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괴롭혔던 변백현7W. 백빠 “나 너 좋아해, 아직도.”“…….”“그게 니가 날 참아야 할 이유야.” 누군가는 첫사랑의 잔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동정심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복수심의 착각이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느낀다는 게 중요할 뿐. 그의 품에 안겨있던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진짜 미쳤어, 변백현. 그는 그 중얼거림에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미쳤지.”“…….”“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널 좋아할리 없잖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변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도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품 사이에 흐르는 심장박동이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 지 두려웠고 낯설었지만 분명히 그녀 또한 백현에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두 손은 백현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만다. ‘이질감’. 인간의 습성이자 본능이었다. 원래의 습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 6년간 그녀가 쌓아왔던 폐쇄적인 관계론이 비틀비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오랜시간 동안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 것도 모자라 누군가의 품에 안겨, 그것도 학창시절 적잖이 괴롭혔던 남자에게 고백을 받고 있다?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할지도. 그녀는 멀찍이 선을 그어놓고 그 선 안으로, 아니 주위에라도 다가오는 사람에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밀거나 저 속으로 멀리 도망가버리는 그런 관계론에 익숙했다. 지난 6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지금 변백현이라는 남자가 그 선을 훌쩍 넘어 안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를 감쌌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무슨 말을 말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네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백현은 제 품을 밀어내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의 옷을 입고 그의 향을 풍기는 그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저 얼굴. 그대로 입을 맞춰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는 그녀를 불렀다. “한에리.”“…….”“에리야.” 누군가 내 본명을 저렇게 따스히 불러준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정도로의 먼 기억. 그녀는 울음을 꾹 참고 있는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응.”“나 뭐 바라는거 아니야.”“…….”“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고. 그러니까,”“…….”“아무 말 안해도 돼.” 미안했다. 너는 내 마음을 이렇게나 잘 아는데 나는 네 마음을 알아 줄 수가 없다는 게. 너가 나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게. 왜 너는 나같은 애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을까. 나는 친절하거나 상냥한 애도 아니고 배려심이 많거나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는 애도 아닌데 왜 대체 너는. 나는 이제 어떻게 사람을 받아들이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모르는 척 지나치는 것에만, 내치는 것에만 익숙한데.백현은 말 없이 저를 바라보는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더이상 다가가면 어디론가 도망가버릴 것 같아. 아직도 비가 내리는 창 밖을 한번, 그리고 시계를 한번 쳐다본 백현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나 정말 잘 곳은 있어.”“끝까지 고집 부리지, 진짜.”“…….”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백현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거실 끝 구석에 있는 방 앞으로 향했다. 당연히 백현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알았다고, 잘가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또 다시 비에 잔뜩 젖은 채로 어느 여관에서 잠을 청했겠지. 변백현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또 고집 부려, 그땐 진짜 나가라고 할거니까.” 그녀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비록 변백현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만의 세계를 부수고 내가 그어놓은 선을 훌쩍 넘어 그 안으로 들어왔지만 혹시 나는 누군가 이래주길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나를 부숴주기를, 나를 달래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온 것이 아닐까. 금방 내 그녀는 아니라며 부정해버렸만 아주 조금의 용기는 꺼내어보기로 마음 먹는다. “저……백현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다 결국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말을 건낸다. “고마워, 진짜로.” 