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w. Cl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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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지구와는 분리된 별개의 세상이 있었다. 에덴(the garden of Eden), 천사와 악마만이 살아가던 낙원에 분열이 생겨버렸다.
네스토르는 밝으면서도 맑은 에오스와는 다르게 조금 더 어두웠다. 자신에게 있어 당당하고 솔직한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에오스라면, 자신과 그 속내를 숨기려는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네스토르였다. 그 마음 속 가리개가 표현되기라도 하듯 네스토르는 아침임에도 우중충하니 어두웠다. 고향을 찾았지만 마냥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백현이 오래된 거리를 거닐었다. 분명 태어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을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작은 날개를 파닥였다. 오빠, 오빠는 왜 날지 않아요? 여자아이의 물음에 백현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애써 못난 날개가 싫다 답하려 하지 않았다. 너네는 못난 날개가 부끄럽지 않아? 조금은 의아함에 느리게 눈을 껌뻑이던 백현이 걸음을 뗐다. 자신은 경수를 구해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조금이나마 제가 살아갈 만한 이유가 생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정체를 속이며 살아가던 자신의 죄악 앞에서도 눈을 찡긋대며 웃어주던 작은 아이가 어느덧 아른거렸기 때문에.
ㅡ경수는 무슨 음식 좋아해?
너랑 있을 땐 매일 스파게티를 먹긴 하던데. 비어있던 백현의 눈이 번뜩였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가려 말하지 않는 음성, 백현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상자 위에 카이가 앉아있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적의라곤 담겨있지 않은 눈동자가 화를 돋궜다.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것이 느껴지자 백현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ㅡ경수 내놔. ㅡ말했잖아.
네 거 아니라니까. 쐐기를 박듯 선명한 발음으로 말한 카이의 표정 없는 얼굴에 웃음이 생겨났다. 백현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살아가며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그 대단한 카이는 제게로 찾아와 자신의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경수를 가져갔다. 그러고서 자신의 분노가 목적이라는 양 주변을 멤돌았다, 경수는 보여주지 않고서 홀로.
ㅡ경수는 이제 널 원하지 않게 될 거야. ㅡ뭐? ㅡ넌 경수가 실로 원하는 것을 주려 하지 않잖아.
온통 알 수 없는 소리들. 경수를 만난 4년 동안 백현은 경수에게 최선을 다했다. 오래 전 만났던 가여웠던 어린 아이가 겹쳐져 해달라는 건 다 해줬는데, 경수가 내게서 얻어내지 못한 것이 무엇이길래.
ㅡ경수는 고작 200년만 살기에는 아까운 아이야. ㅡ너, 설마……. ㅡ경수는 나와 영생을 누리게 될 거야, 방해하려 하지 마.
닥쳐! 백현이 살의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카이에게로 발돋움했다. 그 간악한 목덜미를 잡아챘다고 느껴 손을 움켰지만 잡히는 건 허공 뿐이었다. 사라져버린 카이가 앉아있던 상자 앞에 서있던 백현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웅크려진 몸이 잘게 떨렸다. 상자 위에 하얀 얼굴을 묻었다. 경수야, 영생을 살길 바랐어? 날개가 접어들어갔다. 상자가 조금씩 눈물로 얼룩졌다. 그러면서도 백현이 이를 악물었다. 네가 간절하게 바란다해도, 이 끔찍한 영생이 네 손에 들어가도록 놔둘 수 없다. 너는 내 곁에서 살아가야 해. 내가 갖고 싶었던 그 예쁜 모습을 내게 보여주면서 내 곁에서 평생을 살고, 나는 가질 수 없었던 후회없는 삶의 끝을 맞아야 해. 끝이 빨갛게 변한 코를 훔친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달렸다. 간간히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네스토르의 고위급 악마들을 백현이 밀쳐내면서 빠르게 달렸다. 높은 상공에 자리잡은 카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며 달리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ㅡ거짓말 쳐서 미안해, 백현아.
그렇지만 아마 곧 사실이 될 걸. 쉬지 않고 움직여 뻐근한 근육에 카이가 두 팔을 위로 곧게 뻗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경수한테는 뭘 먹이지?
ㅡ네가 내 반려동물이야?
