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Zion.T - 꺼내먹어요 inst
까칠한 정치프 J
W. 냉포뇨
"자료 여기부터 찾으면 되는 거죠?"
"아, 그거 내가 해도 돼요. 그냥 둬도..."
"아니에요, 저 이거 도와드리러 온 거예요!"
내 말에 고마워요, 하고 작게 미소지어보인 정세운은 나를 소파에 앉혀두고는 다시 제가 일하던 자리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다시 나한테 와서 담요 하나까지 어디서 쏙쏙 꺼내줬다. 그러더니 유유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아까처럼 안경을 쓰고는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원래 이렇게 배려가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었구나, 정세운이. 내가 전부터 어지간히 냉동포뇨 이름만 나오면 도망다녀서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예전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긴 하지. 대체 저 남자는 냉포뇨인지, 따숩따숩한 온포뇨인지... 누가 나한테 정세운에 대해서 논문 쓰라고 하면 진짜 한 페이지도 못 쓰고 내가 지은 별명 목록 나열하다 끝날 각이다, ...뭐 이런, 영양가라고는 1도 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나도 겨우겨우 논문에 집중을 시작했다.
***
"음... 스플린 인저리인 경우는 그럼..."
"다 했어요?"
"네, 이 페이지만 끝내면 돼요!"
"천천히 해요."
자기 할 일을 다 마무리한 건지, 내 옆으로 와서 앉은 정세운이 묻기에 눈으로는 논문을 읽으며 대답을 했다. 벌써 세 시간 넘게 지났다. 난 굉장히 예민하다 지금. 왜냐. 배고프다. 원래 사람이 계속 한 자리에 있으려면 달달한 것도 입에 넣어주고 그래야되는데 지금 나 답지 않게 무려 세 시간이나 집중을 했으니 당연히 배가 고프지. 좀만 더 굶으면 진짜 주변에 있는 걸 아무거나 입에 넣을 수 있겠다는 위기감에 초싸이언처럼 집중해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기 위해 타자를 다다다다 쳐대는 중이다.
근데 정세운은, 자세는 아빠다리를 한 채로 담요를 덮고 야무지게 타자를 치는 내가 뭐 그리 웃긴지, 혼자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을 하고 있다. 모니터만 빤히 보고 있어서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옆에서 웃는 건 느껴질 정도랄까. 애써 모른 척 하며 마지막 줄을 해석하는데, 갑자기 담요 사이로 삐져나온 내 발을 콕 찌르는 간지러운 느낌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는 것도 함께.
"으어, 뭐, 뭐예요 치프님, 갑자기...!"
"와, 발이 진짜 작네요."
"...예...?"
"귀여워서요."
...굉장히 이상한 포인트를 귀여워하시네요. 발이 작다는 말에 키 작다고 놀리는 건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뒤이어지는 말에 또 고대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후다닥 발을 담요 속으로 숨겨넣었다. 아, 존나 정직한 나새끼. 저런 말 들으면 볼이 빨개지는 건 아직 불가항력이다.^^* 정세운은 그걸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건지, 내가 방심했을 때만 노려서 아주 훅훅 들어와주시네. 덕분에 괜히 큼큼, 하고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했다.
으, 다 했다. 하며 노트북을 닫아서 테이블에 올려두고 기지개를 쭉 펴니 정세운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에 손을 뻗어 정리해준다. 수고했어요, 하면서. 뭐, 이제 이런 작은 스킨십은 감당할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배는 안 고파요? 저녁 안 먹었죠."
"음... 네, 사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치프님 오늘 당직이세요?"
"네. 한... 세 시까지는 있어야할 것 같은데."
"그럼 오늘은 같이 퇴근 못 하겠네요... 헙,"
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뭐 사귄지 얼마나 됐다고, 어? 이틀, 사흘. 뭐 이만큼 됐으면서 벌써 정세운이랑 집에 가는 게 익숙해진 건지 뭔지, 나도 모르게 아쉬운 것처럼 입술까지 삐죽여버렸다. 그러다 뒤늦게 제 풀에 놀라 입을 다물었으니망정이지, 이 모습을 윤지성이나 김동현이 봤다면 어디서 앙탈질이냐며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을 게 분명하다. 근데 이놈의 포뇨는 내가 부끄러워 죽겠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엔 웃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소리내서 웃어버린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만지작거리며 몸을 아예 틀어 나와 눈을 맞춘다.
"나랑 같이 퇴근하고 싶었어요?"
"...네, 뭐.. 아마도..."
"아마도?"
"...그럴 걸요...?"
