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술 사줘 ]
대뜸 강찬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잠만, 얘도 계절 듣는다 하지 않았나..?
[ 뭐야 ]
[ 수업중 아니냐 ]
1이 바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눈물 좔좔 흘리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 [ 빨리 날 잡아 ]
- [ 참고로 나 막걸리 좋아함 ]
- [ 되도록 빨리 ㄱㄱ ]
[ 이번 주 수목금 중에 골라 ]
- [ 그럼 목요일 ]
[ 오키오키 ]
뽀얗게 생긴 것과는 달리 입맛만은 할아버지가 따로 없었다.
미팅 날 뜬금없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던 두부김치도 강찬희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뒤늦게 들었다.
진짜 독특한 애야. 강찬희에게 답장을 보내며 작게 웃고 있는데,
옆에서 수업을 듣던 김인성이 어느새 교수님이 아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빤히.
뒤늦게 시선을 느낀 내가 김인성과 마주친 시선에 깜짝 놀라자 김인성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노트 한 구석에 '미팅친구' 네 글자를 적자 김인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어제 늦게 들어갔어?"
"아니. 8시 좀 넘어서 들어갔어."
"그 친구랑 술 마셨어?"
"아니. 밥만 먹었어."
"걔가 데려다 줬어?"
"..."
여태껏 꼬박꼬박 대답하다가 마지막 질문에 머릿속이 바빠졌다.
사실대로 대답하기엔 김인성이 괜한 오해를 할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엔 꼭 불륜을 저지르는 여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날 괴롭힐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도 김인성이 나랑 강찬희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 생각 안 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김인성이 그만큼도 내 이성 문제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면 꽤나 섭섭할 것 같았다. 난 김인성을 좋아하니까.
속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을 처리하느라 대답이 상당히 늦어졌나보다.
선뜻 나오지 않는 대답에 김인성도 당황한 것 같았다.
"그건 왜?"
결국 기껏 고민의 결과로 한다는 답이 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퉁명스럽게 보일 수 있는 답변에 당장이라도 학관식당 테이블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김인성은 잔뜩 당황한 채 특유의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시선만 여기저기 굴렸다.
"아니.. 어제 심심하면 전화하라고 했는데 안 했길래... 그 친구가 집까지 데려다 줬나 싶어서..."
"아.. 그냥 시간도 늦었고, 걔랑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뒤늦게 얼레벌레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변명이 따로 없었다.
김인성은 작게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학식으로 나온 곰탕만 휘휘 휘저었다.
"그 친구랑 썸타는 거야?"
".."
"하긴 나랑 너무 붙어다녔다~ 너가 나랑만 맨날 붙어다녀서 그렇지, 얼마나 괜찮은데~"
"그런 거 아냐."
결국 우려했던 대로 김인성이 하지 않았으면 했던 말을 듣게 되었다.
조금의 질투도 느낌이 아닌, 그냥 친한 동생의 연애사에 대한 관심 정도로 느껴지는 김인성의 반응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가장 최악의 상황, 그 자체였다.
마치 다른 사람과의 연애를 기꺼이 응원할 수 있다는 듯한 반응. 정말이지 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밀려오는 씁쓸함에 한껏 날이 선 말투로 대꾸하자 김인성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장난이나 놀리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던 상황이라, 나의 싸늘한 반응에 김인성도 무안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미 펼쳐져버린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까 말 싸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미안."
"뭐가 미안한데."
"그 멘트는 좀 무서운데."
몇 시간 뒤 우리는 학교 근처의 버블티를 쭉쭉 빨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얼굴이 안 보이는 덕분인지 용기가 났고 그 김에 나는 김인성에게 아까의 반응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다 김인성이 거는 소소한 장난에 다시 분위기가 풀렸다.
우리는 추운 골목길을 의미없이 걸으며 킬킬대다, 또 차가운 버블티때문에 오들오들 떨다가, 다시 웃었다.
"금요일 쪽지 시험이니까 목요일에 같이 밤샘할래? 서로 깨워주자."
김인성의 말에 나는 웃음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자꾸 잊을만 하면 강찬희가 언급되는 지 모르겠다.
"어... 나 그 날 선약."
"뭐야뭐야. 누구야."
"친구가 술 사달래서."
이번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치자. 분위기를 다시 개판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거짓말.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자 김인성은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다음날 쪽지 시험인데 괜찮겠어? 어디서 마셔?"
"아.. 걔가 우리 학교 근처로 온대서~ 그리고 많이 안 마실 듯?"
"그러면 나 어차피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할 거니까 연락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선의의 거짓말 만만세.
* * *
김인성과 대충 학교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공부하러 도서관에 간다는 김인성을 데려다준 뒤 급히 약속 장소로 뛰어왔다.
혹시나 싶어 강찬희의 학교 주변에 가까운 술집에서 만났다.
대학가치고는 사람도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아는 사람 만날 일은 절대 없겠군.
"왜 굳이 우리 학교 주변으로 온다고 했어? 내가 경희대 근처 간다니까."
"너 저번에 회기 왔었잖아. 이번엔 내가 오는 게 맞지."
자리에 앉자마자 강찬희더러 먹고 싶은 거 시키라며 메뉴판을 들이밀었다. 나는 바로 나온 술부터 거하게 말아서 한 잔 마셨다.
강찬희는 뭐가 그리 급하냐며 웃었고, 나는 빨리 먹고 빨리 취하고 들어가자고 했다.
