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3]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내가 잠든 사이 이승준이 전화를 걸었고. 김효진이 그 전화를 받고 정말로 이곳으로 왔고. 그렇게 내 옆에 앉아있다. 대충 이렇게 해석하면 되려나? 이 정도로 가까이서 보게 된 건 아마 처음이지 싶었다. 염색 한 번 해본 적 없을 것만 같았던 까만 머리카락에선 의외로 약간의 붉은 기가 돌았고, 살짝 올라간 눈 끝이 웃을 때만은 휘어졌다. 김효진은 웃을 때 이렇게 웃는구나. 그 모습이 자꾸만 마음을 간질였다. “깼어? 인사해, 효진이.” 생각보다 되게 빨리 왔네 하며 방실 웃던 이승준이 고개를 든 나를 발견하곤 말을 붙인다. “안녕.” 그 때 넋 놓고 바라보던, 아니 바라보는 것보다는 감상하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김효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인사를 건넨다. 듣기 좋은 나긋한 목소리로. 거기서 그냥 똑같이 인사하면 되는 거였는데. 넋 놓고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다는 것에 바보같이 당황해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안녕하세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작게 대답했다. 밀려오는 민망함에 왼편에 앉아있을 애꿎은 이창윤을 쿡쿡 찔러 작게 SOS를 칠 작정이었으나 아직도 자리에 없다. “어, 근데 잠깐만. 그 반응 뭐야? 나랑 창윤이 서운해?” “뭐가요?” “지금 효진이 있다고 그런 거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애꿎은 데에 발목이 잡힌다. 적당히 웃어주고 넘기려했더니만 계속해서 맞는데 맞는데를 시전하는 이승준에 슬슬 열이 오르고, "아니라니까!” “......” “...요.” 결국엔 터져버렸다. 김효진이 옆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막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이승준의 얼굴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걸 미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와 이젠 오빠한테 화도 내?” “그러게 자꾸 놀리니까 그런 거잖아요...” “상처받았어.” “...진짜요?” “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그냥 장난...!” “나도.” “네?” “나도 뻥인데.” “...아.” 삐진 척하다 히 웃는 이승준에게 홀랑 넘어갔다. 또 한번 열이 받치지만 이번에는 꾹 참아본다. 그런데, 그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김효진이 갑자기 웃는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지극히 평상적인 대화에 웃는다는 건, 아무래도 독특한 웃음코드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귀엽다 여주.” 웃으며 그렇게 말한다. 눈꼬리가 휘며 뭐가 재밌는 건지 미소가 끊이지 않는 얼굴. 아무래도 그 말은 본인한테 더 어울린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거기다 내 이름은 또 언제 들은 건지. 김효진의 목소리로 이름을 불렸다는 게 퍽 설레는 마음에 그렇게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이창윤이 돌아왔다. “언제 깼어?” “...어? 아, 방금. 넌... 뭐 사러 갔다온 거야?” “이거.” “아이스크림?” “술 좀 깨라고.”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내밀길래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네 갠 걸 보니 김효진이 올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짧은 대답과 함께 들고 있던 아이폰을 내려놓으며 앉던 창윤이의 시선이 그제야 김효진에게로 향한다. “맞다. 창윤아 넌 처음 보지? 아까 말했던 효...” “김효진.” “......” “맞죠?” 소개해주려던 이승준의 말을 끊어냈다. 그렇게 맨날 틀려대더니 이번엔 정확히 뱉는다. 약간 당황한 건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던 김효진은 다시 옅게 웃는다. “아, 알고있었네 내 이름.” “누가 자꾸 옆에서 얘기하길래요.” 그러면서 이창윤이 내 쪽을 본다. 그 누구는 당연히 나겠지 뭐. 저거 분명히 또 장난기가 발동한 거다. 아이스크림을 꺼내다 말고 발로 이창윤 다리를 퍽 쳤다. “아.” 그 퍽의 정도가 오늘따라 강했던 건지 잠시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엄살을 피운다. 그것조차도 얄미워서 내가 뜯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확 물려줬다. “둘이 되게 친한가봐.” 그런 우리를 보던 김효진이 또 작게 웃는다. 그 말을 뱉는 목소리까지도 나긋한 톤이다. “그럴 만도 하지. 얘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아, 그래?” “네, 5년 친구예요.” ...어쩌다보니. 이창윤을 흘기며 그 뒷말은 생략했다. “근데 나 예전부터 궁금한 거 있었어.” “뭔데요?” “아무리 친해도 대학까지 같이 그것도 같은 과로 오는 건 흔한 게 아니잖아. 어때? 서로 거의 모르는 게 없겠다.” 아이스크림을 냠냠 맛있게 먹던 이승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기다린다. 진짜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와 함께 세트로 대학와서 꽤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내가 대답하려고 입을 뗐는데 창윤이가 좀 더 빨랐다. “그러게. 그런 줄 알았는데...” “......” “여주는 아직 나를 잘 모르나봐.”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의외의 대답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내가 언제! 물으니 가끔 그래, 그러면서 웃는다. 내가 다 먹고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기만 쏙 빼간다.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앞에 놓인 잔만 비워진다. 전에는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던 김효진과 말도 텄고,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지만 조금 친해진 것도 같고, 심지어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준 이승준 덕에 다 같이 번호 교환까지 했다. 그럼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찬바람에 취기가 달아나서 그런 걸까. 반면에 여러 대화가 오가는 동안 계속해서 소주만 따라 마시던 이창윤은 취했다. 원래 걔 주사는 헤실헤실 웃는 건데 오늘은 왜인지 그러진 않았지만 살짝 비틀거리는 걸 보니 그랬다. 중간에 소주로 갈아탈 때부터 알아봤다. 아깐 내가 좀 취해서 제대로 기억나지않지만 아마도 김효진이 오고 나서부터였던 것같다. 맥주 마시다 소주 마시면 다음 날 머리 아플 텐데. 와중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잘도 든다. “가자.” 그래서 더욱 취한 이창윤이 낯설었다. 거기다 원래 가끔 취했을 때 보게되는 걔의 주사라 하면 실실대며 웃음이 많아지는 건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러지도 않았다. 살짝 걱정되는 사이 고개를 반쯤 돌려 나를 보던 창윤이는 가자는 신호와 함께 다시 앞으로 향한다. 아니 정확히는 앞으로 향하려 했다. 그 때였다. “저기.” “......” “내가 대신 여주 데려다 줄게.” “......” “그래도 되지?” 순간 창윤이의 걸음이 누군가에 의해 멈춰졌다. 그 목소리에 시공간도 함께 멈춰진 것 같았다. 이창윤을 붙잡은 건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다름 아닌 김효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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