일어난 지 몇 분이 지나서야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난 경수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렀다. 카이, 백현이 아니라 카이, 중얼거리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카이를 기다리던 경수의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 쯤이려나, 에오스에 이렇게 큰 성이 있었나? 난 100년을 살면서도 왜 못봤지. 뒤통수에 물음표를 한아름 달아둔 경수가 침대 옆에 있는 커다란 창문 밖을 내다보려 무릎걸음을 하다가 문득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관심사를 틀었다. 아까 봤던 백호가 날 좀 봐달라는 양 앞발로 자신의 다리를 마구 긁어대고 있었다. 작은 몸통을 집어든 경수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제 물음에 백호가 혀를 내밀고 헥헥댔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ㅡ아, 기분 좋다!
천사의 반려동물은 감정과 생명 모두가 직결되어있다는 백현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 경수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백현의 말대로라면 함께 기뻐해야 할 백호는 그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나 기분 좋다니까? 의아함에 경수가 백호를 흔들었다.
ㅡ네 거 맞으니까 괜히 괴롭히지 마.
귀여워, 언제 들어온 건지 문앞에 선 카이가 한 손엔 그릇을 들고 웃으며 백호를 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기척도 없이 들어온 카이를 보고 놀란 경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호를 옆에 내려두었다. 그러게, 어깨를 으쓱인 카이가 다가오자 맛있는 냄새가 훅 번졌다. 경수의 시선이 그릇을 쫓자 카이가 침대 옆 책상에 그릇을 올려두고 손짓했다. 슬금슬금 경수가 엉덩이를 끌며 다가가자 포크로 면을 돌돌 말은 카이가 자동적으로 벌어지는 경수의 입에 넣어주었다. 거부감 없이 스파게티를 받아먹으려 재깍재깍 열리는 경수의 입술을 보던 카이가 말했다. 새 모이 주는 것 같아.
ㅡ여긴 어디예요? ㅡ우리 집.
경수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카이가 극히 간결한 대답을 했다. 그냥 그렇게 알아둬. 가끔씩 카이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분위기는 호기심 많은 경수의 입을 꼭 다물리게 하는 때가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거 많은데, 다시 힐끔거리며 카이의 눈치를 본 경수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ㅡ나를 왜 여기로 데려왔어요?
경수는 카이가 화를 낼 줄 알았다. 표정이 더는 묻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짓는 표정인 듯 어딘가 들뜬 카이의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노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100년 후면 죽어, 알지? 차가운 손을 어깨에 두르며 물어오는 말에 알아요, 덤덤한 척 하려했지만 끊기는 목소리로 경수가 답했다. 내가 죽는 게 좋아? 되게 기쁘게 말하네. 그럼 나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백현이형은 100년도 채 안 남았겠다. 속으로 혼자 툴툴대던 경수가 멈칫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ㅡ영원히 살고싶지? ㅡ……. ㅡ너한테 내가 영생을 줄게. 나랑 여기서 영원히 살아.
그럴 거지?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양 멍한 경수의 시선에서 에오스 안에서 다른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동경해왔던 영생과 제 말에 확답을 바라는 카이의 얼굴 너머로 과거에 백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넘실댄다.
[형은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댔잖아, 몇 살이야?] [세기 귀찮아서 안 셌어. 차피 경수 너보다 100년은 더 살았을 걸. ]
형은 나한테 천사라고 했는데, 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걸까? 우리 천사들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200년을 귀찮아서 안 셀 수 있어? 멍하니 앉아있던 경수의 뇌리에 섬광같은 기억들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한 번도 백현의 날개를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생각해? 혼란으로 파르르 떨리는 경수의 아랫입술을 보던 카이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면서 손을 뻗어 움찔대는 여린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울 것 같은 눈가를 살살 쓸어주었다.
해도해도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네스토르 정부 지하에 마련되어있던 비밀 돔 안 중앙에 찬열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라 있었고, 네스토르 대신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관객석에 앉아있었다. 찬열이 깨어나자마자 베아뚜스 기계가 정지해버렸기 때문에 몰려온 네스토르 대신들은 찬열의 능력을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그래서 아직 발걸음을 딛는 것도 어색해하는 찬열에게 일어나 지하의 비밀 돔으로 내려갈 것을 종용했고, 내려가서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능력을 보여줄 것을 강요했다. 권력을 남용하는 대신들에게 치여 관여할 수 없는 크리스는 안타깝게 찬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찬열이 잠들던 그 날처럼.
