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블락비 _ 로맨틱하게 inst
까칠한 정치프 F
W.냉포뇨
"응, 거기서 왼손으로 두 번 감아요."
"이렇게요?"
아. 더럽게 어렵네. 정세운이 할 때는 그렇게 쉬워보이던 게 내가 하니까 엄마 화장 따라하는 유치원생이 따로 없다. 한 마디로 마음처럼 안 된다는 거다. 정세운은 답도 없이 헤매는 내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화 한번 내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다가, 결국 자리를 옮겨 내 옆에 앉았다. 순간적으로 훅 끼쳐오는 정세운의 체향이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았다. 가까워진 거리에 애써 수쳐 세트에만 눈길을 고정했다. 정세운은 손을 어색하게 움직이는 날 한참 보고만 있다, 제 왼손을 뻗어 내 손등을 감쌌다.
"아니, 이렇게."
"아..."
손등 위로 겹쳐진 손이 아까보다는 차가웠지만, 그래도 내 손에 비해 따뜻했다. 정세운은 내 손을 움직여 봉합 바늘을 감았고, 난 또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아, 하는 의미없는 목소리만 뱉었다. ...성ㅇㅇ, 침착하자. 정세운은 포뇨야. 존나 냉포뇨라고. 다정하다고 착각하지 말라니까.
"...그럼 여기까지 하고 타이 하면 되는 거예요?"
"네, 타이 해봐요."
"......"
"...응, 타이는 깔끔하게 잘 하네요."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수고하셨어요 치프님..."
따뜻한 손이 떨어지자마자 참았던 숨을 내쉬고 평소대로 봉합을 마무리하니, 정세운은 제가 직접 컷까지 해줬다. 아, 드디어 끝났네. 한참을 숙이고 있어 뻐근한 어깨를 펴고 시간을 봤다. 벌써 처치실에 들어온지 한 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김동현이나 윤지성이라면 한 번에 알아먹었을 말들을 난 정세운의 아주아주 자세한 설명 없이는 한 번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쓸데없이 이렇게나 오래 걸린 거고. 뭐, 멍충한게 죄는 아니잖아요? 머릿속으로는 혼자 별별 소리를 다 했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아마 오늘 이 정세운의 특강(?)없이 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아주 축구공마냥 이리저리 뻥뻥 까이고 왔을 게 뻔했으니까.
살짝 고개를 돌려 정세운을 보자 내가 만지작대던 수쳐 세트를 한쪽에 대충 정리해두고 짐을 챙기는 듯 보였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못 봤는데, 아마 정세운도 이제 퇴근하는 듯 싶다. 평소에 맨날 들고다니는 크로스백을 메는 걸 보니.
아, 이거 배울 때는 덜 어색했는데, 끝나고 나니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평소엔 이렇게까지 어색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 평소엔 어색할만큼 같이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도 있다.) 아까 아주 잠깐, 진짜 아주 잠깐 느꼈던 심쿵 때문인지, 아니면 처치실에 가득한 정세운 특유의 향기 때문인지 자꾸만 저 포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됐다.
사실 아까 이미 깨달았다. 오늘 내가 좀 정신이 아픈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쓸데없이 정세운한테 자꾸만 시선을 두는 거겠지. 근데 포뇨는 또, 뭔가 할 말이 있는 건지. 저번에 그, 아이스크림 주기 직전처럼 뭔가를 망설이는 표정으로 날 보고있다. 그에 당황해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처치실을 대충 정리하는 척 했다.
...아, 공기 한 번 더럽게 어색하네. 답 없는 이 상황에서 해결책은 딱 한가지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것. 감사하다고 한 번 더 말하며 입고있던 정세운의 가디건을 벗으려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제서야, 정세운은 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밖에 추워요."
"네?"
...밖에 추운 거 저도 아는데요. 그래서요. 뜬금없는 말에 오히려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몇 십 초를 고민하다가 꺼낸 말이 날씨 알려주는 거라니. 네? 하고 되물으면서도 잠깐 멈췄던 손을 다시 소매에서 빼내려 했다. 큼직한 가디건을 어깨에서 자연스레 흘러내리게 두고 손을 빼려했는데. 정세운이 그럴 틈도 주지않고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팔 끝에 걸쳐져있던 제 가디건을 끌어올려 다시 내 어깨에 따뜻하게 걸쳐준다.
