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Every Single Day _ 운명
까칠한 정치프 A
W.냉포뇨
"오늘 1006호 김상진 환자한테 모르핀 4ml 투여한 사람 누구예요."
"...죄송합니,"
"또, 성 선생입니까?"
"......"
아니, 이런 옘병. 그래서 내가 지금 죄송하다잖아.
가만히 제 볼펜만 만지작거리며 모르핀 이야기를 꺼내는 정세운에 대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매우 당당하게 내 말을 끊는 바람에 열이 확 올랐지만 고작 2년차 레지던트인 난 정치프 앞에서 한낱 새우젓이다. 그게 내가 입을 곱게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이유고. 정세운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일렬로 서있는 나와 동기들의 모습은 참 봐줄만 했지만, 웃을 순 없었다. 이 그지같은 사건의 발단은 물론 레지 2년차, 그 중에서도 하필 나의 실수가 문제였으니.
'윤 간호사님, 1006호김상진 환자 모르핀 몇 ml였어요? 아까 정치프님이 말씀하신 거 차팅이 안 되어있어서요.'
'아, 그거... 아마 4ml였을거예요. 아까 김쌤이 메모해두신 거 있어요, 여기.'
'아, 그러네요. 그럼 제 이름으로 차팅할게요. 그리고 김동현 보면 휴게실에서 라면 먹자고 전해주세요!'
'네, 성쌤도 밥 좀 잘 챙겨요오. 맨날 얼굴 부어서 놀림 받으시면서.'
'에이, 그 자식 어차피 제가 이겨요. 저 회진 돌러 다녀올게요! 김상진 환자 꼭 4ml체크해서 넣어주세요!'
...김동현 개자식. 오늘 아침 컨디션이 안 좋았던 제가 오전 회진 때 김동현에게 커피를 쏜다는 조건으로 대신 메모를 부탁한 바 있었다. 근데 이 배은망덕한 놈. 커피는 비싼 카페모카로 뽕을 뽑아서 쳐마셔놓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 미친놈이!
제 옆에서 똑같이 고개를 숙인 채 정세운의 고나리를 받고있는 김동현을 남몰래 째리며 입술을 꽉 물었다. 이 새끼... 너는 이거 끝나고 진짜 뒤졌어. 분노에 찬 내가 이를 빠드득 가는 걸 느꼈는지 옆에서 김동현이 움찔한다. 근데, 이놈의 치프 새끼는 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세워둘 예정인지. 빈 복도에 열댓명의 레지 2년차들을 세워두고 몇 분 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다. 참, 잊고있었다. 정세운이라는 치프 새끼는 전부터 진짜 특이했다. 한마디로, 캐해석이 불가능한 사람이랄까.
다른 3년차, 4년차 선배들은 이런 실수가 있으면 차라리 불러놓고 때리거나 욕을 하기라도 했지. 정세운은 그렇지도 않았다. 지금처럼 누가 한 짓인지 밝히고 나면, 거의 십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가만히 세워두고 저는 그 앞의 벽에 기대어 무표정으로 가만히 우리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처음엔 싸이코인가 했다. (사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말도 안 하고 죄책감 느끼게 하는 게 우리한테는 더 고문이라는 걸 아는 거니까. 에이씨. 맞거나 욕을 얻어먹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지.
게다가 정세운은 다른 선배들처럼 우리한테 자연스럽게 말을 놓지도 않고, 존댓말을 쓰며 우리를 깠다. 그게 더 불편하고 사람 기분 그지같게 만드는 걸 잘 알고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곧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호출이 울리면 그 싸이코, 아니. 정치프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똑바로 해요, 레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싶지 않으면.' 과 같은 소름돋는 말을 뱉어내곤 먼저 자리를 떴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중 누군가의 가운에서 기다렸다는 듯 호출이 울렸고, 정세운은 나를 가만히 노려보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와, 시발. 숨막혀 죽는 줄... 동기들은 누군가 잘못해서 함께 혼나는 상황이 한 두번이 아닌지라, 그저 불쌍한 표정을 한 내 어깨를 토닥여주며 각자 흩어졌다.
