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랑하는데에 반해 더 이상 그 사람은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여전히 사랑하는데에 반해 그 사람은 애초에 감정이 없음을 알았을 때,
전자와 후자중 더 불쌍하고 슬픈 것은 없다.
둘 다 똑같이 불쌍하고,슬플 뿐이다.
*
어릴 적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릴 적 그대로 여리고,
어릴 적 너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릴 적 그대로 내게 아프다.
너는 항상 그랬다.
**13**
비를 그렇게 맞은 탓인지 결국엔 몸살감기에 앓았다.어제 얼마나 오래 현관문에 기대있었는지도 모른다.그냥 기억나는 거라곤 축축하게 젖은 몸을 누군가 들어서 내 방으로 옮기고 옷을 갈아입혀줬다는 것이다.그리고 잠결에 안겨있으면서도 누군가의 가슴팍에서 나는 옅은 향에 취해 더 그 누군가를 껴안았단 것 밖엔 기억이 안 난다.눈은 여전히 감은 채로 어제 일을 회상하다 이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잠에서 깼다.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학교 가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
잠을 그렇게 잤음에도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고 손을 들어 눈가로 가져다 댔다.온 몸이 뜨거웠다.젖은 솜처럼 축 쳐지는 몸에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니 이마 위에서 뜨겁게 젖은 물수건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새엄마인가,싶기도 했지만 지끈대는 머리에 생각하는 것도 포기했다.침대 옆에는 책상의자가 있었고 그 옆 협탁엔 물통과 가습기,온도계가 있었다.아마,밤새 간호한 듯 싶었다.그 때 닫힌 방문 밖으로 1층에서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에 제 발 저린 도둑이라도 되듯 황급히 물수건을 다시 머리에 얹고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곤 곧이어 2층으로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눈을 감은 채로 발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발걸음 소리는 내 방문 앞에서 멈췄고,이내 내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누군가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그러곤 내 머리 위에 올려진 물수건을 살짝 들어 이마를 짚었다.아직도 뜨거운 이마에 물수건을 옆에 있던 물통에 담궜다 꼭 짜내곤 다시 이마 위에 올려놨다.몸을 뒤척이는 척 하며 옆으로 고갤 살짝 돌려 실눈을 떴다.협탁 위에는 죽이 든 쇼핑백과 감기약이 놓여있었다.눈을 다시 감았다.식은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이 따듯했다.
"얼른 나아."
베개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정리해주더니 이내 그 사람이 말을 했다.목소리를 들으니 그인 것 같았다.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는 손에서 그가 쓰던 로션의 달큰한 내가 났다.괜히 기분이 나른해져 다시 잠에 드는 듯 했다.그는 자신의 손이 찝찝하게 젖어 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내 얼굴을 쓸어주며 땀을 닦아줬다.그의 손이 따뜻해서 인지 괜시리 마음이 편해졌다.고백을 했던 김준면도,그런 준면과 나의 사정도,그가 내게 해왔던 행동도.어느 하나 생각나지 않고 그냥 편안해졌다.그가 땀을 닦아주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내 손을 잡아왔다.내 손은 뜨거웠고,그의 손은 따뜻했다.침대 위까지 비치는 햇살에 기분이 더 나른해졌다.잠에 빠져들기 직전,울음기 어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ㅇㅇ아."
"내가."
"내가..많이 좋아해."
****
나는 어릴 적 그대로 서툴고 어리숙했다.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고,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지켜주는지도 몰랐다.나는 그저 어리숙한 7살짜리 아이였다.7살의 어린 아이는 세상의 이치를 너무나 빨리 깨달았다.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김준면은 대충 안 눈치였다.그래서 나를 더 조롱했고,일부로 그 애 앞에서 도발하기도 했다.그랬음에도 김준면에게 뭐라 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 애라는 약점이 잡혀버려서 그랬다.그래서 준면이 무얼 해도 항상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어제 한계가 터져버렸다.
