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야." 박찬열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동시에 팔꿈치로 퍽퍽 치기까지. 나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내려놓으며 빳빳하게 섰다. 마치 군인처럼, 한 손은 주먹을 말아쥐고 한 손은 수첩을 꽉 잡은 채로. 곧이어 변치프이 들어오셨고 우리는 굳은 채로 빳빳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밥들은 먹었고?" 치프쌤의 말에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꼬르륵. 그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박찬열의 소리로 추정되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치프쌤은 피식 웃었다. 웃겨서도 아닌, 안쓰러워서도 아닌, 다정한 것도 아닌 그런. 정말 당연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래, 레지 일년차에 밥이 뭐야." "..." "밥 한 술 더 떠 먹느니 책을 한 장 더 넘겨야 할 판이지."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서있던 우리는 치프쌤이 탁, 소리나게 내려놓는 차트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도 망했다. "박찬열, 이리와." "예." 빠르게 대답한 박찬열이 쪼르르 나가 치프쌤 앞에 선다. 치프쌤은 자신의 앞에 다가온 박찬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뭐든지 빠르게, 변백현 선생님의 신념이었다. 뭐든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여 시간을 절약해 환자를 일분이라도 더 봐라, 그 말을 입에 떼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빠르게 박찬열의 잘못을 읊기 시작한다. "1병동 3번 베드 EGC(조기 위암) 발견 된 환자 수술 안잡을거야? AGC(말기 위암) 될 때까지 기다리게? 노티(환자의 상태를 알리는 것)하고 차팅만 중요해? 너 혼자 노티, 차팅 다 하고 환자는 수술이 언젠지 자기 GL(위장)에서 뭐가 발견 된 건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골백번 말해도 못 알아듣지. 일처리는 너네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환자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변쌤의 속사포처럼 나오는 말에 박찬열의 고개는 땅에 박힐 듯 수구러든다. 그 다음 내 차례일 텐데..나는 괜시리 가슴이 졸려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뒤로 EGD(위 십이지장 내시경)약물 투여 후 부작용 옵저(관찰) 안 한 것, 환자 약물 투여시 부작용 설명 하지 않은 것, 등등 박찬열의 잘못을 무섭게 짚은 치프쌤이 박찬열을 놓아주었다. 손끝으로 까딱, 하자마자 박찬열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원위치로. "다음," 다음, 이라는 말 뒤 내 이름 석자가 조용히 불렸고 나는 그제야 눈을 질끈 감으며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슬쩍 내려다본 내 환자의 차트 위엔 변쌤이 빨간펜으로 죽 그어놓은 표시가 흔치 않게 보였고 나는 다시금 머리가 찡해져 옴을 느꼈다. "너는 도대체, 인턴도 안하는 실수를 하고 앉아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해? 환자한테 가서 죄송하다고 말하면 너 때문에 환자가 느낀 고통 다 없어지나?" 아, 내가 아차싶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변쌤이 싫어하는 습관 중 하나였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제대로 인지 못한 채 죄송합니다, 하고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 "뭐가 죄송한지는 아나?" 망했다. 머릿 속으로 방금 전 대답한 나를 매우 치며 나는 짱돌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라하지, 뭐라고 해야하지. "IV(정맥 주사)로 넣어도 되는 약물을 IM(엉덩이 주사)으로 넣었.." 머리를 쥐어짜서 오늘 내가 했던 잘못을 하나 생각해냈다. 환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보다 몇 배로 느끼는 우리 변백현 선생님께서는 IM 한 번 쓸데없이 놓은 걸로도, 엉덩이에 1초정도 따끔한 고통으로도 펄쩍 뛰고 난리를 치시겠지. "머리, 안 굴려?" "..네?" "1병동 5번 베드 말하는 것 같은데." "네, 1병동 5번 베드 colorectal cancer(대장암) 환자..." "그 환자 약물은 원래 IM로 넣어야 하는 약물이다. 정신 차려라."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는데 내 어깨는 이미 움추려져 양 어깨가 맞닿을 지경이었다. 그럼 뭘 잘못한거지, 대체. "이게 문제야. 사고는 쳐 놓고 뭘 잘 못했는지를 모르니 발전이 없는거고 환자에 대한 미안함도 없는거지." 이제 내 잘못이 무엇인지 들을 시간이 왔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찢어졌는지 입 안 쪽으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이 따위 고통은 내 환자가 나 때문에 느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백현 선생님이 세뇌시킨 말이 내 머릿속을 오갔다. 이렇게 보면 세뇌교육이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쓸개 절제술 환자, cbc(혈구검사) 왜 안넣어?" "..아," "아? 이제야 기억나?" "..죄송합니다." "병동, 베드번호." "3병동 4번 베드입니다." "알았으면 뛰어가." 