물론, 그 틈에서 자연스럽게 함께 흩어지려던 김동현은 내게 덜미를 붙잡혔지만.
"아, 저기... 누님... 그, 제가요. 지금 호출이 와서 좀 가봐야..."
"아까 울린 거 네 PDA아니잖아. 어디서 구라를 쳐? 아, 맞다. 아까도 쳤지? 뭐? 4ml? 너 4가 뭔지 모르냐?"
"...미안, 숫자 공부부터 다시 할까? 아, 나 진짜 2ml를 헷갈려서 그랬어. 미안하다, 내가 요즘 잠 못 잔 거 너도 알잖냐. 응?"
"...이 새끼가 진짜, 더 구박도 못 하게..."
"대신 오빠가 커피 내가 두 잔 쏠게. 어? 한 번만 용서해라."
"...겁나 달달한 걸로."
"콜."
...절대 커피에 넘어간 게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아니라면 아닌 거다. 그저 사흘 째 집에도 못 가고 연속 당직을 서고있는 김동현이 겁나 불쌍해서 봐준 것일 뿐이지.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달한 걸 사오라며 무서운 표정을 하고 말하자 자연스레 베시시 웃으며 제 어깨에 손을 두르는 김동현을 흘겨봤다. 어째 항상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혼나긴 같이 혼났으니 상관없다. 일단은 커피 두 잔을 얻어내 기분이 좋아졌으니 그거면 장땡. 도도하게 의국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시간을 체크했다.
와, 세상에. 정세운이 이렇게 고마울 때가. 몇 분 혼나는 동안 시간이 많이 간 건지, 8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계를 보고는 기쁨의 의미로 김동현의 등짝을 퍽 때렸다. 미친, 왜 이래! 하며 제 등짝을 손으로 쓰는 김동현을 보면서도 그저 자꾸만 입술 사이로 새려는 웃음을 삼켰다.
왜냐니. 20분 뒤면 정세운이 벌당을 나에게 다 몰아주는 덕에 몇 주간 받지 못했던, 그 소중한 오프를 드디어 받는 날이니까! 와, 이렇게 행복할 수가. 베싯베싯 웃어대는 저를 소름돋는다는 듯 보던 김동현이 제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돌았네, 돌았어.' 욕을 먹어도 좋았다. 아싸, 행복해. 그것도 존나.
"야, 누나 오늘 집에 간다. 커피는 내일 사줘. 너도 알다시피 내가 20분 후부터 자유의 몸이잖냐."
"아, 너 저녁부터 오프지."
"엉. 진짜 집에 가서 바로 뻗을 것 같다. 피곤해 죽겠어, 진짜. 오늘 잠들어서 오프 끝날 때까지 안 일어날거야."
"야, 겁나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해."
"왜, 나 다른 스케줄 없는데?"
"오늘 한 부교수님 송별회 8시부터잖아."
"...아, 미친."
"빠지는 사람 죽는다고 했던 거 알지? 너 오늘처럼 또 정치프한테 불려가기 싫으면 얌전히 참석하는 게 좋을 걸."
"......"
...아 시발, 하느님. 대체 왜 저한테 이런 그지같은 시련을...! 김동현도 김동현이지만 저 또한 잠을 제대로 자 본 게 오래 전이었다. 오프 받는 순간 집에 가서 뻗으려고... 그랬는데... 시바... 이렇게 계획이 곱게 무산되다니. 순식간에 절망에 빠진 제 얼굴을 보는 김동현은 아까의 내 표정과 비슷했다. 웃음을 존나 열심히 참고있었다는 소리다. 대놓고 웃어대면 쳐맞을 걸 알긴 아는지 끅끅대는 김동현을 노려봤다. 아니 잠깐만. 근데 이거 날짜 정세운이 잡았다고 한 것 같은데.
