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에이젼시 단체 화보 촬영때문에 지금은 바닷가. 그 날 이후로, 부쩍이나 어색해진 김종인과 도경수였다. 하지만 내 쪽에서는 딱히 신경은 쓰지않았다. 박찬열과 김종인은 서로 그 날에 대해서는 더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뒤늦게 술에서 깬 박찬열이 나한테 되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나는 그냥 쿨하게 괜찮다고 넘어갔다. 박찬열은 사실 게이보다는 이성애자쪽에 가까운터라 오히려 나중에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것에 기분이 나쁠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내쪽에서 미안하다고 하니, 갸웃뚱해 한다. 혹시 김종인이 때린게 아니라 내가 때린게 아니냐며. 장난으로 넘어가는 것도 어쩌면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 아침들 먹으시고.”
민수형이 사오신 간단한 샌드위치와 우유였다. 샌드위치까진 괜찮은데 우유를 보니 순간 소름이 돋고 가슴이 떨려 고개를 절레 절레 저어보였다. 저 우유 싫어해요. 그제서야 민수형이 거둬간다. 요즘 약을 안먹어서 그런지 우유에 대해 더 민감해진것같다. 오랜만에 최민호에게 전화할까 생각하다가 이내 안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종현이형 귀에 들어가면 걱정하고 난리 날 것이 분명했기에.
“우유 안 먹어요?”
도경수가 걱정되는듯 쳐다본다. 안그래도 말랐는데 조금이라도 더 드세요.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루 종일 김종인은 나를 정말 개무시했다. 내가 없는 사람처럼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지나치기 일수였고, 내가 메이크업을 해주는것도 거부했다. 되려 보조 코디가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괜찮다며 손사레를 쳤다. 이까짓 일 쯤이야.
촬영 도중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져서 서로 이리 저리 가장 가까운 숙소로 대피했다. 나도 일단은 들어갈까 하는데 아직 김종인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유독 김종인이 비를 싫어했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설마 비를 맞기 싫어서 아직 테라스에서 뻐기는건 아니겠지? 설마 하다가도 금새 우산을 들고 뛰어나가 테라스로 무작정 미친듯이 뛰었다. 그러면서 우산과 내 몸의 위치가 어긋나 비를 다 맞아버렸다. 아까까지 촬영하고 있던 카페에 도착하고, 테라스에 있는 김종인이 보였다. 있구나, 다행이다.
“김종인!”
김종인이 뒤를 돌아 나를 훑어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다.
“종인아!”
이제는 뒤도 안 돌아본다. 하여튼 저 심술. 카페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실례,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우산을 든 도경수가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종인아.”
“어, 왔어?”
김종인이 그제서야 뒤 돌아보고는 도경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아예 없는 사람인듯 그대로 지나쳐 둘이 우산을 나눠쓰고 빗속으로 걸어간다.
손에 들린 우산을 카페에 두고 그냥 나왔다. 그러고 싶어졌다.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으면서 여러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더 비참해져서 속상한 마음이 커져간다. 바라는거 없다던 난데 결과적으로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바라고 있었다.
계속 정처없이 걷다가 나도 모르게 김종인의 숙소로 갔다. 차마 문을 열어달라고 할 용기가 없어서 현관의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울지말아야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빗물에 다 젖은 담배가 나온다. 신경질이 나서 그걸 던져버리고 라이터를 달칵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반사적으로 기둥뒤로 달려가 빼꼼히 쳐다보니 도경수랑 김종인이 나온다. 둘이 짧게 입을 맞추고, 곧 도경수가 우산을 피고 유유히 걸어나간다. 김종인이 내가 버린 담배를 발견하고는 몇초간 쳐다만 보더니 이내 다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다시 현관으로 가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생각해보니까 이태민 너 진짜 웃긴다. 이제 하다 하다 스토커짓이냐? 그만 가야겠다 해서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지지 않는다. 가기싫어. 이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놀라서 뒤를 돌아보기도 전 담요가 내 머리위로 떨어졌다. 그때가 되고 뒤를 돌아보니까 김종인이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어 서 있다.
