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정엽 _ 왜 이제야 왔니 inst
까칠한 정치프 B
W.냉포뇨
차에서 내린 세운이 조수석에서 잠든 ㅇㅇ를 안아들어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오랜만에 오프라고 수술복이 아닌 사복을 꺼내 입었는데, 왜 하필 그게 치마인 건지. 세운이 제 양복 마이를 벗어 그녀의 무릎부터 감싸두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겨우겨우 한 손으로 제 집의 도어락까지 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오는 동안 마냥 편하지도 않았을텐데. 곤히 잠들어서 제 품을 파고드는 ㅇㅇ가 신기하기도 하고, 그 정도로 피곤했나 싶어 세운은 조금은 미안해진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제 품으로 안기는 ㅇㅇ를 더 끌어안다가도, 푹신한 제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힌다.
"으응..."
침대에 닿은 등에 편안해진 건지, ㅇㅇ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는다. 세운은 그런 그녀를 위해 작은 무드등 하나만 켜둔 채 이불을 덮어주곤 방을 나왔다. 내일 오전타임까지 오프라고 했으니까 알람은 안 맞춰줘도 되려나. 뒤늦게 거실 불을 켠 세운이 물을 한 잔 따라마시고는 제 노트북을 열었다. 아, 논문자료도 찾아야하는데. 세운은 제게 논문 자료를 찾으라 했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질타했다.
짙게 한숨을 쉰 그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벽 한 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새벽 두 시. 집에 오는 것도 오랜만인데, 잠도 못 자고 다시 출근하게 생겼다. ㅇㅇ와 다르게 그는 오전에 수술이 잡혀있었다. 게다가 제 예상보다 한참 늦어진 귀가였기에 쉴 틈이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세운이 씻고 나와 축축히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대충 털며 커피 한 잔을 타 소파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라이기를 켜려다가도 피곤해보이던 ㅇㅇ의 모습이 떠올라 대충 코드를 뽑아 던져둔다. 그러고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 되어있는 것 같은 전공 서적 서너 개를 펴놓고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
"아이스크림..."
"안 돼요. 물 마셔요, 물."
"아아, 왜요... 아이스크림, 어, 아니면 맥주! 요기 아까 있었는데에..."
"하아... 진짜, 술 언제 깨요..."
"응?"
"...아니에요."
냉장고 앞 두 사람의 실랑이는 참 우스운 모양새였다. 물론, 아직까지 술이 깨지 않은 누구때문에 일방적으로 고생하는 냉장고 주인이었지만.
타이핑을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교수에게 보낼 자료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기지개를 펴며 시간을 보자 네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작게 하품을 한 세운이 메일을 보내두고 노트북을 닫는데, 덜컥 소리가 나며 그의 방문이 열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온 건지, 부스스한 얼굴로 멍하니 저를 보고있는 ㅇㅇ의 모습에 세운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던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안심했다. 아, 한 잠 자고났으니 술이 좀 깼겠구나. 아까같이 고생할 일은 없겠지.
세운은 ㅇㅇ 앞에서는 거의 지어보인 적 없던 미소를 어색하게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일어났어요?' 하고 나름 다정하게 물으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거실에 앉아있는 세운을 한 번 보더니 '안녕, 포뇨-' 하며 베시시 웃는 모습에 세운은 멈칫했다. ...아직까지 저, 포뇬지 뭔지 하는 말을 한다는 건, 분명 제 정신은 아니라는 거고. 그렇다는 건, 세운의 시련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했다.
"아이스크림은 안 되고, 맥주는 더 안 돼요."
"......"
"물 줄게요, 마시고 더 자요."
"...돼써, 안 마셔요."
삐진 건지 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제게서 돌아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ㅇㅇ의 뒷모습을 보던 세운이 한숨을 푹 내쉬곤 물 한잔을 손에 들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아직 어두운 방 안에는 제가 켜두고 간 노란색 무드등만 옅게 빛나고 있었다. 취기가 가시지 않았기에 ㅇㅇ는 누구의 집인 줄도 모르는 듯 했다. 그러니 저렇게 세운의 침대에 편하게 누워 얼굴을 묻은 거겠지.
어쩌다보니 ㅇㅇ를 속상하게 만들어버린 세운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술 많이 마셔서 목 탈텐데.
"성 선생, 나 좀 봐요."
"......"
"...아이스크림 내일 사줄테니까, 일단 지금은 물 마셔요."
"......"
