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과 민현을 통해 진실을 접한 아이들은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각자 생각하는게 달라 무엇 때문에 안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혁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은 정한과 민현은 여주가 창균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지에서 아는 얼굴을 만나 3년간 친하게 지냈다는 것 까지만 전할 뿐, 지금 여주의 상태가 좋지 않아 창균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전하진 않았다. 그럼 그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을 아이들이 눈에 훤했으니.
그러나 민현과 정한은 둘이 있을 때면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민현) ..우리가 잘 못지낸 건 맞지만, 여주가 죄책감은 안들었으면 좋겠는데.
정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애초에 그러면 우리가 잘지내고 있었다는 걸 보여줬어야 했는데,
사실 잘지내는 걸 보여줬더라면 여주가 우리 얼굴 보려고도 안했겠지. 영영 떠나려던 애였는데.
민현은 제 책상 의자에 앉아 휴대폰에 찍힌 여주의 전화번호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고, 정한은 민현의 침대에 누워 그런 민현의 말에 답했다. 둘 사이에 옅은 정적이 자리하다가, 티비 채널 갖고 싸우는 민규와 석민의 소리를 듣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민현) ...신기하지. 여주 안부 하나에 이렇게 변하고 있는게.
..석민이랑 민규, 밝은 척 안하고 저렇게 천천히 돌아오는 거 보니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한결 나아.
정한) ...그건 그래. ...근데,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지.
민현) ...........
정한) 여주 상태는 안좋다고 하고, 연락해도 하루종일 누워만 있느라 휴대폰도 안본다는데.
민현) ...........
정한의 말에 민현은 제 엄지손가락을 통화 버튼 위에서 왔다갔다 거리더니 곧 터치했고, 휴대폰을 제 귓가에 가져다댔다. 연결음이 꽤 길게 늘어졌을까, 하나의 음성이 민현을 향했다.
'...여보세요.'
민현) ...여주야.
'응.'
당연히 창균이 받을 줄 알았던 전화에 민현이 당황스러움이 묻은 어투로 여주를 불렀고, 그 목소리에 정한이 몸을 일으켜 민현의 옆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정한이 제 귀를 휴대폰 쪽으로 기울이자 민현은 스피커 폰으로 바꿔 소리를 살짝 줄였다.
민현) ..어, 그, 밥은 먹었어?
'....아, 먹었어.'
정한) ..........
'............'
정한) 거짓말이지.
'...어떻게 알았지.'
정한) ............
'....창균이오빠한테 다 들었어.'
..민혁오빠한테 얘기 다 들었다고.
여주의 쓸쓸한 음성에 민현과 정한은 말이 없었다. 여주는 무언가 감추려고 했던걸 들킨 것 같은 무안함에, 정한과 민현은 무언가 나무라기도, 그렇다고 섣불리 긍정의 대답을 표하기도 참 애매해서. 하지만 두 이유가 채운 공백은 별로 길진 않았다.
정한) ...옆에 창균이 있어?
'...아니, 아까 집에 갔어.'
정한) ..그래서 밥 안먹었구나.
'..귀신이네.'
민현) 여주야, 밥 먹어야지.
'............'
정한) 밥 안먹을거야?
'...배가 아직 안고파서.'
민현) 그럼 창균이한테 전화해서 다시 너희집으로 가달라고 부탁할까?
정한) 창균이 힘들텐데, 왔다갔다 하는 거잖아.
'...먹을거야. 금방 먹으려 했어.'
먹겠다는 여주의 말에 민현과 정한은 씁쓸한 웃음을 띠우고, 후엔 몇마디 더 나누더니 힘없는 여주의 목소리에 민현과 정한은 금새 통화를 끊었다. 정한은 다시금 침대에 풀썩 누웠고 민현은 제 바탕화면에 있는 사진 동아리 단체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민현) ....보고싶다.
아, 진짜 보고싶다.
민현과 통화를 끊은 여주는 깨끗한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옅게 한숨을 내뱉으며 제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리더니 몸을 일으켰고, 곧 냉장고 옆에 놓인 시리얼을 손에 들었다.
우웅-..
“..........”
어, 왜?
제 손에서 울리는 진동에 여주가 시리얼을 들었다가 다시금 내려놓았고, 귀에 가져다댐과 동시에 찬장을 열어 적당한 크기에 유리그릇을 꺼냈다. 그리고 낮은 창균의 목소리가 여주를 향했다.
‘밥 먹었어?’
“...지금 먹으려고.”
탈탈탈-..
여주가 시리얼을 제 그릇에 툭툭 털었고 곧 냉장고 옆에 다시 두더니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제 어깨와 목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뒤 우유를 열던 행동이 창균의 말로 인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시리얼 먹게?’
“..뭐야. 들려?”
‘그거 안들리면 난청이야.’
“그렇게 큰가.”