왜, 뭔데, 왜 점점 가까이 오는데? 내가 눈을 자꾸 피하는 걸 끈질기게 따라오는 정세운의 시선 뿐 아니라 점점 내 쪽으로 기울여오는 몸에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몸이 기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 결국 눈을 꼭 감았다. 포뇨는 지금, 날 놀리는 거에 맛 들렸다. 확실하다. 그치만 이렇게 의도를 눈치 깐 이상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내가 , 어? 당해주니까 바보같지, 어?!
사귀고 난 뒤로 어쩐지 정세운에게 지고만 있는 것 같아 괜한 오기와 승부욕(?)이 확 올라왔다. 반쯤 소파에 기대져 버렸지만 감았던 눈을 떠 정세운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뭐, 나도 너 당황시킬 수 있거든, 이 치프 자식. 1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을 맞춘지 3초, 내가 먼저 정세운에게 다가가 입술을 붙였다 뗐다.
쪽, 하고 울려진 민망한 소리 이후 이어지는 정적에 곧바로 후회했지만. 미친 성ㅇㅇ. 돌았나. 괜한 짓거리를 내가... 이 정적 뭔데...! 아주 내적오열에 내적 수치심 등등 별 난리를 다 치다가 일단 이 분위기를 좀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아서 정세운의 어깨를 살짝 밀며 밥, 밥 먹으러 갈까요? 하고 어정쩡하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세운은 이 정적이 다른 의미였는지 뭔지. 내가 제 어깨에 올려둔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제 목에 감싸게 하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아, 아니, 저기, 치프님 여기 병원, 신성한 외과 병동인ㄷ...
하지만 역시 음란마귀는 모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 이기 때문에... 나레기는 어째 슬슬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정세운과 입술이 맞붙으려는데,
'응급실 긴급, 긴급. GS 지원 바랍니다.'
"......"
"...가, 갈까요?"
이렇게 PDA를 부수고 싶었던 적이 있던가.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 좋게 딱 울릴 수가 있는지, 빡침이 한껏 올라오는 걸 뒤로하고 어색하게 가자고 말하니 정세운도 나와 같은 생각인 건지 뭔지, 불만 가득한 눈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 탓에 정세운의 앞머리가 살짝 흐트러졌다. 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머리를 살살 빗어주곤 흐트러진 가운도 정리해주니, 정세운은 아직까지 시끄럽게 울려대는 제 PDA를 주머니에 넣곤 내 머리를 한 번 쓰윽 쓰다듬어주곤 예쁘게 웃어보인다.
"얼른 끝내고 마저 합시다."
***
근처 고속도로에서 10중 추돌사고가 나는 바람에 응급실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나 오늘 분명... 당직 아니었는데... 내 인생에 몇 안되는 칼퇴근 데이였는데. 난 왜 여기에서... 뛰어다니는...
"성 선생님! 여기 CPR이요!"
"네! 가요!"
잠시 멍 때릴 시간도 없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에, 또 발에 불이 나게 뛰어갔다. 바로 환자의 베드에 올라타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하고, 다행히 얼마 안돼 정상으로 돌아온 맥박에 가빠진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봤더니 이제야 좀 정리가 된 건지 한숨을 돌리고 있는 간호사들이 보인다. 그 와중에 한 쪽 베드 쪽에만 사람이 몰려있기에 그 쪽으로 향하니 정세운이 굳은 얼굴로 서있다.
...뭔데 저 표정. 요즘 하도 생글생글 눈이 접히게 웃는 모습만 보다가 오랜만에 이런 모습을 마주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갑게 식은 분위기가 무색하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정세운은 이미 땀을 잔뜩 쏟은 것처럼 보였고, 흰 가운에는 붉은 색 피로 얼룩이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탈 기계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정적을 깬 건 정세운의 낮은 목소리였다.
"김준석 환자, 20시 48분 사망하셨습니다."
"......"
그 목소리에 베드 옆에 서 있던 보호자분들은 그대로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응급실 안에는 모든 걸 잃은 듯한 울음소리와 고개를 떨군 의료진들이 전부였다. 멍하니 서있다, 조심스레 바닥에 쓰러지듯 기대앉은 보호자의 어깨를 조심스레 일으켜 간이 침대에 기대게 했다. ...이런 상황이 한 두번도 아니고, 의국에 있는 시간이 2년, 3년 더 길어질수록 익숙해질만도 한데. 왜 늘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지.
테이블 데스든, 응급실에서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늘 죄송하다는 말 뿐이다. 입술만 꾹 물고있다 상황을 겨우 정리하고 데스크로 향했다.