결국 또 이렇게 날 빡치게 만든 사람은 정세운이다. 레지던트의 가장 높은 년차인 4년차,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이 치프를 맡는다. 정세운은 매우 당연하게, 교수님들과 동기들의 투표에서 80%라는 기적적인 득표율을 보이며 치프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발된 치프는 레지던트 전체를 거의 통솔하다시피 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는 거고. 하여튼 이 치프새끼는 항상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물론 나도 정세운 인생에 도움이 1도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정세운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정세운을 향한 사람들의 평가에서는 안 좋은 말들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말은 차갑게 해도 친해지면 다정하고, 다른 사람들 말도 잘 들어주고, 실력도 뛰어난 건 기본에, 정세운이 웃을 때는 아주 지구가 밝아지는 햇살 미소라나 뭐라나. 가끔은 '오늘 점심은 뭐지요?'하는 귀여움 폭발하는 말투를 사용한다는 소름돋는 썰도 있다. 하여튼 다 정세운 빠들 (나를 제외한 의국 내 모든 여자들) 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남들한테 하는 거 보면 뭐, 그렇게 폭풍칭찬 받을만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단언컨데 나는 정세운 빠가 아니다. 정세운이 나를 빠로 만들지 않았다. 왜냐면 걔는 날 조오오오온나 싫어하니까. 어떻게 아냐고? 뭐, 당연하다. 나한테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처럼 이렇게 내가 오프인 날에 맞춰 떡하니 회식이나 수술을 잡아준다든가, 혼날 때도 내가 혼나는 날에는 꼭 동기 중 한 명이라도 빠져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올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다른 애들 혼낼 때는 몇 명 바쁘다고 빠져도 봐주면서, 나한테만 존나 봐주는 게 없다.) 예전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난 당연히 정세운을 피했고, 그건 정세운도 마찬가지였다.
의문이 하나 있다면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는 것 정도.
이런 일상의 반복으로 인해 이미 내 동기들과 선배들, 후배들까지 나와 정세운 어색한 사이를 눈치챈지 오래이다. 그래서 회식 자리나 세미나만 가면 알아서들 정세운과 나의 자리를 멀리멀리 만들어둔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이럴 때만 사랑스러운 김동현과 윤지성, 뭐 기타 등등이다.
하지만 정세운이 나한테 하는 각종 못된 짓 중에서도 가장 빡치는 건 바로 이럴 때이다. 레지 때 몇 번 없는 오프가 얼마나 금같은지 지 제일 잘 알면서, 꼭 내 오프만 방해한다. 특히 회식은 더 극혐. 술 마시고 자고 일어나면 쉰 것 같지도 않은데 꼭 이렇게 일을 벌인다. 생긴 거는 졸라 바다 속에 사는 포뇨같이 생겨서 꼭 이렇게 사람 성격 버리게 만든다.
처음 봤을 때는 그 유명한 만화캐릭터를 닮았다고 다들 말하길래 되게 귀엽고 순할 줄 알았지. 알고보니 그냥 포뇨가 아니라 냉포뇨일 게 뭐람. 냉포뇨는 사실 나와 김동현만 알고있는 애칭을 빙자한 욕이다.
냉장고 나라 포뇨처럼 귀엽다는 뜻이 아니다. 그냥 존나 냉동 포뇨새끼라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인턴시절부터 이 까칠한 정치프에게 잡혀산지 정확히 3년째.
병원에서 한낱 냉동 포뇨의 가장 맛있는 먹잇감을 맡고있다.
***
까칠한 정치프 A
W.냉포뇨
***
외과 부교수의 송별회 기념 회식 자리, ㅇㅇ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있었다. 항상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든 세운이 앉은 테이블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그녀가 오늘은 저를 특히나 예뻐하는 부교수 덕에 강제로 세운의 옆자리에 착석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던 지성과 동현도 처음에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안절부절 못했지, 회식 시간이 길어질수록 ㅇㅇ는 안중에도 없이 그들만의 술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물론, 멀리 세운의 옆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ㅇㅇ는 세상 아련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겉으로는 세운과 부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티내지는 못했지만, 괜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아니, 따로 떨어져서 곱게 마시면 될 걸. 부교수님은 왜 굳이 날 이 자리로 불러서... 그것도 하필 이 포뇨새끼도 같이.
