다.

최연준이 샤워 시간을 배로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먼저 앉아있는 건 늘 최연준이었다. 최연준은 말리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었다. 최연준은 바지만 입은 채로 수건만 목에 둘렀다. 방 안에는 아주 작은 화장실이 하나 더 있었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최연준은 방에 있는 불을 껐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무드등을 켰다. 평범한 모양의 무드등은 살짝 노란색 빛을 냈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가득찬 수증기와 함께 소피아가 나왔다. 소피아는 침대 앞에 있는 화장대에 앉았다. 소피아의 화장품들로 잔뜩 채워진 화장대는 최연준이 사다가 열심히 조립한 것이었다. 소피아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소피아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화장대를 보고 건축학과의 재능낭비라면서 재밌다고 웃었다. 소피아는 커다란 수건 한 장만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최연준은 머리를 말리는 소피아를 뒤에서 보면 늘 불안했다. 저 수건이 풀어지지는 않을까 하면서. 소피아는 긴 머리를 이리저리 날리면서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기가 꺼지고 소피아는 뒤를 돌아 침대에 걸터앉은 최연준 앞으로 걸어왔다. 소피아가 싱긋 웃었다. 최연준이 수건을 풀어버리자 입술이 닿았다. 얼마 안 가 소피아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최연준은 그 위에서 입으로 콘돔을 찢었다.

4.

둘이 나란히 마주보면서 누워있었다. 소피아는 최연준의 애인마냥 안겨있었다. 최연준은 소피아의 파란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러다 그냥 아무 맥락 없는 말을했다. '너 한국 이름 알려줘.' 소피아는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최연준은 머리카락을 보던 눈을 돌려 눈을 감은 소피아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하면서 이름 부를 때 불편해. 입에도 안붙고.' 소피아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너가 지어줘봐. 한국 이름 그걸로 하게.' 최연준은 꽤 금방 이름을 불렀다. '민. 민이가 괜찮은거 같애.' 소피아는 답이 없었다. 잠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자마자 대답했다. '설마 엠 이 에이 엔 해서 민은 아니지?' -mean a. 성질이 나쁜- '그런거 아니야.' 최연준이 민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민이 최연준의 가슴팍에 완전히 얼굴을 묻었다. 최연준은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민의 숨소리가 새근새근하게 잦아들었다. 민의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이 환하게 켜졌다. 소리 없이 화면만 요란스러웠다. 최연준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안드레스

지금 자려나?

안드레스

나 잠이 안와

안드레스

5분 뒤에도 답이 없으면 자는 걸로 생각할게

안드레스

자는구나

최연준은 알람을 밀어 없앴다.

5.

마떼오는 키가 한참 컸다. 아마 이미터 조금 안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아주 많은 식당에 들어가도 한눈에 띄었다. 최연준은 마떼오를 발견하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타코를 먹고 싶다는 말에 다른 친구들은 다른 걸 먹으러 사라지고 최연준만 마떼오와 동행했다. 마떼오는 본인보다 훨씬 많이 먹는 최연준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최연준은 오히려 키도 큰 애가 더 많이 먹야한다면서 큰소리를 쳤다. 최연준의 먹방쇼를 직관한 마떼오는 박수까지 쳤다. 최연준이 한창 타코를 입에 밀어넣고 있는데 타코 가게 벨이 딸랑거렸다. 그리고 최연준과 마떼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다. 최연준의 시야 끝에 파란 머리카락이 걸렸다. 최연준은 고개를 돌렸다. 뒷모습밖에 안보였지만 치렁치렁한 파란색 머리는 누가봐도 민이었다. 최연준의 바쁜 움직임이 멈추자 마떼오는 타코를 우물거리면서 최연준과 같은 곳을 한 번 바라봤다. 마떼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말했다. '안드레스한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건가?' 안드레스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이 여자, 저 여자 다 찌르고 다니면서 어장 관리하는 걸로도 이름을 날리기도 했고. 타코를 세게 움켜쥔 탓에 최연준의 타코 안에 재료들이 다 흐르기 시작했다. 마떼오는 최연준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 여자애는 누구지? 처음 보는 애야 .안드레스는 아름다운 미녀만 데리고 다니는데, 또 찾아낸건가. 이제 더 이상 예쁜애가 남아있지도 않겠다. 다니엘, 넌 저 파란 머리 여자애 알아?'' 최연준은 떨어진 양파를 주워서 다시 올렸다. '아니. 몰라.'' 마떼오는 민을 한번 쓰윽 보더니 다시 최연준을 봤다. '근데 둘이 머리색이 똑같네. 신기하다. 커플로 맞춘 것 같아.' 최연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민의 웃음소리만 데시벨을 잔뜩 키워 최연준의 귀를 때렸다. 저번에 농구할 때 옆에 같이 팔짱을 낀 애였다. 민은 안드레스의 앞에서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댔다. 안드레스는 민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핸드폰에 눈을 고정한 채 적절한 때에 짧은 호응만 날릴 뿐이었다. 최연준은 남은 타코를 입에 욱여넣었다. 냅킨으로 입에 묻은 소스를 닦았다. 마떼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갔고, 최연준은 옷을 입으면서 밍기적거렸다. 계산대로 걸어가면서 최연준은 잠깐 망설였다. 발이 걸려서 넘어지는 척을 해서 민이 돌아보게 할까. 최연준은 결국 아무런 소란 없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최연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찾아 다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로 이곳저곳을 뒤지는 최연준을 본 마떼오는 라이터를 던졌다. '오 땡큐.' 최연준은 고개를 살짝 돌려 불을 붙였다. 담배를 검지와 중지에 살짝 끼우고 연기를 뱉었다. 라이터를 다시 마떼오에게 던졌다. 최연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6.

