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로 차가 안 막히네. 해가 진 도로 위의 연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노래를 틀었다. 빛과 소금 -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도로 위 자동차들의 조명이 일렁였다.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쓸쓸해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잖아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출장내내 연락이 없던 그녀였다. 먼저 연락해볼까 싶으면 이미 그녀가 잘 시간이었다. 사실은, 그래 사실은 회피했다. 그녀에게서 어떤 답이 올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혹여나 나를 귀찮아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다 내 잘못이었다. 그녀가 외롭게 내버려 둔 내 탓이었다. 내가 죄인이다.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 그대가 내게 전부였었는데- 연준은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차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저녁 공기가 연준을 맞이했다. 노래를 따라 불렀다. - 시계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연준은 예상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나왔어-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집에는 찬 공기만 맴돌 뿐이었다. '아직 퇴근 안 했나...' 그녀는 가끔 퇴근 시간이 늦어질 때면, 종종 9시쯤에 들어오곤 했다. 연준은 빈 집의 공허함이 싫어, 나가서 그녀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겉옷을 걸쳤다. 집안 곳곳에는 그녀의 향기가 스며들어있었다. 연준의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의 향기가 없어질까 봐서 겉옷을 더 세게 여몄다. 그녀의 향이 그리웠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 —빨리 가요- 이러다가 알바 늦겠어요.
—그냥 잘리지 뭐- 연준의 귀에 들리는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눈을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저 멀리 그녀가 있었고, 그 옆에는 그때 봤던 본인을 그녀의 '아는 사람'이라고 칭하던 남자가 있었다.
—하...
—갈게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수빈 씨. 조심히 가요. 그녀는 아직 연준을 보지 못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에게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배웅해 줄 리 없었다. 연준은 팔짱을 꼈다. 화가 났다. 일주일 만이었다, 일주일. 그녀를 못본지 일주일 째였다고. 근데 일주일 만에 마주한 모습이 다른 남자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라니. 머리가 어질해졌다. 그녀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이여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도니, 연준이 서있었다. 그녀는 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9시에 온다던 그였는데. —일찍 왔네?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왜 나와있어? 감기 걸릴라. 올라가자. 그렇게 말한 후 연준을 지나쳐, 앞장서 걸었다. 그러다가, 연준의 손에 걸음이 잡혔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제 쪽으로 나를 돌려세웠다. —할 말 없어? 화가 아주 많이 나 보였다. —고생했어. 힘들었겠다. 영혼 없이 대답했다. 나의 그런 태도에 그는 더 화를 냈다.
—그거 말고 다른 할 말은 진짜 없어?
—내가 뭘 어떻게 말하길 바라는데?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올라가자. 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는 정적만 가득했다. 거울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표정 하나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이런 상황이 싫었다. 집에 도착하니, 그가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아까 그 남자 누구야. —아는 사람. 애매하게 답했다. 하지만 한 치의 거짓말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저 아는 사람, 그게 다였으니까. —그놈의 아는 사람....!! 연준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화를 냈다. —그 아는 사람이라는 놈은 대체 자기가 뭔데 널 데려다줘? 왜 멀쩡히 있는 애인 두고 널 여기까지 데려다주는거냐고 대체 왜!!!! 화를 내는 그에게 화가 났다. 똑같이 소리쳤다. —네가 애인 구실을 못하니까!!!! 네가 날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니까 자꾸!!! 네가.... 말문이 울음에 막혔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었다. —너 잘한 거 하나도 없어 최연준. 지금 이 상황에 네 책임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어? 울며 말하는 나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준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연준이 지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 지겹다 그냥...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어. 그는 방금 본인이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너무 지쳐서, 괴로워서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제가 말하고도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깊게 상처받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여주야... 그런 뜻이 아니라... 한번 뱉은 말은, 야속하게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
—어디 가려고...! —놔! 꼴도 보기 싫다며. 그니까 눈앞에서 꺼져주겠다고!!!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연준을 올려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겉옷을 챙겼다. 그 다음, 가방에 지갑을 넣었다. 연준은 그런 그녀를 잡았다. 그녀가 연준에게 잡힌 팔을 세게 내쳤다. —너랑 있으면, 자꾸만 내가 비참해져. 그녀는 겉옷과 가방, 그리고 아끼는 작은 화분을 들고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쾅- 순간의 큰 소리와 함께 엄청난 정적이 몰려왔다.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잡는다고 잡히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할 뿐이었다. 마음과 말은 자꾸만 정반대로 나갔다. 또 그녀에게 상처만 줬다. 연준은, 나도 이제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관계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있으련지. 일주일의 피곤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소파에 몸을 맡기고 누웠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었다. 그녀가 느꼈던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둘이 살던 집에, 혼자 남겨졌다. 허공에 손을 뻗었다. 손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나는 누굴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했으며, 누굴 사랑했으며, 왜 결과는 이렇게 엉망일까. 괴로운 밤이었다.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싫어 돌이킬 수 없는 그대 마음 이제 와서 다시 어쩌려나 슬픈 마음도 이젠 소용없네 제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연준은 다시 노래를 틀었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어. 연준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우리는,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엇갈렸을까. 왜 이렇게 엇나갈까.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그저 열심히 사랑한 내 잘못이었을까.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처 없이 걸었다. 흐르는 눈물에 앞이 흐릿했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밤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수빈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가 일하는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온기가 필요했다. - 수빈은 퇴근 후 기지개를 피고는, 드디어 퇴근- 하며 가게를 나왔다. 노래를 들으려고 이어폰을 찾으려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보니 술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있었다. 놀란 수빈은 그녀를 일으키며 물었다.
—여기서 뭐해요...? 왜 이러고 있어요.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눈빛이 일렁이다가 이내 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나 집 나왔어요. 아무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물을 수도 없었다. 너무 서럽게 우는 그녀였다. 그녀의 눈물에 하늘의 별들 마저 다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를 품에 가득 안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