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만나자."
"... 어..."
"나 네 남자친구 하고 싶어."
미치겠다. 얼굴이 뜨겁다.
내 얼굴 터지는 거 아니겠지...
"내가 잘할게."
"... 지금도 충분히 잘하시는데요..."
"나 엄청 참고 있는 건데. 너 부담스러울까 봐."
와우.
아니 뭘 대체 얼마나 잘해주시려고...
"그러니까,"
"....."
"나 안 망설이고 좀 해보게, 남자친구 좀 시켜주라."
"응? 대답 좀 해줘."
미쳐버리겠네 진짜...
"나 안 볼 거야?"
"네?"
"나 얼굴 보고 싶은데."
계산을 하고 차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고개를 못 들었다.
아니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변할 일이냐고...
"아니 너무.. 막 그렇게 쳐다보시면..."
"왜. 내가 내 여자친구 좀 보겠다는데."
아악. 진짜 소리 지를뻔했다.
저 여자친구 소리 진짜 민망해 죽을 것 같다고요...
"나 얼굴 좀 보여줘. 솔직히 집 들어가기 전에는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게..."
"나는 너를 봐도 봐도 보고 싶단 말이야."
제발 좀... 숨이 좀 안 쉬어지는 것 같은데요...
"아까는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그냥 고개만 끄덕이더니, 이젠 얼굴도 안 보여줘?"
"....."
"나 안 봐주면 뽀ㅃ..."
"아 볼게요! 봐요 봐요!"
식겁할뻔했다.
고개를 들고 날 빤히 쳐다보는 눈을 똑같이 바라봤다.
눈싸움처럼 장난스럽게 넘어갈랬는데... 그랬는데...
너무 다정하다. 나를 보는 표정이, 눈빛이, 모든 게.
검은 자에 비치는 게 오로지 나뿐이더라.
갑자기 팔을 쭉.
"한 번만 안아보자."
군말 없이, 안겼다.
차마 나도 팔을 두르지는 못하고, 몸만.
"고마워."
"... 뭘요."
"그냥, 다. 다 고마워."
"... 제가 더 고마워요."
몸이 멀어지고 품에서 나왔다.
아쉽다. 따뜻했는데.
"저 들어갈게요."
더 있다가는, 밤을 새버릴 것 같아서.
집에 안 들어갈 것 같아서.
"... 응."
"조심히 들어가요."
"응. 너 얼른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게."
"왜요, 나 오빠 가는 거 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내가 너 들어가는 거 봐야지. 집 들어가서 불 켜. 그거까지 보고 갈게."
"피곤할 텐데... 얼른 가지..."
"너 봤잖아. 하나도 안 피곤해. 안기까지 했는데?"
아아악. 부끄러워 진짜.
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 저 진짜 들어갈게요. 조심히 가요!"
"응. 연락할게. 얼른 들어가서 씻고 쉬어."
"네!"
내가 더 질질 끌게 될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내가 안 들어가면 저 사람도 안 갈 것 같아서.
입술 꽉 깨물고, 뒤돌았다.
집에 들어가야지. 들어가서 거실 불 켜야지. 그래야 저 사람도 집에 가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불부터 켰다.
불 켜고 베란다 달려가서 내려다보니 밑에 서있더라.
가만히 눈만 맞추다가,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드니, 같이 흔들어주더라.
밤이 늦었으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시끄러우면 민폐니까.
[저 잘 들어왔으니까 얼른 가요. 조심히.]_9:03
[응. 갈게. 문 잘 잠그고, 씻고 쉬고 있어.]_9:04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_9:04
[진짜 간다.]_9:05
손을 붕붕 흔든다.
귀엽다 진짜. 나보다 오빠라니...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주니, 그제야 차에 타고 출발하더라.
차가 아파트를 빠져나가서 안 보일 때까지 서있다가, 거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티비를 켰다.
켜자마자 보이는 게...
김석진이다. 드라마 재방송인가 보다.
진짜... 잘생겼다...
그제야, 하나둘씩 몰려오기 시작한다.
".. 하...."
진짠가.
내가 진짜 저 김석진이랑 사귀는 게 맞나?
나 어떡하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이래도 되는걸까?
막 매니저가 찾아와서 헤어지라고 그러는거면 어떡하지?
무조건 숨겨야될텐데, 잘 할 수 있겠지?
모르겠다, 씻자. 찬물로 세수라도 하면 정신이 좀 들지 않을까.
씻고... 그래도 정신이 안 들어서 찬물로 세수도 하고...
얼굴이 건조해서 수분크림 바르면서 뺨도 챱챱 때려보고...
넋 나갔다. 완전.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머리 말려야 한다. 정신 차려라.