그 말에 백현은 그녀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자. 낯선 곳에서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예민한 나였음에도 눈을 뜨자 왠지 모를 개운함이 느껴졌다. 내 집에서 잘 땐 암막커튼으로 꼭꼭 숨겨놓을만큼 싫었던, 작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눈을 뜸과 동시에 실수 뒤범벅이었던 어제가 생각났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금방 내에 떠오르는 네가 내게 고백했던 장면들.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버렸다. 그러자 내 가슴팍에 올려져있던 무언가가 팔랑 이불 위로 떨어졌다. 웬 종이였다. [출근한다 금방 오니까 기다려] 눈에 익은 글씨체. 학창시절 많이도 봤던 변백현의 글씨는 지금봐도 참 삐뚤빼뚤 했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쓴 글씨처럼.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종이를 보자마자 마음이 놓였다. 어제 도와준 걸로도 모잘라 고백까지 받는 바람에 일어나자마자 나가야하나, 아니면 너와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이 쪽지를 보니 기다려야한다는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또 곧 4200 이라는 숫자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돈은 만들어야하는데 얘기는 못꺼내겠고 그렇다고 엄마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엄마, 엄마는 어디에 있는걸까. 담배가 피고 싶었다. 여관에서 마지막 남은 한개비를 펴고 집으로 향했던 내가 떠올랐다. 일이 이렇게 안좋게 풀릴거면 그때 한개비는 남겨놓는건데. 일단 씻자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집은 또 처음이었다. 난 월세 얻기 전엔 고시원에서 공용화장실 썼었는데... 변백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거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인건 분명했다. 포장을 뜯고 사용한 새 칫솔을 쓰레기통에 버려야하나, 아니면 여기에 그냥 두어야하나 고민을 하다 결국은 통 안에 꽂아두고는 나왔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는데 갑자기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네?” 영문 모를 얼굴로 네? 하고 되묻자 문이 살짝 열렸다. 상냥한 인상의 앞치마를 두른 50대의 아주머니였다. 이런 집엔 당연히 가사도우미가 있겠지, 참. 변백현이 직접 밥을 해먹을리는 없을거고.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식사 하시러 나오세요.”“...아, 저...괜찮은데. ”“하지만 도련님이 꼭 아가씨께 식사를 차려주라고 하셔서요.” 제발 나와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말하는 듯한 아주머니에게 미안해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따라 부엌으로 나갔다. 도련님과 아가씨라니, 마치 궁궐 안에 들어온 천민이 승은을 입어 신분이 상승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그런 도련님이 내게 아침을 차려주라고 말했다고하니 더욱이. 출근하기 전에 부탁한건가? 그럼 대체 나를 누구라고 설명했을지….식탁에는 내가 한달은 족히 먹을 반찬들이 차려져있었다. 언뜻 본 시계의 시침은 벌써 2를 지나고 있었다. 열시간이나 잤구나, 내가. 어쩐지 개운하다싶더라니... 이렇게 오래도록 잠에 빠져있었던 건 근 몇년 간 처음이었다. 아주머니는 식탁 앞에 의자를 빼주며 내게 손짓했다. “앉아서 한수저라도 들어요.”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쌀밥을 한숟갈 떠 입에 넣는데 얼마만의 집밥인지 괜히 코 끝이 찡해졌다. 우물우물 밥을 먹는데 아주머니가 혼자 바쁘게 돌아다니시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아침에 아가씨 옷 빨다가 주머니에서 나온거에요.”“어, 그거 안 빨으셔도 되는데.”“어떻게 그래요, 옷이 빗물에 젖었었는데... 이거 혹시 몰라서 충전해뒀어요.”“……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곤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분명 꺼져있어야할 휴대폰이 켜져있다. 충전하다 켜진건가? 의아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한번 보자 내 눈치를 살피다 입을 뗐다. “…저, 도련님이 잠깐 보시긴 했었어요.”“변백현이요?”“네. 잠깐요... 죄송해요. 제가 말릴 걸 그랬나봐요.”“…괜찮아요.” 너무 미안해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싫은 티도 못내고 그저 괜찮아요, 라고 말해버렸다. 문자 목록에 들어가자 내가 확인한 적 없지만 이미 확인되어진 수백개의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의 대부분의 발신인은 사채업자들이었다. 처음 그들에게 연락올 때부터 휴대폰을 꺼놨으니 내용은 다 비슷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자정에 온 문자는 [우리 오늘 니 애미 찾았어 근데 돈 없으시대 낼까지 사천 만들어와] 였다. 그들이 엄마를 찾은 것도 문제였고 그 엄마가 돈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고 변백현이 이 문자를 봤다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그에게 죽어도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낱낱이. 이번에도 담배 한개비가 절실히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고약한 담배 연기가. 휴대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두 손으로 맨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보려는데 휴대폰이 액정을 반짝, 하며 진동을 울려댔다. 순간 또 빚쟁이들이 아닐까 무서웠다. 