한숨을 푹 내쉰 ㅇㅇ가 선택한 길은 결국 하나, 제 앞에 놓인 수많은 술병이었다. 세운은 제 옆자리에 억지로 끌려와 술만 주구장창 마시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ㅇㅇ에게 잠깐 눈길을 주다가도 이내 부교수와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와중에도 어지간히 불편한지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 그녀가 세운은 은근히 신경쓰였다.
딱 봐도 저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것 같은 치프, 게다가 대선배님이신 부교수. 그 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레지던트 2년차라니. 충분히 술이 고픈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여태껏 세운이 지켜봐 온 ㅇㅇ는 술에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회식에서 동현에게 업혀가는 그녀의 모습을 본 것만 해도 수 십번이었으니. 세운은 대충 제 생각을 정리했다. 뭐, 알아서 잘 가겠지. 이렇게 많이 마셔도 저번처럼 제 동기 찾아 잘 가겠지, 하고.
ㅇㅇ는 계속 술을 마시고, 세운은 그런 그녀를 애써 모른 척 하며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ㅇㅇ의 동기들과 다른 이들은 각자 저들의 술자리를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8시 조금 넘어 시작한 회식은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드디어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부교수는 제 카드를 세운에게 넘기고는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는 꼰대가 되기는 싫다며 먼저 가버렸고, 주변을 둘러본 세운은 그저 한숨을 쉬었다. 동현과 지성을 포함한 후배들은 이미 정신이 반 이상 나간 상태로 저들끼리 2차를 간다며 신발을 구깃하게 신고있었고, 제 동기들 역시 오랜만에 몸 속으로 들어간 알코올에 기분이 업되어 어깨동무를 한 채 가게를 나가고있었다.
세운은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았고, 차를 가져왔다는 핑계로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기에 다들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분위기였다. 평소대로면 이대로 상황이 종료되었겠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의 옆자리에 있었다.
"치프니임... 우리 동현이 어디 가써여... 어, 동혀니 내가 데려다 줘야하는데!"
"김동현 선생 먼저 갔어요. 우리만 가면 되니까, 좀 일어나죠."
"치프님, 정찌프니임... 지금 가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응? 저 좀 봐봐요..."
"......"
"...어! 이, 이거는, 냉... 냉포뇨다!"
"...뭐요?"
"동혀나!!! 나 살려줘어... 냉동... 냉동 포뇨시키가 나타나써..."
포뇨니 뭐니, 저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제 동기를 찾는 ㅇㅇ를 세운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이럴 때만 다들 발이 빠르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식당을 빠져나간 듯, 휑한 식당 안에는 얼른 식당을 정리하고싶어 어색하게 웃는 주인과 아무것도 모르고 볼이 붉어진 채 헤헤거리는 ㅇㅇ, 그리고 강제로 그녀의 귀가를 책임지게 된 세운만이 남아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세운이 아직도 제 옆에서 발그레한 볼을 한 채 베시시 웃는 ㅇㅇ의 어깨를 감싸 일으켰다. 제 어깨를 끌어안는 손길에도 다리가 풀려 금방 주저앉으려던 그녀를 단단히 지탱한 세운이 난감하다는 듯 이마를 긁적였다. 겉으로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ㅇㅇ를 제 차의 조수석에 앉힌 세운이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해 벨트를 맸다.
"벨트부터 매고 집 주소 불러요, 데려다 줄게요."
"......"
"...성 선생, 자요?"
"......"
"아, 미치겠네 진짜..."