최연준과 민은 암묵적으로 밖에서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민의 입장에서는 암묵적으로 생긴 규칙이었겠지만 최연준에게는 아니었다. 최연준은 그날 분명 인사하려고 했고, 지나치는 순간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민은 아는 척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다. 최연준은 황당했다. 근데 이젠 왜 그렇게 했는지 알고 있다. 최연준은 민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비타민을 안먹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다만 먹게 되면 힘이 날 뿐이지. 민에게 최연준이 없다고 민은 최연준을 찢어지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최연준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데 힘을 받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안드레스를 사랑하는 민은 안드레스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아마 민은 안드레스에게 비타민 같은 사람이겠지. 그럼에도 민은 안드레스를 사랑하고 싶다. 안드레스에게서 받는 사랑이 없으니 어디선가 사랑을 채워와서 안드레스에게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어디선가' 가 바로 최연준인 셈이었다. 민은 대외적으로 안드레스와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람이었다. 최연준에게서 부족한 사랑을 채운다는 게 알려지면 민은 바로 안드레스에게 버림 받을 것이다. 그래서 최연준은 해가 떠 있는 동안 민을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했다. 그리고 해가 지는 순간부터 최연준은 민을 온전히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로든 안을 수 있었다. 연준은 낮동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내려고 노력했다. 파란색만 봐도 피가 솟구쳤지만 참으려고 노력했다. 안간힘을 썼다. 안드레스에게 최연준은 마치 민을 위한 배우였다. 안드레스는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만, 아, 민도 모를 것이다. 최연준이 본인과 안드레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계성이 대략 이정도 되었다. 최연준은 이제 늑대인간에게까지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달이 떠야만 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밤이 와야만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최연준은 트와일라잇을 읽다가 책을 덮어버렸다.

7.

최연준은 소파에 앉아 러그에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는 민을 봤다. 개그 프로그램이 한창이라 민은 간간히 웃음 터트렸다. 최연준은 이미 저 프로그램을 본방송으로 봤어서 재미가 없었다. 턱을 괴고 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천천히 선을 따라갔다. 그러다 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벨소리 때문에 티비소리가 묻히기 시작했다. 연준은 이미 누구에게 전화가 왔는지 알고 있었다. 하트가 붙을 만한 이름은 딱 한 개 밖에 없지 않은가. 민은 손을 뻗어 소파를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다. 금방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최연준은 그 모습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전화를 끊어도 아침이 되기 전에 민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최연준은 미련 없이 민을 보내줘야 한다. 최연준은 소파에서 내려와 민에게 가까이 갔다. 덩치가 한참 작아 최연준의 맨투맨에게 잡아 먹힌 민의 뽀얀 어깨가 보였다. 최연준은 어깨를 물 것처럼 얼굴 부볐다. 바라만 보고 있을 시간이 없다. 맨투맨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전에 후크가 앞에 있다고 했나. 최연준이 가슴 사이에 있는 후크를 찾아서 풀었다. 민이 숨을 삼켰다. 티비가 꺼졌다.

8.