내 표정은 아주 볼만 했을 거다. 얼굴에 당황이라고 써있었으려나. 생각보다 가까운 정세운과의 거리에 한 번, 아직 내 어깨에서 내려가지 않은 따뜻한 손에 한 번. 또 심쿵이다. 미친 심장녀나! 나대지 말라니까! 요즘들어 자꾸 정세운때문에 깜짝깜짝 놀란다. 이것도 병인가? 미쳤어 진짜. 머릿속에서 별 헛소리를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정세운을 올려다보니, 날 무표정으로 내려다보고있다. 근데 이 옷은 왜 다시 입혀주는데. 뭐지. 나 집에 가지 말라는 건가. ...가디건 입고 여기서 계속 일 하라는 소리야? 일 더 하라고? 진짜 말도 안 된다. 혼란에 빠져 동공지진이 난 난 보이지도 않는건지, 저 혼자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포뇨에 괜히 겁이 나 침을 삼켰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만 기껏해야 오프 반납을 생각한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아직 비 오니까 이거 입고."
"......"
"나랑 저녁 먹어요."
"...네?!"
순간 내 귀가 이상한 건줄 알았다. 뭐, 뭘 하자구요? 잔뜩 당황해서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것도 완전 빙구같은 목소리로. 아마 정세운 앞에서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내본 것도 처음인 것 같다. 하긴, 맨날 냉동 포뇨 상태였으니... 그 앞에서는 개미만한 목소리만 내는 게 당연했었지.
정세운은 내 목소리에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눈을 보고있던 시선은 어느새 발끝으로 뚝. 담담하던 목소리도 저 아래로 푹. 그래. 이것도 처음 보는 표정이다. 시무룩한 포뇨. 포뇨무룩이었다. ...아 존나 귀엽, 아니. 지금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또 혼자 미친년이라며 자책을 하는데, 정세운은 마땅한 대답없이 눈치만 보는 내 행동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다. 저렇게 포뇨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잇는 걸 보면.
"...바빠요, 오늘?"
"아, 그게..."
"아니에요. 바쁘면 괜찮,"
"저 약속 없어요! 어, 집에 가도 딱히 할 건 없구요..."
"......"
"그, 먹어요! 저녁. 제가 밥도 사고, 어... 술도 살게요!"
...졌다. 해동된 포뇨한테 져버렸다. 포뇨를 얼리면 얼렸지, 녹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처치실에서 사르르 녹아버린 정세운의 포뇨무룩에게 난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정세운은 지만 해동되면 될 것이지, 괜히 나도 더워지게 만들었다. 망할... 뭐, 사실 오늘 정세운에게 고마운 것도 있고, 저렇게 해동된 상태면 뭐, 같이 밥 한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밥도 먹고 술도 먹자는 호탕한(?) 내 대답에 정세운은 포뇨무룩은 어디다 버렸는지, 금세 토끼같은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태까지 꼭 잡고있던 제 크로스백의 끈을 그제야 놓고는 작게 미소지었다. 와, 웃는 거만 보면 진짜 냉동 포뇨 거의 다 녹았네. 해동 많이 됐다. 쓸데없이 예쁘게도 웃는 정세운을 따라 웃으려다가도, 이 포뇨 새끼는 항상 입이 문제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근데,"
"네?"
"술은 내가 사양할게요.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
시발. 정정한다. 아직 해동 다 안 됐다. 예예, 안 좋은 기억 만들어 드린 제가 입 다물어야죠. 예상치 못한 저격에 웃으려던 내 입꼬리는 그대로 고정됐다. 그래. 아직 해동 안 된 거 손수 증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냉동 포뇨 자식아.
***
"음, 그래서어..."
"......"
"뭐, 포뇨 그거는, 네. 죄송해여... 제가 맘대로 별명 하나 만들어씀다!"
"...취했어요?"
아니요! 안 취했는데여. 해맑은 ㅇㅇ는 베시시 웃어보였고, 세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짓말 같겠지만, ㅇㅇ는 아직 취하지 않았다. 조금 알딸딸하고 어지럽긴 하지만 취한 건 아니었다. 목소리가 커지고, 평소보다 쓸데없이 솔직해지는 뭐 그 정도. 저녁을 먹으러 함께 나온 두 사람은 평소 병원 식구들 끼리 자주 가던 가게로 향했었다. (물론 포뇨와 ㅇㅇ가 함께 자주 온 건 아니다. 주로 윤지성 외 1명과 함께 왔었지.) 비 오는 날엔 파전에 막걸리가 진리라며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던 ㅇㅇ와, 얼떨결에 함께 착석한 세운이었다.
