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허각, 지아 _ I need you inst
까칠한 정치프 D
W.냉포뇨
7월이 되고 ㅇㅇ는 잠을 포기했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에 시원한 병원 안에 있는 건 어쩌면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스테이션을 탈출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지성과 동현은 이미 한 번씩 오프를 썼지만, ㅇㅇ는 저번에 있던 당남염 수술 사건(?)으로 인한 벌당이라는 이유로 벌써 7일 째 숙직실과 병동만을 맴돌고 있었다.
뭐, 이게 내 운명이겠거니- 하며 받아들인 그녀는 일주일 동안 고작 30시간도 자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 그것도 한 번에 자는 게 아니라 몇 십분씩 나눠서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잠깐 좀 쉴만하면 들이닥치는 응급실 환자들과 울리는 PDA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그래서인지 벌당이 시작되고 며칠 뒤부터 ㅇㅇ는 아예 숙직실에도 가지 않기 시작했다. 왔다갔다 하는 게 더 피곤하다며 스테이션에 간호사들과 함께 앉아 책이나 차트를 붙들고있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남몰래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오늘 새벽에 들어온 스플린 인저리 환자 주치의 누구죠."
스플린 인저리 - 비장 손상
"아마 성ㅇㅇ 선생님이실 거예요, 최근에 들어온 새벽 환자들은 거의 다 성 쌤이 보고계셔서요."
"...성 선생 지금 어디 있어요?"
"하도 안 주무시길래 정말 쓰러지실까봐 숙직실로 보냈어요, 제가."
"......"
"괜찮다고 하는 걸 억지로... 성 쌤 필요하시면 지금이라도 콜 할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다급하게 내선 전화를 붙잡은 간호사를 제지한 세운이 스테이션에서 돌아섰다. 참 모순적이었다. 그렇게 단호하게 벌당을 서라고 얘기할 떄는 언제고,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는 그녀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되었으니. 그러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ㅇㅇ때문이라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주변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 그의 동기들은 세운이 요즘 너무 이상해진 것 같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일주일 째 혼자 야간 당직을 서질 않나, 스테이션을 자꾸 어슬렁거려서 말이라도 걸면 화들짝 놀라 다른 곳으로 가버리질 않나... 그저 곧 있을 전문의 시험 때문에 애가 많이 힘들구나, 하며 혀를 차기 일쑤였다.
방금도 마찬가지였다. 새벽 5시, 야간 당직인 사람들만 빼면 모두들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세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붙잡고 있다 겨우 일어나 스테이션으로 향했던 거였다. 하지만 본래 목적이었던 ㅇㅇ는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하고 다시 제 방으로 들어왔기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세운이 이렇게 열심히 삽질을 하는동안, 병원에서 ㅇㅇ는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열흘이 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쉬지도 않고 일과 공부를 반복하는데, 그 와중에도 수술실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는 거다. 아무리 사고뭉치다, 덜렁댄다 얘기해도 한 번 했던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버티는 ㅇㅇ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들으려해도 자꾸만 들리는 이런 이야기들 때문에 세운은 더 죽을 맛이었다. 일주일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악마와의 거래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에 세운은 수술실 안에서 ㅇㅇ의 실수에 화가 났었다. 그러게 왜 쉬지도, 자지도 않고 수술에 들어오냐고, 사람 신경쓰이게. 하지만 세운은 제가 화난 걸 ㅇㅇ의 탓으로 돌리려 했지만, 사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그녀를 수술에 들어오게 한 자신에 대한 화가 났던 것이라는 걸 인정해 버렸다. ㅇㅇ의 당직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고, 그 피곤한 애한테 까다로운 수술을 맡긴 제 자신에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게 서툴어 그녀에게 그렇게나 미운 말들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벌써 엎질러진 물이고, ㅇㅇ는 세운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는 건지 죽어라고 일만 해댔으니.
게다가 ㅇㅇ는 그 수술 이후 세운만 보면 화들짝 놀라 굳어있다가 작게 목례를 하곤 곧 제 동기들 뒤에 숨어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 뒷모습 회상하던 세운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지. 안 그럼 제가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
***
"윤 간, 혹시 성 선생..."
"......"
스테이션은 조용했다. 다섯시 반, 새벽 동이 트고있는 시간이었다. 당직인 윤 간호사는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제가 그렇게 보고싶던 얼굴이 있다.