아니 미쳐가지고 그걸 덥석 받아들이고 그 사람도 말이야 좀 신중하게, 며칠 생각해보라고 시간도 주고 그래야지 바로 그 자리에서 사귀자! 가 말이 되냐고 나도 고갤 끄덕일 게 아니고 고민도 좀 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아 정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또 물고, 계속 물고....
어라,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
♪♬♬♬♪♪
[김석진]
무슨 일이지. 문자 온 거 없는데.
"여보세요?"
"전화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아, 저 씻고 머리 말린다고....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렸나 봐요."
"나 주차하고 집 올라가는 중이야."
"아 네..."
그렇구나... 그랬구나...
집에 잘 도착했구나... 그래서 어떡하라는 거지 나는...?
"너 지금 어색하지."
"네?"
귀신이다.
"왜. 이상해?"
이 사람 작두 타야겠는데...?
"멍 때리지, 자꾸?"
cctv도 달아놨나...?
보고 있는 줄.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좋다.
떨린다.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하겠다.
"아니... 그게..."
".... 싫어?"
"네?"
뭔 소리야 이건 또.
"..... 후회해? 나 받아준 거?"
아니 이 인간이.
내가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미쳤나.
"미쳤어요?"
"어?"
"아니 진짜 듣자 듣자 하니까. 후회 같은 소리 하네."
"....."
"후회를 왜 해요? 내가 후회하길 바라요?"
"... 아니..."
아 나 정말.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기로 써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네.
"근데 무슨 그런 소릴 해요? 내가 말했잖아요. 내가 무서웠던 건 내가 피해될까 봐, 혼자 남겨질까 봐 그랬다고."
"...."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요. 나라서 다 괜찮다면서요."
"....."
왜 대답이 없어?
"뭐야, 거짓말이었어요?"
"아니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거짓말을 해!"
"그럼 뭐, 이제 와서 후회해요? 자신 없어요?"
"아니야! 내가 후회를 왜 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
"자신이 없기는 왜 없어. 절대 그럴 일 없어. 말했잖아, 네가 버리기 전까지, 난 너 못 놔."
"....."
"아니다, 네가 날 버려도 나는 널 못 놔."
솔직히 좀 서운했다. 후회라니.
"미안해. 나는 그냥..."
"....."
"내가 너무 얼떨떨해서. 실감이 안 나서."
"...."
"혹시 나 때문에, 네가 얼떨결에 그랬나 싶어서."
"....."
"미안해, 진짜."
내가 얼마나 용기 냈었는데.
"너무 좋아서. 지금 너무 행복해서, 꿈같아서."
"...."
"진짜가 아닐까 봐. 정말 꿈일까 봐."
"...... 저도 좋아요."
"어?"
조금 밉지만,
"저도 좋다고요."
"...."
"저도 꿈같아요."
".... 응."
"저도 얼떨떨하고, 설레고, 꿈같고 그래서 자꾸 멍 때리고 그러나 봐요."
"...."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좀 미웠어요."
".... 미안해."
그래도 좋아서.
"집에 올라와서 정신을 못 차리겠는 거예요, 꿈같고 거짓말 같고."
".. 응."
"티비를 켰는데, 오빠가 딱 나오는 거예요."
"응."
"근데 엄청 잘생긴 거예요. 그래서 놀랐어요."
".. 응."
이제 좀 웃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설렌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좀 전까지 나랑 밥 먹다가 날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간 거야? 싶은 거예요."
"그 잘생긴 사람,"
"....."
"네 남자친구야."
"......"
"네 거잖아, 나"
미쳤다. 진짜 미쳤다.
아니 어떻게...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응?"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요!"
방금 전까지 후회하니 뭐니 그래놓고는 갑자기 이렇게 엑셀을 밟는다고?
"부끄러워 죽겠어요 진짜..."
나는 지금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얼굴이 뜨거워요..."
또 웃는다.
"왜 자꾸 웃어요..."
"좋아서."
"....."
"안되겠다."
"네?"
부스럭부스럭.
전화기 너머 부스럭부스럭. 뭐 하지?
"15분"
"네?"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간다, 네 남자친구."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미쳤나 보다.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여길 왜 또 온다는 건가.
오지말라고 얘기 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하다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이미 씻어버려 화장은 사라진지 오래고, 머리도 감았고.
옷이라도 똑바로 입고 있자, 싶어서 청바지라도 갈아입으려는데...
똑똑.
하... 인생... 맘대로 되는 게 없다...
"안녕."
"어... 네..."
"나 아니면 어떡하려고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어?"
문 열자마자...
와. 후광이... 반칙 아니야 이건?
나는 다 씻어서 얼굴도... 머리도 말린지 얼마 안 돼서 산발인데다가, 옷도 잠옷 입고 있는데...
"그렇게 쳐다보면 나 얼굴 빨개지는데... 일단 나 좀 들여보내주면 안 돼?"