민은 불편한 기색도 없이 최연준에게 안겨 있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핸드폰이 배게 밑에 있는지 소리가 작게 들렸다. 민은 배게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발신인을 확인했다. 최연준은 잠에 들지 않았다. 민을 안은 최연준의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민은 전화를 받았다. 최연준은 맥이 풀렸다. 팔에 힘이 빠졌다. 최연준에게 닿은 몸을 때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안드레스와 통화했다. 내일 어디서 볼지, 뭘 할지, 뭘 먹을지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웃는다. 최연준은 등을 돌렸다. 민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통화를 이어나갔다. 최연준은 뒤를 돌아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쓸데없이 귀는 좋아서 통화소리가 전부 들렸다. 분명 옆에 있는 건 난데, 더 멀었다. 계속 자는 척 목소리를 엿들었다.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민이 최연준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최연준은 시트만 붙잡았다. 최연준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 끈을 놓지 못한다. 셋 중에 제일 멍청이는 본인이 될 게 분명했다. 최연준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늘 아쉬워 하는 건 최연준이었다. 늘 안달나 있는 것도 최연준이었고. 최연준은 잠든 민의 팔을 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민을 쳐다봤다. 빠져 나가야 하는 데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다. 담배를 챙기고 빌라 밖으로 나왔다. 최연준의 입에서 구름은 꽤 오랫동안 생겨났다.

빌라 근처에서 담배만 태웠다. 흰티에 삼선 추리닝을 입은 눈에 띄는 파란머리를 하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힘 없이 바라봤다. 태우던 담배를 발로 뭉개서 꺼뜨렸다. 담배를 다 태웠는데도 최연준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최연준의 눈에 누군가 걸렸다. 안드레스가 길 건너 잡화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최연준의 바람난 전여자친구와 손을 꼭 잡은 채로. 최연준은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진짜 웃기다. 최연준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왜 맨날 저 새끼랑 엮이는지 모르겠다. 최연준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최연준은 기어이 남은 담배를 다 태우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열쇠를 넣고 돌리자 환한 불빛이 최연준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너무 밝은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최연준이 문을 살살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이 소파에 앉아서 몸을 웅크린채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소리에 고개를 돌려 최연준을 확인하자 울음이 터졌다. 민의 옆에는 최연준의 핸드폰과 민의 핸드폰이 나란히 있었다. 최연준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면서 민의 옆으로 달려갔다. 최연준이 민을 안았다. 민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순순히 안겼다. 잔뜩 뭉개진 발음이 끊임없이 들렸다. 왜 핸드폰을 안가지고 나갔냐, 어디에 있던 것이냐, 말도 안하고 나가면 얼마나 놀라는지 아냐, 나쁜새끼야, 가 대부분이었다. 최연준은 민을 한참이나 달래고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재웠다. 어찌나 많이 울던지 민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 방문을 닫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하얀색 티가 민의 눈물로 얼룩덜룩했다. 민이 본인을 이렇게 찾아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비실비실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최연준은 티를 벗었다. 민은 침대에 담배 냄새가 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9.

민이 울고불고 난리가 난 그날 이후로 민은 최연준에게 약간의 집착을 보였다. 약간의 집착이라고 해봤자 최연준이 집을 나갈 때마다 꼬박꼬박 물어보는 정도였다. 최연준은 자존심도 다 집어치우고 민이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민에게 그날 봤던 일은 숨겼다. 민은 안드레스 옆에 있을 때 제일 밝게 웃는다. 그리고 어차피 말해봤자 민은 안드레스 편을 들게 분명했다. 오히려 욕은 최연준이 먹겠지. 안드레스를 볼 때마다 열이 뻗쳤지만 참았다. 저 잘난 상판에 생채기라도 생겼다간 민이 최연준의 품에서 안드레스의 얼굴에 흠이 생겼다며 우울해 할 게 분명했다. 최연준은 아무도 없는 아침 속에서 일어나 민이 사놓은 요구르트 맛 젤라또를 먹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안드레스와 민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예를 들자면 방금 말한 것들. 최연준은 쓰고 나온 볼캡을 다시 꾹 눌러썼다. 최연준은 이 수업을 들을 때마다 모자를 쓰고 왔다. 이 수업에는 안드레스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기 싫었다.

