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파트 사는 학교 선배 김선호와
거의 우리 집에 살다시피하는 불알 친구 우도환
이 둘이 번갈아가며 내 마음을 쥐고 마구 흔드는 썰
06
"고개 들지? 무슨 죄 지었냐 너?"
"... 너 알고 있었지?"
"뭐? 너 학회장이랑 키스한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해준거다. 네가 모르길 바라는 내 이기적인 마음을 위해서.
"미안, 서운했어? 네가 내가 몰랐으면 하는거 같아서 그랬어."
늘 그랬다. 너는 내 생각만 하는 사람.
나도 너도, 다 내 생각만 했던거다.
"됐어. 네가 뭐가 미안해. 처음부터 숨기려고 했던 내 잘못이지."
"그럼 나 이제 물어봐도 돼? 그거, 술김에 그런거 맞냐고."
"... 그거야,"
"아니다, 말하지 마라 그냥. 안궁금해. 절대 안궁금하니까 말하지마, 평생."
나는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약해지기 십상이었다.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체념한듯이 쓸쓸해보이는 그 눈은 언제나 나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간만에 둘이 술이나 한 잔 할까?"
.
"어, 선배?"
"조금만 더 늦게 왔어도 나 얼어 죽을 뻔했는데, 고맙네 나타나줘서."
"저 기다린거에요? 아니, 연락을 하지 왜 추운데 밖에서 이러고 있어요."
"네가 나 보고 이렇게 걱정하는 표정 하는거 좋아서 생색 좀 내봤는데, 생각보다 되게 모양 빠지는데 또 되게 기분 좋다."
참 표현하는데에 거침이 없는 사람이구나.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라는 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남들에게 받은 만큼 그 사랑을 어떻게 주는지도 잘 알아서, 결국 다시 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나 신경쓰이라고 옷은 맨날 그렇게 춥게 입고 다니는거지?"
"아, 됐어요. 추운데 빨리 입어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 두고 혼자만 따뜻한거 보다 매너 있는 남자로 점수 따고 싶은데 그렇게 좀 해줘라."
"치, 근데 왜 기다렸어요? 아 혹시 미안하다는 말 같은거 할거면 하지 말구요. 잘못도 없는 사람들한테 사과는 지겹게 들었으니까."
"혀 꼬이는거 봐. 나랑 만날 때만 술 마시고 오는거야, 아님 술을 달고 사는거야?"
"그러게. 저 원래 술 많이 먹고 그런 스타일 절대 아닌데, 이상하게 선배는 꼭 제가 술만 마시면 나타나요."
"챙겨줄 수 있어서 좋긴한데, 오늘은 진짜 할 말 있었거든. 너 취한거 같으니까 좀 미뤄야겠다."
"저 완전 안취했어요. 쪼금, 아주 쪼금만 취했는데?"
"그래. 넌 안취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술 마신 사람한테 고백하려니까 내가 좀 비겁한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
"뭘 고백해요? 그 날 일이요? 사실 저 하나도 안까먹었어요, 그러니까 굳이 어렵게 그 얘기 안꺼내셔도 ...,"
그 놈의 술이 문제고, 이 놈의 입이 방정이다.
내가 선배 앞에서 먼저 그 날 얘기를 꺼냄으로써 깨달았다.
난 지금 취했다 되게 많이.
".. 거봐, 너 취했다니까."
"..."
"솔직히 너 잘 기억 안나지? 그래서 모르는 척 한거지?"
잘 기억 안나긴요. 그 장면 말고는 하나도 기억 안나는데.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아서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뭔데요. 그럼 이왕 이렇게 된거 선배가 한 번 터놓고 말해보시던가요."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어. 네가 모르는 시간부터 너 좋아했다고."
"저를요? 왜요? 언제부터요?"
"아버님이 봉사 다니던 고아원 출신이야 나. 빚 되게 많이 졌지. 너네 아버님 아니었으면 나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몰라."
"맨날 네 사진 보여주면서 나한테 자기 딸 예쁘지 않냐고, 나랑 꼭 닮았다고 그러셨는데.
...너 아버지 따라 왔을 때, 멀리서 너 처음 본 그 날부터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
"... 거짓말, 거짓말이죠?"
"네가 알아줬으면 하면서도 혹여나 네가 알까봐 겁이 났어. 그래서 그 날은 꼭 다른 사람인 것처럼 둘러 얘기했었는데,
네가 이상하게 네 얘기처럼 마음이 이상하다고 등신같이 우는 나 안아주는게 따뜻해서 ...욕심이 나더라."
내가 좋아했던 선배의 사랑 방식은, 우리 아빠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래서 더 따뜻했고, 이상하게 익숙했고, 좋았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일찍 솔직하지 못했던 선배가 미웠지만 어쩐지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 날의 나도 그랬던거라고.
"약한 니 마음 이용하는거라면 미안해. 솔직하게 말 못한 것도 미안해. ...너를 바라보지도 못하게 될까봐 그랬어."
"어딜가든 누구에게든 따뜻한 사람이었죠, 우리 아빠. 선배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우리 아빠가 그런 사람이라서 다행이네."
""
"언제까지 울거에요. 울고싶은건 난데, 그만 울고 나 좀 안아주죠."
그렇게 한참이나 선배의 품에 안겨있었던 것 같다.
그래야 내가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선배는 우리 아빠의 따뜻함을 꼭 빼닮았기에.
"솔직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안까먹을게."
"계속 네 옆에 있게 해줘. 난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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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못오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너무 감동이었고 감사했습니다 ㅠ_ㅠ
자주는 못오더라도 이렇게 가끔 글 이으러 올게요 !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