예! 우렁차게 대답하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당직실에서 나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뛰었다. 왜 cbc를 잊어버린거야, 대체 왜! 치프쌤의 병동, 베드번호. 라는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변치프쌤의 특기였다. 자기 환자의 병동, 베드번호, 이름, 병명은 반드시 외우고 있어야 할 것, 물어보는 즉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 그 정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환자 볼 생각도 하지말라고 했던 레지던트 초짜시절이 생각났다. 그 때는 몰랐지. 내가 변백현한테 코 꿰여서 이중 생활을 하고 있을지. ㅡ "밥은?" 피곤에 찌들어 조수석에 앉자마자 축 늘어지는 내게 변쌤은 다정하게 안전띠를 매주었다. 한시간 전까지 나한테 속사포처럼 혼을 내던 사람이 진정 맞냐고. "밥이 뭐에요?레지는 밥 같은 거 모르는데." "오늘은 그 말이 가슴을 후벼팠어요?" 아마 이 모습을 박찬열이 본다면 기암을 하고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병원 치프중에서 제일 까다롭다는 사람으로 소문난 변백현 치프가 자기 동기랑 연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난리를 칠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치프가 제 동기를 인턴 때부터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더더욱. 병원에선 레지던트는 사람도 아니다, 하던 치프가 가운을 벗고 내 앞에만 서면 한낱 레지던트의 저녁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까지 안다면..박찬열은 메스로 나를 그어버리겠다며 쫓아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이런 연애는 신기하게도 근 일년간 이어져오고 있었다. 변백현은 공과 사가 뚜렸했다. 아니, 뚜렷하다 못해 혼자 지킬앤하이드를 찍는 것도 아니고..이름과 얼굴만 같은 딴 사람이 되곤했다. 가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쌤의 얼굴을 보면 본능적으로 병원의 변치프가 생각나 소름이 우수수 돋기도 했다. 인턴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같은 나를 잡아챈 변쌤은 말했다. 자신과 나의 관계가 내 병원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단 1퍼센트도 없을 거라고. 자신이 내뱉은 말은 곧 죽어도 지킨다는 변쌤은 정말로 그 말을, 지금까지, 아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저녁 뭐 먹을까?" 다정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린다. "으음, 선생님 집 밥." 말을 내 뱉고 헤헤 웃었다. 변쌤이 좋아하는 웃음이라고 했다. 역시나, 쌤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린다. 병원에서는 맘 편하게 입 한 번 달싹 못하는 레지던트가 병원 밖에서는 말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변치프의 차를 돌린다. 그렇게 멀지 않은 변쌤 집에 도착한 나는 비적비적 신발을 벗고 쇼파에 엎어지듯 몸을 던졌다. 다리가 퉁퉁 부어서 무릎을 굽힐 때 조차 통증이 느껴진다. 오늘 오프받았고..또 언제 오프 받으려나. 자기 여자친구 사정 한 번 봐주지 않는 변치프는 절대 내게 좋은 듀티를 주지 않겠지. 그럼 한 열흘 있다가 받으려나.. "등갈비찜 먹고 싶다며, 그거 먹을까?" "쌤 장 보러 나가야하잖아요.." "재료 어제 사 놨지. 우리 애가 먹고 싶다는데." 아, 좋아. 준비성 철저해. 병원에서는 깐깐하다고 싫어했는데 또 이런 면에서는 행복한 웃음이 번지기 십상이다.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받아치는 남자친구라니. 삐리리- 아, 삐리리- "받아야지." 집 안을 울리는 삐리리-소리가 내 PDA에서 나는 것은 아니길 원했다. 이상하게도 PDA소리는 다 똑같은데 딱 듣자마자, 아 이건 내 콜이구나..하는 느낌이 팍 온다. 나 선생님 집에 들어온 지 30분도 안됐는데. 나 오늘 열흘만에 오프받은지 채 한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어기적 어기적 가방으로 기어가는 내 모습을 변쌤이 뒤를 돌아 쳐다본다. 순간 변치프가 생각나 빠른 손길로 PDA를 잡아 올렸다. "..네, GS(외과).." 하루에도 수십번은 PDA에다 대고 말하는 멘트. 네, GS 누구입니다. 하지만 그 멘트를 채 말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밑에 들어와 있던 인턴이었다. "쌤, 큰일났어요. 11병동 4베드 환자 코드블루(심장 박동에 문제가 생김) 떠서.." "코드블루!?" 코드블루라는 소리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쌤이 탁탁탁, 감자를 썰던 소리는 이미 멎은 지 오래였다. 코드블루가 떴다하면, 외과에서는 가장 긴박한 상황이라 꼽아도 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신발을 대충 구겨신고 가방도 챙겨들지 않은 채 PDA를 귀에 대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마구 눌렀다. 빨리 와라, 빨리.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계단을 두세칸씩 뛰어 내려갔다. "CPR(심폐소생술) 누구야? 너, 너 하지마. 박찬열 불러!! 에피네프린 20이상 넣지 말고 지금 가고 있으니까 TS(흉부외과) 콜 해놔!" 왜 코드블루가 올 때까지 콜을 안했는지, 나는 답답함에 괜한 PDA만 바스라질듯 움켜쥐었고 택시정류장에서 손을 휘날리며 택시를 잡기 바빴다. 오늘 따라 지나가는 택시도 없고 마음은 급해져 성질이 머리 끝까지 뻗치려 할 때 쯤, "타." 