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빚쟁은 등떠밀려 들어간 방 안에서 한복을 들고 멍하니 서있었어
한복은 정말 예뻤어
색깔도 곱고 디자인도 예쁘고
이걸 입으면 택운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예쁜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려고 하는데 너도 모르게 멈칫했어
눈 앞에 보이는 굳게 닫힌 문
"거기 누구 없어요? 래오님! 야 정택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올 생각을 안해
아예 너빚쟁 목소리가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어
이젠 다른 곳으로 갈 시간이라는 걸
이정도면 오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간다니까 뭔가 서운하고 섭섭해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래도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자신이 갈아입은 옷을 봐줄 정택운이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
아니 사실은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앞에 정택운이 있었으면 해
그래서 한 손에는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들고 문을 열었어
역시나 눈에 보이는 건 현재의 한국
너빚쟁은 한숨을 푹 쉬어
이번에는 택운이와 함께 상당히 오래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걸 알아
그 대신에 친구들과 더 오래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왜 아쉬운 거지?
일단 한복은 뭔가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외진 골목으로 들어가서 다시 옷을 갈아 입었어
한 팔에 한복을 들고 유일한 갈 곳인 친구들이 사는 골목으로 향했어
터덜터덜 걸어서 골목 앞에 서서 기다리는데 이번에는 원식이가 먼저 왔어
생각해보니 오늘은 편의점 앞을 지나가지 않은 것 같아
항상 지나가던 길인데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아는 얼굴이 보이니까 반가워서 인사를 해
반갑게 인사하는 너빚쟁을 보고 원식이는 처음에 사람 잘못 본 듯이
게슴츠레하게 쳐다보더니 너빚쟁인 걸 보고 놀라면서도 반가워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게 무슨 순간이동 하는 마법사같다고 하면서 막 웃는 원식이의 말에
너빚쟁은 뭔가 뜨끔하지만 하하하 그러니 하면서 멋쩍게 웃었어
원식이는 너빚쟁 팔에 들린 한복을 보면서 그게 뭐냐고 물었어
너빚쟁은 알바할 때 입었던 옷이라고 둘러댔어
무슨 알바냐고 물어보니까 그 뭐 궁궐같은 데서 하는 거 있다고 대충 둘러댔어
속으로 아주 개뻥은 아니지 하면서 말이야
원식이가 그러냐 하면서 이홍빈 이거 지금 방학했다고 완전 폐인이라고 불러서 같이 마시자고 해
앞집 대문을 쾅쾅 두들기면서 이홍빈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골목 안에 문 두드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울려퍼지는데 너빚쟁은 약간 부끄러워져
아 모르는 척 하고 싶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추레한 모습의 홍빈이가 나와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 김원식 왜 이렇게 말하면서 나오는데 옆에 너빚쟁이 서있는거 보고 놀라
그 때 급하게 가더니 뭐 잘 해결됐어? 하고 묻는데 대충 잘 해결됐다고 대답했어
원식이가 홍빈이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마시러 가자 하는데
홍빈이는 아 이 시간에 마시면 잠 못자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사실 너빚쟁은 돌아다니느라 어디 술집가서 제대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
주민등록증도 없고 제대로 된 신분증도 없고 그래서
두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까 약간 설레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어
지금 마시면 잠 못 잔다고 투덜대는 홍빈이에게
원식이는 그래도 빚쟁이랑은 또 마셔줘야지 하면서 홍빈이를 끌고 가고
너빚쟁은 둘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따라 갔어
근데 도착한 곳은 저번에 갔던 그 카페야
너빚쟁이 의아한 표정으로 마시자며?하고 물었더니
원식이가 이홍빈 완전 알코올 쓰레기라 얘 술 한잔만 마셔도 헤롱헤롱대서
하고 싶은 얘기, 속에 있는 얘기 다 하고 거짓말도 못한다고 하면서 웃었어
그래서 원식이랑 홍빈이 사이에 마시자=커피 마시러 가자 이런 뜻인거야
저번처럼 자리에 앉고 원식이가 주문을 하러 갔어
얘기를 하는데 원식이랑 홍빈이가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카페에서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 하는 것도 웃기다고 소녀인가? 하면서 웃었어
생각해보니까 너빚쟁은 그동안 친구들과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두 사람에게 그동안 좀 옮겨다니면서 사느라 친구랑 놀아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어
그 말을 듣고 원식이가 벌떡 일어나서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떄가 아니라고 하면서
가자, 서울의 밤을 보여줄게 하면서 빚쟁이를 데리고 나갔어
그 와중에 한복은 야무지게 챙겨서 난생처음 노래방, 서울 시내 구경 등등
평범했다면 원없이 했을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
노래방에 가서는 아는 노래가 없어서 그냥 듣기만 하는데도 너무 재밌는거야
오락실은 말한 것도 없고 그냥 길을 두 사람과 걷는데 행복해
그렇게 밤이 늦어지고 너빚쟁에게 두 사람이 지금 어디에 사냐고 물었어
그 질문을 듣고 너빚쟁은 딱히 말할 곳이 없고
최근에 집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택운이네 집 뿐이야
그래서 그냥 그 궁 있고 한옥 있고 그런데 살아 이러니까
애들이 아 경복궁? 그 쪽? 삼청동인가 이러면서 여기서 먼데 얼른 가야겠다고 하면서
그동안 거기서 매번 여기까지 온거냐고 막 어린애 혼내듯이 얘기했어
더 있다가는 둘러댈 말도 없고 그래서 얼른 헤어져야겠다 싶어서
애들에게 인사하고 나와서 보이는 문이랑 문은 다 열어봤어
무조건 어디론가 가야했고 이건 그동안 이렇게 밤이 오면 해결했던 방법이였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나올 때 까지 문을 열고 열고 또 열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을 다 열고 다녀도 어디론가 전혀 가지지 않는거야
그냥 평범한 사람들 문 여는 것처럼 문을 열면 그냥 그 건너의 공간이 보여
당황한 너빚쟁은 일단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가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어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다 무섭고 춥고 외로웠어
원래 항상 이런 삶이였는데 그 동안 며칠 택운이네 집에서 여유롭게 지냈다고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서러운거야
생각나는 건 택운이 얼굴밖에 없고
손에 들린 한복이 야속하기까지 해
이거 하나 입어보겠다고 그 방에 들어가서 이렇게 됐다는 생각만 들어
그러면서 택운이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을 헤아려보는데
말을 타러 나간 일이 대충 열 번 정도,
택운이가 너빚쟁을 데리고 놀러 나간 일도 그 정도
항상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대충 열흘정도 시간이 있는건가 하면서 막막해 해
그동안 어디서 머물고 어디서 씻고 어디서 자고
그런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해
그동안에는 머물 곳이 나올 때까지 문을 열고, 열고, 열었는데
이제 그런 꿈같은 방식의 해결은 더이상 할 수가 없는거야
진짜로 남들처럼 하나하나 해결해야 하는거야
갑자기 닥친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너빚쟁은 한숨을 푹 쉬었어
정택운이랑 있으면서 현재 한국에 있을 시간이 늘어난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평소에 하던대로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시간만큼 평범한 삶이 된다는게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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