앉아마자 파전을 비롯해 간단한 안주 몇 개를 더 시키는 ㅇㅇ를 보던 세운은 절대 먼저 술을 시키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술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정말. 저번에 사고친 게 있는데 또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또 사람이라는 게, 망각의 동물 아니겠는가. 옆 테이블에서 아저씨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걸 보던 ㅇㅇ는 술을 따라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것 같았다. 캬아, 하는 소리가 나면 눈길이 절로 향했다. ...아, 맛있겠다. 술은 없고 안주만 먹으니 ㅇㅇ는 술이 더 땡기는 기분이었다. 눈이 다른 테이블에 있는 막걸리로 돌아가는 ㅇㅇ를 보던 세운은 결국, 제 무덤을 파고말았다.
'딱 한 병만이에요. 진짜 딱 한 병. 약속해요.'
음... 원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합리화를 한 ㅇㅇ는 어느새 세운과 잔을 부딪히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병은 금방 테이블에서 사라졌고, 그 다음 병도 마찬가지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보니 지금처럼 볼이 붉어져서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상태까지 간 ㅇㅇ에, 세운은 그녀 몰래 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카톡창을 열어 동현에게 ㅇㅇ의 집 주소를 찍어달라는 톡을 남기던 그는 또 다시 잔을 집어드는 그녀를 뒤늦게 보곤 화들짝 놀라 잔을 빼앗았다.
"안 되겠다. 이제 그만 마셔요."
"네에? 왜요, 나 진짜 안 취했어요. 진짜로요. 지인짜로."
"...이거 데자뷰같은데."
"네? 포뇨씨, 뭐라구여? 냉동 포뇨씨! 잘 안들려써여."
"......"
안 들렸다고! 안 들렸다니까여. 중얼거리듯 데자뷰같다는 말을 한 세운에, 잘 듣지 못한 ㅇㅇ가 인상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안 들렸다고, 다시 말해달라니까 오히려 입을 꾹 닫은 세운은 제 이마를 한 번 짚더니 한숨을 쉬며 그녀의 잔을 테이블 끝에, ㅇㅇ에게서 가장 멀리 두었다. 이씨... 저거 내 껀데. ㅇㅇ가 손을 뻗어 다시 가져오려 하자 가볍게 손목을 잡아 저지한 세운은, 이 와중에도 조금씩 휘청이는 그녀가 불안한지 마주보고 앉아있던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럼에도 ㅇㅇ의 눈에는 저 멀리 떨어져있는 제 잔밖에 보이지 않았다. 몰라, 지금은 내 잔을 찾는 게 먼저지! 그녀의 강한 의지는 쓸데없이 이런 데서 발현된다.
"자, 그러며는 이렇게 합시다. 포뇨, 아니... 치프님. 우리 내기를 해요."
"무슨 내기를 해요. 뭔데 또."
"내가 문제를 낼게여. 치프님이 맞추며는 우리 딱! 깔끔하게 집에 가구."
"...못 맞추면요?"
"그럼 2차 가기-"
손으로 브이를 보이며 베시시 웃어보이는 ㅇㅇ에, 세운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헐.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이 싸람이. 진짜 너무하시네! 거래하자는 제 말에도 헛웃음만 짓는 저를 짐짓 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세운은 못 말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해요, 해. 무슨 문제인지 들어나 보자.
"자, 그러면 문제 낼게여. 준비 돼써여?"
"네, 됐어요."
"...치프님!"
"왜요."
"...우리 그 날, 잤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세운의 행동이 그대로 멈췄고, 웃고있던 표정도 순간 굳어져버렸다. 세운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리던 ㅇㅇ는, 대답이 없자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이, 우리 잤냐니까! 그, 회식 날! 나랑 치프님이랑 잤,"
"그만, 그만. 쉿. 쉿해요."
세운은 큰 소리를 내는 ㅇㅇ에 뒤늦게 놀라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옆 테이블에서 저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그의 귓가는 이미 붉어진지 오래였다. 제 입을 막는 행동에 덩달아 놀란 건지, 토끼눈을 한 ㅇㅇ는 눈만 깜빡이며 제게 가까이 다가온 세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이, 술 마시고 봐서 그런가. 우리 포뇨 좀 귀엽게 생겼는데? 이거 봐, 무쌍 졸귀... 아니, 무쌍이 원래 귀여운 건가? 아닌가, 정세운이 귀여운 건가. 머리가 아파지는 기분에 몇 번 고개를 저은 ㅇㅇ가 세운과 눈을 맞췄다.
