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6
세자빈 방에서 나온 그는 밖에 나올 때까지 표정이 어두웠다. 뭔가 사연있는 사람마냥 슬퍼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밖에 나오자마자 턱 끝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안에 불빛도 없이 캄캄해보이는데, 겉모습은 왕자님이라도 살 것 같은 풍채였다.
"저기. 저기가 너네 머물 곳."
"세자 방을 준다고?"
"당분간은."
"들키면."
"... 내가 책임져."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말에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하던 그가 날보며 가자고 제스쳐를 취했다. 어, 어 가도 돼? 저기 가면 세자 있는건 아니고? 내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조선에 세자 없어요."
"왜, 왜요?"
"잡혀갔어요, 어딘가로."
잡혀? 잡혀갔다고 세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굴려지는 내 머릿속. 태정태세문단세 ... 인질로 잡혀갔나? 그럼 인조 때인가? 세자는 소현세자?
"지금 머리 굴리고 있죠. 막, 태정태세.. 이러면서."
"... 아닌데요."
"암만 머리 굴려봐도 모를거에요. 역사서에 한번도 나온 적 없으니까."
"그러면, 뭐 숨긴 세자라도 되나봐요?"
"뭐- 그 쯤 해둘까요, 그럼?"
뭐야, 시시하게. 재미있는 비밀인 마냥 씩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다, 세자궁 안으로 먼저 쏙 들어갔다. 주인 없는 궁은 썰렁하기만 해보였다. 더군다나 겨울인 탓에, 차가운 바람만이 휘휘 불며 오싹하기까지 하다. 뒤를 돌아 그를 보니, 어깨만 으쓱인다.
"나쁘진 않죠? 며칠 묵을 장소로는."
"이래도 되는거 맞아요?"
"쟤가 다 책임지겠다잖아요. 아 춥다, 얼른 들어가요."
얼른 들어가라며 자기가 먼저 앞장서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는 것에 문을 닫고는 그를 따라 총총 걸어갔다. 문으로 통과되는 달빛이 서울에 있는 내 방에 내리는 달빛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들. 지금 서울은 어떨까. 친구놈은 나 없다고 한참 찾다가 집 갔겠지? 아, 엄마는? 아빠는??
[연락 부탁해. -찬우-]
... 정찬우는?
"....."
여태까지 연락 안해서 차인 줄 알면 어떡하지. 일부러 안보내는건 아니였는데. 난, 난 그저 ...
"... 뭐 마음에 안드는거라도 있어요?"
언제 저만치 갔는지 어느 방문 앞에서 날 돌아보며 묻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라며 손사래 치고는 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돌아가서, 돌아가서 생각하지 뭐.
"오 꽤 넓네요?"
그렇게 들어선 세자 방은 꽤나 넓었다. 사극에서 보던거랑은 약간 다른 느낌은 있다만, 그렇게 또 낯선 모습은 아니였다. 세트장 와있는 기분이랄까. 그가 탁자 위 초를 보더니 라이터를 꺼내들어, 탁 소리를 내며 불을 붙인다. 양 쪽에 놓여져있는 초들을 켜 놓으니 어두웠던 방안이 환해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이는 세자의 방 안 모습. 어딜 간걸까, 누구에게 잡혀간걸까.
"먼저 자고 있어요. 나 밖에 좀 다녀올테니까."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방문 쪽으로 가며 하는 그의 말에 정신이 확 깬다. 여기에 날 혼자 두고 지금 가겠다고?
"여기 나 혼자 두고요?"
"뭐 그새 나한테 정이라도 붙었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뭘 그렇게 해석해 쟤는? 살짝 짜증 섞인 내 말투에 알았다며 웃고는 달래는 말투로 답하는 그다.
"걱정마요, 금방 올테니까."
"..... 아, 빨리 와요-"
"-알았어요."
투정섞인 내 말에 푸스스 웃으며 문고리를 당기는 그를 보다, 아차 싶어 다시 그를 불렀다. 이름을 묻기 위해서였다.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르는거지만, 알아두면 나쁠건 없기에.