책을 읽다 잠에 든 건지, ㅇㅇ는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있었다. 그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세운이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꼭 닫았다. 저렇게 자면 허리 아플텐데. 그는 최대한 작은 움직임으로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가, ㅇㅇ의 옆자리에 앉았다.
"성 선생, 자요?"
"......"
"...깨지마요."
누가 지나가다 봤다면 참 웃긴 상황이었을 거다. 잠들어있는 사람한테 깨지말라고 하는 건 뭐야. 게다가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그녀에게서 잠을 앗아간 장본인이었으니. 제 손을 몇 번 그녀의 눈 앞에 흔들어본 세운이 꾸벅꾸벅,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대로 책에 얼굴을 박을 것 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었다. ...뭐 받쳐줄 게 없으려나.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세운의 눈에 간호사들이 가끔 사용하는 담요가 들어왔다. 세운이 그 담요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어어...!"
"......"
ㅇㅇ의 고개가 앞으로 푹 숙여졌다. 그대로 책상과 박치기 하려는 그녀의 얼굴에 세운의 손이 닿았다. ㅇㅇ의 볼을 조심스레 받친 그 손이 어정쩡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책상에 부딪혀서 깰 뻔 했다. 그럼 또 옆에 있는 저를 보고 얼마나 놀랄까. 놀라고 나면 그 다음에는 숙직실로 도망가겠지.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 떠올라 세운은 그녀가 깨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운은 조심스레 반대쪽 손으로 그녀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담요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스테이션에 이 담요 두신 간호사님, 진짜 고마워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한 세운은 혹시라도 ㅇㅇ가 깰까 느릿느릿한 손길로 그녀의 볼에서 손을 떼고 대신 잘 접힌 담요를 받쳐주었다. 조금 달라진 자세에 잠깐 낑낑대던 ㅇㅇ가 이내 편한 자세를 찾은 건지, 다시금 달달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세운은 그제서야 베시시 웃었다. 며칠 전, 제 침대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제 집인냥 잠들었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아무데서나 잠들면 안 되는데... 또 흔들리잖아요, 내가. 이 나이 먹고 자는 여자한테 도둑뽀뽀나 하긴 싫은데. 세운은 살짝 몸을 빼 조금씩 밝아지는 병원 복도를 살펴봤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사람 한 명 없이 휑했다.
얼마만이냐, 이렇게 편하게 얼굴 보고있는 게. 다시금 세운이 ㅇㅇ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묶이지 못하고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누가 치료해줬는지, 반창고도 예쁘게 붙였네. 참나. 이젠 반창고 붙인 것도 예뻐 죽겠으니... 중증인가. 세운은 ㅇㅇ의 그 작은 상처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ㅇㅇ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이렇게 저를 챙기는 게 매일 냉동 포뇨라고 욕하는 그 얼어죽을 치프자식이라는 걸. 피곤함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잠든 그녀를 보고 있던 세운은 입고있던 제 가디건을 벗어 작은 어깨에 덮었다. 품이 큰 가디건에 파묻힌 것 같은 그 모습에 세운은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렇게 팔불출같은 모습으로 몇 분이나 더 그 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여섯 시가 다 되어갈 때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뇨 갑니다, 이번 주 당직 수고 많았어요."
"......"
ㅇㅇ는 듣지도 못할 말을 하는 세운이었다. (물론 들었으면 경악했을 거다.) 그의 입에서 나온 '포뇨' 라는 단어는 어색했지만 어딘가 어울렸다. 제가 말하고도 스스로 포뇨라 말한 게 어이가 없는지 세운은 작게 웃어버렸다. ㅇㅇ의 앞에 있으면 자꾸만 웃음이 나는데, 여태 3년 동안은 어떻게 그렇게 한 번을 예쁘게 안 웃어줬는지가 오히려 의문일 정도였다.
