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김동현은, 연애한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비상구에서 폭주해버렸다.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를 내면서 나와 정세운 사이를 번갈아가면서 보던 김동현은 같이 집에 가면서도 계속 아주 우는 소리를 내며 나에게 투정을 부려댔다. 왜 지만 몰랐냐며, 윤지성한테만 알려준 이유는 뭐냐며, 언제부터냐며. 도저히 끝날 줄 모르는 질문 폭탄에 슬슬 난 정신을 놓기 시작했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 상황을 보고만 있던 정세운은, 김동현이 내 양 어깨를 잡아 짤짤 흔들어대자 그제야 내 팔을 아프지 않게 끌어당겨 제 뒤로 숨겨버린다.
"김동현 선생, 안 바빠요?"
"헐... 지금 성ㅇㅇ 지켜주시는 거예요? 와, 대박."
"아니, 성 선생이 어지러워하니까..."
"와, 대박... 진짜 대박... 걱정... 와."
알았으면 그만 꺼져... 나중에 설명할라니까... 정세운과 나를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는 김동현에게 가까이 가 입술을 꽉 깨물고 속삭였다. 타이밍 좋게 김동현 PDA도 울리고.
내가 눈으로 욕을 지껄인 게 느껴진 건지 한참을 더 꿍얼거리던 김동현이 비상구를 빠져나갔고, 정세운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옮겨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조금 있으면 비 올지도 모르니까 내 방에서 우산 챙겨가요. 나 이제 진짜 일 하러 가야해."
"네에... 치프님, 조금이라도 꼭 자요. 알았죠?"
"알았어요. 약속."
그 말을 끝으로 비상 계단에서 벗어나는 정세운이었다. 시계를 봤더니 벌써 열 두시 십ㅂ... 열 두시? 이런 미친. 성ㅇㅇ 네가 진짜 연애한다고 돌았구나. 남자친구 도와주다가 꿀같은 수면 시간을 네 시간이나 까먹다니... 미친 것; 호다닥 집에 가서 나도 발 닦고 잠이나 자야되겠다, 하는 생각으로 정 치프님 방에 들러 우산을 가지곤 빛의 속도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정세운의 새로운 모습... 이라곤 하기 뭐하지만, 여튼, 예전이라고 하면 생각도 못 했을 낫 온리 온포뇨 벗 올소 연약포뇨... 랄까? 포뇨의 약한 모습까지 본 것 같다. 정세운도 결국은 나랑 똑같은 의사포뇨였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왠지 앞으로는 정세운을 엄마 미소로 볼 수 있을 듯...?
***
정세운의 엘베 삐짐 사건이 딸기라떼 덕분에 해결된 지도 거의 한 달 가까이가 지났다. 정세운과의 비밀애정 전선은 뭐, 나름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수술 끝나면 내 방으로 와요. 아이스크림 사왔어요.'
'날 추운데 따뜻하게 입어야지요.'
'오늘 끝나고 영화 볼까요?'
정세운은 생각보다도 더 내 심장을 부수는데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다. (특히 아이스크림 먹자는 말이 날 가장 설레게 했다.) 수면실 윗층 직원용 계단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의 정세운과 나의 비밀 접선 장소였다. 거의 뭐 첩보 영화 찍는 수준으로 연애하는 날 보며 김동현과 윤지성은 오늘도 혀를 끌끌 차지만. 지들이 솔로라서 그러지 뭐, 하는 양애취같은 생각으로 손을 훠이훠이 젓고는 차트를 두고 슬금슬금 몸뚱아리를 비상계단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갑자기 날 부르는 수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멈추긴 했지만.
"아 맞다. 성 쌤, 요즘 정 치프님 무슨 일 있으세요?"
"...정 치프님요?"
"네, 최근 들어서 정 치프님이 좀, 뭐랄까. 변하신 것 같아서요. 되게 유해지셨다고 해야하나. 성 선생님이 보실 땐 어때요, 그렇지 않아요?"
"뭐,뭐... 뭐가요? 제가 보기엔 똑같으신 것 같은데... 하하, 참... 무슨 말씀을..."