힐끗 액정을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문자가 띄워져있었다. [에리야 엄마야 미안해 딸.. 전화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 엄마였다. 멍하니 그 문자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다. 엄마가 내게 문자를 해왔다. 분명 그 사람들에게 잡혀 전화나 문자 따위는 못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문자 내용이 내 마음을 쿡쿡 찔러왔다. 찰나 눈물이 울컥 터져나오려는걸 꽉 참으며 뭐라고 답을 해야할 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자를 못본 척하고 무시하거나 [아니] 라고 보내버리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원망했었으니까. 바뀐 번호 하나만 남겨주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문자라도 한번 해주지, 빚은 어떻게 갚을건지 설명이라도 해주지 하고 바랐지만 엄마는 언제나 답이 없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문구 밖에는. 그러나 나는 원망 대신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바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에리야.]“……엄마.”[에리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정말... 정말 엄마로서 자격이 없구나. 진짜로 미안해.]“…….”[엄마도 갚아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잘 지냈니? 어디 아픈데는 없구?]“…번호는 왜 바꿨어요?”[걔네가 휴대폰도 끊어놔서... 너한테 연락하면 괜히 피해갈 것 같아서 못했어. 진작 했었어야했는데...]“…….”[엄마가 정말 미안해, 진짜로. 그리고 고마워.]“…….” 결국은 눈물이 몇 방울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엄마를 원망하다가도 다정한 목소리 몇 마디에 영락없는 딸이 되어버린다. 옆에 서있던 아주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려내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았고 나는 재빨리 “잘먹었습니다”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욕조 옆에 걸터앉아 눈물을 안으로 삼켜냈다. [왜 말이 없어, 엄마가 미워서 그래?]“……아니에요.”[엄마가 그 돈은 꼭 갚을테니까 걱정 말고. 정말 고맙다, 에리야.]“…네?”[니가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힘들게 구했단거 알아. 엄마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갚을게, 진짜 고마워.]“…….” 엄마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말을 계속 이어갔다. 걔네들이 아까까지 날 잡고 있다가 이제 가보라고, 딸이 다 갚았다고 말하는데 그때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 어린 네가 그 큰 돈을 어디서 구했을지 싶기도 하고. 너한테까지는 정말 손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 그 후로 엄마는 많은 말을 했지만 단 한마디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망치로 내 뒷통수를 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엄마의 말을 끊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엄마 빚을 갚아줬다는거에요?”“응? 응, 니가 나 대신 사천만원 갚아줬다며.”“…….”“아니야? 걔네들이 그러던데.. 니가 나 대신 다 갚았다구.”“…엄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을 화장실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니가 내 문자를 다 봤다고 했을때부터 낌새를 눈치챘어야하는건데. 변백현이 아니라면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사천만원이라는 돈을 제 맘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내 주위에 없었다, 너 말고는. 변백현은 확실히 미친게 분명했다. 기어코 니가 일을 저질러버리고 만거야. 결국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 한칸이 모래처럼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화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나는 세탁실을 찾았다. 방문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며 세탁실을 찾았고 아주머니는 수상한 내 행동에 내 뒤를 따라오며 “어디 찾으세요?” 라고 물었지만 난 대답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마침 그 방은 세탁실이었다. 내 옷은 방금 세탁기에서 나온 듯 축축한 채로 빨랫대에 널어져있었다. 내가 무작정 걸어가 그 옷을 집어들고 입으려하니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며 내 팔을 잡았다. “아이구, 아가씨! 옷 아직 안 말랐어요!”“괜찮아요. 상관없어요.”“아가씨, 젖은 옷 입으면 감기걸려요, 네?!”“그럼 제가 입을만한 옷 좀 아무거나 주세요.”“어디 가시려구요, 대체! 오늘 도련님이 아가씨 집에만 있으라고 하셨어요!” 이건 아니었다. 가뜩이나 도와달라고 전화한 것도 후회되는데 내가 돈까지 빌려쓴다고?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래, 내가 조금 더 양심을 상실했었더라면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었겠지. 그러나 내가 변백현에게 돈을 빌릴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만약 그 돈을 변백현에게 빌리기라도 한다면 난 정말로 그의 밑에서 기는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변백현을 찾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며 아직 축축한 옷을 걸치려고 했고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아이구, 아가씨이! 