세운이 ㅇㅇ가 누운 침대에 걸터앉으며 하는 말에, 말없이 듣고만 있던 ㅇㅇ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아 세운과 눈을 맞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세운이 그저 눈만 꿈뻑이며 지켜보고있으면, ㅇㅇ는 세운의 손에 들려있던 물을 반쯤 마시더니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세운이 머그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다시 ㅇㅇ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은 물기를 머금은 채 빛을 받아 촉촉하게 빛나고있었고, 괜히 혀를 내어 마른 제 입술을 축인 세운은 애써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시선을 피하는 세운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ㅇㅇ는 두 손을 뻗어 세운의 볼을 감싸 자신을 보게한다. 어쩐지 차 안에서의 일이 반복되는, 데자뷰같은 느낌에 세운이 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내리려 했지만, 손에는 그녀가 쥐어준 머그컵이 있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점점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ㅇㅇ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세운은 결국 눈을 감았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는데. 이 여자가 날 그렇게 두질 않는다. 괜히 ㅇㅇ의 탓을 하면서도 세운은 머그잔을 협탁위에 올려두곤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둘 사이의 간격이 거의 사라져, 입술이 부딪히려는 찰나였다. 툭, 하고 제 어깨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세운이 헛웃음을 지었다.
새근대는 숨소리를 내며 잠든 ㅇㅇ를 감싸안았던 세운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혹시라도 머리가 부딪히진 않을까, 조심스레 목뒤를 받쳐 침대에 눕혀준 세운이 이불을 덮어주곤 머그컵을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또, 실수 할 뻔 했다. 남들이 보면 욕할지도 모른다. 절대 실수라는 걸 모르고,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정세운 선생이 여자 하나한테 이렇게 갈대마냥 흔들거리고 있으니.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ㅇㅇ에게만 유독 까칠하게 대했지, 다른 이들에게는 나름 다정하게 대했으니, 봐도 욕할 사람은 ㅇㅇ뿐이었다. 뭐, 기억도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머그잔을 대충 싱크대에 넣어둔 세운이 다시금 노트북 앞으로 향했다. 초록색 검색창을 띄운 그는 반짝이는 커서를 가만히 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두 글자를 입력했다.
'포뇨'.
이미지를 눌러 한참을 찾아보던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의미지, 설마 닮았다는 건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 세운은 이내 노트북을 닫고 소파에 누웠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아, 물어보면 당황하려나. ㅇㅇ가 당황하면 짓는 멍한 표정을 상기시킨 세운이 피식 웃었다.
세운은 쓸데없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저들이 키스한 걸 알면, ㅇㅇ는 또 무슨 표정을 지을까.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아, 죽겠다. 환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더니, 익숙한 병원 냄새...가 아니네.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집보다는 병원 숙직실이 익숙한 탓에 장난처럼 인소대사를 치며 일어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뭐지, 이 과하게 좋은 침대에, 과하게 따뜻한 이불,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향기. 모든 걸 파악하고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후다닥 빠져나왔다. ...시발 뭐야. 이거 뭔데. 이 집 누구 집인데. 나 왜 여깄는데. 어? 머리 속에서는 이미 수백만개의 물음이 던져졌다. 물론 답은 1도 생각이 안 났다. 언제나처럼 필름이 저 멀리로 날아갔으니.
어제 분명, 정세운과 부교수님이 있는 테이블에서 술을 마셨다. 그래, 마셨지. 그것도 존나 많이... 얼마나 들이부었으면 기억도 나지 않으니까. ...아마 부교수님은 늘 그랬듯이 먼저 가셨을 거고. 그렇다면 여긴 윤지성네 집? 아니면 김동현? 아니다. 걔네 집은 술마시려 이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사람은 아마,
[망할포뇨새끼]
출근하면 내 방으로 와요. -10:06
...그래, 망했다.
***
술을 마셔서 그런지 속은 정상이 아니었고, 아침에 도착한 그 카톡때문에 정신도 말이 아니었다. 와, 미친.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 그것도 아주 거하게 쳤어. 하필이면 어제 필름이 끊길 게 뭐람. 병원으로 들어가는 발이 자꾸만 후들거렸다. 포뇨... 아니, 정치프님은 분명 내 출근 시간도 알고있을 거다. 오후 네 시. 평소같으면 개운하게 출근을 했겠지만, 뭐랄까. 1교시 수업 숙제를 안 해 온 학생의 마음이 딱 이렇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호구가 아닌 이상 정세운한테 가면 나는 이 병원 대표 포뇨의 먹잇감답게, 겁나 물어뜯길 걸 알고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정세운의 방까지 가는 길이 평소보다 몇 배는 짧게 느껴졌다. 어제와 같은 옷을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 괜히 죄 지은 사람처럼 탈의실로 가고있는데, 누군가 제 어깨를 친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격한 내 반응에 더 놀란듯한 김동현이 빠르게 저를 스캔하고는 눈을 맞춘다. 모른 척. 모른 척 하자.
"...크흠, 뭐냐."
