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랑하는데에 반해 더 이상 그 사람은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여전히 사랑하는데에 반해 그 사람은 애초에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전자와 후자중 더 불쌍하고 슬픈 것은 없다.
둘 다 똑같이 불쌍하고,슬플 뿐이다.
*
이 세상에서 무서운 건 단 두가지이다.
사람과,
그런 사람에 대한 사랑.
**10**
빗소리탓에 준면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해 그저 그를 째려보고만 있었다.그는 나를 보며 미소짓다가 이내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걷기 시작했다.비에 젖어 볼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여간 간지러운게 아니였다.그가 내 앞에서 걷고 나는 그의 뒤에서 그의 뒷통수를 째려보며 걷고 있었다.이내 우리집 앞에 도착했고,그가 다시 뒤를 돌아 나를 향해 웃었다.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고,나는 뒷걸음질을 쳤다.뒷걸음치던 발이 담벼락에 닿았다.나는 갈곳이 없어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고,그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왔다.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민 준면에 놀라 더욱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한참동안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만 났다.그러다 이내 그가 피식하며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그는 눈을 감은 내게로 다가와 귓가에 대곤 말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감기걸리지 말고,"
"내일보자."
난 여전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고,그가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 가는 듯 했다.그 소리를 듣고 감은 눈을 떴다.아직도 비는 오고 있었고,그렇게 신경을 썼던 가방은 젖은지 오래였고,초록색 컨버스 안 흰 양말도 세탁기에 빨기라도 한듯 축축하게 젖어있었다.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그의 말이 자꾸만 눈앞을,귓가를 아른거려서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인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집에 들어오니 밖과는 달리 따뜻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치마끝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종아리 위를 타고 내려갔다.간지럽고 찝찝한 느낌에 위층으로 재빨리 올라가 가방 안의 교과서를 꺼내놓고는 가방과 갈아입을 옷,로션을 챙겨 내려왔다.빨래 건조대에 물기를 털은 가방을 올려놓고는 욕실로 들어와 축축히 젖은 교복을 벗었다.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서인지 벗는데 짜증이 났다.뜨거운 물을 틀자마자 뜨거운 김이 훅 끼쳐 거울을 뿌옇게 만들었다.차가운 몸과 대조적인 따뜻한 물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샴푸로 머릴 감고는 바디타올에 바디워시를 짜려던 참이였다.세면대 한 구석에 놓인 그의 바디워시에 괜히 눈길이 갔다.생각과는 달리 손이 먼저 움직였고 바디워시를 펌핑했다.거품을 내다보니 항상 그의 몸에서 나던 달큰한 후르츠향과 섞여 오묘한 향을 내던 차분하면서도 시원한 향이 코를 찔렀다.욕실엔 온 향이 가득했다.샤워기 물을 틀어 거품을 모두 흘려보냈다.그러곤 수건으로 몸을 닦곤 내 바디로션을 발랐다.바디로션의 향때문의 내 몸에서 나던 그의 바디워시 향은 지워져갔다.그리고 욕실에도 남아있던 모든 향을 먹어버린듯 플라워향이 진동했다.
옷을 입고 나오니 그가 쇼파에 앉아있었다.그에 놀라 숨을 들이켜 참았다.창 밖을 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나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세탁실로 가 세탁기 안에 교복을 집어넣었다.세탁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 물을 한잔 마시다보니 점심때부터 텅 비었던 배가 슬슬 고프기 시작했다.생수통을 홈바에 다시 집어넣고는 냉장실 문을 열었다.먹을 것이 없나 한참을 뒤지다가 맨 아랫칸에 있는 복숭아가 눈에 띄었다.하나를 꺼낼까,두개를 꺼낼까 고민을 하다가 냉장고에서 삐_거리며 소리가 났고 그냥 두개를 집어들었다.싱크대에서 복숭아를 씻고는 접시 두개를 꺼내어 자르기 시작했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아차싶은 찰나에 과도에 손을 베여버렸다.검지 손가락에 얇은 자상이 생겨 피가 스멀스멀 나오고 있었다.내 소리탓인지 그가 쇼파에 앉아있다말고 부엌으로 걸어왔다.피가 나는 부위를 손으로 짜내며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손을 씻으려 싱크대 수도꼭지를 열려던 때였다.그가 내 옆으로 다가와 피가 나는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당황한 나는 손을 빼려들었고 그럴수록 그는 내 손목을 더 세게 쥐며 자신의 입에서 못 빠져나가도록 했다.상처난 부위를 그의 혀가 핥고 지나갔고 아릿하면서도 간지러운 감에 이상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손가락을 쪽쪽 빨기도 하고 혀로 상처부위를 진득하니 핥아올리기도 했다.썩 좋지않은 느낌에 등뒤로 소름이 오소소돋았다.그가 이내 자신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내어 수도꼭지로 가져다대곤 물로 씻어줬다.어느새 피는 멈춰있었다.그가 주머니에서 밴드를 꺼내 내 손가락에 붙여주었다.
"손 조심해."