‘밥 먹지.’
“찬도 없고, 쌀도 없어.”
‘그니까. 그게 말이되냐고.’
“안될 건 뭐람. 집엔 도착했어?”
‘응. 거의.’
아.
거의 도착했다는 창균의 말에 여주가 시리얼을 들고서 침대에 앉아 넓은 창틀 위에 그릇을 올렸다. 늦은 시각임을 보여주듯 어두운 분위기에 저 멀리 보이는 다리와 도시의 빛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여주가 시리얼을 휘휘 젓더니 한 입 집어넣었다.
“내일 출근해?”
‘...하지말까?’
“아니? 해. 그냥 물어본거야.”
‘...........’
여주가 애꿎은 시리얼만 휘적거리고,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다가 창균이 그 정적을 깼다.
‘여주야.’
“응.”
‘같이 갈게.’
“............”
‘내일 같이 갈게.’
그거 때문에 내일 출근하는지 물어본 거 아니야?
창균의 물음에 여주는 입 안에 있는 시리얼을 오물거리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금새 내렸다.
‘.............’
“............”
‘내일 데리러 올게.’
“....조심히 가.”
하늘만 바라보던 여주가 시선을 내리며 창균의 눈을 맞추고, 조심히 가라고 전했다. 그러자 밑에서 계속 여주를 바라봤던 창균이는 알고있었냐며 되물었고, 여주는 그저 말없이 웃으며 창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어떻게 몰라.”
“.............”
“불꺼지면 전화오고,”
“.............”
“전화 안받으면 엄청 빨리와서 조용히 문 두드렸잖아.”
오빠집에서 우리집까지 뛰어서 십오분인데. 오분도 안돼서.
“...그래서 일부러 거기서 먹는거야?”
“응. 자꾸 먹는거 맞냐고 묻길래.”
다 비웠어. 보여?
여주가 빈 유리그릇을 살짝 들어 흔들고, 창균이 웃자 똑같이 웃으며 얼른가라고 말했다.
“안그래도 돼.”
“..........”
“그렇게 계속 나 괜찮은지, 확인 안해도 된다고.”
“...하게 해주면 안돼?”
“..........”
“....그래야,”
“...그거밖에 없어?”
“..응? 응.”
회사에서 짐을 들고나온 여주가 뒷자석에 짐을 두자 창균이 물었고, 여주는 짧게 답하며 곧 앞좌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다시금 한 창균이 여주를 향해 말했다.
“다들 별 말 없으셔?”
“...많았지. 갑자기 무슨 일이냐길래, 그냥 조금만 쉬고싶다그랬어.”
“...어디 들렀다가 갈까? 뭐라도 먹을래?”
“...그냥 집에 가자.”
“밥은?”
“그것도, 그냥 다 집에서 하고싶어.”
“..그래.”
여주의 말에 창균은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여주는 멍하니 대낮의 풍경을 바라봤다. 낯설었던 미국땅이 익숙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는데, 난 언제 이렇게 이 곳에 익숙해졌을까.
여주가 창문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곤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런 여주를 흘끗 본 창균은 틀어져있던 노래를 살짝 줄였고 다시금 운전에 집중했다.
그러다 여주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창균의 휴대폰이 밝게 빛났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한국의 국제번호에 하숙집 아이들 중 하나일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고, 창균은 곧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휴대폰을 들고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 여보세요.
‘야. 이거 내 번호야.’
“...알았어. 저장할게. 무슨 일이야?”
그나마 친분이 좀 있던 순영이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창균이 짧게 답했고, 순영은 마저 말을 이었다.
‘여주는?’
“..아, 지금 차에서 좀 자고있어.”
‘아 그래? 아니 문자를 안받길래. 같이 있나해서 해봤지. 근데 넌 회사 안가냐?’
“.....오늘 여주 회사 같이 갈 일이 있어서. 태워다주려고 쉬었어.”
‘무슨 일 있었어? 회사를 왜 같이 가줘?’
“...그건 나중에 여주한테 물어봐. 내가 함부로 말하기가 좀 그래서.”
‘아, 그래 그럼. 그럼 여주한테 문자 봐달라고 말해줘.’
“알았어.”
짧은 통화를 끝마친 창균이 뒤돌아 다시금 문을 열자 자다 깬 흐릿한 눈동자가 창균을 향했다. 잠긴 목소리는 덤이었다.
“통화했어?”
“응. 그 순영이가 문자 좀 봐달라고.”
“아, 무음이라 못봤나보다.”
창균의 말에 여주가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들더니 화면을 확인했고, 창균은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그러다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는 여주를 잠깐 보더니 물었다.
“...답장 안보내?”
“..보내야지.”
“뭐라고 왔는데?”
“............”
