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악동뮤지션 _ Be with you
까칠한 정치프 E
W.냉포뇨
- 세운 시점 -
"안녕하세요. 해성 병원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 성ㅇㅇ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앞에 일렬로 서있는 인턴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딱히 관심이 있지도, 없지도 않았다. 대학 다닐 때 새내기들을 보는 것 같았다. 다들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한 채 서있었다. 지루한 환영식에 혼자 손장난을 치며 딴짓을 하다, 제 귀를 사로잡는 밝은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사고 되게 많이 칠 것 같이 생겼네. 당직 겹쳐서 고생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별 의미 없던 그 생각을 한 건, 처음 널 봤을 때였다. 그래. 너한테 이렇게 답도 없이 빠지는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사고뭉치일 것 같다는 내 느낌은 언제나 그렇듯 딱 들어맞았다. 성ㅇㅇ는 정말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쳤다. 오더를 받은 걸 잘못 전달한다거나, 차트를 잘못 적는다거나. 하필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만, 꼭 그렇게 사고를 쳐댔다. 그덕에 레지 2년차인 나는 바쁜 선배들과 맹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중간에서 성ㅇㅇ를 혼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거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성ㅇㅇ 하면 '정세운 한테 맨날 까이는 애' 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어째 의도한 게 아닌데도 그런 앙숙같은 사이가 되었으니, 반강제적으로 서로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다. 아니, 매일 그렇게 혼내기만 하는데 친해지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랬던 우리 사이에, 아니 정확히는 나에게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았다. 네가 막 레지 1년차를 달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평소와 같이 너와 네 동기들을 불러 혼을 냈다. 그러고는 수술에 들어가기 전, 잠깐 쉬고싶어 캔커피를 들고 비상구 문을 열었을 때였다.
"씨이... 몰라아, 지쨔 속상해... 나 열시미 했는데에, 흐어어..."
"아우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그만 울어라, 어? 너 내일도 당직이야."
"흐으, 알아... 왜 구지 그거를 또 말하는데에, 윤지성, 윤지성 이 나쁜 놈아..."
"에이씨, 그러게. 어? 다 윤지성 이 쓰레기 잘못이야. 뚝. 뚝해라. 너 여기서 울다가 또 정세운한테 걸려서 까이면 어떡하려고 그래."
"야, 김동현, 근데 내가 왜 쓰레기냐? 엉?"
익숙한 목소리에 비상구 문을 최대한 조용히 닫고 들어왔다. 세 사람의 목소리는 내가 있는 곳의 아랫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우느라고 제대로 발음도 못 하면서, 웅얼웅얼대면서도 눈물을 줄줄 쏟아내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다.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갑자기 들린 내 이름에 괜히 뜨끔했다. 아, 괜히 죄책감 들게하네 진짜. 사실 혼나고 우는 레지들을 한 두번 본 게 아니지만, 성ㅇㅇ가 우는 걸 보는 게, 그게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었다. 성ㅇㅇ을 달래려고 애를 쓰는 두 남자는 아주 안절부절 못하며 등을 두들겨주고 있었다. 아마 제일 친하게 지내는 동기들인 것 같았다.
저 세 사람은 여기 내가 있단 것 조차 모르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그 뒤에는 ㅇㅇ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세운 나빠. 정세운 존나 미워. 못됐어... 나쁜 포뇨새끼. 냉동 포뇨... 흐어어.' 아주 온갖 나쁜 말은 다 나한테 갖다붙였던 것 같았다. 아, 어쩌면 '포뇨'라는 단어를 들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정신이 없어서 금방 잊어버렸지만.
그래, 내가 울린 거긴 하다. 그렇긴 한데, 잘못했으니까 혼내지. 어? 나도 혼내고 싶어서 그렇게 모질게 군 게 아닌데. ...괜히 억울한 기분에 한숨을 쉬다가도 다시금 서럽게 우는 그 얼굴을 보면 미안해졌다. 그때, 그 눈물을 보는 게 유난히 속상했다는 걸 스스로 뒤늦게야 인지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인정했던 것 같다.
내가 너를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별 쓸데없는 걸 가지고 트집을 잡았던 게, 그 예쁜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그랬다는 걸.
