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슈가볼 - 우아 inst
검사님, 수갑 차고 싶어요. B
W. 냉포뇨
"근데 안 지치십니까?"
"뭐가요?"
"몇 주 전부터 계속 저 따라다니시잖아요. 변호사님. 오늘도 그렇고."
"음... 뭐, 이유가 하도 많아서."
"......"
"좋아하는 여자한테 나 좀 봐달라고 노력하는 걸로 해두죠."
켁, 마지막 말에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고기가 사레가 걸렸다. 아니, 무슨 돌직구를 저렇게 담담하게 던지냐고. 아무리 변호사라도 그렇지, 참 쓸데없는 말빨이 좋은 사람이다.
먹다말고 켁켁대는 나를 본 임영민은 화들짝 놀라서는 물컵을 내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에이씨, 쪽팔려. 물을 받아마시곤 겨우 진정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제야 나와 똑같이 한숨을 쉰 임영민은, 베시시 웃으며 나와 눈을 맞추고 말해온다.
"아, 제일 큰 이유가 생각났어요."
"...뭔데요?"
"검사님 법복 입은 게 섹시해서."
"......"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누가 그랬어. 제가 보여드립니다, 침 뱉는 거. 자꾸 헛소리하는 이 남자 콱 집에 보내버리는 거. 어?
"취한 거 아니죠? 시간 늦어서 위험한데."
"네, 저 술 셉니다."
"에이, 아쉽다. 데려다 주려고 그랬지."
"...됐거든요. 덕분에 저녁 잘 먹었습니다. 변호사님도 들어가세요."
"어어, 잠깐만."
메뉴가 메뉴였다보니 꽤나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가게를 나오니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잘 들어가라는 말만 하고 그대로 돌아서 걷던 내 발걸음을, 임영민은 또 멈추게 했다.
꽤나 다급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어느새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시원한 밤공기 사이에서 올려다본 임영민의 얼굴이 어쩐지 붉어진 것도 같고.
놓치지 말라는 듯 내 손 위에 꼭 쥐어준 걸 펴보자 반듯하고 정갈한, 꼭 저같은 글씨가 적혀있다. 'BN로펌 변호사 임 영 민' 참 예쁘게도 적혀있는 글씨 아래에는 당연하다는 듯 열한 자리의 번호가 적혀있다.
"먼저 연락해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죠?"
"...아마도?"
명함을 내려다보다 다시 임영민을 올려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짓고있다. ...뭐, 그렇게 보면 먼저 카톡이라도 해줄 줄 아나. 괜히 사람 마음 약해지게. 뭔가 또 말릴 것 같은 기분에 애써 그 곱상한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내가 제게서 시선을 떼자마자, 이 불도저같은 남자는 제 바지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대더니 또 뭔가를 내 손에 쥐어준다.
이번엔 또 뭐야, 하고 손을 펴보면. 아까 식당에서 가지고 나온 건지, 하얀 박하 사탕 세 개가 내 손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 뇌몰."
"......"
"법정에서 말고, 검찰청에서도 말고, 변호사로서 말고."
"......"
"그냥, 나도 좀 예쁘게 봐달라는 뇌물이요."
***
"아 선은 무슨 선이야! 나 아직 스물 여덟이거든?"
"이년아, 스물 여덟이면 결혼 하고도 남았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라면 좀 나가! 니 엄마 손주도 못 보고 죽겠다!"
"아니 엄마는 무슨 손주를...!"
"됐으니까, 오늘 점심이야. 장소 보내둘테니까 안 나가기만 해, 엄마 어렵게 잡은 자리야. 가서 까칠하게 굴지 말고 좀. 끊어!"
...끊긴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누가 그랬어. 우리 엄마가 존나 이겼는데? 아니.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끊으면. 어? 내가 안 나가면 존나 쓰레기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누가 점심 약속을 그 날 아침에 알려주냐고, 이런 씨...
혼자 빡침을 가득 담아 책상을 팡팡 쳐대는 내가 존나 이상한지, 아님 무서운 건지. 한 쪽에 잔뜩 쌓인 서류를 정리하던 김동현이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뭐, 시바 지금 건들면 물어버린다. 김동현을 향해 눈을 부라려주니 또 그새 쫄았는지 웅얼웅얼대며 잔소리를 한다.
"야, 어머님 입장에서는 걱정되시는 거야, 너 혼자 늙어죽을까봐."
"혼자 늙어죽으면 뭐 어때, 꼭 남자가 필요하나."
"그런 게 아니라, 너 혼자 있는 게 걱정이시라고. 그러니까 좀 한 번만 나가봐라, 벌써 몇 번째 선 자리냐 이거?"
"아니, 뭐..."
"아니면 뭐, 너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
"......"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라. 누굴 좋아해본 적이 하도 오래돼서... 내가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날 좋아하는 사람은 있긴 한데.
"임영민?"
