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누구야?"
선배에게 잠깐 양해를 구한 뒤, 허겁지겁 뛰어와 앞에 섰다.
"여기 어쩐 일이에요? 촬영 있다면서요!"
"중간에 잠깐 시간이 비어서... 마침 너 퇴근시간 근처길래, 데려다줄까 해서."
"아... 저 선약이 있어서... 죄송해요."
어떡하지 진짜...
"촬영 있다고 하셔서, 그래서 약속 잡은 건데..."
"....."
"진짜 죄송해요. 힘들게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미치겠다. 아 어떡하지...
정정한다.
참 개 같은 타이밍이다.
"미안해요. 연락할게요."
이미 선배와 저녁 약속까지 잡아버린 상황에서, 뭘 어떡하겠는가.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나 때문에 바쁜데 여기까지...
잠시만.
왜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연락 없이 온 건 저 사람이고, 나는 선배와 선약이 있었을 뿐이고.
미안해서 그런 거다.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 와준 저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야 해서, 그게 미안해서.
그래서, 자꾸 눈에 밟히나 보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저 눈빛이.
"괜찮아?"
"네?"
"표정 되게 안 좋아 보여서."
"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게 드러났나.
요즘 표정관리가 잘 안되나 보다. 왜이러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까 그 사람 연예인 아니야?"
"네?"
망했다.
"배우 아니야? 김석진 같던데."
"아... 맞아요."
에라 모르겠다.
"아는 사이야?"
"아... 네."
"... 그래? 너 보러 온 거야, 오늘?"
어떡하지. 아무리 선배여도 말하기가..
그 사람은 연예인인데... 어쩔 수 없다.
"아뇨, 뭐 병원에 볼 일이 있으신가 봐요."
".... 그래? 이 늦은 시간에?"
"에?"
"아는 사람이 입원했나?"
"아아 그런가 봐요."
"우리 병원에 연예인 입원해있나?"
"모르겠어요. 무슨 일로 왔는지 자세히 안 물어봤어요."
아씨. 위험했다, 진짜.
"근데 너는 어떻게 알아, 그 배우를?"
"아 그게..."
"...."
"저번에 촬영하다가 사고가 있어서, 저희 병원 응급실에 왔었거든요."
"아, 그래?"
"그때 저한테 콜이 잘못 들어와서, 제가 응급실 내려갔었어요. 당직 서다가."
"그때 만난 거야?"
"네. 그때 안거죠, 뭐."
죽었다 깨어나도 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나한테 들이대고 있다 말 못 한다.
"그렇구나. 난 또 뭐라고..."
"많이 먹어. 왜 안 먹어?"
".. 저 완전 잘 먹고 있는데요?"
"그래? 뭔가 걸리는 얼굴이길래."
아, 또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나 보다.
계속 남겨두고 온 그 사람이 신경 쓰인다.
내가 움직였을 때 나를 따라오던 그 눈빛이, 표정이.
아직도 핸드폰은 조용하다.
"출퇴근 안 불편해?"
"네?"
"아니. 너 차 팔고 나서, 버스 타고 다니는 거 아니야?"
"아, 맞아요."
"늦을 땐 어떡해?"
"택시요. 아님 걷기도 하고."
이거 봐.
선배는 순식간에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순식간에 전환된 대화 주제에 말이 술술 나온다.
방금 전까지 굳어있던 표정이 풀린다. 편하다.
"걸어 다닌다고? 그 늦은 시간에?"
"네. 택시 탈 때도 있긴 한데, 컨디션 괜찮고 날씨 괜찮으면 걷는 것도 좋아해요. 거리가 많이 멀지도 않고."
한 번씩 퇴근이 늦은 날, 버스 막차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난 후 퇴근하는 날.
나는 걸어서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도 없고, 차도 많이 없고. 한적하잖아요."
"....."
"혼자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생각 정리도 되고. 기분전환도 되고."
"그래도 위험하잖아."
"저만의 소소한 행복?"
"참나. 너무 소소한 거 아니야?"
밤바람을 맞으면서, 조용한 거리를 걷는 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그럼 다음부터는 나랑 같이 하자."
....에?
"위험하잖아."
"아니..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
"뭐, 맘 같아서는 매번 늦을 때마다 차로 데려다주고 싶은데, 너만의 소소한 행복이라니까."
".... 네."
"옆에 조용히 있을 테니까 나랑 같이 걸어."
"선배가 왜... 바쁜 사람을 굳이..."
"나 안 바빠. 네가 더 바쁘지."
"아니 뭐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고..."
"그럼 전화해."
호출 말고는 선배한테 전화해본 적이...
"문자라도 하던지."
".... 네."
선배님 말씀인데....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어? 내가 자꾸 말 시켜서 많이 못 먹은 것 같은데."
