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4] 익숙함에 특별함이 더해지는 것.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그런 식의 변화가 하나씩 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질리도록 걸었던 이 길이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지는 지금처럼. 기숙사는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경사 또한 만만치 않아 한 번 올라가려면 자그마치 15분이 넘게 걸리곤 했다. 그래서 늘 내가 불평을 일삼던 길이였는데, 분명 그랬는데. 그 길을 김효진과 함께 걷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분이 색다르다. 방금 전 그가 벗어준 가디건의 따뜻한 감촉에 조금씩 미소까지 피어오르고, 설렘 그리고 약간의 긴장. 그 두 가지가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기분 좋게 어지럽힌다. 그래서 혹시나 들뜬 마음에 말실수라도 할까 해 남아있는 취기를 전부 털어내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미디어 마케팅의 이해.” “...네?” “왼쪽에서 두 번째 맨 뒷자리.” “......” “맞지?” 간간히 불어올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그런 바람과 같은 음성. 어둠 속에서 놀란 두 눈과 웃음기를 띈 두 눈이 그렇게 마주친다. “어떻게... 알았어요?” “항상 그 자리에 앉잖아, 너.”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짚어낸 건 정확히 내가 교양 수업마다 앉던 자리였다. 되돌아온 대답이 묘하게 동문서답 같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한 건 그 말에 설레고 마는 내 자신이다. 그 기분이 낯설어 아무 변명이나 막 내뱉게 되고, “...아, 그게. 일부러 맨날 뒤에 앉는 건 아니고요. 전 앞에 앉자고 했는데 이창윤이 자꾸 뒷자리가 좋다고 그래서...” 그게 안하느니만 못한 수습이었다는 걸 늦게야 깨닫는다.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공부 안하는 애로 비춰질까 괜히 혼자 찔려서는 주절주절. 거기다가 괜히 이창윤 얘기는 또 왜 해 가지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마 김효진은 이창윤을 도무지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좀 전의 상황만 해도 그랬다. 대신 데려다줘도 되지? 라는 김효진의 물음이 무색해지게 이창윤은, '어차피 나도 학회실에 두고 온 게 있어서 올라가봐야 되거든.' 김효진이 그렇게 덧붙이기까지 그를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그리고는 그 말에 내가 김칫국을 제대로 마셨음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이승준!' 하며 빠르게 우리 둘을 스쳐지나갔더랬다. 물론 취한 이승준이 찻길로 나가려는 걸 그 때 이창윤이 막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사람 말을 무시하고 그냥 가 버려? 그러니 거기서 이창윤 얘기를 꺼낸 건 상당히 바보 같은 짓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김효진은 또 한번 웃어준다. “그 수업이 좀 재미없긴 해. 그치?” 그래서 오빠 얼굴만 열심히 봤어요. 그 말은 끄덕임으로 대신하고 말을 돌릴 구실을 찾았다. “...맞다. 저도 오빠 본 적 있어요, 그 수업 때.” “그래?” “네. 그리고 아마 제가 오빠를 더 먼저 알았을걸요.” 본 적이 있다기보단 항상 보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건 꽤 용기를 낸 발언이었다. 긴장섞인 숨을 한번 삼켜낸 후 올려다 봤는데 조금도 놀란 기색없이 미소만 짓는다. “아닐걸?” “네?” “내가 널 먼저 알았을 텐데.” “어, 아닌데... 오빠는 절 언제부터 알았는데요?” “맞춰봐.” “네?” “우리 같이 얘기도 했는데.” “얘기를 했다고요?” “진짜 기억 안나?” “전공이나 교양 수업...? 그것도 아니면 진짜 모르겠는데...” 처음엔 그냥 김효진이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러기엔 너무 확신에 찬 말투다. 예전에 강의가 또 겹친 적이 있었나? 그랬다면 내가 이상형을 못 알아챘을 리가 없고. 아니면 같은 과니까 과방에서? 정말 뭘까. “그럼 힌트라도 주면 안돼요?” “힌트?” “네. 힌트 주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그래? 하며 또 한번 웃더니 골똘히 무언가 생각한다. 그러더니 입을 연다. “그래. 그럼 힌트 줄게.” “......” "...비 오는 날, 도서관, 우산.” “그게 힌트예요?” 예쁘게 웃으며 끄덕이는 김효진의 머리칼이 순간 바람에 살짝 흩날린다. 잘 생각해봐, 그러면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어째 힌트를 듣긴 들었는데 더 모르겠다. 알쏭달쏭한 가운데 세 단어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여기 맞지?” “아,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아.” “아니야. 