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수고의 축젯날이다. 시험도 끝난 학생들은 며칠 동안 축제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평소에 이런 것에 관심이 없던 주리는 교실에 남아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재욱은 연습이 있는지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고 혜윤 또한 영대가 없어 혼자 있을 거란 생각에 주리는 혜윤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귀신같이 알고 주리의 교실로 들어오는 혜윤이었다.
"김주리, 우리도 나가서 놀까?"
"귀찮게 뭐하러. 난 여기 있을 건데?"
"야, 고3 되면 축제도 없어! 그런데도 여기 있을래?"
"나가봤자 할 것도 없잖아."
"할 게 왜 없어? 귀여운 1학년들 구경도 하고 셀카도 찍고 하는 거지!"
"아, 귀찮게..."
결국, 혜윤에게 끌려 나온 주리는 신나서 돌아다니는 혜윤을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이왕 나온 김에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
주리는 전시 된 그림을 보고 있다가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혜윤인가 싶어 돌아보면 처음 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김동희'라고 적힌 명찰 색을 보니 1학년인 듯싶어 "나?"라고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동희였다.
"김주리 누나 맞죠?"
"응. 맞는데?"
"누나,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뭐?"
"누나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주리가 당황한 듯 서 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옆에서 말을 걸며 다가오는 재욱이었다.
"오, 김주리 인기 많다?"
"재욱이 형, 아는 사이예요?"
"얘 내 친군데."
"아 뭐야, 언제부터 친했어요?"
아는 사이인 듯싶은 재욱과 동희를 번갈아 보며 뭐냐는 표정을 짓는 주리에 재욱은 "같은 초등학교 나왔어."라며 말했고 고개를 끄덕이는 주리를 보던 동희가 입을 열었다.
"누나, 그래서 남친 있어요?"
"얘 남친 있어."
"진짜요? 아 아쉽다."
"그리고 얘 너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
"참나.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친군데 당연히 알지. 그러니까 이제 가~"
재욱을 한번 째려보곤 주리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 동희에 주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연습은 끝났어?"
"응. 김혜윤은 어디 가고 너 혼자 있냐?"
"몰라. 갑자기 없어졌어."
재욱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한번 보고는 주리에게 "그럼 나랑 놀자."라며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도착한 곳은 이것저것 귀여운 물건들을 팔고 있는 부스였다. 이런 걸 좋아하는 주리는 재욱에게 "너도 이런 거 좋아했었어?"라며 물었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재욱이었다.
"그냥. 너가 좋아할 거 같아서."
주리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갑자기 재욱을 불렀고 재욱이 뭔가 싶어 그곳으로 가보면 갑자기 자기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씌우는 주리였다.
"야 ㅋㅋㅋ 진짜 잘 어울려."
"아, 뭐야 이게."
"가만히 있어 봐. 이거 귀도 움직일걸? 봐봐. ㅋㅋㅋ"
"ㅋㅋㅋ 그렇게 웃기냐."
재욱은 웃으며 모자를 누르는 주리가 귀엽다는 듯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부스 담당 학생이 "선배님들,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하며 다가왔고, 주리는 잠깐 당황하다가도 재욱이 어깨동무를 하며 "찍어줘."라고 하자 어설프게 브이를 해왔다.
"ㅋㅋㅋ 아 너무 웃기다. 그 모자 하나 살 걸 그랬나?"
"참나. 그렇게 재밌냐?"
"아 근데 이 사진 너무 빵떡같이 나왔는데."
"너 빵떡 맞잖아."
"--;; 죽는다."
주리는 투덜대면서도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방금 찍은 사진을 끼워 넣었다.
축제가 끝나고, 연습하느라 학교에 남아야 하는 재욱에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주리였다.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보다가 울리는 카톡 알림음에 핸드폰을 보면 '오늘 만날까?'라고 도현에게 온 연락이었다. 요 며칠 도현이 몸이 안 좋다며 못 만났었기에 걱정이 된 주리는 '그럴까? 몸은 좀 괜찮아?'라고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 너희 집 쪽으로 갈게.'라며 오는 답장이었다.
"오랜만이네.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다."
"ㅋㅋㅋ 뭐래. 몸은 이제 진짜 괜찮은 거지?"
"당연하지. 오늘 축제는 재밌었어?"
"뭐,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고."
"재밌었겠네. 사진도 찍었어? 궁금한데~"
궁금하다는 도현의 반응에 주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었을까, 사진을 찍을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재욱이 어깨동무를 하며 주리를 바라보고 찍힌 모습에 혹시나 도현이 오해할까 싶어 지갑을 닫았다.
"아, 근데 이거 너무 못 나왔어. 안 보여줄래."
"ㅋㅋㅋ 너가 보여주기 싫으면 안 보여줘도 돼."
"...미안"
"괜찮아. 아, 근데 이제 진짜 따뜻하게 입어야겠다. 주말 되면 12월이야."
"헐, 그러네. 시간 진짜 빠르다."
"... 그러게."
그 뒤로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주리의 벨 소리에 핸드폰을 보면 '이재욱'이라고 뜬 화면에 주리가 도현의 눈치를 보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받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 김주리, 너 학생증 나한테 있다.