최연준은 볼캡을 잠깐 위로 올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다시 눌렀다. 모자를 도대체 왜 쓰고 나왔는지. 마주치기 싫다고 방금 말한 거 같은데. 최연준은 앞에 앉아 있는 안드레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감았다. 안드레스는 최연준을 보고 그냥 피식 웃었다. 최연준은 생생히 전달받았다. 안드레스 눈에 최연준은 얼마나 호구같이 보일지 안봐도 뻔했다. 최연준은 마른 세수를 했다. 팀플을 위한 한 팀이었다. 최연준과 안드레스는 2인 1조로 같이 과제를 해야했다. 팀플을 하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왜 하필 얘가 걸렸냐고. 안드레스는 ppt를 만들기로 하고 최연준은 발표를 하기로 했다. 최연준은 과연 안드레스가 자료를 보내주긴 할까하는 의심에 바꾸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얘가 자료를 안보내주면 그냥 혼자 만들고 혼자 발표하면 될 일이었다. 괜히 자료 열심히 만들어 보낸 다음에 안드레스가 발표날 출석을 안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그림이었다. 안드레스는 본인이 인스타나 페북을 잘 하지 않아서 연락하기 어려울 듯 하니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자고 했다. 자료를 혼자 만드는 건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최연준은 왜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그냥 동의했다. 귀찮은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섞었다간 머리가 다 뽑힐 지경이었다. 안드레스 말에 따라 발표 전까지 총 세 번을 만나야했다. 얘기가 얼추 끝나자 안드레스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앉아있는 최연준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최연준은 안드레스가 닿은 부분을 털어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찾고 있을 때 초록눈을 가진 태닝이 예쁘게 된 여자애가 최연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사실은 최연준하고 일면식이 있는 여자애였다. 수업이 꽤 많이 겹쳐서 인사도 간간히 하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저녁을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는 말을 했다. 최연준은 시간을 확인했다. 최연준은 고민했지만 결국 그 여자애는 최연준의 차에 탔다. 차는 학교 주차장을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최연준의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 안 받아도 괜찮아?' 최연준은 그냥 웃었다. 진동이 멈추고 신호에 걸렸을 때 최연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1건. 메세지 1개. '나 오늘 집에 안 가.' 최연준의 표정을 살피던 여자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한 일이야? 전화 걸어도 돼.' 최연준은 핸드폰을 뒷자석에 던져버렸다. '스팸이야.'

10.

여자애와 저녁으로 커리를 먹고 근처 펍으로 갔다. 맥주에 가벼운 안주를 먹으면서 최연준은 그 여자애와 얘기하는 게 꽤 재밌다고 느꼈다. 해가 지고 날이 바뀌고 나서 헤어졌다. 내일 점심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그날 최연준은 멀쩡한 차를 놔두고 비싼 텍시를 불러서 집에 도착했다. 알딸딸한게 기분이 좋았다. 씻고 침대에 딱 누웠을 때도 여전히 기분이 좋을 채로 잠에 들었다. 최연준이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비틀비틀 거리면서 일어나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것보다 좀 신경을 썼다. 오랜만에 머리도 넘기고, 피어싱도 새로 끼웠다. 향수도 몇 번 칙칙 뿌리고 토스트기에서 올라온 식빵을 입에 물고 집을 나갔다. 속이 메스껍지 않은 아침은 오랜만이었다.

오늘 1교시는 그 여자애와 민이 같이 있는 수업이라는 걸 최연준은 잠시 잊었다. 민이 보이는 뒷자리말고 그 여자애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번은 민이 최연준을 보게 됐다. 최연준은 학교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건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침 숙취로 얘기가 넘어갔다. 여자애는 아침에 일어나서 죽을 뻔 했다면서 고통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최연준은 여자애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웃었다. 본인은 어제 별로 취하지 않아서 숙취가 딱히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여자애는 배신감 가득한 눈빛을 쏘아 댔다. 최연준을 주먹을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근데 너 오늘 아침에 왜 전화 안 받았어?' 그러고 보니 최연준은 핸드폰을 아침에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자애의 말에 핸드폰을 급하게 찾던 최연준은 어제 상황을 다시 돌렸다. '아, 어제 차에 놓고 내렸잖아.' 최연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다. '그러면 차 찾으러 다시 그 커리 먹으러 가야겠네.' 여자애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최연준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가야겠다.'