"야, 섭섭하다. 나는 너랑 얘기 좀 오래 하고 싶은데."
"내일 9시 수업. 받고 쪽지 시험. 설명 끝?"
그리곤 알바생이 가져다 준 막걸리를 따서 강찬희에게 야무지게 따라주었다.
요새 김인성 신경쓰느라 스트레스가 많았는 지 술이 훅훅 잘도 들어갔다. 그렇다고 달진 않았고 그냥 잘만 들어갔다.
강찬희와 의미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술을 들이키고 또 반복했다.
"야!"
"어우,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남자들은 관심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자꾸 엮이면 어떻게 하냐?"
"글쎄. 유쾌하진 않지. .. 너 그 좋아한다는 사람 얘기냐?"
"어~ 내가 너어무 답답해서 너한테만 말한다아~"
강찬희는 팔짱을 끼며 호기롭게 자기가 듣는 거 하나는 또 잘한다며, 다 말해보라고 했다.
어차피 아는 사람 올 일도 없겠다, 들어주는 사람도 있겠다 싶어 나는 소맥 한 모금을 홀짝이고 입을 열었다.
새내기때부터 종종 선배들을 따라 다니면 '김인성'이란 이름을 한 번쯤은 들을 수 있었다.
12학번이면 나보다 훨씬 까마득한 분인데 왜 이리 언급이 많나 싶기도 했었다.
송파키드 김인성은 군대 다녀와서 여기 저기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대학생활을 보냈고 그래서 복학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학교밖에 모르는 바보인 나는 입학부터 지금까지 동기들한테 '회기동 지박령'으로 불릴만큼 학교에 붙어 살았다.
그러다 남자 동기들은 군대로 떠나버리고, 여자 동기들은 교환으로 떠나게 된 시기에도 혼자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시기라 과행사에서는 늘 고학번 선배들과 어울리는 게 더 편했다.
"어? 우리과였어요?"
그리고 돌아온 복학생 김인성과 만나게 되었다는 길고 긴 이야기.
김인성과 겹치는 전공 과목이 하나 있었고 오전수업에 난이도가 극악이라 과 사람들은 다들 기피하는 수업이었다.
그래서 보통 타과생이나 복전생이 많았고 김인성은 그런 수업에서 유일하게 같은 과에 말 붙일 사람인 나를 찾게 된 것이었다.
김인성의 적극적인 친구 러쉬에 다음날부터는 서로 목례를 하기 시작했고, 인사를 주고 받다가 결국 김인성에게 밥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그렇게 수요일 메이트가 되어버린 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넌 왜 맨날 혼자 다녀?"
"응. 아싸라서."
유일하게 같이 붙어다니던 동기의 갑작스러운 교환학생 행으로 혼자 다니게 된 터라 김인성과 수요일 메이트에서 평일 메이트가 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냥 돈도 많고, 나이도 많은 선배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괜찮았다.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사람을 보면 늘 전단지를 받아줬고 손에 종이뭉치를 든 채 학교까지 걸어가서 버리는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아닌 일에는 화를 낼 줄 아는 사람.
자기가 목표한 일은 기어코 이뤄내는 근성이 있는 사람.
무한도전을 좋아해서 웨이브까지 끊어놓고 등하굣길마다 보며, 웃긴 유머는 기억해놨다가 꼭 써먹는 사람.
김인성이 배워 온 드립을 할 때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도 무슨무슨 특집의 무슨 장면이라고 대꾸하면 김인성은 대단하다며 조용히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런 김인성을 바라보며, 사람이 괜찮은데 취향까지 겹치는 사람은 드물다는데 이렇게 만난 것은 꼭 오래 알고 지내라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너무 붙어다닌 탓일까, 김인성이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에게 나의 마음의 깊이가 깊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연애 감정때문에 이렇게 소중한 인연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서 정말 고민 많이 했지만, 사람 마음이 어찌 마음대로 되랴.
"내가 진짜 미치겠다아. 그냥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 할 거얼~"
"..."
그 말을 끝으로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술집 테이블에 풀썩 머리를 내려놓았다.
길고 긴 김인성 짝사랑담이 끝날 때까지 턱을 괸 채 내 말을 듣고 있던 강찬희는 여전히 말 없이 내 얼굴만 쳐다봤다.
대학가 치고는 인적이 드문 한 술집의 제일 구석 창가 자리에 앉은 남녀.
테이블 위에는 소주와 맥주병이 올라와 있었고 간간히 막걸리 병도 섞여 있었다.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린 여자의 머리통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남자는 뭔가 결심한 듯 긴장한 표정으로 여자를 불렀다.
여자는 여전히 테이블과 하나가 된 채 대답했다.
"그 사람이 너 싫대?"
"몰라~ 말을 안 해봤는데 어떻게 아냐~"
"..."
"나 불쌍하지~ 와안전 불쌍하지?"
"나 너한테 술 사달라고 한 거 있잖아."
"..."
"나 너 맘에 들어서."
"..."
"그래서 술 사달라고 수작부린거야."
"..."
"야..?"
남자가 긴장한 채 할 말을 고르느라 뜸을 들였던 탓일까.
여자는 대답이 없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여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혹은 당황스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지금 잠들어서 못 들은 거야..?"
조용히 나직하게 남자의 말이 흘렀지만, 술에 취해 잠이 든 여자는 그 말 또한 듣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