사람이 참 이상한 게, 누군가 날 미워하고, 피하고, 날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니까, 그 모습이 자꾸만 더 보고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군가가 성ㅇㅇ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연애를 한동안 안 해서 그런가. 난 아직도 초딩들이 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기면 별 이상한 별명들을 붙여가며 놀리고, 자꾸 괴롭히고 하는 그 초딩말이다.
성ㅇㅇ가 보고싶으면 그냥 가서 보면 될 걸. 그러지 못했다. 그나마도 레지 1년차가 된 이후에는 스케줄이 많이 겹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널 볼 수 있는 시간도 복도에서 혼낼 때 뿐이었다. 그래서 네 동기들을 혼낼 때와는 다르게, 한 명이라도 오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시간을 끌기도 했고, 혼낸다는 명분으로 가만히 널 보고있기도 했다. 사실 10여분 동안 후배들을 혼낼 재주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이럴 때 말고는 볼 기회가 많이 없으니까, 그게 속이 상했다. 아, 사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좀 이상한 사람 같겠지만, 기가 잔뜩 죽어서 입술을 꼭 물고 울상이 된 모습이 마음이 아프면서도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우는 ㅇㅇ를 달래주는 남자 동기들은 맘에 들지 않았다. 까대기치지말라고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는지.)
그렇게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널 지켜보기만 했다. 뭐, 내가 레지 3년차를 겪는 동안은 정말 접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랑 잘 어울린다, 성격이 좋다 병원에 아무리 소문이 나있어도 너는 이미 인턴 때부터 나와 거리를 두어 왔으니까. 그렇기에 갑자기 다가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4년차가 되고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치프가 되고, 너와 내 스케줄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맞아떨어졌다. 함께 있는 시간도 지난 2년에 비해 훨씬 많아졌다. 당연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당직도 같이, 오프도 같이, 회식도 같이. 오프 때에 맞춰 회식을 그렇게 잡아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술만 마시면 양 볼이 발개져서, 베시시 웃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물론 애교 부리는 상대가 윤지성과 김동현이라는 것만 빼면 참 완벽했다.)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오프를 뺏은 게 솔직히 미안하긴 하지만, 귀여운 걸 어쩌라고. 뭐. 권력남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맞는 말이니까. 근데 그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나만 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하잖아. 그건 너무 고문이다.
...아, 좀 거짓말같겠지만, 송별회 때 있었던 대형 사고는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다. 교수님이 내 옆자리에 너를 앉힌 것도, 네가 그렇게 혼자서 술만 마셔댄 것도 전혀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로 취한 ㅇㅇ를 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절대 이 여자가 다른 남자랑 술마시는 걸 가만두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벨트를 매주려는 내 행동을 제지한 ㅇㅇ이는 그대로 날 끌어당겼다. ...나 진짜 밀어냈다. 안 하려고, 키스 안 하려고 했는데.
"...저, 성. 선생 지금 이게 뭐하는,"
"...맨날 나한테만, 어, 냉동실이 따로 업써어... 냉동 포뇨오... 정치프니임..."
"냉동, 뭐요?"
"...진짜, 콱, 물어버릴라."
"......"
"이리 와, 우리 포뇨."
...포뇨? 포뇨가 뭐였더라.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그 단어가 뭐였는지 생각이 나기도 전에, 너는 내 입술에 닿았다. 심장이 그대로 멎는 것 같았다. 자꾸 예쁜 것만으로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이렇게 밀려오면, 난 더 밀어낼 수가 없잖아. 괜히 네 탓을 하면서도 널 더 끌어안았다. 고개를 틀어 네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고, 더 가까이 안겨오는 네 뒷목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결국 그 날 밤에는 의도치 않게 ㅇㅇ이를 우리 집까지 데려갔고, 달래고 달래서 재우기까지 했다.
솔직히 이건 칭찬받을만 했다. 진짜 잘 참았다. 아이스크림 달라 떼쓰고, 안 주니까 제가 그렇게 못 버티는 그 울망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겨우겨우 물을 먹이고 나니 또다시 안겨오는 모습에 정말, 딱 죽을 것 같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절에 들어가서 스님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그 날의 나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거의 보살이었으니.