ㅇㅇ는 포뇨라는 단어를 세운을 욕할 때 주로 사용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3년동안이나 접점 하나 없었던 둘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가 의도한 결과이긴 했지만... 세운은 '포뇨'를 그런 그들 사이에서의 유일한 애칭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애칭이라기엔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매우 격하게 사용하긴 한다. (포뇨새끼, 냉동 포뇨 등등) 그닥 달달하진 않다는 말이다. 그래도 ㅇㅇ가 저에게만 부르는 호칭이 있다는 게 세운은 자꾸만 애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아, 하지만 이건 절대적으로 세운의 생각이다. ㅇㅇ에게 포뇨는 아직, 정세운 욕할 때 써먹는 말. 그 외의 다른 의미 따위는 없었다.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드디어 벌당이 끝났다. 시발,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런 게 행복인가요? 정확히 아침 8시에 당직에서 해방받고, 나는 집에 갈 틈도 없이 그대로 숙직실로 향했다. 직원용 샤워실에서 씻고 나와 경건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편하게 누워보는 게 진짜 얼마만이냐. 이불을 덮으니 행복이 밀려오네... 맨날 가운도 못 벗고 새우잠이나 쳐잤는데... 하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는 혼자서 지옥같은 일주일 벌당을 이겨낸 내 자신에게 폭풍 감동에 빠져있다가도 거의 5초만에 잠에 들었다. 그리곤 오후 세시 즈음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너무 오랜만에 잠을 자서 그런가, 상쾌함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시까지만 병동으로 가면 되니까 여유롭네. 오랜만에 눈을 뜨고도 한참을 밍기적거리다 겨우겨우 씻고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근데 저게 뭐야, 우리 사랑스러운 동현이 아냐. 오늘따라 저 멀리 있는 김동현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김동현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와다다다 달려가 뒷목을 확 끌어당겨 안았다. 강제 백허그였다. (백허그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헤드락에 가까웠다.)
내 행동에 으어걱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낸 김동현은 날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봤다. 근데 뭐, 맨날 저딴 눈빛이니까 이제 좀 익숙해진 것 같기도. 헤헿. 정말 정신나간 애처럼 베시시 웃어보였더니 무섭다며 내게서 한 발짝 떨어지는 김동현에,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아침... 아니, 오후부터(?) 만나자마자 티격태격대는 우리를 엄마미소로 보시는 수간호사님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김동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쭈쭈. 우리 동현이 누나가 많이 애끼는 거 알지? 흡사 변태같은 표정으로 김동현에게 또 한 발 더 다가가자 한숨을 쉰다.
"진짜 말로 할 때 그만해라. 만나자마자 왜 이러는데. 어? 나 또 뭐 잘못했냐."
"에이, 모르는 척은. 동현아... 누나 진짜 감동받았다?"
"감동? 뭔 소리야, 갑자기."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뽀뽀라도 해줄까?"
"...미쳤나 진짜."
쨔식. 부끄러워하기는. 아침에 가디건 덮어준 거 너쟈나... 누나 감동이어써... 나의 쓸쓸하고 외로운 뒷모습이 보호본능을 자극한 거구나? 헤헤. 날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동현에게 당당하게 까만색 가디건을 내밀었다.
새벽 즈음, 스테이션에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눈을 감았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수쌤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 어깨에 걸쳐져있던 무언가가 툭 떨어졌었다. 까만색 가디건. 사이즈를 보면 남자 껀데... 누구 꺼지. 한참을 고민하던 내 기억을 스쳐지나간 건 김동현이었다. 오늘 아침에 수술 있다고 일찍 온다고 했었으니, 당연히 이 가디건의 주인은...
"자, 네 옷. 덕분에 따뜻하게 잘 잤다. 내가 겁나 사랑하는 거 알지?"
"내꺼 아닌데?"
"에이, 뻥치시네. 진짜로?"
"어, 아니라니까. 나 그런 옷 없어."
"...그럼 누구 꺼야? 윤지성 오늘 오프잖,"
"그거 내껀데요."
"......"
...미친. 뭐지.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차트에 시선을 고정한 정세운이 보인다. ...시발 잠깐만, 이게 무슨 상황이죠. 내 손에 들린 까만 가디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김동현과 눈을 마주쳤다. 이 자식도 당황했다. 김동현과 나는 둘 다 눈이 동그래진 채 입모양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쳤다. '뭔데 이거? 미친!' '내꺼 아니라고 말 했잖아!' 표정을 아주 실시간으로 바꿔가며 난리를 치는데, 언제 또 내 옆까지 온 건지. 우리 둘 사이에 익숙한 하얀 가운이 하나 더 끼어들었다.
"안 줘요?"
"...네?"
"내꺼라니까, 그거."
"아, 아아. 네, 여기..."