"...뭐? 임영민 변호사?"
"어, 그 사람이 나 좋아하는 것 같던데."
"미친, 어지간히 좋아할 사람 없었나보다."
"...뒤질래?"
"아니, 뭐... 그래서, 너는 어떤데?"
"뭐가?"
"그 임영민 변호사.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글쎄... 사실 예전에는 그냥 심심해서 나한테 들이대고, 말 걸고, 장난치고 하는 줄 알았는데 며칠 전 그 '삼겹살에 소주에 임영민' 이라는 새로운 조합의 식사자리 이후, 조금은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정말 이 남자가 날 좋아하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고...
뭐 이러나 저러나 임영민 생각을 자꾸만 하다보니까 그 이후에도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도 하고...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아른거리기도 하고... (물론 그 내용은 '수갑차고 싶어요', '법복 입은 게 섹시해서' 등등 아주 불건전했지만.)
임영민 변호사가 어떻냐는 물음에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는 날 가만히 보던 김동현은, 오늘도 늘 그렇듯 재수없는 얼굴로 팩폭을 날려주신다.
"너 지금 임 변호사 생각하지. 어째 얼굴이 빨개진다? 너도 좋아하냐?"
"뭐?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라, 말 더듬는 거 봐라? 진짠가보네."
"이 미친놈이 진짜! 빨리 안 꺼져?!"
꼭 매를 들어야 말을 듣지. 뭐 존나 짝꿍 된 애들 있기만 하면 사귄다고 놀려대는 초딩들도 아니고. 서류 더미 중 하나를 들어 던지려는 제스쳐를 취하자 아주 눈이 접히게 웃으며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는 김동현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에이씨, 짜증나. 쟤 때문에 괜히 또 임영민 생각하게 됐잖아... 이씨. 게다가 이따 점심 때 선 보러 또 나가야 하고...
귀찮아 죽겠다는 생각이 벌서부터 들어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괜히 헤집어놓으며 쌓인 서류들 중 하나를 집었다. 일이라도 해야 늘 해사하게 웃는 그, 임영민 얼굴이 사라질 것 같아, 애써 집어든 사건 파일 하나하나를 꼼곰하게 읽기 시작했다.
***
검사님, 수갑 차고 싶어요.
W. 냉포뇨
***
팔자에 있지도 않은 어마무시하게 큰 고급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선은 꼭 이런 데서 봐야하는 거야? 뭐 무슨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억지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오랜만에 한 화장을 대충 고치며 카페로 올라가니 저 멀리에 딱 봐도 '나 선 보러 왔어요. 여자 기다리는 중이에요.' 하는 남자가 딱 하나 보인다. 어떻게 아냐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어째 호텔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저 남자만 딱 보였거든.
멀리서부터 걸어오면서 보는데 어째 양복도 위 아래로 깔끔하게 입고있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 옆태밖에 안 보이는데, 그것도 좀 잘생긴 것 같기도 하다. (렌즈를 끼지 않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잘생긴 건 알겠다.) 아니 뭐, 내가 얼빠는 아니지만 그냥 첫인상이 그렇다는 거다.
근데 이 사람은 뭐, 내가 거의 바로 앞까지 왔는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 창밖만 보고있다.
...그런데, 어째 이 얼굴, 이 옆태. 불길하게 익숙한데.
아니, 잠깐만. 내가 보고있는 게 진짜면, 이거, 그 임영민이잖아? 저번에 박하 사탕 임영민?! 당황해서 어버버대는데, 멍하니 창가만 보고있던 임영민이 입을 연다.
내가 온 걸 모르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척 했던 거였나보다. 날 존나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저렇게 잘 하는 걸 보니까.
"죄송합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다."
"...네?"
"이 자리 어쩔 수 없이 나온 거예요. 예의가 아니라는 거 알지만, 먼저 일어나겠습ㄴ... 어?"
"안녕하세요?"
...임영민이 저렇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하면서 아주 청산유수마냥 죄송하다느니, 먼저 일어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리던 이 변호사 시끼는 나를 보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래, 존나 당황스럽겠지. 나도 딱 몇 십초 전까지 그랬으니까.
그 큰 눈이 더 커져 꿈뻑이며 나를 보길래, 그냥 앞자리에 앉아버렸다. 아니, 엄마도 참 웃긴다. 검사 딸래미한테 변호사를 소개시켜주는 사람이 어딨대. 그것도 하필 임영민을. 생각할수록 어이없기도, 신기하기도 한 상황에 방금 전 임영민과 똑같이 창밖을 한 번 보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멍한 표정이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당황시켜 볼까.
"아, 좋아하는 분 계시는구나."
"...네? 아니, 그,"
"죄송해요, 저도 그건 몰랐어서... 괜히 시간만 뺏었네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성 검사님... 내 얘기 좀 듣고 가요, 응?"