말이 없는 ㅇㅇ에 제 머리를 긁적이던 세운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가 조수석 벨트를 잡아당기던 찰나였다. 한 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벨트를 당기려 끙끙대는 세운의 행동에, ㅇㅇ가 그제야 느릿하게 감았던 눈을 떴다. '치프님-' 하고 작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세운이 벨트에 고정했던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꽤나 위험한 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운이 위험했다. ㅇㅇ의 끈적한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둘의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고, ㅇㅇ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세운의 입술로 향했다.
그 눈빛에 당황한 세운이 뒤늦게 벨트를 놓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 ㅇㅇ가 그의 셔츠깃을 잡아당겼고, 중심을 잃은 세운의 손은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방금까지도 충분히 가까웠던 거리가 이제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세운이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더듬더듬 말문을 연다.
"...저, 성 선생. 지금 이게 뭐하는,"
"맨날 나한테만, 응? 냉동실이 따로 업써어... 냉동 포뇨오... 정치프니임..."
"...냉동, 뭐요?"
"진짜, 콱, 물어버릴라."
"......"
"...이리 와, 우리 포뇨."
이리 와, 하며 세운의 옷깃에 있던 손을 옮겨 그의 목 뒤로 따뜻하게 감싸안은 ㅇㅇ는, 기어코 사고를 치고만다.
물어버리겠다는 말이 장난은 아니었던 건지 세운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물던 ㅇㅇ가 느릿하게 고개를 틀어 제 혀로 그의 입술을 살살 핥는다. 당황한 세운이 뒤로 물러나려해도 그의 목을 더 꼭 끌어안은 ㅇㅇ는 떨어질 줄 모르고, 오히려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더 깊게 파고든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혀를 타고 두 사람 사이에 얽힌다. 한참을 어쩔 줄 모르고 진득한 입맞춤을 이어가기에, 세운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음에도 술에 취하는 듯 아찔함을 느껴 ㅇㅇ의 어깨를 꽉 잡는다.
몇 번의 질척한 소리가 난 끝에, 세운의 목에 감긴 팔에 힘이 빠진다. 자연스레 떨어진 두 입술은 그리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액으로 번들거린다. 제가 지금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알지도 못하는 건지, ㅇㅇ는 그저 풀린 눈으로 가쁜 숨을 내쉰다.
두 사람의 뜨거운 입김이 몇 초간 오고갔을까.
이번엔, 상황이 바뀌었다.
"......"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날카롭던 세운의 눈빛이 위험했다. 어느새 그는 풀린 눈으로,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한 채 ㅇㅇ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세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손을 뻗어 축축한 그의 입술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ㅇㅇ의 립스틱이 세운의 입술에도 잔뜩 묻어있었기에 그 입술에 닿았던 그녀의 손가락도 약간 붉은 색을 띤다.
제 손에 묻은 색을 ㅇㅇ가 스스로 확인하기도 전에, 2차 돌발 사고는 일어나버린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세운을 불편하게 죄던 운전석 벨트가 풀렸고, 이번엔 세운의 입술이 먼저 그녀에게 닿는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 뒤를 살살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옷깃을 꼭 쥐고있는 작은 손을 잡아 제 목을 감싸게 만든다. 고개를 트는 세운에 기다렸다는 듯 두 입술이 더 가깝게 맞물린다. 방금 전보다 훨씬 빠르게 파고드는 세운에 ㅇㅇ는 자연스레 그의 목을 더 끌어안는다.
창 밖으로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창밖의 공기는 빗물과 함께 점점 차가워지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자꾸만 더워질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갈구하듯 혀를 얽고 입안을 헤집는다.
ㅇㅇ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세운은 이 날의 우연, 또는 충동적인 두 번의 돌발 사고가 그들의 병원 생활을 180도 바꿔버릴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이 탄 차는 한 밤의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
1. 나만 괴롭히는 의사 정세운이 보고싶어서 쓴 글입니다.
2. 정세운이 야한 건 그저 작가의 못된 사심...(뿌듯)
3. 단편스러운 느낌이 있지만, 뒤에 내용이 이어지는 연재글입니다.
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