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심장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글을 써봅니다. 저는 28살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제가 쓸 이야기는 저와 저의 동거인의 이야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거인이 남긴 편지를 올리는 거겠죠. 저의 동거인의 편지를요. 단지 특이한 점이라면, 편지를 쓴 사람은 귀신입니다.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 그리고 전 그런 귀신과 동거합니다.
-----1월 17일, 토시오----
To. 이 집의 주인에게.
먼저 인사드립니다. 나는 토시오.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허나 분명 저에게도 이름은 있습니다. 그것은 토시오. 사실 이 이름은 제가 저에게 붙인것입니다만. 몇달전 당신이 TV로 영화를 볼 때에, 전 저와 똑같이 생긴 귀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옆에서 같이 숨어서 보는데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요.-아 물론 전 심장이 있지도 않고 뛰지도 않습니다만- 전 거기서 나오는 귀신의 이름을 따서 저를 토시오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토시오. 토시오. 저의 파란 피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저는 제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절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제가 만나는 사람이라곤 이 집에 사는 당신과, 가끔 찾아오는 반장 아주머니 정도. 아- 신문배달부 한명과 택배 아저씨들이 있겠네요. 당신은 다른 사람을 집에 부르는 편도 아니었고, 저 또한 그들에게 나서기는 힘들었습니다. 아 물론 당신에게도 절 내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름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부터는 욕심이 생기더란 말입니다. 저에겐 이름이 있고, 이렇게 생각도 할 수 있고 놀 수도 있는데, 그 누구도 저를 불러주진 않습니다. 저를 보아주지 않습니다. 예전 어느 누군가의 책에서-이건 제 생의 기억인지 사후의 기억인지는 애매합니다만- '사람은 이름 지어지고 불리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신들과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는 있다지만. 전 아마 사람으로써 당신들과 마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 이 이름은 커다란 의미였지요.
아마 이 편지를 읽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곧 제 존재를 드러내겠습니다. 부디 놀라지 마시고 저를 맞아주시길. 나는 토시오. 당신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From. 토시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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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첫번째 편지를 받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장난이라니! 어떤 도둑인지, 혹은 내 친구들의 장난인지, 몇일 전에 놀러왔던 가족들의 장난인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만 꽤나 악질적인 장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한거겠지요? 누가 이런 이야기를 믿겠습니까? 귀신이라니? 그리고 이렇게 편지를 남기는 귀신이라니! 이 얼마나 웃기는 코메디 같은 상황인지! 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편지를 접어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약간은 젖어있는 듯한 이 편지를 그때 의심했었야 했는데. 그건 토시오의 첫번째 자신의 흔적이었습니다.
몇일이 지난 후 토시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하듯, 폴더가이스트 현상을 만들어 냈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물건을 가지고 노는 정도. 그 정도라고는 하였지만- 주전자가 날아다니고 베게가 서서 춤을 추고, 뒹굴던 음식들이 요리가 되어 떨어지는 그런 괴상한 현상들. 가끔씩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소리가 들렸지만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소름이 돋아 마땅한 그 순간이었음에도, 저는 꽤나 침착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편지 때문이었을지도. 혹은 이런 괴상한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뒤로 몇번이나 이러한 현상을 겪으면서 두번째 편지가 놓이길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자리에 다시 놓아져 있었습니다. 언제 썻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1월 30일, 토시오----
To.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다시 인사드립니다. 나는 토시오, 당신의 집에 얹혀사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그것입니다. 몇일동안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저를 보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많은 물건들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영령인 저에게 모든 물건들은 꽤나 무거운 것들이라서 몇번 물건들을 흔들고 나면 몸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게 꽤나 섬뜩한 느낌이라서 많이 겪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목소리를 내어 당신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제 목소리를 듣는듯 하였습니다만, 정확히 대답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당신의 말 소리는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몇일 간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걸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저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깨우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왠지 저를 알아주지 못하는 당신이 원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이제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편지를 남겨 주시겠습니까?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당신과의 대화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From. 당신의 악령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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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번째 편지를 받고 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토시오는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지요. 전 그 즉시 토시오에게 전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소통을 위한, 첫 장. 사람과 귀신의 제대로된 의사소통의 첫 발자국 이었을지도 모릅니다.
=====2월 1일, 정인====
To. 제 집에 얹혀사는 토시오에게.
당신이 자주하는 말처럼, 제 집에 얹혀사는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토시오에게 이 편지를 남깁니다. 저는 당신을 보진 못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도 들었고, 당신의 행동을 모두 보았습니다. 몇일간은 두려움에 잠을 자지못햇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재밌는 동거가 기대되기까지 합니다. 언제든지 저에게 편지를 남겨주세요. 저도 당신에게 편지를 남기겠습니다.