강의가 끝나고 최연준은 여자애와 강의실을 나왔다. 영양가는 없지만 재미는 있는 얘기를 하면서. 누군가 최연준을 불렀다. 그것도 큰 목소리로. '준!' 그리고 이렇게 최연준을 부를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최연준은 살짝 굳은 채로 뒤를 돌았다. 여자애는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민은 최연준의 앞으로 뛰어왔다. 약간 화가 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너 어디가?'' 스페인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 여자애는 살짝 당황한 듯 싶었다. 최연준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밥 먹으러.' 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최연준은 민의 입술에 엄지를 가져갔다. '깨물지 마.' 최연준은 몸을 돌려 여자애를 바라봤다. '가자.' 여자애는 반 박자 느리게 대답하고 민을 한 번 쳐다보고 최연준을 뒤따랐다. 민은 그 자리에서 서서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여자애는 최연준을 급하게 따라가다 쓰윽 물었다. '여자친구야?' 최연준은 여자애의 말에 입꼬리를 겨우겨우 끌어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리고 그 여자애는 민이 안드레스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민은 최연준 집의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최연준은 매일 밤마다 비어버린 베개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11.

최연준은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숨을 후 뱉어내고 집을 나섰다. 안드레스를 만나는 날이었다. 베이지 바지에 초록색 니트. 솔직히 꿀릴 게 없었다. 근데도 최연준은 자꾸 멜트를 만지작거렸다. 최연준은 카페에 앉았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얼음을 따로 부탁했다. 얼음이 들은 컵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부었다. 빨대는 쓰지 않고 그냥 컵을 들고 마셨다. 약속 시간이 17분이 지났을 때 안드레스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안드레스는 전혀 서두르지 않은 기색으로 차분히 최연준의 앞에 앉았다. 맥북을 꺼내고 켰다. 최연준은 안드레스가 틀을 짜놓은 구성안에 이런저런 피드백을 남기는 식이었고 안드레스가 짜온 구성안은 정말 형편없었기 때문에 회의는 1시간이 조금 넘어서 끝이 났다. 최연준은 아아메를 들이키면서 앞에서 맥북으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안드레스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내가 ppt 만들어야 겠네. 이딴 생각을 하면서. 정리가 다 되고 짐을 챙기고 있는 중에 테이블 위에 있던 안드레스의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소피아. 최연준은 금방 이름을 읽었다. 최연준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최연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데, 작은 스니커즈가 안드레스 옆에 멈췄다. '안드레스!'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최연준을 파고 들었다. '어? 여기는...' 최연준은 고개를 들었다. 민은 최연준을 마주하고 많이 당황한 듯 눈이 떨렸다. '이번에 같이 과제를 해야 해서. 여기는 다니엘. 너도 알지 않으려나, 워낙 유명해서.' 안드레스는 최연준과 눈을 똑똑히 마주하면서 소개했다. 최연준은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민은 최연준의 손을 잡았다. '...저는 소피아에요.' 손을 짧은 악수 후에 떨어졌다. 최연준은 가벼운 목례 후에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최연준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모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앞으로 안드레스를 두 번이나 더 봐야했다. 그리고 안드레스의 개같은 자료를 대신할 발표 자료마저 다시 만들어야 했다.

12.