그가 내 손가락을 한참 내려보다 나를 보며 말하곤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이상하게도 상처난 부위에서 심장이라도 뛰는 듯 두근댔다.하지만 아직도 상처는 아리기만 했다.밴드가 붙여진 손가락을 만지다가 다시 과도를 잡아 복숭아를 잘랐다.이리저리 못나게 자른 복숭아 한 접시를 내 손에 또 다른 한 접시는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것이였다.뭐 어찌됬던 그가 먹던,안 먹던 상관은 없었다.
****
내 방에 올라가 침대에 누워 복숭아를 먹었다.창밖에 비는 여전히 오고 있었다.복숭아를 한입씩 깨물어 먹을 때마다 과육즙이 손목을 따라 흘렀다.찝찝하고 끈적이는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인상을 찌푸리다가 귀찮은 마음에 그냥 손을 털어 흐르는 과즙만 털어냈다.지나가는 소나기인줄 알았는데,그건 아닌지 학교 끝난 후부터 계속 오고 있었다.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다 먹은 접시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눈을 감으니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자다가 깬건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였다.새벽임에도 일찍 잔 탓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눈이 저절로 떠졌고,목에서 느껴지는 갈증에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나갔다.온 집 안에는 그저 시계가 똑딱대는 소리만 난 채,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하고,어두웠다.조심해서 1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향했다.깜깜한 것에 무서움을 잘 타는 나였기에 부엌불은 모두 켠 채로 냉장고 홈바를 열었다.큰 머그컵에 물을 한가득 담고는 한번에 들이켰다.시원한 물에 정신이 번쩍드는 듯 했다.그러곤 부엌불을 끄곤 다시 올라가려던 찰나 식탁 위 접시에 눈길이 갔다.아까 복숭아를 올려두었던 접시 위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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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에 한번 깬 탓에 30분동안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그 덕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했고,가방을 메고 나오니 그도 현관문을 열곤 따라나왔다.그러면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면과 이렇게 셋이 불편한 등교를 한다.전날 비가 온 탓에 등굣길이고 운동장이고 축축하게 젖어 운동화에 진흙이 자꾸 묻었다.그 덕에 아끼던 컨버스화가 자꾸 얼룩이 져갔다.준면과 그,둘이 나를 반 앞까지 데려다주곤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진흙때문에 기분이 안 좋기도 했지만,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면서 햇빛이 따갑지 않게 내리쬐는 날씨 탓에 기분이 다시 또 좋아졌다.
좋은 컨디션으로 오전 수업을 들었고,점심시간이 되어 밥을 먹으러 가자며 온 수정이에 웃으며 그러자고 말하곤 급식실로 내려갔다.평소에 무뚝뚝한 성격탓에 잘 웃지 않았는데,오늘 기분이 좋은 탓에 자주 웃으니 수정이도 덩달아 웃으며 더 신이나 이야기를 주절거렸다.식판을 받고 급식실을 보니 많은 애들에 포화상태라도 된듯 남은 자리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고 있으니 찬열이 또 나를 불렀다.
"김종인 동생!"
"또 저 선배다."
"...그러게."
"그냥 먹자."
찬열이 큰 소리로 부른 탓에 지나가던 애들은 물론이고 밥을 먹던 애들마저도 나와 수정이를 쳐다보고 있었다.곤란한 표정으로 수정이를 쳐다보니 괜찮다며 그냥 먹자고 자신이 먼저 찬열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역시나 그렇듯 그가 앉아있었고,나는 또 그의 앞에 앉게 되었다.오늘은 내가 좋아하던 브로콜리가 나왔고,밥을 설렁설렁 먹고는 두세개의 브로콜리를 집어먹었다.내 양을 다 먹은 탓에 입맛을 쩝 다시다가 브로콜리가 싫다던 수정이가 생각나 수정이의 식판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데 내 식판 위로 뭔가가 올려지는 소리가 나 고갤 돌렸다.내 앞에 앉은 그가 자신의 식판에 있던 브로콜리를 내 식판으로 옮기고 있었다.그런 그를 나도 이상하게,옆에 앉아있던 찬열은 더욱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찬열이 놀란 채로 그에게 물었다.
"야 김종인.니 이제 브로콜리 안 좋아해?"
"아니."
"근데 왜 ㅇㅇ이한테 다 줘?너 내껏도 뺏어먹을려고 했잖아."
"..나보다 얘가 더 좋아해.브로콜리."
그가 말을 마친 뒤 다시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아무렇지 않은 그와는 달리 나는 꽤나 놀랐다.그가 이러면 이럴 수록 나는 더욱 그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기도,머릿속이 혼잡하기도 했다.내가 좋아하는 브로콜리임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젓가락을 대지 못했다.브로콜리를 보고 있자니 그의 얼굴이 잔상이 되어 자꾸만 보였다.찬열은 읽을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그런 찬열을 보다 나는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신경쓰이는 것은 찬열의 표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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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설국열차보고 오느라 못 왔어요...ㅠㅠ
이 날씨에 학원가야되는데 겁부터 난다는...헣
오늘은 분량도 괜찮고 끝이 좀 이상한 거 빼곤 괜찮은 거 같은데!아닌가요..흡
내일뵈어요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