"엠뷸런스에서부터 몇 번 심정지가 왔었다나봐요, 원래도 뇌종양이 있던 환자기도 했고."
"아..."
"응급실 들어오고 장기 내부 출혈이 심해져서 정 치프님이 바로 수술 들어가시려는데 또 심정지가 와서..."
"...정 치프님 지금 어디 계세요?"
"글쎄요, 아까 상황 정리 된 뒤로 안 보이시는데."
"......"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옷을 갈아입고, 인수인계까지 마쳐 퇴근할 준비를 끝냈다. 이제 이 몸뚱이만 병원 밖으로 내보내면 된다 이 말씀! 가디건을 걸쳐입고 나가려다 정세운의 방에 들렀는데, 어떻게 된 건지 여기에도 없다. 혹시 처치실에 있나 싶어 미어캣마냥 슬쩍슬쩍 문틈으로 봐도 없는 것 같고... 대체 어디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히네. 아까 응급실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는데, 전화라도 해봐야하나. 꼭 묶었던 머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다 비상구로 들어가 정세운의 번호를 누르는데,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악!"
이 미친, 깜짝이야. 너무 놀라 아직 할부도 안 끝난 소중한 폰까지 떨어뜨려버렸다. 한껏 예민보스같은 표정을 짓고 뒤를 돌아보니 그렇게 열심히 찾던 정세운이 벽에 기대어 서있다. ...아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아주 화들짝 놀라 자빠질 뻔한 나를 계단 반대쪽으로 당긴 정세운은 놀랐구나, 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주워준다. 작게 미소짓고 있는데 어째 평소와는 다른 게 이건 뭐랄까... 냉포뇨도 아니고 온포뇨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긴 한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게 확실히 기분이 요며칠 봤던 텐션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성 선생은 퇴근 안 하고 뭐했어요."
"저 이제 막 퇴근하려고... 인사하고 가려고 했는데 방에 없길래 치프님 찾아다녔어요."
"나 찾았구나..."
"치프님,"
"응?"
"...왜 기분 안 좋아요?"
정세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 눈을 올려다봤다. 나도 몰랐는데, 어쩐지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쳐진 정세운 모습을 보고있자니 나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눈빛이 마구마구 발사된 건지 뭔지. 그제야 포뇨는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작게 미소지어보인다.
"아닌데.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정세운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피곤한 얼굴은 아닌데요. 뭐가 문제지, 포뇨가? 나랑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괜찮은 것 같은데,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척 하면 그 와중에도 또 그 미묘하게 사람 속상하게 만드는 표정이 나온다. 흠. 아까 논문 정리할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돼 버린 건 아마,
"아까 김준석 환자 때문에 그렇구나."
"......"
"원래 지병이 있던 환자였대요, 심정지도 처음이 아니었고..."
"...그랬구나."
정세운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병원에 들어오고, 정세운도 나도 수 없이 이런 상황을 겪었다. 테이블 데스부터 응급실에서까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고 힘든 건 나 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냉포뇨는 그냥 나보다 감정을 숨기는 능력이 훨씬 좋았던 것 뿐이었던 거지.
난 정세운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데다, 애초에 위로에도 소질이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라앉은 정세운의 표정을 보고만 있는데, 잔뜩 쳐진 눈꼬리의 포뇨는, 애써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 안 해도 돼요."
"......"
"그냥..."
"네?"
"그냥, 나 좀 안아줄래요?"
안아달라고 말하는 정세운을 올려다봤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 허리를 감싸안자, 내 어깨 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한 번 내쉰 정세운은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아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아이구우, 하는 소리를 내며 정세운의 품을 더 파고들어가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애같은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애같다기보다는 여리다고 해야할까. 정세운이랑 사귀진 않을 때, 그러니까 정세운이 나에겐 그저 냉동 포뇨에 불과했을 때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정세운도 나처럼 이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죄책감을 가지고,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던 걸 이제야 알아버린 거다.
몇 분이나 둘이서 부둥부둥 안고만 있었을까, 쌀쌀한 비상구의 온도가 익숙해질 때 쯤, 정세운이 먼저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봤다.
"나 때문에 퇴근도 늦어지고, 미안해요."
"아니에요. 아직 막차 안 끊겼,"
"...성ㅇㅇ?!"
...아. 개망했다.
***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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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ㅇ<-<...
2. 걱정 마세요...! 시간이 걸려도 정치프는 완결을 볼 예정이니까요!
3. 믿고 기다려주신 분들 모두모두 감사해요.S2
4. 모든 댓글과 추천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5. 금방 또 다시 올게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