P.S* 아! 최근 토시오가 해놓은 계란후라이는 상당히 짯습니다. 소금을 조금만 덜 쳐주세요.
P.S* 저의 이름은 정인이에요, 토시오.
From. 집주인 정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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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시오는 이 편지의 대답에 꽤나 기뻣던지 A4용지 세장분량의 편지를 남겼었습니다만, 이 내용은 죄다 자신이 이제 사람으로써 존재할 수 있음에, 당신과의 첫 교류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식의 어려운 단어들의 집합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같이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고, 어느 순간부터 저는 제 집의 물건들이 하늘을 날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움직이는 물건을 향해 손을 흔들면, 그 물건들도 마주 흔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토시오도 저에게 인사하기 위해 열심히 물건을 흔드는 것이겠지요.
이 이후에는 그저 중요했던 몇가지의 편지들만 올려보도록 할게요.
-----6월 20일, 토시오-----
To. 더위에 지쳐가는 정인에게.
이제 곧 여름이네요. 곧 하늘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풀들은 파래지고, 동물들은 무더운 더위에 지쳐가는 날이 오겠네요. 정인도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세요. 저는 요즘 당신에게 해주기 위해서 요리책을 보고 있습니다. 몇일 전 사다주신 요리책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요리를 발견햇지요. 그다지 어려운 식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난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번주 토요일을 기대해주세요. 맛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P.S* 세탁기에 양말을 넣을땐 뒤집지 말고 넣어주세요.
From. 더위를 타지 않아서 좋은 토시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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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정인======
To. 잔소리꾼 토시오에게.
토시오는 모르겠지만 벌써 무더운 더위에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선풍기 내놔요. 어디다 감춘거에요? 전기세는 제가 내는거라구요. 거기다가 양말 좀 돌려넣었다고 잔소리는...물론 토시오가 해주는 요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몇일 전에 사다준 책에서 먹고 싶은 요리가 있었는데, 표시해 두신거 보았나요? 그걸 먹고 싶었던건데. 어쨋든 요번주 토요일은 약속 취소하고 빨리 집에 돌아오겠습니다.
P.S* 잔소리 좀 그만해요
From. 수영장 놀러갈 정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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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토시오----
To. 놀러간 정인에게.
오늘은 정인이 놀러갔다는걸 알고 있지만 조금은 서운하네요. 다른 집의 사람들처럼 24일에 가족끼리 보내고 싶었는데요. 크리스마스 트리도 꾸미고 별도 달고 꼬마전구도 두르고 그렇게요. 물론 정인은 사회 생활이 바쁘다는걸 알고 있으니 할 수 없다는걸 알고는 있어요. 그래도 같이 보내고 싶었어요.
From. 나홀로집에 토시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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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정인====
To. 나이를 모르는 토시오에게.
몇일 전 크리스마스에는 미안했어요. 사과를 했어야 되는데 꽤 오랜 시간을 끌고 말았네요. 토시오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생일도 몰라서 이렇게 케이크와 함께 편지를 남깁니다. 오늘을 새해의 첫날일 뿐만 아니라 토시오의 생일로 삼기로 해요. 나이는 오늘부터 1살.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오늘을 토시오의 첫생일. 어때요? 괜찮아요? 비록 맛은 못보겠지만 모양이라도 마음에 들었으면 싶어서 제일 이쁜 케이크로 사왔어요.
생일 축하해요 토시오.
From. 한~~~~참 누나 정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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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편지가 끝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편지는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네요. 벌써 몇년째 이렇게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끝을 어떻게 내야할진 모르겠지만, 이만 저희의 글을 줄입니다.
귀신, 혹은 원령. 또는 악령이라 불리는 토시오, 그리고 집 주인 정인이의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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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전부터 계속 토시오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무서운 내용이 아니라 약간은 어리숙하고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그런 내용으로.
원하던 스타일의 글은 아니지만, 쓰는동안은 재밌었다.
어떻게 끝맺을지 몰랐다는 저 문장은 실제로 진짜 모르겠어서 저렇게 썻다.
음.
근데 그래도 난 귀신은 싫다.
글 쓰느라 토시오 얼굴 몇 번을 봤드니 꿈에 나올까 두렵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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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보니까 여태껏 제 글 중에서 최고의 스크롤!!!!
...겁나 혼자 쓰면서 재밌긴 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