택시 정류장에 변백현 선생님의 차가 나타났다. 거의 울먹거리듯 PDA를 쥐고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쌤은 딱지를 끊기면서도 엑셀을 밟아댔고 나는 평소보다 2배정도 빠르게 병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원 정문에 차가 멈추자마자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튕겨 나가듯 내려 병동을 향해 뛰었다. 벌써 TS(흉부외과)에서 왔을 테고, 일은 일단락 되었을 테지만 나는 인턴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땀이 흐르는 것도 채 닦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쌔앰.."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헉헉거리는 내 소매를 붙잡고 인턴이 우는 소리를 냈다. "..하.." 나는 숨도 제대로 몰아쉬지 못하고 헉헉거리고 있었다. 고맙게도 내 환자에게 달려와준 박찬열이 CPR을 치고 있었다. 심박동이 겨우 정상수치를 찍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박찬열이 베드에서 내려왔다. "맥박이랑 BP(혈압)은요?" "P 60, BP는 90에 70까지 올라왔습니다." 간호사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제야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혈압 더 올라와야하는데. "아이고, 손목아." 박찬열이 내 앞으로 와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이리저리 눈 앞에 흔든다. 손목을 잡고 오버하며 죽는 시늉까지. "김레지님, 당직 한 번, 콜?" "..콜." 내가 언제 한 번 박찬열 환자 CPR 대신 치고 만다. 반드시. "부정맥 환자.." 내 뒤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린다. 부정맥 환자, 하고 읊조리는 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해 굽혔던 허리를 빠르게 폈다. 변치프쌤이었다. 아, 또다. 또. 순식간에 바뀌어버렸다. "부정맥 환자는 제대로 옵저(관찰)하라고 말 안했어?" 언제 올라온 건지 빳빳한 가운을 걸친 치프쌤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주치의였기에 모든 책임은 나에게로 지워졌고 나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꾸욱 다물었다. 할 말이 있어도 입은 다물고 있었겠지만. "약물 주입했으면 최소 2시간마다 심박수 체크하고, 아트로핀 넣었으면 1시간마다 EMR(전자차트) 차팅하라고 했지." 아,EMR..마음 속으로 아차,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길 바랬지만 내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치프쌤은 조용히 명령했다. "EMR 열어." 망했다. 나는 주춤주춤 EMR로 걸어가 11병동 4번 베드 환자의 기록지를 열었고 그 곳에는 아트로핀 투여 환자의 1시간 간격 차팅 대신 3시간 전에 차팅해 놓은 기록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었다. "정신 똑바로 안 챙기지." "..죄송합니다." "아트로핀 맞고 환자 코드블루 나서 오프 중간에 뛰어오고, 병원이 좋은가봐?" 나는 할 말이 없어 고개만 푹 숙였다. "1시간, 아니 2시간 전에만 다시 바이탈 쟀어도 BP(혈압) 떨어지는 거 확인 했을 테고, R. rate(호흡수) 비정상인 거 알았을 거고, 그럼 환자 코드블루는?"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 아네. 멀쩡히 심장 뛰는 환자 어레스트 한 번 걸고, TS(흉부외과)부르고!" 스테이션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애써 꾹 눌러담았다. "허구한날 TS 콜 할 거면 TS로 가! 환자 어레스트가 장난이야!? CPR쳐서 살려놓으면, 다 됐다고 심장 쓸어내리나?!" "..." "그러다 CPR쳐서 안 돌아오면, 그렇게 환자 익스파이어(사망) 시킬거야?!" 치프쌤의 입에서 나오는 끔찍한 소리에 나는 결국 눈물을 떨궜다. 톡,하고 신고 있는 크록스에 눈물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치프쌤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신부전(신장이 제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상태) 환자라고 신장만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없는 짓이 어디있나." "..." "폴리카테터(유치도뇨관) 삽입해서 시간마다 소변량 체크하면 뭐하냐고." "..." "환자 어레스트오면 그냥 사망인데." 어레스트, 익스파이어..끊이지 않는 끔찍한 단어에 나는 결국 애꿎은 EMR 귀퉁이만 만지작 거리며 눈물을 훌쩍였다. 아니 훌쩍이는 수준도 아니고 그냥 투둑투둑..그럼에도 불구하고 치프쌤은 조금의 물러섬이 없었고 나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눈물을 집어넣으려 애썼다. 병원 밖에서는 내가 울먹거리기만 해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병원 안에만 있으면 내가 눈물로 병원을 잠기게 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ㅡ 저..오래..못왔는데..미리 말씀 드릴게요..ㅠ_ㅠ 시험 끝날 때까지 또 못와요..ㅠㅠ 댓글로 많이들 기다리시더라구요 제가 뭐라고ㅠㅠ 도저히 쓸 시간은 안나고 녀러분 의사 좋아하시져 그래서 메모짱 박혀있던 다른 백현이 데리고왔어요 이건 한창 사례공부할때 공부할겸 하던거라 이상한 용어도 많고..그러코.. 힘드네여 힘들어요 ㅠㅠ 실습 정말 힘두네요..으엥. 죄송해용. 이거라도 재미나게 읽어쥬세여 ♡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