도련님 금방 와요, 응? 조금만 기다리세요!”“안돼요, 기다릴 시간 없어요. ”“아가씨, 제발요..! 이 아줌마 봐서 한번만, 응? 조금있음 도련님 온다니까요!”“변백현 보러가는거 아니에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 나는 변백현이 아니라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엄마는 빚이 없어져서야 비로소 내게 전화를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억울하고 서글프고 화난 지점이었다. 엄마는 빚이 없어져서야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결국 옷을 입으려고 난리를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벗다가만 티셔츠를 다시 입혀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 한때는 부모사랑 듬뿍 받고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고 매일을 웃는 얼굴로 지냈었는데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렇게 된거지...?아주머니는 한참을 울고 있는 날 일으켜 세수라도 하라며 화장실에 데려다주었다. 찬물로 세수를 열번을 넘게 하고나서야 울음이 서서히 그쳐갔다. 세면대 위 거울을 보는데 눈꼬리가 발갛게 부어오르고 눈이 충혈돼있었다. 서서히 성에가 껴 흐릿해진 거울에 나는 손가락으로 이렇게 썼다. 좆같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으로 문질러 없앴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날 진정시켰다. 화장실 안에서 삼십분은 넘게 있었나, 화장실에서 나오자 어느새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든 아주머니가 내 앞으로는 급하게 걸어왔다. “아가씨, 괜찮아요? 응?”“…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소란을 일으켜서.”“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이제 괜찮으신거 맞죠, 응?”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감정에 너무 북받쳐서 아주머니한테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외투 단추를 잠구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제가 이제 본가로 들어가봐야해서요. 아가씨 혼자 있으셔서 어떡하죠?”“..아,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닌데요, 뭐. 아깐 죄송했습니다.”“아유, 어린 아가씨가 우니까 내 맘이 얼마나 아프던지.. 도련님 좀있음 오니까 티비라도 보고있어요. 어디 가지 말고. 응?”“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으로 향했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그제서야 이 집에 나 혼자만이 남게되었다. 나는 멍하니 거실에 서있다가 소파로 가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한심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빚은 해결됐다는 안도감을 느낀 내가 너무 싫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백현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겁이 나 그저 소파에 가만히 앉아 변백현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 그 발걸음 소리를. 이윽고 등 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네. 없어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제서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피곤한 듯한 얼굴.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항상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을 때의 너가 생각났다. 변백현은 한쪽 손으로 넥타이를 푸르며 내게 물어왔다. 언제 일어났어. 밥은 먹었고? …저 태연함. 나는 불쑥 화가 나려는 걸 애써 참으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제정신 아니지, 변백현?” 너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나직히 웃었다.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가 얄미웠다. “내가 언제 너한테 돈빌려달라고 했어? 넌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도와달라며, 니가.”“그게 빚 갚아달란 말은 아니었다고!”“그럼 그게 무슨 말이었는데?” ……. 그 말에 내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슨 의미로 도와달라고 너에게 전화를 했더라. 그때의 기억이라고는 내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비를 피하다 주머니에 든 네 명함을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건 기억 뿐이었다. 재워달래야지, 돈 좀 빌려달라고해야지, 엄마 찾아달라고 해야지, 같은 어떠한 목적이 있어 전화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너가 절실했었다. 왜 그렇게 네가 절실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놓고 너에게 전화한 것을 후회한 이유는 미안해서, 였다. 내 자격지심과 죄책감 때문에 다가오는 변백현을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나는 어째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나. 나는 힘없이 소파 위로 다시 앉으며 작게 말했다. “...나는 니가 이러면 너무 미안해서 감당할 수가 없어, 백현아.” 항상 나는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서 너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내가 추했다. 