"뭐?"
- 몰라 나도. 1학년 애가 주웠나 봐. 칠칠맞게 이런 걸 떨어뜨리냐.
"아, 그럴 수도 있지. 암튼 월요일에 줘."
전화를 끊고 나니 뭔가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주리는 도현의 눈치를 보고 있으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입을 여는 도현이었다.
"주리야, 혹시 내일 만날까? 오랜만에 데이트 하고 싶은데."
"데이트? 그래. 몇 시에 볼까?"
"너 편한 시간에 보자. 언제가 좋아?"
"음... 2시?"
"그래. 그럼 그때 데리러 올게. 이제 들어가서 쉬어. 피곤하겠다."
그렇게 도현을 보내고 집에 도착한 뒤 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조금 전 너무 이상했던 자신 때문인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재욱과 내 사이는 그냥 친구일 뿐인데 왜 때문에 도현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인지, 왜 방금 도현의 눈치를 봤던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아 결국 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아가 전화를 받자 주리는 조금 전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고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민아가 말을 이어 왔다.
- 너 설마 이재욱한테 마음 있어?
"미쳤냐? 걔랑은 그냥 친구야."
- 그럼 찔릴 게 뭐가 있는데? 너가 걔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걔한테 마음은 무슨, 아 아니야 절대로."
- 그럼 고민할 게 뭐 있어. 야, 니 남친이 오해하기 전에 잘 좀 해.
"하... 그래야지."
- 내일 만난다며. 애정 표현도 좀 잘 하고! 어? 니 남친같은 스윗남이 또 어딨어?
"참나. 암튼 알겠어. 고맙다."
- 그랭. 즐데~
민아와의 전화를 끊고 주리는 또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만약 정말 조금이라도 이재욱에게 마음이 있으면? 그러다가 그 마음이 더 커져 버리면? 그럼 그땐 도현이랑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주리는 애초에 재욱에게 마음이 있다는 게 말도 안 된다며 그만 걱정하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보세요."
- 주리야, 나 도착했어.
"알겠어. 지금 나갈겡."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 번 더 확인한 주리는 나가기 전 향수를 뿌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1층에 도착하니 도현이 웃으며 반겼고 예쁘게 꾸민 모습의 주리를 껴안으며 "오늘 진짜 예쁘네."라고 말하자 주리는 부끄럽다는 듯 도현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오늘 동네에서 놀까? 멀리 나가지 말고."
"그래. 어디 갈까?"
"밥 아직 안 먹었지? 배고프면 밥 먹으러 갈까?"
"음, 그럼 우리 오랜만에 거기 가자. 우리 고1 때 자주 갔던 수제버거 집!"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곤 주리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가니까 설렌다며 웃는 주리를 보던 도현은 "그러네, 진짜 오랜만이네." 하며 따라 웃었다.
수제버거 집에 도착해서, 도현과 주리는 자주 먹던 메뉴를 주문하고 자주 앉던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와보는 곳에 주리는 괜히 추억에 잠겼다.
"와, 거의 1년 만이네. 작년에 진짜 자주 왔는데..."
"그러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
"여기가 추억의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그치 ㅋㅋㅋ"
"응. 너가 전학만 안 갔었으면 더 자주 왔을 텐데."
"헐~ 내 탓 하냐 이도현?"
"ㅋㅋㅋ 그냥. 어, 우리 거 나왔다."
늦은 점심을 다 먹고 나와 시간을 보니 3시가 훌쩍 넘었고 다음은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사진 찍을래?" 하는 도현에 주변에 있던 네 컷 사진관으로 향했다. 사진관에 도착해서 주리는 머리띠와 모자들을 이것저것 써보다가 맘에 드는 게 없어 그냥 찍기로 하곤 도현과 칸 안으로 들어갔다. 지폐를 넣고 어떻게 찍을지 고민하는 주리를 보던 도현은 바로 촬영 버튼을 눌러버렸고 갑자기 촬영이 시작돼 당황한 주리를 보며 도현은 그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는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주리를 보며 웃었다.
"아, 진짜 웃기게 나왔어!"
"ㅋㅋㅋ 귀여운데 뭘."
"다음에 찍을 때도 먼저 시작해버리면 죽는다--;;"
"...그래."
사진관에서 나와 산책이나 할 겸 한참을 걷던 둘은 이제 점점 추운데 카페나 가자는 도현의 말에 주변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음료가 나오면 가지고 가겠다는 도현의 말에 주리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 화면을 켰다. 데이트는 잘 하고 있냐는 민아의 카톡에 답장을 해주고 이런저런 연락을 하고 있다 보니 도현이 음료 두 잔을 가지고 왔고 주리는 주문한 레몬에이드를 한 입 마시고는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응. 여기 맛있네. 자주 오자."
자주 오자는 주리의 말에 도현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음료만 마시고 있다가 도현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주리야."
"응?"
"이제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지금처럼 웃어줄 수 있지?"
"뭔데?"
"오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그래서 보자고 한 거고."
"무슨 말인데 그래 ㅋㅋㅋ"
한참을 고민하는 듯한 도현이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곤 말을 이어왔다.
"... 우리 이제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