그렇게 너를 재우고 거실로 나와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너무, 2년 동안 얌전히 지켜보기만 했나. ...너는 분명히 나 말고 다른 남자들과도 술자리를 가졌겠지. 예를 들면 김동현이라든가, 윤지성이라든가. 아니면 제 동기놈들이라든가. ...아, 짜증나. 소파에 담요를 덮고 누웠다가 신경질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저 여자 진짜, 쓸데없이 예뻐가지고. ...설마 다른 남자랑도 키스한 건, 아니. 아니지. 아닐 거다. 그러면 안 된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도 한숨이 나왔다. 괜히 대학에 다닐 때 너를 일찍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질투가 났다. 웬만한 일에는 유하게 반응하는 나였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더 일찍 봤으면, 인턴 들어오기 전에 봤으면 더 가까울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 개와 고양이 사이같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생각했다. 아, 지금처럼,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미녀는 용기있는... 뭐라더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한번 생겨난 불안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빨리, 조금 더 너와 가까워져서, 내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조금씩 변화를 줘봤다. 그 중 첫 변화가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던 거고.
사실 네게 수술을 맡긴 건 말 그대로 내 실수였다. 아이스크림을 주기 위해 너를 부르려고 했던 건데. 부를 핑계를 찾다보니 스케줄을 고려하지 못한 채 수술을 맡긴 거였다. 미안해 죽겠는데, 그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가 않더라. 네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화가 난 거였지만, 표현에 서툰 터라 자꾸만 못된 말들만 나올 뿐이었다. 네 볼에 붉게 난 상처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차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가 네게 했던 모진 말들은 다시 돌아와 내 마음에 푹푹 박혔다.
그래서 늦게라도 너를 만나려고 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던 커피도 사고, 반창고도 챙겨서 나름대로 다정하게, 평소와 다르게 네게 다가가려고했다.
그래서 커피숍에서 난 먹지도 않는 달달한 카페모카, 거기다 휘핑크림까지 잔뜩 올려 주문했다. 네가 환장하는 시원하고 달달한 커피와 작은 반창고. 이 정도면 제가 했던 미운 말들을 상쇄시킬 수 있겠지. 당직 시작 전에 주면 되겠다. 뭐, 나름대로 좋은 작전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있었다. 윤지성. ...맘에 안 든다, 진짜.
"냉포뇨 새끼, 진짜 존나 너무해. 나쁜 새... 헙,"
"...왜? 누구 있,"
"...야, 나는 카페모카!"
...다 들리거든요. 그 냉포뇨. 그거 내 욕인 거 이제 다 알거든.
주문한 카페모카를 받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음료를 한 손에 들고 뒤를 돌아 나오다 생각했다. ...침착하자. 카페모카는 윤지성때문에 강제로 내 커피가 됐지만, 반창고는 줄 수 있을 거야.
"...성. 선생 여기서 커피 마실 시간이 있나봐요."
"네?"
"당직 안 가요? 10분 남았는데."
"네... 죄송합니다. 지금 올라가겠습니다."
...아, 망했다. 기껏 좀 다정해져보겠다고, 굳이 카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네게 다가갔는데. 이미 그 하얀 볼에는 반창고도 참 예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밴드를 잔뜩 구겨 제 주머니에 숨겼다. 가까이 다가가놓고 용건이 없어졌으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려던 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아무말이나 내뱉었더니, 또 다시 상황은 마음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래, 다 핑계다. 아무리 당황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게 뭐냐 정세운. 난 또 그렇게 네 앞에서 '냉동 포뇨'다운 모습만 선보이고 말았다.
카페를 빠져나와 나가는 길, 고인 눈물을 쓱쓱 닦아내는 네가 보였다. 꼭 이렇게 울려놓고 속상해하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아주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구나. 아무래도 앞으로 네와 더 가까워지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다. 2년이 넘게, 거의 3년 동안이나 열심히 멀리멀리 떨어뜨려 두었던 거리를 좁히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고생길은 열렸다. 너와 가까워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 이대로 계속 거리를 유지한다면, 연애고 뭐고... 다 망하는 거지요. 응. 끝이지요.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너를 생각하니 짜증이 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젠가, 주말에 만나자고 할 거다.