존나 누가 봐도 발연기를 펼치는 나레기를 옆에서 보는 두 동기녀석들의 시선이 어마어마하게 따가웠다. 심지어 눈치를 쌈 싸먹은 김동현마저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고있었으니 말 다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스테이션에서는 수쌤의 말에 동조하며 자기도 요즘 느꼈다고, 정치프님이 전보다 잘 웃으신다, 연애라도 하시는 거 아니냐, 하며 다른 간호사들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미친상황으로부터의 대피가 시급했다.
존나 미어캣이라도 된 것 마냥 눈치를 보며 비상계단으로 1초에 한 걸음씩 옮겼다. 심장 빠지는 줄;
"와씨... 진짜 김동현 빼고 눈치 다 빠르네."
"김동현 선생 들으면 서운하겠네."
"악!"
"어어, 조심."
아, 포뇨 진짜... 이젠 날 놀래키며 등장하는 게 뭐 습관이라도 된 건지, 화들짝 놀라는 내 어깨를 가볍게 캐치한 정세운은 어깨를 으쓱하곤 웃어보인다. 저러고 웃으면 내가 못 날뛰는 거 알고 그러지... 이 영악한 포뇨자식.
"지금 또 속으로 내 욕하지요?"
"예? 아니, 아닌데. 아닌데요? 전혀요? 정말 아닌데."
"...본인이 거짓말에 소질 없는 건 알죠?"
"......"
반박의 여지가 1도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정세운은 그럴 줄 알았다며 가운 주머니에 꽂아넣었던 손을 빼더니, 뭘 주섬주섬 까서 내 입에 집어넣는다.
"초콜릿이에요?"
"응, 아까 의찬이 주고 남은 거. 성 선생은 오늘 새벽 당직이죠?"
"네에... 오늘 김동현이랑 윤지성도 없어서 엄청 심심할 것 같아요."
"그러게... 밥 꼭 먹고 해요. 졸리면 잠도 좀 자고."
...당직 때 졸리면 자는 사람이 어딨어요... 나 월급 못 받게 하려고 그러시나 이 싸람이.
정세운의 (말 같지도 않은^^)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의찬이가 오늘은 좀 괜찮았나보네, 어제 회진 때 까지만 해도 아프다고 하루종일 투덜거렸는데.
아, 의찬이는 외과 병동에 입원한 남고생인데,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며칠 전에 전치 3주를 받고 들어온 아이였다. 혼자 학교도 못 가고 외과 병동에 있는 게 맘이 안 좋아서 요즘 가장 신경이 쓰이는 환자이기도 했다. 근데 또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정세운은 요즘 답지않게 달달구리한 것들을 들고 다니더니, 주머니에서 하나 둘씩 나온 군것질 거리들은 가끔 의찬이와 내 입으로 들어갔다.
마치 정세운한테 고딩이랑 같이 사육(?)받는 느낌이긴 하지만. 초콜릿은 죄가 없다. 맛있으면 장땡이지.
"무슨 생각해요?."
"의찬이요, 우리 잘생긴 의찬이... 아프지 말아야하니까요... "
"......"
"의찬이를 보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은 게 보인달까...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생기면 나중에 누나들 마음 다 휘어잡으려고..."
방금까지만해도 살짝 미소짓고있던 정세운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아마도 어제 회진 때 일어난 일 때문이겠지.
'환자분, 밤 동안 어디 불편한 건 없으셨죠?'
'그, 성 선생님...'
'네? 어디 안 좋으셨어요?'
'아, 그런 건 아닌데. 성ㅇㅇ 선생님... 혹시, 애인 있으세요? 의찬이가 저번부터 성 선생님 너무 예쁘시다고... 하하.'
'아 엄마!'
허허허허! 하고 크게 울려퍼지는 교수님의 웃음 소리에 나는 잠깐 멍때리다가도 뒤늦게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옆에 계시던 보호자분께서 아무말 못하는 의찬이가 답답했는지 대신 말을 해주신 덕분에 21세기 남고딩은 귀끝까지 빨개져가지고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어유 애긔가 귀엽네 아주... 껄껄... 짜식 이쁜 건 알아가지고^^*
난 변태같은 표정을 억지로 숨기느라 고생 좀 했더랬지.