"왜요, 뭐 필요한거 있어요?"
"아, 그건 아니고."
"그럼?"
"... 이름, 이름 알려줘요."
"아- 이름."
"알려줘도 되나 모르겠네."
허공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내려 나와 눈을 맞추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지원, 김지원."
"김지원이에요, 내 이름."
미드 나잇 인 서울
'일국의 세자가 사라졌다. 그것도 몇 달 동안이나.'
'.......'
'세자 책봉을 다시 할 것이다.'
'아바마마..!'
'..... 가례부터 올릴 준비나 하거라.'
"-가례는 무슨."
진환은 정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틈나면 저자에 놀러가고, 심심하면 규장각에 콕 박혀서 책만 주구장창 읽고. 그것이 그의 삶의 대부분이였다. 지루한 나랏일들은 배다른 저 형의 몫이였으니 말이다. 배다른 저 형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정부인에게서 나온 형은, 후궁에게서 나온 동생들을 끔찍이도 여겼다. 이렇게 평생, 원만하게 살길 바라던 진환의 바람을 하늘은 도와주지 않는듯 했다.
"형님은 어딜 그리 가십겁니까- 내가 뭘 할 줄 안다고."
약간의 선율이 섞인 그의 말투는 답답함과 복잡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자신의 처소로 걸어가던 진환이, 그리운 형님 얼굴은 못보지만 그 처소 주변이라도 돌까 하며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자선당, 한걸음 한걸음. 그는 그 쪽으로 내딛었다.
.
.
.
.
.
"어-이."
"....."
그닥 반가운 목소리는 아닌 것에, 준회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본 준회는 그를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지원 또한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세자빈 궁 앞은 좀 그런데. 좀 한적한 데 없냐?"
".... 여기서 말해. 자니까."
"니 정체가 다 탄로나도 상관없나봐."
".... 어디서 온거야, 넌."
"짐작 가능하잖아."
"....."
"나 너 잡으러 온거야. 더 뻘짓하기 전에, 너 잡으러 왔다고."
웃음기 가득하던 지원의 말투가 갑자기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너,"
"타임리프."
"누구한테 썼어?"
"........."
갑작스런 물음에 준회는 당황한 눈초리였다. 침을 삼키는 듯, 목울대가 움직인다. 지원은 목을 돌리며 주변 눈치를 슬쩍 보다, 준회 앞으로 더 다가갔다.
"그것만 말해. 너가 보낸거야- 아님 스스로 간거야."
"....."
"말하기 싫음 지금은 안해도 돼. 근데, 내가 여기 그냥 왔을리가 없잖아? 증거가 있으니까 왔지."
"...... 기다려."
"뭐를."
"내가 해결할테니까, 기다리라고."
지원은 준회의 말을 대충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인정하는걸로 받아들였다. 지원이 한숨섞인 웃음을 보이고는, 준회의 어깨를 두드리며 한 발짝 떨어진 그는 다시 운을 뗐다.
"... 여긴 조선이야. 그것도 18세기."
"..... 니가 있던 30세기가 아니라."
"알아두라고. 혹시나 잊었을까봐 말하는거니까."
지원이 그렇게 가고, 남은 준회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잠깐 머리에 손을 얹던 준회는 체념한듯 보였다. 세자빈 궁 안은 바깥의 불만 켜져있을 뿐, 빈궁 처소는 캄캄했다. 그대는 아무 걱정 말고 자길. 그 와중에도 준회는 바라고 있었다.
.
.
.
.
.
세자 책봉을 다시 할 거라는 얘기가 들리는 것에 한빈은 당연하게 진환이 다음 세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불만이 없던 그였다.
한빈, 그는 후궁의 둘째 아들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새벽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나 추워서 일찍이 처소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러나 자선당 옆을 지나치던 그가 멈춰선 것은 들리는 이 대화 내용 때문이였다.