만나서 일 말고 데이트를 하고 말거다. 꼭. 반드시.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아, 추워 죽겠네. 우산을 접고는 어깨에 묻은 비를 대충 손으로 털어냈다. ...나한테 장마 끝났다고 비 얼마 안온다던 새끼 누구야. 어떤 새끼였어! 괜히 혼자 씩씩대며 병원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오늘은 비가 조금밖에 안 온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듣고 나왔다. 근데 이게 뭐람, 집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폭우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옘병. 이런 구라청이 진짜. 아니, 아니지. 생각해보면 문제는 비가 오는 게 아니라 행복한 오프, 그것도 주말 오후에 나를 병원까지 불러낸 정세운이 잘못이다. 암, 그렇고말고.
"네, 그럼 이 환자는 지금 수술 일정 잡는 걸로... 어, 성ㅇㅇ?"
"어. 하이."
"오프 아니냐? 뭐 그런 꼴을 하고 병동에 왔어, 우산은 폼이야?"
"시비 걸지마라. 누나 바빠, 나 먼저 간다!"
분명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축축해진 머리를 대충 털며 외과 병동으로 올라왔는데 스테이션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던 윤지성과 마주쳤다. 대충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주고 바로 정세운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내 꼴을 보고는 꼴이 그게 뭐냐며 혀를 찬다. 에이씨, 조금밖에 안 젖은 것 같았는데. 그 정도인가. 뭐, 봉합 실습만 할 거니까 옷은 갈아입지 않아도 되겠지. 몇 번을 와도 적응 안 되는 정세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리는 '들어오세요' 소리에 빼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세운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매일 입던 그 단정한 가운은 어디다 벗어뒀는지 예쁜 사복차림을 하고 있다.
"아, 왔어요?"
"네. 수쳐 세트 준비해서 처치실로 가있을까요?"
"어... 그럴래요? 나 마무리할 일이 좀 있어서. 곧 갈게요."
"네."
책상에 앉아 이것저것 바쁘게 처리하고 있는 모습에 다시 방을 나왔다. 뭐가 저렇게 바쁘다냐. 나도 4년차 되면 저런 인생을 사는 건가? 미쳤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쳐 세트를 챙겨 들고 작은 처치실로 향했다. 다행히 오늘은 응급실과 외과 모두 한산해보였다. 주말이라 그런가. 하긴... 다 피서갔겠지. 이씨... 부럽다. 난 여기서 반강제로 포뇨랑 같이 봉합 실습이나 하는데... 우울함에 한숨을 푹 쉬었다.
들어오기 전에 잔뜩 젖어서 그런가, 원래 처치실이나 수술실 온도가 다른 곳보다 낮은 편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여튼 오늘은 하루종일 되는 일이 없다. 그래도 여름이라고 평소에 입지도 못하고 쳐박아뒀던 반팔과 반바지를 꺼내입었구만, 하필 내가 집을 나서자마자 폭우가 내린 것 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아, 가서 가운이라도 가져올까.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편도 아닌데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에 결국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고 온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몸을 돌렸는데,
"여기가 좀 춥죠."
"......"
"이런 날씨에 그렇게 입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멍충이마냥 말을 더듬었다. 그도 그럴만 한게, 처치실을 나가려고 했는데... 뒤를 돌자마자 앞이 턱 막힌 기분에 고개를 들었을 때,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는 정세운이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도 모를 포뇨는 날 내려다보다 감기 걸린다는 말과 함께 내 어깨에 그 가디건을 덮었다. 그래, 저번에 그 까만색 가디건이었다. 정세운은 내가 제 가디건에 팔을 얌전히 끼워넣는 것을 보고나서야 내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정세운의 가디건은 아빠옷을 입은 것처럼 컸다. 어깨선은 팔 아래로 축 늘어져있었고, 소매도 팔보다 한 뼘은 더 나와있었다. 정세운 특유의 달달하면서도 상쾌한 향이 훅 끼쳐왔다.
...갑자기 처치실 안이 더워진 건 아닐텐데, 몸의 온도가 확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이것저것 수쳐 세트의 도구들을 확인하는 정세운에게서 시선을 떼고 손부채질을 해댔다. 근데 포뇨는, 저 사과같은 머리통에도 눈이 달린 건지 뭔지, 내가 작게 움직이자마자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손."