"뭐긴 뭐야. 회진 돌고 오다가 너 보이길래."
"그, 그렇구나. 그래. 그럼 가던 길 가렴. 안녕!"
"뭐? 야, 성ㅇㅇ!"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탈의실로 달려들어왔다. 미친, 들킬 뻔. 아니야, 눈치빠른 윤지성이면 몰라도, 김동현은 아마 절대 모를 거다. 재빨리 환복을 마치고 잘 다려둔 가운을 걸쳤다. 머리를 대충 묶고 거울을 보니 입술이 부어있다. ...뭘 했길래 또 이렇게 부었냐. 설마 정세운 차 시트라도 물어뜯은 건 아니겠지. 미친.
사실 김동현이나 윤지성은 다 알고있다. 나의 개같은 주사를. 물론 개같다는 게 멍멍이같다는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항상 뭔가를 열심히 물어뜯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동현의 팔뚝이라든가, 윤지성이 아끼는 그, 파랑파랑한 옷자락이라든가... 이미 전적이 몇 번 있기에 더 불안한 거다. 게다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에 대한 기억도 날아갔으니.
오늘따라 방문 앞에 적힌 '정세운'이라는 반듯한 세 글자가 원망스러웠다. 과거의 나년아. 왜 하필 정세운이니. 차라리 윤지성 집 포뇨 인형을 물어뜯었으면 몰라. 왜 하필 외과 최고 까칠이 정세운이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노크를 했다. 안에서 들리는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 정세운의 앞에 섰다. 차트를 보는 건지 말없이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볼펜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왜 말을 안 해, 불러놓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치프님. 저 왔습니다."
"...아, 잠깐 거기 앉아있어요."
"네..."
정세운이 눈짓하는 소파에 가서 털썩 앉았다. 와, 사람 심장 떨리게. 왜 또 앉으래, 그냥 대충 할 말 하고 내보내줘, 제발. 정세운이 들을리 없는 내 마음속의 외침은 오늘도 존나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달달 떨리는 다리를 애써 고정하는데, 정세운이 뭔가를 들고와 내 앞자리에 앉는다. 그에 눈만 꿈뻑이자 내게 제가 들고있던 서류들을 건넨다. 뭐지. 오자마자 잔뜩 까일 거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전개인데.
"GB empyema..."
GB empyema - 화농성 담낭염
"네, 화농성 담낭염 맞아요. 내일 당장 OP인데, 윤지성 선생이 세미나가 잡혔다네요."
OP-Operation, 수술
"아..."
"성 선생이 어시 좀 서줄 수 있을까 해서. 혹시 내일 수술 있어요?"
"없습니다. 근데 저, 이 케이스 환자 OP는 처음인데..."
"괜찮아요, 나도 어시로 같이 들어갈 거니까. 부담스러우면 김 선생한테 넘기고요."
아, 잠깐만. 정치프 너도 들어오신다구요? 그게 제일 안 괜찮은데. 그게 제일 문제인데요. 차트와 씨티 결과지를 살펴보니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케이스의 환자였다. 안 그래도 긴장될텐데, 정치프까지 들어온다니. 눈치보여서 어떻게 하냐고, 수술을... 입밖으로 내지 못할 말들을 삼키곤 애써 웃어보였다. 그래, 죄지은 자가 뭐 별 수 있냐. 까라면 까는 거지.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회진 끝내고 내 방으로 와요."
"네, 그럼 저 이만 나가보겠,"
"잠깐 앉죠, 아직 할 얘기 더 있는데."
...제발 이 용건이 끝이라고 해줘, 제발. 내 마음 속 외침은 또 다시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차트를 들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려던 나는 정세운의 목소리에 강제착석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에 열심히 다른 데다 시선을 두었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시발, 지금 나 또 혼나는 중인 건가. 어제 제 실수로 복도 한 가운데에서 혼나던 순간같아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선수를 쳐야하나. 문 밖으로 들리는 작은 소리들을 빼면 방 안은 정적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과 이런 분위기였다면 어색함이라고 표현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대가 정세운, 즉 냉동 포뇨이기에, 분위기는 그냥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온도가 아주 쭉쭉 내려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에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어제는 제가 정말 죄송했고, 어, 감사했습니다."
"기억은 나요? 어제 일."
"아니, 제가 원래 진짜 잘 안 그러는데... 하필 어제 그, 필름이 끊...겨서."
"......"
...저 표정은 확실하다. 내가 분명 미친 사고를 친 거야. 딱 지가 아끼는 옷 물어뜯었을 떄의 윤지성 표정이었다. 대답 없는 정세운에 나도 입술을 꼭 물고 고개를 숙였다. 망했다, 망했어. 레지던트 끝나기도 전에 다른 병원 가고싶냐는 그거, 어쩌면 내 얘기일지도.