최연준은 뜨거운 아메리카노 빨대만 잘근잘근 씹었다. 안드레스는 혼자서 맥북을 두드리면서 쌩쇼 중이었고 최연준은 더 이상의 피드백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냥 니 좆대로 만들어 라는 식이었다. 2시간 정도 되는 시간을 이렇게 죽이고만 있으니 여간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오늘은 빈 강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최연준은 말이 없었고, 안드레스는 도대체 무엇에 집중하는지 열심히 컴퓨터나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싶을 때 최연준은 가방을 매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최연준이 나가려는 걸 안드레스가 잡았다. '다니엘, 너무 서두르지 말지. 오늘 너랑 할 얘기도 있는데.' 최연준은 무시했다. 강의실 문을 열어 나가려고 했을 때 민이 앞에 서 있었다. '할 얘기가 있다니까.' 안드레스만 여유만만했다. 심지어 웃으면서 말하는 게 섬뜩하기까지 했다. 최연준과 민은 망부석이었다. 누구하나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안드레스는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드레스는 최연준의 앞에 섰다. 민은 두 남자 사이에 있었다. 안드레스는 민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소피아, 너 비밀번호 바꿨네?' 민은 안드레스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으려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안드레스는 그저 손을 조금 높이 들었다. '말해.' 민은 손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저 손을 뻗었다. '줘. 달라고.' 안드레스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라고, 좋은 말 할때.' 민은 움찔거렸다. 망설이더니 비밀번호를 말했다. 최연준이 알고 있던 번호였다. 안드레스는 핸드폰을 몇 번 누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와우, 베로니카 말이 사실이었네.' 안드레스가 핸드폰 화면을 최연준에게 보였다. 민이 가만히 자고 있는 최연준을 열심히 치대면서 깨우는 영상이 플레이 되고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건지...' 안드레스는 갤러리를 넘겨보면서 중얼거렸다. 민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최연준은 민의 손을 잡고 내렸다. 안드레스는 갤러리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드레스는 핸드폰을 던졌다. 크게 부딪히는 소리에 민이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베로니카한테 소피아는 개처럼 나만 보는 호구 같은 년이라고 큰 소리를 떵떵 쳤는데, 어떻게 생각해 베이비?' 민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너도 베로니카랑 데이트 하면서 뭐라 할 입장은 아닐 거 같은데.' 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안드레스는 고개를 돌렸다. '야, 푸타개새끼, 넌 되게 당당하다?' 민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불안한 눈이었다. '너랑 나랑 다를 게 없지. 넌 여자친구도 있는 주제에 바람났고, 나는 남자친구도 있는 애랑 hook up 했으니까. -사전적 의미는 데이트하다라고 하지만 은어로는 잤다라는 의미로 씁니다. 최연준의 중의적 표현- 틀린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안드레스는 최연준의 멱살을 잡았다. 민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나랑 만나는 주제에 너랑 바람났고. 먼저 화내야 하는 건 나지. 이렇게 너가 먼저 발끈하면, 섭섭하지 내가.' 안드레스가 주먹을 날렸다. 최연준이 뒤로 넘어졌다.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동시에 안드레스의 고개가 시원하게 돌아갔다. 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떨었다. '준, 때리지마. 그리고 그렇게 억울하면 헤어져.' 최연준을 일으키던 민을 안드레스가 밀쳤다. '너, 다니엘이랑 맨날 붙어먹어서 그렇게 비싸게 굴었어?' 안드레스가 넘어진 민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내 친구들이 얼마나 비웃었는지 알아? 동양인 애새끼 하나 따먹지도 못해서 얼마나 쪽팔렸는데.' 벌써 민의 남방은 젖혀졌다. 민이 입만 뻐끔거리면서 발버둥쳤다. 안드레스가 민의 머리를 잡아채고 뺨을 때렸다. 최연준이 안드레스를 발로 찼다. '떨어져.' 민을 일으키고 남방을 주었다. 갈비뼈를 세게 차인 안드레스는 바닥에 누워서 쿨럭거렸다. 최연준은 민의 어깨를 감싸고 강의길을 빠져나왔다. 빈 강의실에 비명 아닌 비명이 울렸다.

13.

최연준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민을 집에 데리고 왔다. 든 게 얼마 없는 구급상자를 들고 왔다. 안드레스에게 맞은 부어오른 뺨에 무작정 연고를 발라댔다. 밴드를 덕지덕지 붙이고 꽁꽁 얼어버린 맥주병을 들고 왔다. 수건까지 감싸서 민의 볼에 비볐다. 민은 맥주병을 내려놓고 연고를 들어 최연준의 얼굴에 발랐다. 주먹으로 맞아서 입술 주변은 이미 생채기가 났다. '또 다친 데는 없어?' 최연준은 민의 손을 잡고 내렸다. 두 손이 민을 잡았다. 민이 다른 손으로 최연준의 두 손을 덮었다. '내가, 미안해.'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민의 파란 머리가 이리저리 엉켜 엉망이었다. 최연준은 손을 빼내서 머리를 정리했다. '울지마. 괜찮아.' 최연준이 손이 민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는 이제 자존심도 없어. 남은 게 하나도 없어. 너가 없으면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최연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정말 못 사랑하겠어?"

최연준의 눈에 눈물이 점점 밀려왔다. 민은 아무말도 없었다.

"나 좀 사랑해주면 안돼?'

최연준의 볼에 길이 생겼다.

14.