오늘은 꼭 그 날 밤의 일을 듣겠다고 굳게 다짐한 ㅇㅇ는, 제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고 세운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치프님이 쉿 하랬다. 그러니까 말 잘듣는 레지인 저는 조용히, 귓속말을 택해야한다는 게 그녀의 결론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세운이 한숨을 푹 쉬고 다가가자, ㅇㅇ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여."
"......"
"회식 날이요오. 치프님 집에서. 나랑 치프님이랑 같이,"
"...진짜 기억 하나도 못 하네."
ㅇㅇ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세운의 목소리는, 어딘가 서운한 것 같기도,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대충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정말 저와 입을 맞추고, 제 품에 그렇게 푹, 잘만 안기던 걸 다 잊었을 줄은 몰랐기에. 그는 그 나름대로의 서운함이 밀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ㅇㅇ는 대답해주지 않는 세운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회식 다음 날 세운의 집에서 일어난 것 때문에 제가 며칠 밤이나 샜는데도 도저히 기억이 안 나 제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사실 기억 날듯 말듯 하면서도 스틸 컷처럼 함께 침대에 앉아있던 장면, 차에서 벨트 매주던 장면처럼 조금씩밖에 기억이 안 나는 게 더 답답했던 ㅇㅇ였다.
세운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져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듯한 표정의 ㅇㅇ를 빤히 보다 말없이 일어나 계산을 하고 온 그는 그녀의 짐을 대신 챙겨들었다. 대답도 안 해주고 기억 못 한다고 화내는 거야, 뭐야 이게. 아까 처치실에서처럼, 제게 하루종일 보여주던 웃음은 어디다 갖다 버린건지. 매일매일 보던 그 무뚝뚝한 얼굴을 한 세운은 말없이 ㅇㅇ가 더워서 벗어뒀던 가디건을 다시 입혀주고는 ㅇㅇ의 손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치, 내기는 마무리도 안 했으면서. 저렇게 무서운 표정 하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취기가 돌아 알딸딸하다지만, 저 표정은 언제 봐도 무서웠다. 저를 혼낼 때만 짓는 '냉동 포뇨' 얼굴을 한 세운에게 ㅇㅇ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아랫입술을 잔뜩 내민 채 내 서운함을 팍팍 티내는 것 뿐이었다.
ㅇㅇ가 툴툴대면서도 세운을 따라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그쳐 있었지만 밤공기는 여전히 축축했다. 하늘에는 별 하나 찾을 수 없었다. ㅇㅇ는 세운의 가디건을 입고, 부축하는 그에게 기대어있었지만, 눈은 절대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좀 어지러워서, 어? 가만히 있는 거지. 스스로 합리화를 한 ㅇㅇ는 차가운 바람에 술기운이 조금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는 세운이 밉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ㅇㅇ의 서운함, 속상함 가득한 얼굴을 봤으면서도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오늘은 ㅇㅇ에게 하루종일 혼란 뿐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꾸만 세운의 행동에 설렜고, 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포뇨 자식이야, 누구한테나 그렇게 행동하는 걸 알고있었다. 평소에 저한테만 차가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요 며칠 동안 쓸데없이 다정하고, 달달해서 사람 마음 쓰이게 만들더니. 또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토록 제가 갈피를 잡지 못하게 이랬다 저랬다 행동하는 세운 때문에 ㅇㅇ는 속이 상했다.
세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동현이 보내준 ㅇㅇ의 집 주소로 향했다. 그 날 일에 대한 대답을 안 해줬다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문 앞까지 도착해서도 입술을 꼭 닫고 저를 봐주지 않는 ㅇㅇ에 세운은 애가 탔지만 그렇다고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현관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던 ㅇㅇ는, 아직도 그 서운하고 뾰루퉁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제 집 비밀번호를 두어 번 틀리는 행동이 아직 그녀가 취기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는 걸 알려주었다.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보고있던 세운이 손을 뻗으려 할 때 쯤에야 ㅇㅇ는 문을 열었다.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세운은 '들어가서 쉬어요.' 하는 말과 함께 뒤를 돌았지만, 이내 제 옷자락을 잡은 손길에 의해 걸음을 멈춰야 했다.
세운이 몸을 돌려 ㅇㅇ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문을 반쯤 열다만 채로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작은 손으로 세운의 소매는 아직도 꼭 잡은 채로.
"...치프님, 화났어요?"
"화 안 났어요."