너는 앉아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에 비치는 웃음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따스했고 달콤했다. 그리고 그 속엔 고등학생 때 날 바라보던 묘한 눈빛마저 담겨있었다. “불편하지.”“…….”“부담되고 죄책감 들어서 미치겠지, 지금.” 그 큰 돈을 언제 만들어 갚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도 네게 반드시 갚아줘야한다는 부담감, 엄마가 또 다시 연락을 끊고 그 돈을 내게 다 떠넘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난 변백현에게 가해자였지만 변백현은 내게 은인이 된 자책감, 자괴감, 모든 감정이 날 힘들게 만들었다. 변백현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는 내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그거 바란거야.”“…….”“그래야 너가 도망 못가지, 내 옆에서.” 변백현이 내 눈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옷갈아입고 올게,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말이 온전히 이해된 순간, 변백현은 날 돕기위해 빚을 갚아준 것이 아닌 내 발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백현, 너는 나를 너무 잘 알고있었다. 나를 다루는 법을. ▼Busta Rymes - Decision (Feat. Jamie Foxx, Mary J. Blige, John Legend & Common)암호닉 ♡ (Ctrl+f 누르고 찾으면 더 쉽다능..)우리니니 삼김 찰거머리 상콤한레몬 레몬사탕 큥들큥들 순댕이 빛나는밤 야옹냐옹 쀼쀼 블루칵테일 한겨울밤 꽃이찬 큐이 버블티 증원 에이스에스 핫초코 곰국지색 복숭아 큐울 별다방커피 큥카프리오 올봉 말랑 센센 할렐루야 길피수 달로와요 라이또 호이호잇 알찬열매 끼룩끼룩 급똥 오렌지 복동 단이 동도롱딩딩 와대박 고사미 빵 산낙지 안나 구금 몽이 봄날같은백현 4랑둥이경수 고슈가 마요마 우주 우랴기 두둠두둠 슈로롱 이퓨 비바 클쓰마스 유라온 뿡뿡이용 융 큥큥큥 맙소사 백큥큥큥 차녈아난너뿐이야 에엑소오 지호 크러쉬온유 감자 여리 큥이랑슨이랑 김민석장326 쎄후냐 아도라 호빗 꾜미 뭉이 박변김장도오 돌하르방 박찬열치아세포 예찬 로카멜 움치킨 목욕가운 비쇼 0304ㅇㅈ 건포도 뿌뿌 버덕 널만난봄 백현아 지호 패러슛 거봉 버덕 에리나 콩콩 치킨첸 미세모 퓨어 아몬드 0616 갈치 맞춤법 초코칩 종이니니 9094워더 그뉵쿠키 미니롱 찰리 영원 변가락 미적 꼬꼬댁 열부 대아 열매점 쓰니워더 자킬 쁌쁌 하트 동원참치 꿀꿀이 첸쇼 물처럼 몽구몽룡 존느멋 시동 또렝 체니첸 자라 키득키득 꿀꿀이 민트초코 민슈프림 바자다가 아퀼라 1다다 미니언 바닐라라떼 치킨 죄송합니다수호입니다 킹콩홍콩 비글 녹차 휘휘 뽀로로 붕붕이☆ 하트경수 자몽이제일조아 나이키 브디엘로 동동 코코니 투투 045692 체니베니 흥흥 오호랏 오렌지 구회장 동룡 끄아앙 무지개소녀 스무살의봄 귤형여친 종대쓰 봄날 양화대교에 눈사람 임세명 뺑덕 애를도라로 79 커피사탕 다니 누누 유채 훈이랑쑤 109 님 너무 감사합니다 ♥ 날씨가 너무 추워졌죠...ㅠ0ㅠ..? 울 액희들 옷 따뜻하게 입구다니세여!!! 오늘도 읽어주셔서 너~~~~무!!!!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다들 쪽쪽ㅎ3ㅎ + 암호닉은 최근편에 신청해주세용 []쳐주시면 감사하게씁니다♡++추천과 댓글은 작가의 힘...! 아잣아잣☆★
내가 괴롭혔던 변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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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백빠
“나 너 좋아해, 아직도.”
“…….”
“그게 니가 날 참아야 할 이유야.”
누군가는 첫사랑의 잔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동정심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복수심의 착각이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느낀다는 게 중요할 뿐.
그의 품에 안겨있던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진짜 미쳤어, 변백현. 그는 그 중얼거림에 작게 웃고는 대답했다.
“당연히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널 좋아할리 없잖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변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도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품 사이에 흐르는 심장박동이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 지 두려웠고 낯설었지만 분명히 그녀 또한 백현에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두 손은 백현의 가슴팍을 밀어내고 만다.
‘이질감’. 인간의 습성이자 본능이었다. 원래의 습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 6년간 그녀가 쌓아왔던 폐쇄적인 관계론이 비틀비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 오랜시간 동안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 것도 모자라 누군가의 품에 안겨, 그것도 학창시절 적잖이 괴롭혔던 남자에게 고백을 받고 있다?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할지도. 그녀는 멀찍이 선을 그어놓고 그 선 안으로, 아니 주위에라도 다가오는 사람에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밀거나 저 속으로 멀리 도망가버리는 그런 관계론에 익숙했다. 지난 6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지금 변백현이라는 남자가 그 선을 훌쩍 넘어 안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를 감쌌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무슨 말을 말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네게 뭐라고 말을 해야할까.