나도 가는 길이었는데 뭐. 잘 들어가.” “...오빠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보자.” 잠시만, 내일? 내일은 미디어 수업 없는 날인데.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말인가? 멍해져있는 사이 김효진은 궁금증만 남겨두고선 웃으며 돌아선다. 이번엔 바람에 내 머리카락이 한번 흩날린다. 흩날리다못해 엉켜버린다. 그건 당장의 풀리지 않는 답보다 더 복잡해질 앞으로의 일들을 시사했다. 이미 얽혀버리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라던가 뭐 그런 것들을. 어쩐지 뭔가 허전한 기분이더라니. 꼼꼼하지 못한 성격은 이런 데서 드러났다. “아, 카드... 이창윤한테 있는데.” 그에 더해 쓸데없이 들떠있던 탓이었다.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내 불찰을 질책하듯 굳게 닫혀있는 기숙사 1층 로비 문. 게다가 출입카드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터리가 1퍼센트 남았던 핸드폰은 그대로 명을 다했다. 하는 수 없이 기숙사 앞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누구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둘러보지만 우습게도 오늘은 담배를 피러 나오는 사람조차 한명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시간 전. 강의실에서 가방을 정리하다 안 쓰는 투명파우치에 카드를 넣어놓고선 그걸 잠깐 이창윤에게 맡기고 깜빡한 게 발단이었다. 통금이 지난 후에 들어오는 게 아니면 1층 기숙사 문은 늘 열려있었기에 그동안은 굳이 카드를 꺼낼 일이 없었고, 때문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쉬며 걸쳐진 가디건을 여몄다. 김효진의 옷이 없었다면 벌써 감기에 걸렸을 지도 모르겠다.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에 눈이 조금씩 감겨온다.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나 나 오늘 여기서 자다가 입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 체감 상 20분이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저 멀리서 점점 가까워지는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창윤?” “너, 왜... 전화를, 안 받냐?” 그래 그건 이창윤이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을 잇는다. “...어? 아, 나 폰 꺼져있었어. 근데...” “오래 기다렸어?” “...아니.” “다행이다. 자.” 네가 왜 여깄어. 승준오빠는 어쩌고. 취한 건 괜찮아? 물을 틈도 주지 않고 안도의 웃음과 함께 파우치를 내민다. 그리곤 그 안에서 카드를 꺼내 손에 친히 쥐어주기까지 한다. 앞으론 잘 좀 챙기라는 말을 덧붙이며. “근데,” “.....”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이거 갖다주려고? 땀이 맺힌 발그레한 얼굴을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 “너 이거 없으면 못 들어가잖아.” “야, 그래도...” “왜, 승준이 형 아무 데나 버려두고 왔을까봐? 야 걱정 마, 침대에 잘 눕혀놓고 왔어.” “......” “자꾸 찻길로 나가려고 하길래 고생 좀 했다. 덕분에 술 다 깼잖아.”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예쁘게 웃는 이창윤을 보며 그 말이 도무지 목구멍에서 나오질 않았다. “...근데 그건.” 그 때 창윤이의 시선이 내 어깨에 걸쳐진 가디건에 닿는다. 그러더니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다. “어? 이거?” “...아 맞다, 이승준 내 침대에 토하면 안 되는데.” “응?” “나 간다.” 그러다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갑자기 뜬금없는 혼잣말을 하더니 휙 뒤를 돈다. “어...? 야, 이창윤!” “......” “그냥 가?” “......” “...잘 가.” 걸음도 빨라서는. 작은 중얼거림이 제대로 들렸을지 모르겠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손만 대충 흔들어보이는 걸 보니 알아들은 것도 같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봤다.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기숙사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눕는 그 순간까지도 알 수 없는 이 마음들을 정의할 수 없었다. 맨날 보는 모습에다가 걔가 그러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그 이상한 감정은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 써 봐도 가라앉질 않아서, 내일 오전수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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