"아닌데, 화 난 것 같은데에..."
"......"
"아니, 그러니까... 그냥 우리가 뭐 했는지만 알려달라니까요. 사람 궁금하게 만들구 지짜..."
초등학생이 투정부리듯, 웅얼웅얼 말을 하는 ㅇㅇ를 보던 세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걸 ㅇㅇ도 알았기에 잔뜩 기가 죽어 시선을 밑으로 두고 있었지만, 세운의 다음 행동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드러운 손길로, 그러나 빠르게 ㅇㅇ를 집 안으로 밀어넣은 세운이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닫히고,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신발장 센서등만이 밝게 켜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ㅇㅇ가 그의 팔을 잡았지만, 세운은 그저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있을 뿐이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뭐라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이며 세운을 보던 ㅇㅇ가 입을 열려는 순간, 센서등이 꺼졌다. 그에 세운은 혹시라도 ㅇㅇ가 무서워할까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그 날 우리가 한 짓, 알려줄게요."
"......"
"...이번엔 기억해요."
순식간이었다. 세운은 한 손으로 ㅇㅇ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볼을 감싸쥔 채 그대로 그 붉은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놀란 ㅇㅇ가 손목을 잡자 자연스레 제 목에 감싸게 한 세운이, 조금은 거칠게 그녀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미끄러지듯 들어간 뜨거운 혀가 ㅇㅇ의 입안 여기저기를 훑는다. 치열 끝부터 끌까지 하나하나 쓸어주기도 하고, 혀를 강하게 옭아매기도 한다. 고개를 틀어 ㅇㅇ에게 숨 쉴 틈을 주다가도 다시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그녀를 자극한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혀로 핥아주고, 느릿하게 잘근대는 행동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ㅇㅇ는 결국 까치발을 떼고 그에게 더 가까이 안긴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세운은 입술을 맞댄 채 웃어버렸다.
한 발 물러나 주는 듯 하다가도 제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깊게 입안을 헤집는 세운의 행동에 ㅇㅇ는 옅은 신음을 낸다. 저번에, 그러니까 ㅇㅇ가 그렇게 알고싶다던 회식 날 밤에 했던 키스와는 달랐다. 제 입술 새로 들어온 ㅇㅇ의 혀를 이로 살살 긁기도 했고, 오히려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어 입천장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자꾸만 짙어지는 농도에 두 사람은 깜빡이는 센서등조차 신경쓸 틈이 없었다.
몇 분이 더 지났을까, ㅇㅇ가 숨이 차 떨어지려 하면 봐주지 않겠다는 듯 더 가까이 붙어오는 세운 덕에 키스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몇 번 더 그 행동이 반복되고 나서야 세운의 어깨를 간신히 밀어낸 ㅇㅇ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맞댄 두 사람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오고간다. 겨우 입술 사이에 작은 틈이 존재할 정도의 거리에서, 밝은 센서등 아래로 타액에 잔뜩 젖은 ㅇㅇ의 입술이 세운의 눈에 들어왔다.
깊었던 키스때문일까, 힘이 풀려 그의 목에 감고있던 손을 내리려던 ㅇㅇ를 그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다. 세운이 그녀의 젖은 입술에 한 번 더 짧게 입을 맞추고 떼자, 은색 실이 길게 늘어나다 끊긴다. 센서등이 다시 켜지고, 나른하게 ㅇㅇ를 바라보던 세운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ㅇㅇ."
"......"
"지금 너랑 키스한 사람 누구야."
"......"
"...기억해야지. 응? ㅇㅇ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ㅇㅇ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어둠 속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고있음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닿아있는 허리, 뒷목, 그리고 방금까지 잔뜩 탐해버린 입술까지. 모든 게 그의 이름을 말하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정세운."
"......"
"치프님ㅇ,"
치프님이요, 라고 대답하려던 ㅇㅇ의 대답은 자연스레 세운의 입술에 먹혀들어갔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부딪힌 두 입술 사이로 새는 질척한 소리만이, 어두운 집 안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
1. 요즘들어 연재 텀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답없이 살아서 공부를 시작했거든요...8ㅅ8
2. 혹시 BGM 때문에 글에 집중이 안 되시는 게 아니라면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글만큼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짤이랑 BGM이랍니다. :)
3. 곧 암호닉 확인 글을 올릴테니 중복신청, 누락된 암호닉 신청자가 되지 않도록 확인 꼭 부탁드려요!
4. 모든 댓글과 추천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5. 오늘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