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해 유독 신입생 중 남학생이 적은 탓에 최수빈은 고등학교 내내 청일점을 도맡아 했다. 물론 전교에 남학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빈은 단 한 번도 남학우와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예고에 그것도 그림을 그리는 남학생을 수빈도 그렇게 많이 보진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여자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성격이 어디 모나지도 않고 대외적으론 순딩한 탓에 여학우들이 수빈을 끼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수빈을 싸고 도는지 수빈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친구 대신 여자 형제를 새로 만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얘기도 은근 잘 통해서 쉬는 시간마다 의자를 붙여서 열심히 떠들었지만 이따금씩 불쑥 튀어나오는 화장품 얘기는 수빈에게 너무 먼 세계의 것이었다. 올리브영이 비단 화장품만 파는 게 아니라는 걸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알았다. 화장품이나 뷰티쪽 얘기에 시동이 걸리면 수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듣다보니 졸업할 즈음 화장품의 이름은 물론이고 왠만한 화장품 회사와 화장에 대한 이해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식을 쌓게 된 정말 결정적 계기는 수빈이 화장을 당하면서 시작됐다. 여학우들은 수빈과의 내기에서 이기면 무조건 화장을 시켰다. 2 수빈은 무난하게 졸업하고 무난하게 대학에 들어갔다. 암암리에 동양화과 전봇대로 불리며 뭇 여학생들의 마음을 불 태웠지만 수빈은 같이 예술하는 사람을 만나는 걸 꺼려했다. 특히 미술하는 사람들. 그래서 종종 무용하는 학생은 수차례 소개받은 적이 있었고 수빈은 은근히 할 건 다 하고 다녔다. 조용히 지내면서 남들 할 건 다 하고 다녔지만 아무도 몰랐다는 게 가장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서양화과 최범규하고 중문과 휴닝카이가 아니면 글쎄. 다들 최수빈이 아무것도 모르는 첫눈 같은 남자앤 줄 알았다. 그 말을 들은 범규와 카이는 감자탕으로 분수쇼를 하는 엄청난 장기를 선보였다. 이러저러한 일을 거쳐 최수빈은 나라의 부름을 받았고 복학을 준비하는 사이 심각한 진로의 기로에서 시달렸다. 최수빈이 예술하는 사람을 꺼린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돈을 못 벌어서. 수빈은 적어도 그림에 진심이었고 가능하다면 쭉 붓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돈이 안된다. 우리나라가 예술로 알아주는 나라도 아니고. 미대 나와서 뭐하게. 내가 못 벌면 한 쪽이라도 잘 벌어야지. 근데 혼자 살면 이걸로 밥 벌이가 되나? 수빈은 이 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셨다. 결국 최수빈은 일단 복학을 먼저 했다. 먼저 했고, 하다보니 졸업을 했다. 중간에 몇 번 휴학도 했으니 또래보다는 좀 늦은 졸업이었다. 학교를 나오니 정말로 돈이 궁해진 수빈은 본인이 입시를 준비하면서 다녔던 학원에 무작정 찾아가서 알바로 써달라고 했다. 수빈을 가르쳤던 쌤이 원장이 되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 입에 풀칠도 못할 뻔했다. 그리고 입시학원에서의 선생일은 마치 수험생활을 한 번 더 하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줬다. 3 선생을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가는 수빈에 범규가 은근한 제안을 내밀었다. 형 전시회 해볼 생각 없어요? 느닷없는 전시회 얘기에 수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전시회? 범규의 말은 이랬다. 아버지가 카레이서시다. 지원을 받는 재단이 예술 뭐 이쪽도 같이 운영한다. 이번에 청년 전시회를 주최해서 청년 예술가를 모집 중이다. 재단이 꽤 커서 작품이 눈에 들면 엄청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미 자본에 무릎을 꿇은 최수빈은 그 달을 마지막으로 선생 일을 그만뒀다. 그리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최수빈은 제발 누구의 눈에라도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혼을 갈아넣으면서 작업을 했다. 아주 커다란 동백꽃을 그렸다. 붉은색 동백꽃이었는데 범규의 추천이었다. 꽃을 그리고는 싶은데 무슨 꽃을 그릴지 마음을 못 정한 수빈의 옆에서 같이 열심히 고민해주다 형하고 딱 어울리는 꽃인 것 같다며 동백꽃을 추천했다. 빨강 동백꽃의 꽃말이 기다림이러면서. 형 지금 후원 기다리잖아요! 머니~ 그 말에 최수빈은 입을 닫고 붉은 먹을 갈았다. 동양화는 아무래도 수묵화가 클래식이지? 4 수빈은 본인의 그림이 꽤 크다고 생각했지만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 후회했다. 아씨 이왕이면 더 크게 할 걸... 이건 뭐 눈에 들지도 못하겠는데... 하필이면 일월오봉도 옆이라 더 작아보이잖아 망할... 수빈은 고만고만한 크기의 본인 그림들을 보고 좌절했다. 