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울었을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거실로 향했다. 그가 작은 탁자 앞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생각이 많아질 때 책을 읽곤 했다.– 인기척이 나자, 그는 돌아봤다. —여주야. 내 이름을 부르는 그를 애써 외면했다.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직 그가 미웠다. 발걸음이 멈췄다. 그에게 잡혔다. 그는 뒤에서 나를 안더니, 얼굴을 내 어깨에 묻으며 말했다. —사랑해... 나 너랑 헤어지기 싫어... 싸우기도 싫고. 내 허리에 둘러진 그의 팔을 풀어냈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하지 말지 그랬어. 다시 걸음을 옮기는 내 손을 잡는다. —여주야 제발 좀...! 그의 말을 끊어냈다. —내일 얘기하자. 오늘은 이만 자. 너 피곤할 거 아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 눈이 여태껏 나를 외롭게 했던 나날들을 정당화 시킬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상처받았다. —나는 다른 방에서 잘게. 안방에서 편하게 자.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가디건을 챙겨 베란다로 향했다.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 그와 핀란드로 오로라를 보러 가자며 장난스레 꺼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이제 그 약속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냥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다 떨어져 내려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 감정도 헷갈렸다.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인지, 나인지. 이 관계를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인지, 아니면 이것도 나인지. 바람이 불어와 겉옷을 여몄다. 품이 큰 가디건에서도 그의 향이 어렴풋이 나고 있었다. - 며칠째 한마디를 안 했다. 그도 그럴 것 인게, 그는 아침만 차려놓고 먼저 출근했고, 먼저 퇴근한 나는 그가 오기 전 잠들었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을 보냈다. —나 다음 주 출장 잡혔어. 오늘은 그가 먼저 퇴근한 날이었다. 그는 작은 조명을 켜놓고 침대 맡에 앉아있었다. 씻고 나와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는 내게 그가 말했다. 그의 갑작스런 출장소식이었다. —며칠이나? —일주일. 예전 같았으면, 떨어져 있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나였다. 나는 그래. 하고 단답으로 말한 후, 그에게 등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작은 조명을 끈 후, 옆에 누웠다. 빛이 가고 어둠만 남았다. 정적이 가득한 밤이었다. - 연준은 그녀가 잠에서 깰까 봐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의 출장 날이었다. 새벽 비행기로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라, 그녀가 잘 때 나가야했다. 작은 조명을 켜고, 마저 짐을 쌌다. 새근새근 자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울던 모습이 자꾸 아른거렸다. 요새 사랑에 소홀했던 건 솔직히 맞았다. 연준은 너무 바빴고,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맞다. 핑계가 맞았다. 곤두서있는 신경이 자꾸만 그녀에게 향했고, 결국 상처 줬다. 사랑에 핑계를 대면 안 된다. 그녀의 잔머리를 조심스레 정리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자는 그녀였다. —내가 앞으로 잘할게. 그녀에게 조용히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해가 뜰 준비를 하는 새벽이었다. - 아침이 밝았다. 연준의 목소리가 아닌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다가 식탁에 쓰여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아침 거르지 말고, 간단하게라도 챙겨먹어. 나 다녀올게. 사랑해. 그의 메모 밑에는 샌드위치가 놓여있었다. 언제 이걸 또 사놨는지... 커피를 내리며 뒤를 돌았다. 그의 빈자리가 괜히 크게 다가왔다. 그의 메모지에 써있는 마지막 단어를 읊조렸다. 사랑... 그 단어가 더 이상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 수빈은 2주째 그녀를 보지 못했다.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제 질문에 글쎄요. 라고 답하던 그녀가 생각났다. 수빈은 머리를 헝클였다. 애인이 있는 그녀에게 자꾸 관심이 가는 자신이 미웠다. 잊자. 그저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하자.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출근을 하니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여주 씨...? 혼자 술을 마시는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그녀를 불렀다. —어? 