왼손에 들고있던 가디건을 빛의 속도로 정세운에게 내밀었다. 감사한다고 말을 해야하는데 너무 당황해서 입이 안 떨어진다. ...이거 너무 예상치 못한 전개 아니냐고. 왜 하필 이게 포뇨 옷이야...? 왜? 아니 애초에 포뇨 옷이 왜 내 어깨에 덮여있었는데? 이해되지 않는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 뭐, 김동현 표정 보니까 얘도 나랑 같은 생각인 것 같고. 둘 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데, 태연하게 들고있던 차트를 데스크에 내려놓은 포뇨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자연스럽게. 그냥 존나 자연스럽게 다른 데를 보면 된ㄷ...
"성 선생."
"네?"
"감동받을 상대가 잘못된 것 같지요?"
"어, 그게, 그러네요... 네에..."
"나한텐 뭐, 다른 말 안 해주네요? 뭐, 뽀뽀해준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김 선생한테는 잘만 하던데."
"...아니, 어..."
...아니 오늘 포뇨 왜 이러는데. 나 뭐 또 잘못했니? 벌당 끝났는데 또 뭐 벌 받아야하는 거야? 잔뜩 당황한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포뇨 자식은 스테이션에서의 제 업무가 끝난 건지 차트를 내려놨다. 그러고는 그대로 자기 꺼라고 주장하는 가디건을 곱게도 챙겨들고 지 방으로 사라졌다. 오늘 컨셉은 달달구리 포뇨인가. 아님 그냥 시비털고싶어서 그래? 뭔데 이거.
정세운이 사라진 뒤 스테이션은 말 그대로 폭풍이 쓸고지나간 자리였다.
"...니가 봐도 이상하지?"
"응. 겁나게."
그래, 내가 볼 때만 저 포뇨가 이상한 게 아니다. (심지어 눈치고자 김동현이 이상하다고 하면 정말 심각한 거다.) 진짜 소름돋게 왜 그러는 거야, 나한테. ...아니, 오늘은 진짜 처음부터 이상했다. 애초에 나한테 자기 가디건을 덮어준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뭐 감동, 어쩌고 하는 걸 보니까 아마 나랑 김동현이 대화하는 걸 처음부터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거 참. 기분 되게 묘하네. 가디건의 주인이 너무 예상치 못한 사람이라 그런가. 문득 며칠 전 정세운이 아이스크림을 줬을 때 귓가가 붉어졌던 모습도 문득 떠올랐다.
요즘들어 왜 이러지. 정말. 여태까지 지내온 아주아주 멀었던 3년의 거리를 좁히려는 정세운의 행동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평소의 그 냉동 포뇨같으면 아이스크림은 무슨, 집에서 재워주는 것 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게다가 이 가디건도. 절대 우리가, 아니... 우리라고 하니까 또 묘하네. 정치프와 나는 그럴 사이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당직 두 시간 남았는데 쳐자냐고 뭐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인데.
여튼 요즘, 정세운과 나 사이에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 망할 회식 날을 기점으로 말이다.
지금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난 일단 포뇨 방에 갈 일이 하나 생겨버렸다. 저 따위로 말을 툭툭 던져놓고 그냥 가버렸으니, 가서 고맙다는 말을 안 하면 난 진짜 쓰레기가 되는 거니까. 정세운 앞에 또 쭈구리처럼 서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아메리카노나 사서 들러야겠다.
아아, 어무니 아부지. 오늘도 딸은 포뇨한테 물어뜯기러 갑니다. 외과 대표 먹잇감 답게. 망할.
***
똑똑-
"들어오세요."
"저기, 치프님..."
쭈구리같은 내 목소리에 정세운이 컴퓨터 화면에 고정하고있던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그렇게 빤히 보지 마세요, 기분 이상하거든요.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고는 빼꼼 내밀었던 몸을 억지로 질질끌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또 이렇게 정세운의 홈그라운드에 입성해버렸다. 하여튼 여기만 오면 되게 불리해지는 기분이라니까.
"이거, 아메리카노인데..."
"그런데요."
"그, 아까 동현이꺼 사는 김에 같이 샀어요! 새벽에는 진짜 감사했습니다..."
"......"
괜히 아까 상황을 생각하니 또 멜랑꼴리해지는 기분에 괜히 말꼬리를 늘였다. 사실 김동현은 핑계이다. (그 자식은 오히려 나한테 커피를 사야하는 입장이지.) 내가 정세운의 책상에 아메리카노를 올려놓으며 말하자, 정세운은 김동현의 이름에 잠깐 멈칫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실게요."