나를 보면서도 실실 웃는 김준면이 미웠고,가까이 있음에도 그 애에게 아무 말도 못 거는 나도 미웠다.내 눈을 똑바로 보며 이게 나와 당신의 차이라는 듯 다 보는 앞에서 고백을 하는 준면에 머릿속에 꽉 잡고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졌다.그렇게 준면을 때리면서도 고백조차 못하는 내가 한심하기도,불쌍하기도 했다.그리고,마음 한 구석에선 나와 다른 준면이 부럽기도 했다.
학생주임 선생님께 꽤나 혼났다.고개를 숙이고 그저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솔직히 한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나오는 듯 했다.날 보며 비웃던 준면의 모습과,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그 애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반성하는 태도로 아무런 말없이 훈계를 들으니 선생님이 한숨을 쉬다가 이내 그만 가보라고 하셨다.그렇게 훈계를 듣고 나오니 교무실 밖 복도에 박찬열이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채 닫지 않은 문을 닫고 교무실 문에 기대 찬열을 쳐다보고 있으니 찬열이 핸드폰에서 눈은 떼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병신이다.병신."
"너 진짜..존나 머저리같아.빨리 집에나 가봐."
하며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내 가방을 툭 던졌다.그런 찬열을 보다가 가방을 어깨에 맸다.찬열이 핸드폰에 고정되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작게 웃었다.그런 찬열에게 고맙다고 작게 말하곤 뛰어갔다.밖에는 한참 내리던 소나기가 그쳐있었다.평소에 달리던 것보다 더 빨리 뛰었던 것 같다.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문 앞에 서니 이마 위에는 땀이 송글송글 했고,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에 쪼그려 앉아 잠이 든 그 애가 보였다.조심히 손을 뻗어 어깨를 살살 흔들었음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젖은 교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모양새가 꽤나 불편해 보였다.읏차하고 안아든 그 애는 열이 났다.침대에 뉘이곤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 댔다.가습기를 가져다 틀고 온도계로 체온을 재고,물수건을 올려두기도 했다.이 시간에 약국이 열 턱이 없어 온 집안을 뒤졌지만 약은 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그렇게 그 애가 열이 내리길 기다리면서 밤을 샜다.
잠에 들었을 때나,평소에나 항상 그 애는 예뻤다.내가 꿈 꿀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예뻤다.하지만,나는 애초에 꿈도 꿀 수 없었다.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결정된 가족이란 굴레 속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였다.애초에 내가 이 마음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 애도,나도 편했을 것이다.아니,그 전에 네가 우리집에 입양이 되지 않았더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이 악몽을 시작하지 않았다면,이 애는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고,난 이 애에게 더 모질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어둠 속에서 길을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 있었고,돌아가기엔 너무 무섭고,너무나도 멀었다.너와 나의 괴리감은 작은 듯 컸고,어리숙한 우리 둘은 무서워 주저 앉았다.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은 현실뿐이였고,그게 운명이였다.
식은땀이 나는 얼굴을 계속해서 쓸어주었다.땀이 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어떻게 생각하면 모두 내 잘못같아서 더 그랬다.달빛에 비친 그 애의 얼굴이 내가 처음 억지로 범했을 때가 생각이 나 무섭도록 몸이 떨렸왔다.그 애는 얼마나 무서웠을지 가늠할 수 없어서,그래서 더 무서웠다.그 애의 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잡았다.길고 얇은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그러곤 손등에 짧게 입맞췄다.내 마음이 너무 커져 내가 되고,괴물이 되어버렸고,너를 집어삼켰다.흉측한 괴물에서 어리숙한 소년으로 돌아간 나는 어릴적 7살 모습 그대로 울고 있었다.
우린 너무나도 어리고 여려서 열병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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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드디어 14편이에요.실질적인 마지막화!!ㅋㅋㅋ
15화는 말만 마지막화고 딱히 이렇다..할 전개는 얼마 없답니다.
어머 어쪄죠.이렇게 2편 남았으요..됴르르
으앙 쥬금ㅠㅠ
아휴 집중 못하고 써서 산으로 간다..어디가니..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