나도 옆에 쟤처럼 빡센 거 그렸어야 했나...? 죄다 은은한 걸 그려가지고... 대학생 시절 교수님이 해주셨던 얘기가 수빈을 스쳐지나갔다. 최수빈 학생은 참 그림이 수수해. 동양화의 매력 중에 하나긴 해요. 근데 그래서 그런가 진가를 알기까지가 되게 힘들어. 화법을 바꿔보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싶네요. 그러게요 교수님... 진작에 그럴걸 그랬어요... 최수빈은 달달 떨면서 전시장을 나왔다. 지나간 자리에 머리카락이 무슨 헨델과 그레텔처럼 길을 만들었다. 5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관람객인 척, 모르는 척 하면서 본인의 그림의 반응을 보려고 전시장을 돈 횟수 말이다. 그러니까 그 거물급 인사들이 오긴 온데? 그냥 다 평범한 사람 같은데? 그러다 한 여자가 우두커니 본인의 그림 앞에 있는 걸 봤다. 그것도 동백꽃 앞에 말이다. 세상에 일월오봉도 앞이 아니라 정확히 최수빈의 동백꽃 앞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수빈의 몸에 힘이 죽 빠졌다. 역시... 그럴리가 없었네... 근데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옆에 누군가를 끼고. 옷차림으로 봐선 여기 스텝 같았다. 귀에 인이어를 하고 있는 걸 보고 확신했다. 그리고 최수빈의 동백꽃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하더니 이내 그 스텝이 사라졌다. 뭐야...? 뭔데...? 그림에 상처가 생겼나?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 수빈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자를 확인한 수빈은 손이 달달 떨렸다. 헐. ••• 최수빈 작가님의 작품 중 〈동백> 을 구매할 의사가••• 미쳤다. 6 최수빈은 바람과 같이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여자는 최수빈이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없어진 후 였다. 여자는 작품만 사가는 게 아니라 작가하고 만나고 싶다며 수빈에게 대면을 요청했다. 암요, 제가 먼저 만나뵈야죠. 최수빈이 본 여자의 첫인상은 키가 진짜 크다. 였다. 반올림해서 근 백구십인 최수빈이 크다고 느끼는 정도는 정말 진짜 키가 큰 경우가 아니면 어지간해서 잘 하는 유형의 생각이 아니었다. 남자든 여자든. 여자는 수빈을 보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와 완전 포스 짱... 수빈은 공손히 손을 맞잡았다. 악수가 이렇게까지 멋지게 할 일인가? 여자는 본인의 명함을 내밀었다. 또 공손히 명함을 받은 수빈은 턱이 나갈 뻔 했다.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CEO? 아이고 죄송합니다 귀한 분이 누추한 곳에 직접 행차해주시고... 이사님이네 이사님... 수빈은 명함이 없어 그냥 통성명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일어났다. 최수빈의 이사님은 원래 수빈이 제시한 값보다 더 큰 액수를 불렀다. 수빈이 그건 안된다고 하자 세금을 다 떼고 나면 남은 금액이 작가님께서 제시한 금액 정도가 될 거라며 원래 값을 치르고 있는 게 맞다고 했다. 그렇게 이사님은 수빈의 동백꽃을 들고 사라졌다. 바람과 같이 뾰로롱... 7 이사님이 가시고 한 달 후에 전시회가 마무리 됐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귀신같이 이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최수빈 작가님? -네? 제가 최수빈은 맞긴한데... -청년 전시회 때 〈동백> 구매한 ••대표이사 입니다. 제가 부득이하게 재단 쪽에 작가님의 번호를 물었어요. 죄송합니다. 그림이 너무 좋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혹시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그림을 볼 수 있나요? 다시 최수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 사람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최수빈은 이사님과 시간하고 장소를 잡았다. 장소야 어쨌든 수빈이 연명하고 있는 작업실이 될 줄 알았는데 이사님은 레스토랑을 불렀다. 대박. 진짜 나 후원받아? 최수빈은 당장 최범규를 불렀다. 최범규는 샴페인을 들고 왔고 휴닝카이도 같이 데려왔다. 형의 앞날의 축하하는 파티를 신나게 열었다. 8 최수빈은 코트를 괜히 한 번 탁탁 털었다. 발 붙일 일도 없었던 서래마을이라니... 머리를 한 번 단정하게 눌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하셨습니까? 과하게 친절한 직원의 말에 네... 최수빈이요... 하고 누가봐도 처음 왔다는 티를 팍팍 냈다. 네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괜히 어정쩡하게 직원을 따라 룸 안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 옷을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있는 이사님이 보였다. 직원이 문을 닫아주고 사라지자 가벼운 목례를 주고 받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수빈에게 이사님이 코트를 달라고 했다. 