"네, 저 그럼 가보겠습,"
"잠깐만요."
"...네?"
뭐요. 또 뭔데요. 제발 저 좀 내보내주세요. 아직도 저한테 물어뜯을 게 남으셨나요...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려 뒤를 돌았다가도 정세운의 목소리에 다시 책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세운은 기껏 나를 불러놓고 쉽게 입을 뗴지 않는다. 뭐 그렇게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본의 아니게 이어지는 정적에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그, 성 선생 이번 주말에 오프인 걸로 아는데."
"이번 주... 아, 네 맞아요."
"약속 없으면, 나랑 병원에서 잠깐 보죠."
"네, 뭐 병원 좋아요... 아니, 네? 병원이요?"
"다음 주에 한교수님이랑 압뻬 수술 들어간다면서요. 저번처럼 헤매면 교수님도 이제 안 봐주실 텐데."
압뻬 - 급성충수돌기염
"아..."
"펄스 스트링 수쳐 미리 알려줄까해서요."
펄스 스트링 수쳐 - 대동맥 봉합법의 한 종류
순간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아니. 진짜 자꾸 왜 이래 나한테. 신종 괴롭히기 방법이야? 오프 때도 쉬지않고 괴롭히겠다, 뭐 이런 건가. ...진짜 존나 당황스럽다. 정말 오늘은 뭐... 달달이 컨셉이에요? 후배를 아끼는 참된 선배의 달달함 뭐 그런 건가? 안타깝지만 전 오프 때까지 병원에서 썩고싶지가 않은데요.
...아, 근데 또 한교수님이면 좀 걱정되긴 한다. 일주일 전에 내 수술실에서의 난리를 친 날도, 그 분께서 집도하셨으니까. 게다가 정세운이 말한 봉합법은 내가 좀 약한 부분이기도 했다. 컷할 때 또 정신 못차리고 이리저리 헤멜 게 뻔해 영상 보면서 시뮬레이션 좀 할 생각이긴 했는데. 정세운의 말에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으로 고민하다보니 자동으로 침묵이 생겨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저 제안에 거절을 놓기가 애매하다는 거다. 이것저것 나서서 알려주신다는 게 엄청 감사하긴 하다. 게다가 정세운은 수술실에서 어떤 집도의가 들어와도 침착하게, 완벽하게 어시를 하는 걸로 유명하기까지 하니까. (그래서 더 재수가 없다. 사람이 빈틈이 없어 짜증나게.) 그치만, 오프란 자고로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존재하는 것. 포뇨한테 이걸 배운다면 도움은 되겠지만 하루종일 기빨리면서 눈치를 봐야하는데...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정말!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1만큼도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다. 아, 잘해주는 게 아니라 관심을 준다고 표현해야 맞겠네, 원래는 아예 모르는 사이마냥 살았으니. 포뇨자식, 혹시 저번 회식 때 나한테 뭐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가? 그래서 이러는 거라면 이해하지만 그때 일을 내가 알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망할 필름이 끊겼기 때문에. 하여튼, 정세운은 요즈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사람이 냉동고마냥 차갑다고 해도 그렇지. 저 정도로 생각이 읽히지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진짜.
저런 정세운의 태도에 대처할 때 생각할 건 딱 하나다. 난 이 병원, 이 외과 병동에서 슈퍼 을이고, 정세운은 슈퍼울트라 갑이라는 거. 그래서 난 오늘도 자진해서 먹잇감이 된다.
"...성 선생이 바쁘면 어쩔 수 없,"
"아니, 아니요! 시간 있어요, 네... 엄청 많죠, 시간..."
"정말이에요?"
아니요 존나 거짓말인데요. 병원 너무 시러! 봉합도 존나 시러! 포뇨도 시러!!!
"...네, 토요일에 오면 되는 거예요?"
"토요일 괜찮네요. 시간은 내가 수술 일정 좀 보고 따로 문자 넣을게요."
...이렇게 이번 주의 내 오프도, 또 다시 포뇨에게 강제 반납이다.
감사합니다, 포느님. 제기랄.
***
1. 오늘의 세운이는 냉일까요 온일까요?
2. 답은 조경수역 정세운입니다. 워아이니.
3. 곧 암호닉 신청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4. 모든 댓글과 추천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5.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