그 와중에 교수님은 풋풋한 상황에 대리설렘을 느끼신 건지, 대신 내가 애인 없다는 희망적인(?)대답을 대신 해주시곤 다시 허허허허! 하면서 병실을 나가버리셨다. 그리고 병실을 나와서 마주친 정세운의 얼굴도 아주 가관이었다. 존나 오랜만에 보는 냉동포뇨랄까?
...이 분위기 어떡하라고요 교수님...
남고딩한테 고백받아 자꾸 웃음이나려는 걸 단번에 멈추게 하는 포뇨의 정색에 조용히 승천하려는 광대를 꾹 눌렀던 이 사건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와, 이제 내 앞에서 대놓고 딴 남자 생각해요?"
"아니 치프님, 의찬이가 무슨 남자예요. 애지."
"열 아홉이 무슨 애예요. 다 컸는데. 오늘 회진 때는 헛소리 안 했으려나 모르겠네."
"음, 헛소리는 안 했는데,"
"...안 했는데?"
존나 누가봐도 질투하는 인간마냥 아랫입술을 한껏 내밀고 툴툴대는 모습에 또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종이를 꺼내 정세운의 손에 얹어줬다.
'010-1380-7102 박의찬'
"...성 선생."
"네?"
"왠지 신나 보이네요?"
"ㅎㅎ..."
아, 숨긴다고 숨겼는데.ㅎ 아무래도 눈에서 신난 게 느껴졌던 건지 뭔지 정세운은 밉지않게 나를 흘기더니 제 손에 쥐어진 쪽지를 꾸깃하게 접어 가운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더니 살짝 흐트러진 내 잔머리를 손으로 살살 정리해주며 중얼거린다.
"...앞으로 박의찬 초콜렛 안 줘야지.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
까칠한 정치프
W.냉포뇨
***
"그 문제 답 그거 아닌데."
"네?"
"삼각함수 미분에서 틀린 것 같아요. 잠깐만."
세운이 의찬의 문제집을 가만히 보다, 필통에서 샤프를 하나 더 꺼내들어 문제집에 몇 줄의 식을 쭉 써내려간다.
"여기서 미분하면 접선이 이렇게 생기니까, 범위 안에서는 k값이 전부 1/2보다 크지요?"
"아아, 그럼 여기서 미분 한 번 더 한 다음에..."
"그치. 그렇게 하면 찾고싶은 최대값 나오죠."
"헐, 이해 됐어요. 감사합니다!"
의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제를 들여다보던 시선을 옮겨 세운을 올려다봤다.
"와, 역시 의사 쌤... 저 나중에 또 물어봐도 돼요? 중간 얼마 안 남아서요."
"뭐,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 전에, 알아둘 게 하나 있는데."
세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의찬에, 그는 슬쩍 차트를 보는 척 하며 눈을 돌리더니 말을 잇는다.
"성ㅇㅇ 선생 남자친구 있어요."
"네? 저번에 없다고..."
"있어요. 게다가 질투가 엄청 많다던데."
"이게 무슨..."
어리둥절한 의찬의 손 위로, 세운은 제 주머니에 있던 남은 초콜릿과 함께 쪽지를 함께 올려주었다.
"어, 이거..."
곧 그 종이 쪼가리가 제가 덜덜 떨며 ㅇㅇ에게 건넸던 거라는 걸 인지한 의찬의 얼굴에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설마 하는 눈으로 의찬이 세운을 보자, 세운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곧 꼬인 수액 줄을 풀어주고 아프지 않게 딱밤을 놓는다.
"성 선생님 넘보지 말고, 수학 열심히 해요. 알았죠?"
"...헐."
"나 질투 많으니까."
***
그러나 의찬이 퇴원하는 날이 되고, 세운은 제 진심어린 경고가 1도 효과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