백현은 제 품을 밀어내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의 옷을 입고 그의 향을 풍기는 그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저 얼굴. 그대로 입을 맞춰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는 그녀를 불렀다.
“한에리.”
“에리야.”
누군가 내 본명을 저렇게 따스히 불러준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정도로의 먼 기억. 그녀는 울음을 꾹 참고 있는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응.”
“나 뭐 바라는거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고. 그러니까,”
“아무 말 안해도 돼.”
미안했다. 너는 내 마음을 이렇게나 잘 아는데 나는 네 마음을 알아 줄 수가 없다는 게. 너가 나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게. 왜 너는 나같은 애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을까. 나는 친절하거나 상냥한 애도 아니고 배려심이 많거나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는 애도 아닌데 왜 대체 너는. 나는 이제 어떻게 사람을 받아들이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모르는 척 지나치는 것에만, 내치는 것에만 익숙한데.
백현은 말 없이 저를 바라보는 그녀를 다시 품에 안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더이상 다가가면 어디론가 도망가버릴 것 같아. 아직도 비가 내리는 창 밖을 한번, 그리고 시계를 한번 쳐다본 백현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고 가.”
“……나 정말 잘 곳은 있어.”
“끝까지 고집 부리지, 진짜.”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백현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거실 끝 구석에 있는 방 앞으로 향했다. 당연히 백현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알았다고, 잘가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또 다시 비에 잔뜩 젖은 채로 어느 여관에서 잠을 청했겠지. 변백현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또 고집 부려, 그땐 진짜 나가라고 할거니까.”
그녀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비록 변백현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만의 세계를 부수고 내가 그어놓은 선을 훌쩍 넘어 그 안으로 들어왔지만 혹시 나는 누군가 이래주길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 나를 부숴주기를, 나를 달래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온 것이 아닐까.
금방 내 그녀는 아니라며 부정해버렸만 아주 조금의 용기는 꺼내어보기로 마음 먹는다.
“저……백현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다 결국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말을 건낸다.
“고마워, 진짜로.”
그 말에 백현은 그녀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자.
낯선 곳에서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예민한 나였음에도 눈을 뜨자 왠지 모를 개운함이 느껴졌다. 내 집에서 잘 땐 암막커튼으로 꼭꼭 숨겨놓을만큼 싫었던, 작은 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마저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눈을 뜸과 동시에 실수 뒤범벅이었던 어제가 생각났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금방 내에 떠오르는 네가 내게 고백했던 장면들. 자리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버렸다.
그러자 내 가슴팍에 올려져있던 무언가가 팔랑 이불 위로 떨어졌다. 웬 종이였다.
[출근한다 금방 오니까 기다려]
눈에 익은 글씨체. 학창시절 많이도 봤던 변백현의 글씨는 지금봐도 참 삐뚤빼뚤 했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쓴 글씨처럼.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종이를 보자마자 마음이 놓였다. 어제 도와준 걸로도 모잘라 고백까지 받는 바람에 일어나자마자 나가야하나, 아니면 너와 얼굴을 다시 마주해야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이 쪽지를 보니 기다려야한다는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또 곧 4200 이라는 숫자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돈은 만들어야하는데 얘기는 못꺼내겠고 그렇다고 엄마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엄마, 엄마는 어디에 있는걸까.
담배가 피고 싶었다. 여관에서 마지막 남은 한개비를 펴고 집으로 향했던 내가 떠올랐다. 일이 이렇게 안좋게 풀릴거면 그때 한개비는 남겨놓는건데. 일단 씻자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집은 또 처음이었다. 난 월세 얻기 전엔 고시원에서 공용화장실 썼었는데... 변백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거지만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인건 분명했다.
포장을 뜯고 사용한 새 칫솔을 쓰레기통에 버려야하나, 아니면 여기에 그냥 두어야하나 고민을 하다 결국은 통 안에 꽂아두고는 나왔다. 얼굴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는데 갑자기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네?”
