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서야 너빚쟁이 자고 있던 방문이 열렸어
문 틈 사이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데 너빚쟁은 모처럼 안전하고 포근한 곳에서
푹 잘 수 있어서 기척도 없이 기절한 듯이 자고 있었지
그런 빚쟁이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같이 밥을 먹으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인에게 상을 가져오라고 했어
방 안에 상이 차려지고 아침이 다 준비됐을 때 쯤에 너빚쟁은 냄새를 맡고 몸을 일으켰어
그러는 너빚쟁을 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전에 감옥에서 봤던 한심하다는 눈빛이였어
"이렇게 외간 남자 집에서 늘어지게 자는 계집은 조선 팔도에 없을 것이다"
"제가 조선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없지요"
아침은 정말 아침인데도 진수성찬이였어
고기 반찬도 가득하고 생선도 맛있게 구워져있고
너빚쟁이 허겁지겁 밥을 입안에 밀어넣는데 그 모습을 보던 그 남자는
밥을 먹고 어디 같이 가볼 곳이 있다고 했어
이럴려고 고기 반찬 먹였구만 하면서 일단 너빚쟁은 택운이를 따라 나섰어
어쨌든 이 정택운과 똑닮은 이 사람과 최대한 붙어있어야
그 시간만큼 현재로 돌아갔을 때 머무를 수 있으니까
그 남자를 따라간 곳은 마굿간이였어
너빚쟁은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목장에 떨어진 일도 많고 그래서
타본 적은 없어도 큰 말을 보는데 무서움은 없었어
여기에 왜 데려왔냐고 물어보려고 그 남자를 쳐다봤는데
그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빤히 말만 쳐다보고 있는거야
그래서 너빚쟁은 딴에는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보려고
말들이 참 순하네요. 이렇게 낯선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가만히 있고 하하하...
이렇게 말하는데 그 남자는 그게 문제다, 하면서 너빚쟁을 번쩍 들어서 말 안장에 앉혔어
너빚쟁은 어어???하면서 진짜 엄청 놀라는데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고삐를 잡았어
그렇게 떨어질까봐 고삐만 겨우 잡고 있는데 그 남자가 너빚쟁 뒤에 올라타 앉았어
너빚쟁은 너무 의아해서 눈이 완전 커지는데 일단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어
말에 타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냥 고삐만 꽉 잡고 덜덜 떨고 있는데
신기한 건 이렇게 두 사람이 올라타는 데도 말은 가만히 있는거야
그리고 그 남자가 발로 툭 치니까 그제서야 말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 다음에는 움직임이 정말 부드러웠어
눈 앞에 펼쳐진 목장을 따라서 말과, 그 남자와 너빚쟁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어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그 남자는 말에서 가뿐하게 내렸어
너빚쟁이 혼자 못 내려가고 계속 고삐만 붙잡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얘가 뭐하나 싶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 남자가
태워줬을 때처럼 너빚쟁을 들어서 땅으로 내려줬어
너빚쟁은 말을 처음 타봐서 재밌고 신나기도 하지만 아까 말을 타면서 뒤에서 느껴지는 그 남자의 품이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어
비록 너빚쟁을 죽이려하던(?) 첫 만남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 중에 밥도 챙겨주고 잠 잘 곳도 마련해주는 사람은 처음인데다가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착한 사람일지도(?) 그렇게 생각이 되는거야
이렇게 약간씩 설레는 너빚쟁 마음과는 다르게 그 남자의 표정은 정말 심각했어
방금 몇 년만에 말을 탔는지 몰라
왜, 어떤 사고가 났는지도 흐릿한 그 사고 이후로
이렇게 말 옆에 가까이 가서, 심지어 말을 탄 게 거의 5년이 넘는 것 같거든
진짜 이건 기적에 가까웠던거야.
그 남자는 확실히 너빚쟁이 있으면 자신이 말을 타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래서 너빚쟁을 조금이라도 더 옆에 두고 싶다고 생각해
그래야 자기가 말을 타서 제대로 된 호위무사로 복귀할 수 있고 그러면 왕에게 큰 도움이 될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택운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너빚쟁은 사라지고 없었어
말을 보고 있다가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 하필 마굿간 문이였던 거야
그 칸막이 같은 것도 문은 문이라고 눈 앞에 보이는 건
말똥이 가득한 건초더미가 아니라 현재의 한국이였어
너빚쟁은 이번에는 그래도 택운이랑 같이 있던 시간이 좀 기니까
그래도 그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그래서 일단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을 홍빈이라는 친구한테 가기로 해
그렇게 행선지를 정하고 있는 동안 언제나 너빚쟁을 반기고 있던 편의점 문이 열리고
이제는 얼굴이 익숙한 편의점 알바생이 문을 열고 나왔어
알바 시간이 끝난 건지 평소와는 다르게 가방을 들고 나오는데
사실 뭐 딱히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서 아는 척 하기도 뻘쭘해서 그냥 홍빈이에게 가기로 하는데
이상하게 그 알바생이 너빚쟁 뒤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괜히 의식이 되서 힐끔힐끔 보고 괜히 무서운 얘기도 생각나서
신경을 엄청 곤두세우면서 전의 그 동네 골목으로 향했어
골목에 다 와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어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여동생도! 있어요!"