“사생은 범죄인데.”
“… ….”
“비 맞은 새끼고양이 거둬줄만큼 내가 좋은 성격은 아닌건 알고 있을꺼고,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뭔데.”
“…비 맞은 전 애인은 거둬줄래?”
“… …들어오던가.”
담요를 덮어쓰고 들어가니까 난로가 보인다. 곧장 난로로 달려가서 오들 오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는데 김종인이 쇼파에 길게 앉아 나를 바라본다.
“용케도 일 하고 있네 너.”
“말했잖아 나는 너랑 떨어지지않는다구.”
“미저리같은 새끼.”
“알아.”
김종인이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고, 나는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낡아보이는 종이로 만든것이 재질이 까칠까칠하다. 열어서 보는데 시들이 적혀있다. 하나 하나 읽어보는 와중에 전자렌지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시에 나름 심취해서 있는데 어느새 온 김종인이 내게 머그컵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금새 새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르며 떨어트렸다. 덕분에 뜨거운 우유들이 내 발등에 떨어져서 빨갛게 붓고 깨진 유리들에 찔려 생체기가 났다. 놀란 김종인이 손으로 머그잔들의 잔해를 치우더니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수건에 물을 뭍힌다.
“괜찮아? 안 뜨거워?!”
찬 수건으로 아프지않게 겉만 눌러주고는 이내 내 발을 들어 이리 저리 살펴본다. 상처났잖아. 찡그린 얼굴이 걱정으로 얼룩져있었다. 정처없이 허공을 떠돌던 내 손이 김종인의 뺨에 닿았다.
“너 진짜 이럴꺼야?”
“… ….”
“내가 너한테 지랄맞게 군다고 이러는거면 그만 둬. 피말려서 죽이려는거 아니면.”
유릿조각이 다행히 박히진않은건지 상처만 어루만진다.
“너 도경수가 그렇게 좋아?”
“어.”
“생각하지도 않네.”
“생각 할 필요없어 좋으니까. 안좋아도 좋아. 좋아도 좋고.”
“……그럼 나 오해하게 하지마, 기대갖게 하지도 말고. 넌 결국 나한테는 안올꺼잖아.”
내 말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김종인이 붕대가 없다며 자신의 티셔츠를 치아로 찢어 내 발을 감쌌다. 나는 피하는 김종인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다행인 마음도 들어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척 수첩을 다시 열었다. 김종인이 다시 부엌으로 가는가 싶더니 방으로 간다.
“나 잘꺼니까 너는 가라.”
“…여기서 자면 안되?”
“지랄하지말고 꺼져.”
괜히 풀이죽어 나가려다가도 이번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제딴에는 가장 크게 욕심내서 쇼파에 벌러덩 누웠다. 같이 한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 고요한 분위기를 만끽하다가 이내 조심스레 종인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서니 황량하게도 큰 침대가 보인다.
“종인아….”
이미 잠든건지 대답이 없다. 용기를 내 김종인 옆으로 가 멀찍히 떨어져서 누웠다.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른다. 그래서 흐느껴 울었다. 언제부터가 잘못된거지. 대체 언제부터 우리 이렇게 된건데.
“…내가……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게 너도 힘들었었어?
“……근데 있잖아…나도 정말 많이 힘들었어 종인아……….”
죽어라 맞고, 빌빌 기고 놀림감이 되었던 시간동안.
“매일같이 손목을 그으면서도……너 생각하면서 살아갔어….”
너는 알아? 지금의 내 상처를. 때론 남겨진 사람보다 떠난 사람이 더 아프기도 해 종인아.
*
종인이 입술을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치아로 깨물고 눈을 감는다.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른 눈물은 그가 얼마나 참고있는지 보여주는것같았다. 그새 몸을 돌려 잠든 태민을 바라보고는 종인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너 수취 불명의 사랑이 뭔지아냐?”