"...네?"
"손 줘봐요."
"......"
정세운은 내가 손을 내밀자, 내 팔보다 한참은 길어 팔랑거리는 가디건 소매를 차곡차곡 접어준다. ...아, 이제 좀 이런 다정다정한 행동이 익숙해진 것 같기도... 아니, 미쳤나봐 성ㅇㅇ. 잊지말자. 얘는 포뇨야. 존나 냉포뇨라고. 갑자기 이렇게 달달하게 행동한다고 냉동고 같았던 과거를 잊어서는 안ㄷ...
"너무 추우면 말해요. 온도 좀 올려줄게요."
"...어, 괜찮습니다. 그렇게 안 추워요."
"그래도 감기 걸리면 속상하잖아요.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아, 네에..."
"그럼 시작할게요. 일단 한 번 보고, 그 다음에 설명해줄테니까 천천히 따라해봐요."
"...네."
정세운은 따라해보라는 말에 대답하는 날 보며 작게 웃었다. ...정세운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다른 누군가와 웃으며 대답하는 건 오며가며 몇 번 봤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날 향해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심쿵. 와, 나 미쳤나봐. 정세운은 잠깐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도 수쳐 세트로 시선을 옮겨 손을 움직였지만, 나는 뭔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성ㅇㅇ 정신차려. 진짜 미쳤어? ...집중해, 집중. 정세운의 저, 따뜻한, 포근한... 뭐랄까. 어떤 형용사로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냉동 포뇨답지 않은' 미소를 보고나니 자꾸만 정신이 다른 데로 샌다.
수쳐 세트에 고정되어 있어야할 눈은, 걷은 소매 사이로 드러난 정세운의 힘줄로. 집중하는 건지 뭔지 오늘따라 더 날카로워 보이는 그 눈매로. 또, 대충하는 것 같아 보여도 섬세하게 움직이는, 나보다 예뻐보이는 그 손가락으로.
"성ㅇㅇ 선생."
"......"
"성 선생, 보고있어요?"
"......"
"성ㅇㅇ?"
"...네, 네!"
늘 써오던 '성이 선생' 라는 호칭이 아닌 내 이름 세 글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멍때렸다. 또 혼나겠네... 보지 않아도 예상되는 전개였다. 내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일 때 쯤이면, 그 다음에는 '정신 안 차려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야하는데.
"볼이 빨갛네."
"......"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어디 아파요?"
정세운의 손등이 내 볼에 닿아왔다. 놀랄 틈도 없었다. 따뜻한 그 손이 내게 닿는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정세운의 눈만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야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네."
"......"
"아픈 것 같아요."
정확하게 어디가 아픈 건지 뭔지는 몰랐다. 그냥 아픈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처럼 쓸데없이 심장이 빨리 뛸 이유가 없다. 미쳤나봐. 아픈 것 같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체온계를 찾으려 일어나던 정세운은 뒤늦게 괜찮다고 얼버무리는 내 말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도 나를 한참동안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긴 했지만.
그래, 나는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요즘들어 뭔가 확실히 변해버린 정세운.
그리고 평소보다 한 20도, 30도.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올라간 것 같은, 아늑한 포뇨에게 내가 제대로 치여버렸다는 걸.
***
1. 저번 편에 조경수역 세운이 반응이 너무 핫해서 지쨔 깜짝 놀랐습니다... ㅇㅅㅇ//
2. 작가는 의대와는 1만큼도 상관없는 한낱 공대생입니다! 헤헷.
3. 그렇기때문에 글 안에 나오는 여러 의학용어들은 저도 찾아보고 쓰는 거예요... 실수가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양해부탁드립니다! :)
4. 이거이거... 실화입니까...? 저 진짜 깜작 놀랐잖아요 8ㅅ8 캡쳐해주신 독자님도 감사하고, 읽어주시는 우리 독자님들 모두모두 정말 사랑합니다.
5. 보고싶으신 주제나, 소재가 있으신 분들은 댓글에 써주셔도 좋습니다. 하나하나 읽어보고있어요. :)
6. 모든 댓글과 추천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7.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오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