"네? 아니에요!"
저 완전 잘 먹었는데요... 제 앞에 빈 접시들이 못 보셨는지...?
"저 완전 잘 먹었어요. 정말 배불러요, 지금."
"다행이네. 가자, 그럼."
"다음엔 제가 살게요!"
"뭐야. 나랑 또 밥 먹게?"
"에?"
은근히 사람을 잘 당황시킨다.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봐도 나 당황했어요-하는 얼굴로 선배를 보니 그냥 웃기만 한다.
"나야 좋지. 근데 말했잖아. 내가 어떻게 너한테 얻어먹냐?"
"밥은 내가 살게. 나랑 먹기나 해줘. 빨리 타, 집에 가자."
"감사합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미쳤다. 차 겁나 편해. 저는 자본의 노예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비싼 차를 산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내 주위 사람들은 다 좋은 차를 타고다니나보다. 덕분에 얻어타는 나만 개이득.
"얼른 들어가. 푹 쉬고, 내일 오프지?"
"네. 진짜 감사해요.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정말 편하게 왔어요."
"별말씀을. 푹 쉬고 병원에서 보자."
"조심히 들어가세요!"
창밖으로 손을 붕붕 흔들던 선배가 멀어진다.
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걸 보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기는데...
김석진?
뛰었다.
뛰어가야 할 것 같았다.
".... 왔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음, 얼마 안 됐다고 말하면,"
"....."
"안 믿네. 얼굴 보니까."
진짜 말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다.
미안함이 나를 집어삼킨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야."
"촬영... 촬영은 어떡하고..."
"괜찮아. 나 막 째고 도망 온 건 아니야."
".... 미안해요 진짜..."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눈을 못 마주치겠다.
어떤 눈일지 몰라서, 나를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을지 몰라서.
"나 좀 봐주면 안 될까, ㅇㅇ아?"
"...."
"나 너 엄청 보고 싶었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애 타 죽겠다. 나 좀 봐주라. 나 얼굴 좀 보여줘."
"뭐부터... 물어볼까?"
똑같은 장소. 똑같은 자리.
똑같은 라테와 차.
"그 남자... 누구야?"
"어..."
"말해줄 수 있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사실 나한테 말 안 해도 뭐라 할 사람 없어."
"....."
"아직은 나도 너한테 그 사람 누구냐고 물을 자격이 없기도 하고."
목소리가...
슬프다. 저 표정으로, 저 목소리로 말하는데 어떻게 버티랴.
"대답... 해줄 거야?"
나는 또 무너질 수밖에.
"일단..."
"응. 천천히 해."
후. 침착하자.
"선배에요. 저 되게 잘 챙겨주시는 선배."
"...."
"그때, 전화로 들었던 그 목소리 주인공이에요."
".... 아."
"통화하면서 말 안 했던 건, 별다른 이유 없어요. 왠지 모르게 장난치고 싶었어요."
"....."
"만나서 얘기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온 진심을 다해 얘기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닿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정말, 갑자기 생긴 약속이었어요."
"...."
"하루 종일 촬영 있다고, 연락도 잘 안되고 그러길래."
"......"
"많이 바쁜가 보다. 오늘 스케줄이 많나 보다, 하고 말았죠."
"......"
"퇴근하고 집에 가서 씻고 쉬어야지, 했는데..."
"......"
"선배랑 같이 내려가다가 저녁 같이 먹자! 해서 그래요! 한 거죠."
"그랬구나."
"근데... 병원 문 나섰더니... 앞에..."
"내가 서있었고."
"네..."
사실이었다.
나는 전혀 예상 못 했고, 시간이 비어있어 마침 친한 선배와 저녁 약속을 잡았을 뿐이다.
"선배랑 먼저 선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선배를 따라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
"혼자 남겨두고 가서 죄송해요."
"왜?"
"네?"
"왜 나한테 미안해해?"
당연히... 미안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야... 스케줄 하다가 저 때문에 병원까지 와준 사람을 혼자 두고 가버렸으니,"
"....."
"미안해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미안할게 뭐 있어."
"....."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 건 나야."
"....."
"내가 데리러 갈 걸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랑 약속이 잡혀있던 것도 아니고."
"......"
"내가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 거잖아."
"......"
"네가 사과할 이유, 없어."
그래도....
"그러니까, 얼굴 좀 펴."
"......"
"내가 다 속상해지네."
이 와중에 또 다정하다.
"보고싶어서 그랬어. 네가 너무 보고싶어서, 촬영 중간에 시간이 비는데 마침 또 너 퇴근시간이길래."
"...."
"내가 미안해. 너무 멋대로 행동했나 봐. 난감하게 만들어서 미안."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는데.
내가 사과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나한테 사과하냐고 말해야하는데.
"...... 네."
나는 용기가 없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