“… ….”
“지난 시간동안 내가 너를 생각하면서 죽어라 외웠던 시야.”
“… ….”
“너 국화꽃의 꽃말이 뭔지는 알아?”
소나기라고 하던 비가 더욱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과 부딪히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진실. 감사.”
사실은 니가 보고싶었다. 그래서 니가 코디가 되었다는 명단이 넘어오자마자 내 고집대로 너를 택했다. 그냥 니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래놓고 스스로에게는 너에게 복수를 하는것이라 생각하고 믿었다. 그러지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보였다.
종인은 조금은 용기를 내 태민에 뺨을 만져봤다.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한 이태민이다 넌.
“…나는 너를 도저히 밀어낼수가 없어 더이상.”
가슴아픈듯 눈썹을 일그러트리고는 태민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래도 니가 너무 싫다.”
잠꼬대를 하는 태민을 지켜보다가 이내 상처들이 난 손목을 발견하고는 입을 맞췄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너한테 이러는거.”
“… ….”
“나 정말로 너 짜를려고, 더이상은 안되겠으니까.”
“… ….”
“다른 새끼 만나지마, 나말고 아무도 사랑하지마.”
“… ….”
“이기적인거 아는데…그러지마 너는.”
“… ….”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고하고 몸을 섞어도 넌 그러지마.”
그땐 정말 너와 나는 죽을꺼야.
얼마나지났을까 잠에서 깬 태민이 옆에 종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거실로 가보니 경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아-읏! 종인아. 종인아! 흐응-”
종인과 눈이 마주쳤다. 다리에 힘이 풀린듯 금방이라도 주저앉을것같은 태민이 겨우 겨우 벽을 짚고 서 있었고 뒤이어 경수와도 눈이 마주쳤다. 종인은 태민을 보며 완벽하게도 웃어보이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것을 태민이 보기를 원하고, 볼것이라 예상한 것 처럼.
“도경수, 사랑해.”
얼마나 꼬여야하나 우린. 태민은 이미 종인의 마음을 다 눈치챈듯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그 장면들을 모조리 지켜봤다. 기꺼이 상처입어줄께. 근데. 근데 종인아 너무 아프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니 입술이 너우 아프다. 너는 이렇게 나를 떼어놓고 싶었어? 이렇게까지 하면서?
태민은 절대 물러서지않았다. 금방이리도 도망갈것처럼 잔뜩 질린 표정이었지만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종인에게 스스로 놀림감이 되도록 복종하고 있었다.
꽤나 싸늘했던 섹스가 끝나고, 경수를 안아들은 종인이 태민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타이밍좋게도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벨소리가 또 다시 끊겼다 들린다.
“여보세요….”
ㅡ태민아 형인데 지금 한국이야 너 어디냐?
“종현이형 죄송해요 저 이만 끊을께요.”
태민이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띄어 수첩을 별 감흥없이 넘겼고 우연찮게 익숙한 문장을 발견하고는 유심히 쳐다본다. 아! 수취 불명의 사랑. 종인이 준 쪽지에 적혀있던 문장이었다.
수취 불명의 사랑 - 김정한
내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수취 불명의 사랑이
어느날 갑자기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수취 불명의 사랑은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하나 둘씩 그리움을 심고
내안에 하나 둘씩 기다림을 쌓아두고 갔습니다
그만 난 그 사랑의 덫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 사랑이 이 기다림이 이 그리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길 없으나
이제는 수취 불명이 아니라 내가 주인인,
나를 찾아온 사랑을 내 것으로 알고
기꺼이 지키고 아끼며 오래 오래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유년시절의 기억조각인 내 증명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이 너의 진실이야?
하와 |
오늘 스토리나 필체가 매우 허술한 점 깊히 사죄합니다ㅜㅜ 변명하자면 집중도가 오늘따라 떨어져서ㅠㅠ 다음화는 좋은 퀄리티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