ㅡ네스토르를 행복하게 할 능력을 보여주게!
어서! 대신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찬열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치않은 타의로 짊어져 온 의무를 각인시켰다. 천천히 손을 쥐고 펴기를 반복하던 찬열이 숨을 들이쉬고 돔의 바닥으로 손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절망하고, 대신들이 화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할 때에 격렬한 파공음과 함께 찬열의 손에서 커다란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돔 바닥을 온통 그을리게 만든 불기둥은 점차 크기를 키워가다가 찬열이 손을 움켜쥐자 사그라졌다. 그 위력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경탄했다.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강한 위력의 불기둥으로 보아 베아뚜스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새어나오는 참에, 굳건히 닫혀있던 돔의 문이 와장창 깨졌다. 찬열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바라본 먼지바람이 사그라들자 한없이 위태로운 표정의 백현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알아본 찬열이 눈을 크게 떴다. 살아 움직이던 100년과 잠들어있던 3000년 동안 가장 강하다고 믿었던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떨리는 입술이 지나치게 여렸다.
ㅡ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백현에게 대신들이 반갑다는 인사를 꺼낼 틈도 없이 백현은 냉큼 용건부터 꺼내 놓았다. 도와주셔야 합니다.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들을 등지던 자의 요청이 단숨에 의무로 변하는 괘씸함에 대신들이 무어라 호통을 치기 한 발짝 전에 백현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자존심을 체감했던 이들이 모두 흠칫, 놀랐다.
ㅡ도와주세요, 제발…….
찾아야만 해, 찾아야만 한다고……. 작게 읊조리는 입모양을 알아본 찬열이 다가감과 동시에 백현의 몸이 무너졌다. 찬열은 급하게 다가가 백현을 품에 안았다. 눈을 감고 잘게 떠는 몸을 토닥여주다가 찬열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너무 커져버린 불쌍한 아이를 알아볼 수 없는 건가, 어쩌면 당신보다 강해진 내가 당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도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언뜻 부둥켜안은 두 몸이 서로 다른 안타까움에 휩싸여 있었다. |
s2감사하신분들s2 |
3장독자님들♥
노루님, 니포님, 꼬부기님, 미카엘님, 모바일님, 빛나리님, 환자님, 독자7님, 콩님
공지독자(?)님들♥
니포님, 콩님, 독자7님, 환자님, 모바일님, 빛나리님, 노루님, 꼬부기님, 미카엘님, 독자8님
진짜이렇게늦게오는데도꾸준히기다려주시고늘항상너무너무감사드려요독자님들ㅠㅠㅠㅠ제가일부러빨리오려고캠프끝나자마자친구들놀자판도마다하고왔습니다5장에서는독자님들한테길지는않겠지만편지도써드릴생각이예요ㅎㅎㅎ항상읽어주셔서감사한마음뿐입니다ㅠㅠ |
부연설명 |
4장부터는 새로 등장할 내용도 별로 없어서 아마 부연설명은 점점 짧아질 것 같습니다ㅎㅎ!
1. 3장에서 혹시나 다르게 여기실까봐.. 찬열이는 악마가 맞습니다! 대신에 태어나자마자 실험용 악마가 되었고, 지금은 실험(베아뚜스)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위력이 엄청 강력한 악마가 될 거예요.
2. 천사와 악마 구별을 똑바로 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하나하나 설명해드리자면,
백현(보수파 악마), 경수(천사), 세훈+준면(천사→유토피아로 인해 변종 악마), 찬열(악마→베아뚜스 실험체), 카이(천사도 악마도 아닌 전설적인 존재), 크리스(악마) 정도 되겠습니다! 예상 가능하시겠지만 카이는 세훈이를 납치해서 경수를 변종 악마로 만들려고 해요.
3. 백현이는 찬열이를 분명 기억합니다. 하지만 찬백은 찬열이가 성체가 되기 하루 전에 헤어졌고, 백현이는 찬열이의 성체 모습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는 없어요. 또 경수가 혼란을 빚는 이유는 1장에서 짧은 한문장으로 나왔었는데, 백현이는 경수에게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은닉했습니다. 경수는 백현이가 천사인 줄 알았어요.
부연설명이 필요했던 내용들은 훗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완결나서 텍파공유를 할 때 다소 수정되어 나올 것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s2 |
암호닉, 신알신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