영문 모를 얼굴로 네? 하고 되묻자 문이 살짝 열렸다. 상냥한 인상의 앞치마를 두른 50대의 아주머니였다. 이런 집엔 당연히 가사도우미가 있겠지, 참. 변백현이 직접 밥을 해먹을리는 없을거고.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가씨? 식사 하시러 나오세요.”
“...아, 저...괜찮은데. ”
“하지만 도련님이 꼭 아가씨께 식사를 차려주라고 하셔서요.”
제발 나와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말하는 듯한 아주머니에게 미안해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따라 부엌으로 나갔다. 도련님과 아가씨라니, 마치 궁궐 안에 들어온 천민이 승은을 입어 신분이 상승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그런 도련님이 내게 아침을 차려주라고 말했다고하니 더욱이. 출근하기 전에 부탁한건가? 그럼 대체 나를 누구라고 설명했을지….
식탁에는 내가 한달은 족히 먹을 반찬들이 차려져있었다. 언뜻 본 시계의 시침은 벌써 2를 지나고 있었다. 열시간이나 잤구나, 내가. 어쩐지 개운하다싶더라니... 이렇게 오래도록 잠에 빠져있었던 건 근 몇년 간 처음이었다. 아주머니는 식탁 앞에 의자를 빼주며 내게 손짓했다.
“앉아서 한수저라도 들어요.”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쌀밥을 한숟갈 떠 입에 넣는데 얼마만의 집밥인지 괜히 코 끝이 찡해졌다. 우물우물 밥을 먹는데 아주머니가 혼자 바쁘게 돌아다니시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아침에 아가씨 옷 빨다가 주머니에서 나온거에요.”
“어, 그거 안 빨으셔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요, 옷이 빗물에 젖었었는데... 이거 혹시 몰라서 충전해뒀어요.”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곤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분명 꺼져있어야할 휴대폰이 켜져있다. 충전하다 켜진건가? 의아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한번 보자 내 눈치를 살피다 입을 뗐다.
“…저, 도련님이 잠깐 보시긴 했었어요.”
“변백현이요?”
“네. 잠깐요... 죄송해요. 제가 말릴 걸 그랬나봐요.”
“…괜찮아요.”
너무 미안해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싫은 티도 못내고 그저 괜찮아요, 라고 말해버렸다. 문자 목록에 들어가자 내가 확인한 적 없지만 이미 확인되어진 수백개의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 중의 대부분의 발신인은 사채업자들이었다. 처음 그들에게 연락올 때부터 휴대폰을 꺼놨으니 내용은 다 비슷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자정에 온 문자는 [우리 오늘 니 애미 찾았어 근데 돈 없으시대 낼까지 사천 만들어와] 였다.
그들이 엄마를 찾은 것도 문제였고 그 엄마가 돈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고 변백현이 이 문자를 봤다는 것도 문제였다. 내가 그에게 죽어도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들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낱낱이. 이번에도 담배 한개비가 절실히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고약한 담배 연기가. 휴대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두 손으로 맨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보려는데 휴대폰이 액정을 반짝, 하며 진동을 울려댔다. 순간 또 빚쟁이들이 아닐까 무서웠다. 힐끗 액정을 확인해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문자가 띄워져있었다.
[에리야 엄마야 미안해 딸.. 전화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
엄마였다. 멍하니 그 문자를 몇 번이나 읽었다.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었다. 엄마가 내게 문자를 해왔다. 분명 그 사람들에게 잡혀 전화나 문자 따위는 못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문자 내용이 내 마음을 쿡쿡 찔러왔다. 찰나 눈물이 울컥 터져나오려는걸 꽉 참으며 뭐라고 답을 해야할 지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자를 못본 척하고 무시하거나 [아니] 라고 보내버리고 싶었다. 나는 엄마를 원망했었으니까. 바뀐 번호 하나만 남겨주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문자라도 한번 해주지, 빚은 어떻게 갚을건지 설명이라도 해주지 하고 바랐지만 엄마는 언제나 답이 없었다.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문구 밖에는.
그러나 나는 원망 대신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바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에리야.]
“……엄마.”
[에리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정말... 정말 엄마로서 자격이 없구나. 진짜로 미안해.]
[엄마도 갚아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잘 지냈니? 어디 아픈데는 없구?]
“…번호는 왜 바꿨어요?”