아씨... 존나 이렇게 예상대로 반응하면 귀엽잖아; 좀 화난 것 같은 표정연기까지 같이 해줬더니 진짜 주인 찾는 아기 강아지마냥 쩔쩔매는게... 아, 씹덕이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1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은 임영민은 일어서려는 내 손목을 꽉 잡고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제야 자기가 내 손을 세게 잡고있었단 걸 알았는지 그대로 또 툭, 손을 놔버린다.
"아, 미안해요. 아팠어요?"
"......"
"정말 막, 성 검사님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며 말을 잇는 임영민은 방금까지 죄송하다며, 먼저 일어나겠다며 존나 단호하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오해를 하고 가 버리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이젠 거의 울상을 짓는 얼굴에 결국은 나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아주 꾹꾹 눌러 참던 게 터져 큭큭대고 웃고있으면, 임영민은 또 당황한 표정을 짓고있다.
방금까지 화가 나 가버리려던 사람이 이러니 당연하겠지만, 임영민 놀리는 게 이렇게나 재미있는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알아요, 장난 한 겁니다."
"......"
"커피 마시자, 밥 먹자 말고도 할 줄 아는 말이 많네요?"
"아니, 그게... 억지로 나온 건 맞는데, 상대가 성 검사님일 줄은..."
제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하다는 듯 웃는 임영민을 보다 울리는 핸드폰을 보니 김동현이 잔뜩 문자를 보내놨다.
[김동현ㅗ]
야 내일 -13:04
그 민사 재판 연기됨 -13:04
피고 변호사 선임에 문제 생겼다던데ㅇㅇ -13:04
너 선 보고 그냥 퇴근해도 될 듯? -13:04
어라, 뜻밖의 개이득인데? 안 그래도 내일 재판 일이 좀 복잡해서 정신이 1도 없었는데 정말 하늘이 도운 건지 뭔지. 겁나 다행이었다. 오늘 밤을 새도 못 다할 판이었는데. 김동현의 행복가득한 문자에 알았다는 답장을 간단하게 보내주면서도 오랜만의 칼퇴라니! 하는 생각에 자꾸만 웃음이 실실 새어버렸다, 앞에 임영민이 있는 것도 잠깐 잊어먹고.
"무슨 일 있어요?"
"아, 네. 오늘 내일 재판 하나가 연기됐답니다, 집에 가서 쉬라고."
"...그럼 오늘 이 약속 후에는 스케줄 없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이 불길한 예감은 분명,
"그럼 우리 선 보죠."
"예?!"
"대신, 우리 어머님들께서 원하는 방향 말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게 무슨,"
"일단 데이트 먼저 하고. 다음에 사귀고, 그런 다음 천천히 결혼 약속 잡아도 늦지 않으니까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드립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임영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당황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럼 어디부터 갈까요? 우리 성 검사님 가고싶었던 곳 있어요?"
소풍 나가기 전 초딩 표정... 곧 데이트 나가기 전 신난 남자 표정이 확실하다. 아니, 저렇게까지 신나하면 내가 존나...
"검사님이 없으면, 내가 가고싶은 데 갈까요? 사실 어딜 가든 성 검사님이랑 같이 가면 좋긴 한데."
"......"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보지마... 그럼 내가 거절하기가...
"아, 물론 검사님이 가기 싫으시면 안 가셔도 돼요... 그냥 저 혼자 다니죠 뭐... 외롭게... 네..."
"...가요, 가! 간다구요."
"와아, 진짜요? 와. 저 나중에 어머니들께 식사라도 대접해야겠어요."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아니, 누가 변호사 아니랄까봐 말꼬리 하나, 표정 하나로 사람을 아주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외롭게 자기 혼자 간다면서, 아주 세상 잃은 표정을 짓는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거절을 해. 아니, 뭐... 물론 평소같으면 존나 칼같이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르다.
이렇든 저렇든 임영민이라는 남자가 나한테 장난으로 들이대는 건 아니라는 게 조금은 느껴졌고, 게다가 아까 이 남자가 말한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지 궁금하달까.
그래, 내가 봐도 존나 이상한 상황이라는 거 안다. 이렇게 또 데이트를 하게 된 게 말이다.
검사답게, 성ㅇㅇ답게 말하자면 나도 좀 관심이 생긴 것 같다. 임영민 변호사, 아니. 임영민이라는 남자에게.
***
1. 안녕하세요. 냉포뇨입니다!
2. 정치프도 돌아왔으니, 임변호사님도 돌아오셨지요.ㅎㅎ
3. 아마 '검사님, 수갑 차고 싶어요.'는 정치프보다는 짧게 진행되어 곧 완결이 날 것 같습니다. (뭐 얼마나 썼다고... 하하.)
4. 즉흥적으로 떠오른 소재였기 때문이지요.ㅎㅎ
5. 모든 댓글과 추천은 감사히 받고있습니다.
6.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ㅁ^ 정치프도 곧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