"아, 네네. 들어오세요."
너무 정신 놓고 봤나 보다.
솔직히 저 얼굴을 정신 차리고 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귀엽다. 잠옷이야?"
...아.....
도망 각 인가...
"어디 가."
...허리가 잡혔다.
나는 분명 잠옷이 부끄러워서 도망가려고, 방으로 숨으려고 뒤돌았는데...
등 뒤에 넓은 품이 느껴진다. 또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미안해."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말하는 목소리가 꽤 처량하다.
"나 미워하지 마..."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그래도...
"째려보지 마... 자꾸 째려보더라 무섭게.."
몸을 빼내 휙 돌려 온 힘을 다해 째려본다.
"눈 아프겠다. 나 이쁘게 봐줘. 내가 잘못했어."
진짜 속상했었다고. 티 팍팍 내야지.
"얼른 들어와요."
이제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야지.
"앉아요."
"응..."
미친. 웃을 뻔했어.
소파 맞은편 바닥에 그냥 털썩 앉았다.
"위로 올라와. 옆에 앉아. 왜 바닥에 앉아..."
커다란 강아지 같다.
강아지 귀 달려있었으면 분명히 축 처져있었을 것이다. 약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옆에 앉기 싫어?"
"...."
"그럼 내가 내려갈..."
"그냥 앉아있어요."
"응..."
귀여워 진짜.
눈동자만 도륵도륵.
저 덩치 큰 사람이 내 눈치를 본다.
괴롭히는 것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 진짜 서운했어요."
"...."
"속상하기도 했고."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사귀기로 하고 하루가 지났어, 이틀이 지났어."
"...."
"몇 시간, 그것도 세 시간 좀 넘자마자 후회하냐고 묻는 게 어딨어요?"
"미안..."
"속상했어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진심이 아닌 것 같았나 싶기도 하고."
"아니야. 그건 진짜 아니야."
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후회하냐 물은 건지, 알고 있다. 이해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건지 알 것 같아요."
"...."
"제가 오빠 속을 좀 썩이긴 했죠."
"아니야."
말은 아니라면서, 웃기는.
"제가 하도 혼자 낑낑대서, 이런저런 고민은 혼자서 다 했었으니까."
"...."
"얘가 괜히 나 때문에, 제대로 고민도 못해보고 분위기에 쓸려서 받아준 건가? 했겠죠."
"....."
"근데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
"저 오빠 좋아해요. 진심으로."
"......"
"생각보다 많이."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많이.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
"제가 더 잘할게요."
"... 아니야. 넌 더 잘할 필요 없어."
"....."
"충분해. 그냥 옆에만 있어줘."
"....."
"미안해, 불안해해서. 그리고 고마워."
"나는 네가 나한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나를 쳐다보는데, 이쁘다.
아까보다 표정이 편안하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냥 마주 봤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러고 싶어서.
민망하다.
"음.."
할 말 다 하고 나니까 민망하다.
너무 막 말했나...? 필터링 좀 할 걸.
아까부터 계속 빤히 쳐다보는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내 집인데 나만 가시방석이다.
"ㅇㅇ아."
"... 네?"
"옆으로 와."
슬그머니 일어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물론, 붙지는 않았다.
"이리 와. 왜 그렇게 멀리 앉아."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가지, 뭐."
아, 또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 안아줘."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쳐다봤다.
"얼른"
또 팔을 쭉 뻗길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팔 아플 텐데 계속 들고 있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안겼다.
이번엔 나도 허리에 팔을 감았다.
심장소리가 들린다.
콩닥콩닥
"고마워. 솔직하게 다 말해줘서."
".... 뭐가 그렇게 자꾸 고마워요."
웅얼웅얼.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얘기하니, 좋은 향기가 난다.
웃으니까 어깨가 들썩인다. 나까지 미소가 지어진다.
"좋다."
"....."
"지금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좋다."
"....."
"당연히 네가 젤 좋고."
저도 당신이 젤 좋긴 한데요...
이렇에 안고 있는데 그렇게 직구로 던지시면... 제가 많이 힘들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굳이 세고자 할 생각도 없었고.
그냥 한참을, 안겨있었다.
얼마나 더 지났을까.
"나 가지 말까?"
"네?"
이게 무슨 소리죠...?
"나 가기 싫어."
저희... 아까 좀 전에 만나기 시작했는데요...
일단 좀 품에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안 놔준다. 오히려 더 꽉 껴안는다.
"일단 저 좀 놔주시면..."
"나 내일 스케줄도 없어."
"저는 출근해야 되는데..."
"내가 아침에 데려다줄게."
"아니 괜찮은데요..."
"나 진짜 가기 싫어."
"나 안 가면 안 돼?"
저기...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