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지만 괜찮아
w.1억
어렸을 때 몇 번의 심장 수술이 있었고, 지금은 더이상의 수술도 필요 없고, 약 조금 먹으면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심장병을 가진 여주인공 처럼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일은 딱히 없다. 그리고 죽을 일도 없고.
가끔 심장이 콕콕 아프고, 힘이 없을 뿐이지. 지금은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살고는 있는데. 그런 취급은 못 받는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 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한다.
고백이란 걸 하기도 하고.
"좋아해. 전학 온 처음날 부터."
"미안한데 난 너 싫어."
고3 때 전학 와서 어색하게 있는 나를 보고 무심하게 챙겨줬던 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고 대답을 했다.
"왜?"
"……."
"나한테 되게 잘해줬었잖아."
나름 답답하다는 소리 잘 듣는 나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당당하게 왜?라고 물었을까.
내가 참 신기했다.
"담임이 너 아프다고 챙겨달라고 해서 몇 번 챙겨준 것 뿐이야."
"아.."
하긴 그렇지. 인기도 많은 네가 나한테 마음이 있을리가.
그래도 나름 용기를 내서 꾸준히 너를 좋아하게 됐다. 네가 어딜 가던, 뭘 하던 말이다.
"안녕."
"……."
너에게 인사를 씹히는 것도 이제 반년이 다 되어갔고.
"끝나고 집에 같이 갈래?"
"왜 그래야 하는데?"
거절을 당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같이 가!!"
"……."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네게 익숙해졌고.
"좋아해."
그런 너에게 고백을 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입이 닳도록 이재욱에게 틈만 나면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재욱 너도 그런 나에게 지쳤고, 싫었는지.
내게 큰 상처를 주었다.
"싫다는 사람한테 계속 좋다고 붙어있는 너도 참."
"……."
"하나만 물어보자. 죽을병 걸린 사람도 연애라는 걸 하긴 하냐."
"…뭐?"
"심장이 안 좋다며. 매일 정해진 시간도 아니고, 수업시간에, 점심시간에 틈만 나면 약 먹는 게 죽을병 아니면 뭔데?
약 없으면 버티지도 못 하는 네가 사랑이란 걸 할 수가 있냐고."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아픈 사람은 누굴 좋아할 수도 없는 거야?"
"안 그랬음 좋겠어."
"……."
"너한테 관심 없는 사람한테는 더 더욱."
숨이 턱 막혀왔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저런 말을 들어야한다니. 죽을병이라니.. 사랑이란 걸 할 수가 있냐는 말을 너에게 들으니 눈물이 먼저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네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내가 싫었던 걸까.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꾹 참고 입술을 꽉 문 채로 너의 어깨를 치고서 교실에서 달아났다.
"……."
그리고 교실 앞에는 여자 세명이 다 엿듣고 있었는지. '안녕'하고 어색하게, 또는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그 애들의 인사 조차도 무시하고서 학교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또 하필이면 비가 왔다. 매일 이러더라. 영화 속에서나, 드라마 속에서나.. 다 똑같이 말이다.
워낙 몸이 안 좋기 때문에 나는 아프면 안 된다.
감기 마저도 걸리면 안 되는데. 걸려버렸다. 그래서 나는 결국엔 입원을 하게 되었고.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가자."
마침 아빠의 일 덕분에 시골 쪽으로 이사를 가야 했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막말을 하던 이재욱의 얼굴이 떠올라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나를 더 아프다 생각을 했고, 나는 괜찮다고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참 비굴하다. 너에게 고백을 했고, 막말을 듣고 나서 전학이라니.
그리고 몇년 후. 나는 스물네살이 되었고 대학 졸업까지 마친 나는 취업을 나가려고 했는데.
큰아빠가 소개 시켜준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냥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 바로 물어봐요. 원래 인턴일 때 궁금한 게 제일 많을 때지. 아, 근데 나 말고 한주임한테."
"아주 뻔뻔해서 못 봐주겠네. 서주임님."
"……."
"그래 ^^ 인턴.. 아니 아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그리요!!.."
내 말에 서주임님이 '왜들 그리 다운 돼있어어!!'하고, 곧 한주임님이 미친 것!! 하고 숟가락으로 서주임님의 머리를 쳤고..
곧 내 옆에 앉아있던 정대리님이 말한다.
"우리팀에 막내도 들어왔겠다. 오빠,언니 처럼 행동 좀 해라."
"정대리님?.. 저는 가만히 있어도 오빠..얼굴 아닌가요."
"먹어^^."
"네 ^ㅁ^."
우리 팀에는 이분들이랑 나까지 합쳐서 6명 정도 있다. 다들 착하신 분들이라 다행이긴 하다만..
굳이 이 사람들 앞에서 약 먹는 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픈 것도 숨길 예정이고.
다같이 밥을 먹고 회사로 들어섰는데.. 정대리님이 내게 건물 층수마다 뭐가 있는지 알려준다.
"회식 같은 경우는 많이 안 하죠...?"
"회식?"
"네…혹시라도 막 빠지거나 그런 건."
"회식..은 빠져도 괜찮지만. 아픈 게 아닌 이상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아, 그렇겠죠..? ㅎㅎ.."
"왜? 회식 별로야? 술을 못 마시나?"
"마셔본 적도 없고.."
마시는 것도 힘들고.
"스물네살이라면서? 왜 안 마셔봤어?"
정대리님의 질문에 앞에서 떠들며 가던 한주임님이 뒤돌아 내게 말한다.
"헐?? 술을 안 마셔봤다구? 아니 아니 어쩌다가? 왜??"
"인턴이 정상인 거지! 한주임 처럼 소주 네병이나 마시는 사람이 어딨나."
"서주임님 ^^ 언제는 멋있다면서요."
"멋있다고 안 하면 소주병으로 내려찍을 것 같은데 그럼 뭐라 해."
얘기를 들으며 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쪽을 보자..
"……."
보고싶었던, 아니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5년만에 보는 너는 내 눈을 피했고, 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