"미안한 거 알면 됐으니까 고개 좀 들죠."
"......"
"줄 거 있어서 부른 거예요."
"...네?"
"저기 냉동실 열어봐요. 포뇨인지 뭔지 그건 없어도, 어제 그렇게 찾던 거 넣어뒀으니까."
"......"
"가지고 가요. 난 회진이 있어서."
정세운은,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대로 제 방문을 열고 빠져나가버렸다. 정세운의 뒷모습이 어째, 양쪽 귀가 새빨개졌던 것 같기도...
아니, 잠깐만. 포뇨?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미친. 미친 거다. 정세운이 포뇨를 알고있을리가 없는데. 아니, 정세운은 알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포뇨라는 그 단어를 곱게 불렀을리가 없다. 미친 포뇨, 냉동 포뇨, 그것도 아니면 포뇨새끼...? 이 중 뭘 말했든 난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내 영혼은 이미 제 주인 품을 떠난지 오래였다. 머리 속이 텅 비어, 멍한 얼굴로 터벅터벅 한 켠에 자리한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냉동실을 열었다. 텅텅 빈 냉동실 한 가운데에는, 정세운과는 단 1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아이스크림이 든 쇼핑백과 작은 쪽지 하나가 있다.
[달달한 거 좋아한대서요.]
주인을 닮아 정갈한 글씨체로 적어둔 노란색 포스트잇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뭐지. ...어제 내가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뭘 얼마나 난리를 쳤길래 이런 걸 주는 거야. 그렇게 냉동실 문을 열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 문을 얼른 닫지 않으면 전기세가 존나 나올 거라는 냉장고의 삐- 하는 소리에 급하게 문을 닫곤 정세운의 방을 빠져나왔다.
시발, 이런 식의 두근거림은 참 오랜만이다. 이건 뭐, 신종 비꼬기인가. 내가 널 어제 집까지 데려가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떼를 써? 하고 말하는 뭐 그런 비꼬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정세운의 스윗함은, 하루종일 내 정신이 바깥으로 나돌게 만들었다.
멍하니 발을 옮겨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머릿속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어제 뭘 얼마나 사고를 친 걸까. 누가 나한테 와서 다 말해줬으면, 하면서도 듣기가 무섭다. 어제도 분명 개가 되었을 내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야, 성ㅇㅇ. 무슨 생각 하냐."
"어? 어어, 아니. 뭐..."
"그건 뭐냐, 웬 아이스크림?"
"...몰라, 나도."
"뭔 소리래.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야, 나 회진 돌고 올테니까 저녁 같이 먹어."
"어어, 그래. 응..."
김동현은 나를 처음 보는 환자 보듯이 했다. 이내 저를 따르는 인턴 몇몇을 데리고 사라지긴 했지만. 나도 데스크 안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뒤늦게야 인사하고는 아이스크림을 데스크 냉동실에 넣었다. 성ㅇㅇ, 정신차리자. 회진 돌아야지. 애써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는 정세운의 모습을 지우려 고개를 저었다. 또 정신을 팔아먹었다가는 어제처럼 내 동기들을 다 끌어모아 함께 혼날 게 뻔했으니. 억지로 웃으며 저를 기다리던 인턴들을 데리고 병동으로 걸어들어갔다.
제발, 사고 좀 치지말자.
***
[냉포뇨 치프님]
김 선생 -09:51
혹시 성 선생 취향 잘 알아요? -09:51
09:52- 네? 성ㅇㅇ요?
09:52- 갑자기 무슨 취향을...
[냉포뇨 치프님]
그러니까 -09:54
그런 거 있잖아요. -09:54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요. -09:55
09:56- 아
09:56- 걔는 달달한 거 좋아해요
09:56- 초딩 입맛이라서요
[냉포뇨 치프님]
아 고마워요. -09:57
근데 되게 서로 잘 아ㄴ -09:57
아닙니다 고마워요. -09:58
동현은 갑작스러운 세운의 카톡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애매한 답장은.
의아함에 인상을 찡그리던 동현이었지만, 병원에서 보장하는 눈치고자인 그의 관심사는 이내 바뀌었다. 아, 성ㅇㅇ 이 자식. 언제 또 내 핸드폰을 건드린 거야. 제가 설정해둔 [정치프님] 이라는 단순한 이름을 [냉포뇨 치프님] 이라고 바꿔두며 혼자 실실 웃었을 ㅇㅇ를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아,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야지.
***
1. 생각보다 많은 첫 글 댓글 수에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아쥬금.)
2. 댓글과 추천 모두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3. 작가는 닥냉 정세운의 악개입니다. 모두 냉포뇨한테 입덕하세요.
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