뒤에 따라오던 알바생이 저렇게 크게 외치면서 먼저 골목 안으로 들어갔어
너빚쟁이 의식하고 있단 걸 눈치채고 있었나봐
괜히 미안해져서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그 알바생은 골목 왼쪽에 있는 대문으로 금방 쏙 들어가버렸어
아 여기 사나보다 하면서 그 골목 입구에 서서 홍빈이를 기다렸어
이미 집 안에 있는거면 어떡하지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을 다 두들기면서 찾아볼 수도 없고
그래서 무작정 기다리로 하고 서있는데 다행히 아직 집에 온 건 아니였던 건지 저 멀리서 홍빈이가 오는게 보였어
홍빈이는 너빚쟁을 발견하고 뛰어왔어
그 때 왜 말도 없이 그냥 갔냐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도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홍빈이는 그래도 다시 와줘서 다행이라고 대답했어
그러더니
"아 맞다, 원식이. 원식이 기억나? 너랑 나랑 원식이랑 셋이 예전에 엄청 잘 놀았었는데
얘 지금 알바 끝나고 집에 왔을거야. 잠깐만"
하면서 홍빈이는 어디론가 연락을 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까 편의점 알바생이 들어간 대문이 열리고 알바생이 나왔어
어 원식아.
그 매번 년도를 알려주던 그 알바생이 바로 너빚쟁의 또다른 옛날 친구 김원식이였던거야.
너빚쟁이 뭔가 뻘쭘해있는데 원식이도 방금 전의 일이 생각나서 굉장히 당황하는 표정이였어
그것도 모르고 홍빈이는 할 얘기가 엄청 많다고 어디 까페라도 가자고 했어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원식이가 주문을 하러가자마자
홍빈이는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했어
너빚쟁은 사고 후에 거둬주신 분들이 있어서 거기서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
아무리 어렸을 때 친한 친구라도 갑자기 나타나서 시간 여행을 하러 다닌다고 하면
세상 사람 중에 몇 명이나 이 말을 믿겠어
음료를 받아 온 원식이가 자리에 앉고 나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됐어
"우리는 그동안 너 죽은 줄 알았잖아. 이렇게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이러면서 너빚쟁 머리를 쓰다듬는데
너빚쟁은 사람의 손길을 느낀게 오랜만이라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였어
너빚쟁이 홍빈이를 찾아온 일차적 목표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한 거니까
세 사람이 함께 했던 과거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해
너빚쟁이 사고로 옛날 기억이 잘 안난다는 말에
두 사람은 배신이다~ 이러면서도 진짜 열심히 이야기를 해줬어
"너가 이 오빠를 다 잊었다니 정말 섭섭하다"
"허허.."
"아 이런 것도 낯설다고 우리는~"
어렸을 적 너빚쟁은 이런 말을 들으면 두 사람을 때리기 바빴다고 했어
두 사람이 해주는 얘기는 정말 재미있었어
정말 재미있는 옛날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어
주인공은 너빚쟁인데도 말이야
세 사람은 어렸을 떄부터 함께 자라난 동갑내기 친구라고 했어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해
그런데 같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쯤에 큰 교통사고가 나서
부모님은 두 분이 다 그 때 돌아가시고 동네 사람들은 다 너빚쟁도 같이 죽은 줄 알고 있다고 했어
장례식을 했던 건 아닌데 워낙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깨어나지를 않았다고 해
그러다가 친척 손에 맡겨졌다는 소문도 돌았고
그 후에 죽었다는 소문도 돌고
어쨌든 그 이후로 동네로 돌아오지 않아서
어린 홍빈이와 원식이는 이제 빚쟁이 못 봐? 하고 물었는데
어른들은 응 못 볼거야 라고 대답해서 그냥 죽은 줄 알고 자라났다고 해
"그러고 보니까 우리 장례식도 안 갔는데 왜 죽은 줄 알았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었어
그렇게 과거에 같이 지내던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홍빈이가
"근데 그 형은 요즘도 바쁜가? 얼굴 본 지 꽤 됐네"
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원식이가 누구? 택운이형?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너빚쟁은 그 이름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어. 누구? 정택운?
그러니까 홍빈이는 와 섭섭하다. 그래도 부부였다고 그 형 이름은 기억하나보네 하는거야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
"옛날에 우리 맨날 그 형이랑도 같이 놀았잖아. 우리 진짜 어렸을 때 소꿉놀이 하면
맨날 너가 엄마하고 택운이 형이 아빠하고 옆집 살던 상혁이 애기하고
우리한테는 맨날 개라고 그랬잖아 강아지도 아니고 ㅡㅡ;"
홍빈이는 이렇게 삐진 듯이 말했어
그러면서 아 맞다, 너 사고가 그 택운이형네 가족이랑 같이 휴가 가다가 난 사고일걸? 그 사고 나고 택운이형네 미국으로 이민갔잖아
거기서 모델로 완전 성공해가지고 이제는 얼굴 보기도 힘들다. 전에는 한국 그래도 자주 왔었는데. 외롭다고.
이렇게 덧붙였어
그 얘기를 듣고 너빚쟁은 자리에서 완전 벌떡 일어났어
그리고 먼저 가볼게 하면서 짧게 인사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어
완전 멘붕상태인거야. 그러면서 그 동안의 기억들이 전부 뒤죽박죽
급하게 카페 문을 열고 나갔 곳은 과거였어
그리고 눈 앞에는 미래에서 만났던, 너빚쟁과 아는 사이인 정택운과 꼭 닮은 과거의 남자가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어
"정.. 택운?"
하면서 부르는데 그 남자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너빚쟁을 얼굴을 찡그리면서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어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무례한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내 이름을 막 부르는건 더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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