수빈의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건 이사님은 수빈에게 편하게 있으라며 웃었다. 물론 최수빈은 못 웃었다. 9 다짜고짜 그림 얘기만 할 줄 알았던 식사 자리는 의외로 사적인 얘기들만 오갔다. 나이하고 취미나 좋아하는 영화라던지. 그리고 이사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개인 사업이 완전 대박난 케이스. 덕분에 꽤 이른 나이에 이사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갑질 대신 수빈을 전적으로 배려했다. 대화 하나하나에 전부 묻어났다. 덕분에 수빈은 챙겨왔던 활명수를 원샷하지 않고서도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입이 짧은건지 아니면 빨리 먹는건지 이사는 수저를 내려놓고 대놓고 밥 먹는 수빈을 구경했다. 작가님은 되게 토끼상이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나중에 수묵화로 토끼 한 번만 그려주세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토끼 닮았다는 말을 들은 수빈은 입 안에 고기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중에 한 번 시도해볼게요. 먹은 값은 해야죠. 저 은혜 갚는 토끼. 이사가 낮게 웃었다. 후식까지 든든하게 챙겨먹은 행복한 수빈에게 이사가 말했다. 이제 갈까요? 이사가 수빈에게 코트를 건넸다. 빵빵하게 부른 배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아서 코트를 받은 수빈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말했다. 이사님은 키가 크시네요... 이사가 머플러를 두르며 말했다. 저 모델 제의도 받고 그랬어요. 키가 여자 평균 치곤 좀 크죠? 얼마 전에 건강검진 했을 때 보니까 72더라구요. 학교 다닐 때보다 줄었어요. 키가 줄어든 게 너무 기쁘더라고요. 학생 때는 키가 큰 게 콤플렉스 였거든요.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입었다. 그래도 저보단 작으신데요? 이사가 룸의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수빈씨 만날 땐 구두 신어도 되겠어요. -제일 높은 구두가 몇 센치에요? -칠센치? 그게 제일 높아요. -나중에 그러면 제일 높은 거 신고 오세요. 그래도 저랑 육센치나 차이나요. -은근슬쩍 다음 약속 잡으시네요? -아 들켰네요ㅎㅎ 최수빈은 후원자가 절실했다. 10 최수빈의 작업실까진 이사가 몰고온 레인지로버를 타고 갔다. 이사가 손수 운전까지 하고 도착한 최수빈의 작업실에는 초라한 양의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본격적으로 그림만 그린지는 얼마 안되서... 이사는 양은 상관이 없다는 듯 그림에만 집중했다. 최수빈은 이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모든 그림을 찬찬히 둘러본 이사가 뒤를 돌았다. 역시 작가님 그림은 너무 제 취향이네요. 제가 근데 변덕이 심해서 세 번 봤을 때도 여전히 좋으면 그때 결정할게요.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원은 무슨, 저것만 다 사주셔도 감지덕지다. 그럼 언제 볼까요? 수빈은 또 엉겁결에 다음 약속까지 잡았다. 이사님이랑 있으면 뭔가 아닌듯 하면서도 자꾸 말리는 기분이었다. 차에 타서 골목을 빠져나가는 이사님을 배웅하고 수빈은 다시 작업실로 들어와 앉아서 골똘히 생각했다. 지금 그림을 그려야 하는 신호가 왔다. 수빈이 앞치마를 둘렀다. 11 두 번째는 이사님의 회사 앞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옥 앞에 선 최수빈은 건물을 보느라 목이 꺾이는 줄 알았다. 설마 이 건물이 다...? 허얼... 잘못 걸린 거 같기도 하고... 사옥 안으로 들어가기엔 깡이 없어서 유리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섯시가 조금 넘자 회사원들이 우수수수 건물 밖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역시 퇴근이 짱이네.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수빈의 어깨를 이사가 톡톡 쳤다. 수빈이 뒤를 돌자 저번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 이사님이 있었다. 저 구두 신고 왔어요. 작가님 말대로. 그리고 수빈의 말대로 이사는 여전히 수빈보다 작았다. 구두 신었을 때 저보다 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이제 생겼네요. 약간 들뜬 듯한 이사의 말투에 수빈이 웃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구요. 이사가 수빈의 옆에 가까이 섰다. 저보다 큰 사람은 처음이에요 작가님. 구두도 진짜 오랜만에 신어서 낯설 지경이에요. 쓰러질지도 몰라요. 그럼 그땐 작가님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수빈이 팔을 쓱 내밀었다. 이사님 다치면 안되니까 팔짱 끼세요. 부축해 드리는 거에요. 이사가 팔꿈치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무릎에 데일밴드 붙일 일은 면했네요. 최수빈이 살풋 웃었다. 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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