'너, 타임리프. 누구한테 썼어?'
도통 알 수 없는 단어였다. 타임리프? 그건 또 뭐야. 호기심이 많던 한빈은 그대로 자선당 문 앞에 기대어 귀 기울였다. 휘이-. 바람소리에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들으려 안간힘을 썼다. 바람 소리가 조금 잠잠해지고, 그에게 들린 한마디.
'여긴 조선이야. 그것도 18세기. ... 니가 있던 30세기가 아니라.'
"........."
18세기, 그리고 30세기라. 놀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잠시동안 얼빠진 표정으로 허공을 보던 그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미래."
"... 미래에서 온 자들인가."
다시 한번 거센 바람이 자선당에 휘몰아쳤다.
"아 왜 안오는건데 ..."
대충 체감상 몇 십분은 훨씬 지난 것 같다. 불은 항상 때워놓는건지 따뜻한 방바닥에서 몸을 녹이고 있던 것도 잠시 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불안하니까, 나 혼자 있는건.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미칠듯한 정적만 감돌아도, 혼자보단 여럿이 나았다.
"아 추워."
밖에 다시 나오자마자 냉랭한 날씨에 몸을 웅크리며 돌계단에 앉았다.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희미하게 보이는 궁 너머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진짜네, 조선."
그 높은 빌딩이 하나도 없잖아. 서울에 있는 경복궁에서는 그냥 고개만 들어도 높은 빌딩이 훤히 보이는데.
"... 어느 처자이십니까?"
"........!"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데,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이는건, 내가 기다리고 있던 그, 지원이 아닌 낯선 남자 뿐이였다. 어, 어떡하지. 아씨, 왜 안와서는. 그는 내가 당황한걸 눈치라도 챈건지 주변을 보며 아무도 없다는걸 알고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돼, 안된다. 오지마라.. 오지마. ... 뭐, 내가 바란다고 오지 않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만.
"행색을 보아하니, 궐 사람은 아닌 듯 하고-"
"....."
"- 그렇다고해서 또, 평민은 아닌 듯 하고."
이미 그와 내 사이 거리는 스무 걸음 내외다. 뛰어야하나? 뛸까? 슬쩍 뒤를 돌아보아도 갈 곳이라곤, 여기 세자궁 뿐이다. 그는 점점 더 가까이 오더니, 갸우뚱하며 날 바라본다.
"미래에서라도 왔나?"
"........"
"나 옆에 앉아도 되죠?"
"........"
"알았다는걸로 들을게요 그럼?"
"........."
부동자세. 그야말로 부동자세였다. 정좌. 아, 여러모로 후회되는게 참 많다. 수련회가서도 제대로 못했던 정좌자세를 여기서 이렇게 잘할 줄이야. 정말 그는 내 옆으로 와 아무렇지 않게 털썩 앉았다. 슬금슬금 옆으로 가려하니, 피식 웃는다.
"무서워하지마요. 안물어요."
"....... 예."
"어, 말했다."
"........."
말했다며 고개를 돌려 날 빤히 바라보는 것에 그를 슬쩍 보다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대로 다시 부동자세. 그는 눈이 휘어지듯 웃더니, 내 긴머리를 보고는 물음표 가득 띄운 얼굴로 말한다.
"미래에서는 머리 안땋나봐요?"
"....... 예."
"오, 진짜? 이렇게 풀어도 되는거야?"
"........ 예."
"그럼 결혼해서는?"
".........."
"댕기 안올려도 돼?"
"........ 예."
무슨 예스맨도 아니고. 부동자세로 이러고 있으니 마치 기계라도 된 것 같다. 근데 이 사람 참 이상하네. 보통 놀라지 않나, 귀신이라도 본 마냥.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상상하는거 하나는 끝판왕이거든요."
"........"
끝, 끝판왕 ... 조선에서도 이런 말을 쓰던가. 그러고보니 저 사람 조선에서 쓰는 고어체같은거 안쓰네 ... .