'다니엘! 지저스, 너 괜찮아? 얼굴이 이게 뭐야?' 최연준과 자주 밥을 먹었던 그 여자애가 보기에도 최연준의 상태는 심각한 것 같았다. 얼굴은 상처 투성이에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많이 별로야?' 목소리까지 쩍쩍 갈라졌다. 어떻게든 가려 보려고 애썼지만 글쎄, 그래서 더 아파보였다. '니 팬클럽이 울겠다, 울겠어. 길 가다가 깡패라도 만난거야?' 호들갑에 최연준은 살짝 웃었다. '깡패 만났지.' 그 말에 여자애는 더 놀라서 최연준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아? 경찰에 신고는 했어?' 최연준은 자판기에서 콜라를 눌렀다. 콜라가 떨어졌다. '야, 나 맞기만 하지 않았어.' 최연준의 허세 가득한 말에 여자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랑이다. 그런데 진짜 병원 안가도 괜찮아?' 최연준은 여자애에게 콜라를 무작정 쥐어줬다. 그리고 그냥 반대편으로 뛰었다. '다니엘! 왜 갑자기 뛰어!!' 진짜 저 잔소리쟁이. 최연준은 강의실 문을 열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다들 최연준을 보고 수군거렸다. 단지 얼굴 상태 때문이라고 하기엔 낌새가 묘했다. 최연준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걔는 언제오나 하고 여자애를 기다리는 데 말을 한두번 섞어본 남자애가 최연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 다니엘...' 최연준은 고개를 돌려 그 남자애를 바라봤다. 남자애는 시선을 엉뚱한 곳에 둔 채 핸드폰을 보여줬다. '이거 사실이야?' 최연준은 남자애가 슬쩍 내민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 안에는 안드레스가 상처난 곳을 이곳저곳 찍어 최연준과 민을 공개저격한 글이 있었다. 인스타그램 안 한다더니 안드레스는 인스타에 온통 도배를 했다. 공개저격 플러스, 상해죄로 고소할 거라는 온갖 개소리에 글을 읽기만 했는데도 시끄러웠다. 최연준은 읽으면 읽을 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인데 그게 한 30퍼 되고, 나머지 70퍼가 전부 쌩쑈였다. 내가 뭔 칼을 들고 지를 위협 하고 모텔에 민이랑 있던 걸 들켜. 최연준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불안하게 보고 있는 남자애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안드레스한테 개소리 잘 봤다고 해줘.' 뒤에서 애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이 아닌가봐.' '에이, 그냥 구라 아니야?' '안드레스가 미친놈인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소피아랑 다니엘은 그냥 모르는 사이 아니야?'

강의 시간이 끝나고 밖에 나가자 최연준은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최연준이 지나가기만 하면 다들 입을 가리고 수군거렸다. 최연준은 민에게 전화하려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처박았다. 그 개새끼가 핸드폰을 박살내는 바람에 민은 한동안 연락이 안됐다. 이걸 다 노린거라면 박수 쳐야 한다. 최연준은 이빨을 갈았다.

15.

최연준은 메일함에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 강의실이 최연준을 굉장히 아끼는 교수의 담당 강의실이었다는 것이다. 최연준은 교수에게 눈물 어린 메일을 보냈다. 지금 안드레스가 퍼뜨린 허위 사실에 매우 고통 받고 있으며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 강의실에 있는 씨씨티비 영상이 필요하다. 이 한문장에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서 누구라도 메일을 읽으면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최연준은 교수가 보낸 메일을 읽었다. 당연히 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동영상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씨씨티비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질이 굉장히 깨끗한 편이라고 덧붙였다. 최연준은 본인의 팔로워 수와 안드레스의 팔로워 수를 비교했다. 이 영상을 미쳤다고 SNS에 올리겠는가. 일단 경고장 하나 정도는 보내줘야 나중에 법정을 가더라도 할 말이 있지. 최연준은 인스타 그램에 그냥 검정 사진 하나와 짧막한 말을 올렸다. 몇 분 후 안드레스의 인스타에 뻐큐 손 모양과 고소하겠다는 얘기가 올라왔다. 최연준은 학생위원회에 영상과 안드레스 인스타그램 캡쳐본을 보냈다. 민도 합세했다. 학생위원회는 곧바로 청문회를 열었다. 최연준은 몇 일만에 만난 민의 옆에 서서 안드레스를 마주봐야 했다. 민은 긴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고 불안한지 손톱을 뜯었다. 최연준은 민의 손을 잡았다.

학교에 공고문이 하나 붙었다. 안드레스를 폭행 및 성폭행으로 퇴학 처리 했다는 내용이었다. 민은 그 공고가 붙은 날부터 학교에 나왔다. 사실 안드레스가 퇴학 처분을 받기까지 많은 여학생들이 증거를 추가 제출했다. 그 여학생들의 몫까지 처분을 받은 것이었다. 권선징악이지 뭐.

16.