왔네요- 조금 취한듯 배시시 웃는 그녀였다.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혼술 몰라요 혼술? 그냥 혼자 술 좀 마시고 싶어서... 수빈 씨는 2시에 끝나던가? —네- 2시. 수빈은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으면, 나 끝나고 같이 갈래요? 데려다줄게요.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빙을 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했다. 혹여나 그녀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가 있을까 봐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애인도 아니면서 애인인 것 마냥 신경 쓰였다. —야 최수빈, 너 퇴근해라~ 사장 형이 말했다. 아직 새벽 1시였다. —네? 아직 2시 안됐는데요...? —너 저 여성분 신경 쓰여하는 거 다 보인다~ 어차피 오늘 별로 안바쁘니까 퇴근해~ 맘 바뀌기 전에 가라- 아 형, 진짜 감사해요. 수빈은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고 짐을 챙겨 그녀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괜히 테이블을 툭툭 치며 멍하니 있었다. —다 마셨어요? 나갈래요? 아님, 더 있고 싶어요? —일찍 끝났네요? 가요- 나 가고 싶어... 거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았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그녀 쪽으로 다가오면, 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아 내 쪽으로 당겼다. 그녀와 붙어 걸으니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 얼굴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열이 오른 얼굴에 바람이 닿았다. 오늘따라 새벽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하늘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가 답답한 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빈의 물음에 그녀가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무슨 일 있어 보여요? 왠지 슬퍼 보이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제를 바꿨다. —애인 분은요? 데리러 올 법도 한데. —어제 출장갔어요- 애인이 있는 사람이 혼자 나와있기에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꼴을 본다면, 그녀의 애인이 더 속상할 일이었다. 것도 그렇지만, 사실 떠 본 게 맞다. 혹시나 헤어졌나 해서 떠본 것도 맞다. —애인분이, 화 안 내요?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게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를 비췄다. 그녀는 땅을 보며 눈물을 뚝 뚝 떨어트렸다. 수빈은 잠시 당황하다가, 우는 그녀를 저도 모르게 껴안았다. 어쩐지 그녀의 애인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새벽의 가로등이 밝게 빛나며 둘을 비췄다. - 연준이 출장 간 빈 집은 왠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자꾸만 집에서 나와, 수빈이 아르바이트하는 술집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연준의 빈자리로 느끼는 공허함을 수빈에게서 찾아 채웠다. 다정함이 그리웠고, 애정이 고팠다. 그렇다고 수빈과 바람을 피우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냥, 마음이 가는 곳으로 몸도 향했다. 퇴근 후, 하루를 끝내고 자려고 누우면 이상하게도 눈이 더 말똥말똥 해졌다. 불면증인가 싶어 따뜻한 차를 내려 마셨지만 효과는 없었다. 빈 집은 공허함을 더 크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밖으로 나가 걸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수빈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술집 앞이었다. 들어갈까 하다가도, 일을 하고 있을 그였기에 그냥 그 앞에 앉아있었다. 2시가 땡- 하자 수빈이 나왔다. 알바가 끝나고 나온 수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들어와 있지, 왜 밖에 있어요. —방해될까 봐요- —다음에는 들어와 있어요. 감기 걸릴라. 그는 내게 제 겉옷을 벗어 덮어주며 말했다. 그는 한없이 다정했다. 나는 공허함이 느껴질 때면 자꾸만 수빈의 술집 앞에서 그를 기다렸고, 수빈은 그런 나를 데려다주곤 했다.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 준 날이면, 근심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그렇게 벌써 또 일주일이 흘렀다. 문자 알람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나 오후 6시에 인천공항 도착 예정이야. 집에는 9시쯤이면 도착할 거 같아. 그녀는 메세지를 확인하고, 폰을 덮었다. 밤이 깊다 못해 새벽이 왔고, 오늘도 겉옷을 챙겨 수빈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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