"그래서 별걸 다 상상해봤지 내가. 미래는 어떨까, 하고."
"........."
"나 사실 되게 놀랐어요. 엄청."
"........."
"어떻게 왔는지는 안물어볼게요. 그냥 나 봐도 되죠?"
"........"
"어? ... '예.' 안하네? 싫은가?"
".......... 얼굴..을 보겠다는...?"
"그럼 뭐,"
"어딜 봐, 보길."
뭐, 뭐냐 이 사람. 음흉하게 웃으며 날 이상하게 보는 눈빛에 같이 눈을 찌푸리니 또 베시시 웃는다. 이상한 사람일세...
"나 뭐게요."
"...... 예?"
"나요, 나. 뭐일 것 같냐고."
"....... 어 ..."
얼굴도 예쁘장하고, ... 체구도 조그맣고 .... 어..... 사극에 그 뭐더라, 걔 있잖아. 왕 옆에서 예이, 하는 애. 내... 내....
"내시!!!!"
".... 뭔, 뭔 시?"
"............"
"...... 아..아하하..하하하."
"......."
"미래... 에서는 옛날 내시를 매우 잘생겼다고 생각했나보네. 하하."
"...... 네.. 네 뭐. 하하."
망, 망. 이 놈의 입방정. 입을 찰싹찰싹 때리는 시늉을 하곤 그를 쳐다보니, 날 흘깃보다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잔잔한 목소리.
"나, 왕자예요."
...?
"왕, 자?"
"응, 왕. 자."
"왕... 자?"
"네, 왕자."
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으니 내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쏙 넣으려는 것에 얼굴을 뒤로 내뺐다. 뭐, 뭐하는거예요!
"아- 아니,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장난 좀 쳤지."
"그래서, 그래서. 지금 진짜 왕자라고요?"
"응, 나 왕잔데 왜요?"
"허-."
그러던 그 순간, 난 깨닫고 말았다. 그래, 내가 여기 조선에 있다는 것도 믿어주자- 하고 믿었는데, 내 옆에 이 사람이 왕자라는 사실 하나도 못 믿을까. 그래, 그래. 귀염상 너, 왕자해라.
"근데 왕자님이 여긴 왜 왔대요."
"심심해서요."
"왕자님은 공주님들이랑 놀면 되잖아요-"
"공주 없어요. 우리 삼형제야."
"아니, 그거 말고. 왕자님이 사랑하는 사람."
"그것도 없는데?"
뭐 다 없대, 얘는.
"조선시대는 일찍 결혼하지 않아요?"
"오 잘 아네? 미래에서 알려주는구나."
"그럼, 다 알죠."
"그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일지도 알겠네?"
"... 응?"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질문 기습공격에 당황하며 그를 보는데,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그에 더더욱 당황했다. 1cm 도 안되는 거리. 조금만 더 닿다간 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거리. 눈을 맞추다 내가 깜빡이니,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그가 얼굴을 뗀다.
"나 알려줘요, 알게 되면."
"...... 뭐.. 를요."
"내 부인. 내가 사랑할 사람이 누군지,"
"미래, 그대가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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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별내에서의 진환이를 살려주고자 왕자님으로 만들었습니다! ㅋㅋㅋ 이제 한빈, 진환이도 나왔으니 윤형, 동혁이만 나오면 되는건가요?!
이번 작 '미드나잇 인 서울'은 큰 틀로 잡아놓고 쓰고 있기에 첫부분이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계속 보다보면, 아 이래서! 하며 이해하실 수 있을테니 끝까지! 재밌게 봐주세요♡ (오늘 편만 해도 어느정도 감이 잡히죠?)
암호닉
(암호닉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당)
바나나킥 / 김밥빈 / 초록프글 / 뿌득 / 부끄럼 / 준회가 사랑을 준회 / ★지나니★ / 기묭 / 핫초코 / 쪼매 / 한빈아
꺅 사랑해요 (하트백만개) (하트천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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