최연준은 안드레스 없이 준비한 팀플을 혼자서 잘 발표했다. 민은 핸드폰을 고쳤고, 최연준에게 이제 연락이 된다는 짧은 메시지 하나를 보낸 것 말고는 더 이상의 연락이 없었다. 최연준은 속이 탔다. 그래서, 그 말에 대답도 안하고, 연락도 안하고, 보지도 않고. 최연준은 침대에 누워서 메세지 창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제 토 할 것 같은 요구르트 맛 젤라또가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아침마다 꼬박꼬박 사다줬는데, 그것도 참 부지런한 일이었다. 최연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팔을 눈 위에 올렸다. 이거 뭐, 민의 집에 찾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 아니다. 기다려야지. 민의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최연준은 다시 핸드폰을 켰다. 민이 찍은 사진만 무한번 넘겨봤다. 이제 다 해결됐는데, 걸림돌 다 치웠는데, 민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17.

최연준은 차에서 내렸다. 학교가 늦게 끝나고 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머니에 들은 키를 찾으면서 계단을 올랐다. 집까지 반 층 밑에서 올려보는 윗층은 환했다. 앞 집 사람이 방금 들어갔나. 최연준은 깜깜한 바깥에 비치는 불빛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그리고 최연준이 올라갔을 땐, 민이 겉옷도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최연준은 처음엔 벙쪄있다 정신을 차리고 빨리 다가갔다. 민의 손을 찼다. 최연준은 급하게 문을 열었다. 민이 최연준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최연준은 민을 소파에 앉혀두고 담요로 둘둘 쌌다. 물까지 포트에 올려서 따뜻한 물을 들고 왔다. 민은 김이 폴폴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최연준은 쓰지도 않던 물주머니를 찾아내서 포트에 남은 물을 따랐다. 사실,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그냥 조금 쌀쌀한 정도였지.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스페인이었다. 최연준은 담요 안에 물주머니를 넣었다. 최연준이 소파에 앉아도 둘은 아무말이 없었다. 분명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민도 물만 홀짝였다. 민이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잠깐 너랑 연락 안하고 지냈을 때, 생각해보니까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

최연준은 민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걔를 사랑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응."

"너가 저번에 나한테 물어본 거 있잖아. 내가 생각해봤는데."

최연준은 바짝 긴장했다.

"나는 그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 같아. 걔는 뭔가 내 의무 같았어. 좋아하는 애니까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데 계속 만나야할 것 같고, 그래서 너한테 못할 짓만 계속하고... 내가 진짜, 진짜, 쓰레기 같이 행동했다, 그렇지."

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이 젖어갔다. 최연준은 민을 끌어당겼다. 최연준은 민을 안았다.

"괜찮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다 상관없어. 더 못되게 해도 되. 더 나쁘게 굴어도 되.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할거야."

"내가 너한테 받은 것만 돌려줄 수 있게 해줘. 내가 적어도 그건 주고 싶어.'

민은 혀가 다 꼬인 채로 말했다. 이게 울음인지 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민은 쏟아지는 눈물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아서 숨도 못 쉬고 짧막 짧막 말했다. 그것마저 최연준은 다 알아들었다.

"더 줘도 돼. 그리고 다 주면 내가 그것만큼 다시 돌려줄게."

[TXT연준] Love me less 외전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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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ㅠㅠㅠ 저 소설 한 편 읽은 느낌이에요ㅜㅜㅜ
4년 전
독자2
작가님 너무 좋아뇨ㅠㅠ근데 이건 전에 올라왔언 럽미레스랑 아예 다른 이야기인건가요??
4년 전
42
넹! 전 본편에서는 우리 그대들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 이번에는 최연준씨를 고생시켜보자! 하고 써봤답니다! 완전히 다른 글이에요!
4년 전
독자3
헐헐 이것도 좋아요ㅠㅠㅜㅠㅠㅜ그냥 분위기 미..를 쳤네요
4년 전
독자4
사랑합니다
4년 전
비회원245.121
순간 전의 내용과 이어지는줄 알고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하고 '음 그랬나..?' 하면서 봤는데 다른 이야기라니 다행이에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4년 전
비회원137.31
사랑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4년 전
비회원160.132
진짜 대박이다...ㅜㅠ 완전 빠져서 읽었어요ㅜㅜㅜㅜ
4년 전
독자5
아 ㅠㅠ ㅠㅠ ㅠ 럽미레스 넘 조아요... 해바라기 연준...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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