뭐라고 왔냐는 창균의 물음에 여주는 짧지않은 순영의 문자를 계속 응시하다가 결국 답장을 하지 않은 채 홀드를 누른 뒤 창 밖을 바라봤다. 공백이 길다고 느껴질 때 즈음 여주의 목소리가 창균을 향했다.
“...그냥.”
“............”
“..보고싶다, 밥은 뭐 먹었어, 지금 쯤이면 일어났어, 뭐 이런거.”
“....근데 왜.”
“....나도 빨리 답장 하고싶은데,”
모르겠네. 그냥 자꾸 멈추게 돼. 생각이 많아져.
뭐?
“....그냥, 난 여주 네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집으로 올라와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여주를 향해 침대에 걸터앉은 창균이 무언가 말을 꺼냈고, 여주는 물을 마시다가 놀란 듯 되물었다. 그러자 창균이 태연히 답하고 곧 침대에 풀썩 눕더니 손장난을 쳐댔다.
물 줘?
응.
여주가 물 주냐는 물음을 던지곤 곧 컵을 들고 창균의 옆에 앉았고, 창균은 몸을 일으켜 컵을 받았다.
“...싫어. 어떻게 그래.”
“.............”
“.............”
“그럼 다른 방법 있어?”
“...방법이 뭐가 필요해.”
“그냥 이렇게 집에서 지내다가,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회사 가는거지.”
“...언제.”
“뭐?”
“그렇게 하면 네가 생각하기엔 얼마가 걸릴 것 같은데?”
“...........”
“아니지, 얼마나 있다가 다시 나가려고. 너 그냥 시늉만 하다가 다시 출근할 거잖아.”
쉬는 거 해본 적 없어서 그냥 이 집에서 계속 속상해하면서 그렇게 지내다가, 또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갈거잖아. 넌 다 낫지도 않았을텐데.
정확한 사실만을 말한 창균에 여주는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창균이 물을 한모금 마시더니 컵을 침대 옆 탁상에 올려두곤 제 옆에 앉은 여주를 안았다. 그리고서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 만 내 말 좀 들어줘. 그냥 그렇게 하자. 응?”
“...그럼 오빠는?”
“...........”
“...........”
여주의 물음에 창균은 말없이 여주를 계속 안고있을 뿐이었다. 창균이 여주의 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더니 낮게 여주를 불렀다.
“여주야.”
“...왜.”
“나 어떡하지?”
“............”
이젠 네가 내 옆에 있는게 익숙해.
없는 건 상상이 안 가.
앍-!!!!!!!!!!!
벌컥-!
명호) 미친놈 아니야 진짜!
벌컥-!
지수) 진짜 돌은거야 뭐야?
새벽 여섯시. 어디선가 울려퍼진 긴 비명에 잠 귀가 예민한 아이들이 방 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 원인의 방인 순영과 승관의 방. 그 방 문이 열리며 주인공이 나왔다.
승관)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승관이 휴대폰을 들고 부시시한 머리를 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지수는 그런 승관을 보며 인상을 팍 찌푸린 채 2층 거실 소파에 앉았다. 명호는 호들갑을 떠는 승관을 보며 계단을 올라오더니 곧 지수의 옆에 앉았고, 승관은 그 둘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흔들기 바빴다.
승관) 형형형형 야야야야야야 봤어?! 봤냐고!!
지수) 이 새벽에 뭘 봤다는 거야.
명호) 그니까. 너때문에 잠 다깼어.
지수) 지훈이랑 정한이 깨기전에 조용히 하는게 좋을 걸.
지훈) 이미 깼어. 저거 미친거 아니야?
정한) 황민현한테 말해야겠다. 저거 경고 주라고.
민현) 그래 승관아. 그런 식으로 하면 삼진 아웃. 내쫓는다 진심.
눈을 비비거나 하품을 찍찍 뱉으며 소란스러움에 하나 둘 2층으로 모이고, 승관은 졸지에 모두들 앞에 서서 쌩 쇼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승관은 그런 건 신경쓰이지도 않는 듯 입을 열어 또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승관) 아니! 형들 문자 안왔어?!
지훈) 뭔 문자.
승관) 여주! 여주가-!
쾅-!!!!!!!
석민) 김여주 한국 온대!!!!!!!!!!!
아 그거 내 대사라고-!!!!!!!!!
승관의 짜증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아이들의 잠이 달아났다.
**
모난 말은 몇년을 들어도 익숙해지긴 커녕, 더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 같아요. 진실은 알지도 못한 채 나를 나무라는 말을 무시할 순 있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면 사람이게요? ...그냥 알아주지 못하는게 그저 속상할 뿐인 하루였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억측을 당했다는게..
속상해서 보고싶어가지구 몇글자 써놓은 거 급히 마무리 지어서 가져왔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모진 말들 안듣고 예쁜 말만 들으셨음 좋겠어요!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
넉점반의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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