[걔네가 휴대폰도 끊어놔서... 너한테 연락하면 괜히 피해갈 것 같아서 못했어. 진작 했었어야했는데...]
[엄마가 정말 미안해, 진짜로. 그리고 고마워.]
결국은 눈물이 몇 방울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게 엄마를 원망하다가도 다정한 목소리 몇 마디에 영락없는 딸이 되어버린다. 옆에 서있던 아주머니는 눈물을 뚝뚝 흘려내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았고 나는 재빨리 “잘먹었습니다”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욕조 옆에 걸터앉아 눈물을 안으로 삼켜냈다.
[왜 말이 없어, 엄마가 미워서 그래?]
“……아니에요.”
[엄마가 그 돈은 꼭 갚을테니까 걱정 말고. 정말 고맙다, 에리야.]
“…네?”
[니가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힘들게 구했단거 알아. 엄마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갚을게, 진짜 고마워.]
엄마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말을 계속 이어갔다. 걔네들이 아까까지 날 잡고 있다가 이제 가보라고, 딸이 다 갚았다고 말하는데 그때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 어린 네가 그 큰 돈을 어디서 구했을지 싶기도 하고. 너한테까지는 정말 손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 그 후로 엄마는 많은 말을 했지만 단 한마디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망치로 내 뒷통수를 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엄마의 말을 끊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엄마 빚을 갚아줬다는거에요?”
“응? 응, 니가 나 대신 사천만원 갚아줬다며.”
“아니야? 걔네들이 그러던데.. 니가 나 대신 다 갚았다구.”
“…엄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폰을 화장실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니가 내 문자를 다 봤다고 했을때부터 낌새를 눈치챘어야하는건데. 변백현이 아니라면 이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사천만원이라는 돈을 제 맘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내 주위에 없었다, 너 말고는. 변백현은 확실히 미친게 분명했다. 기어코 니가 일을 저질러버리고 만거야. 결국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 한칸이 모래처럼 부서져 사라져버렸다.
화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나는 세탁실을 찾았다. 방문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며 세탁실을 찾았고 아주머니는 수상한 내 행동에 내 뒤를 따라오며 “어디 찾으세요?” 라고 물었지만 난 대답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마침 그 방은 세탁실이었다. 내 옷은 방금 세탁기에서 나온 듯 축축한 채로 빨랫대에 널어져있었다. 내가 무작정 걸어가 그 옷을 집어들고 입으려하니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며 내 팔을 잡았다.
“아이구, 아가씨! 옷 아직 안 말랐어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아가씨, 젖은 옷 입으면 감기걸려요, 네?!”
“그럼 제가 입을만한 옷 좀 아무거나 주세요.”
“어디 가시려구요, 대체! 오늘 도련님이 아가씨 집에만 있으라고 하셨어요!”
이건 아니었다. 가뜩이나 도와달라고 전화한 것도 후회되는데 내가 돈까지 빌려쓴다고?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래, 내가 조금 더 양심을 상실했었더라면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었겠지. 그러나 내가 변백현에게 돈을 빌릴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만약 그 돈을 변백현에게 빌리기라도 한다면 난 정말로 그의 밑에서 기는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변백현을 찾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으며 아직 축축한 옷을 걸치려고 했고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아이구, 아가씨이! 도련님 금방 와요, 응? 조금만 기다리세요!”
“안돼요, 기다릴 시간 없어요. ”
“아가씨, 제발요..! 이 아줌마 봐서 한번만, 응? 조금있음 도련님 온다니까요!”
“변백현 보러가는거 아니에요...!!”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래, 나는 변백현이 아니라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엄마는 빚이 없어져서야 비로소 내게 전화를 했다. 그게 내가 가장 억울하고 서글프고 화난 지점이었다. 엄마는 빚이 없어져서야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결국 옷을 입으려고 난리를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벗다가만 티셔츠를 다시 입혀주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 한때는 부모사랑 듬뿍 받고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고 매일을 웃는 얼굴로 지냈었는데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렇게 된거지...?
아주머니는 한참을 울고 있는 날 일으켜 세수라도 하라며 화장실에 데려다주었다. 찬물로 세수를 열번을 넘게 하고나서야 울음이 서서히 그쳐갔다. 세면대 위 거울을 보는데 눈꼬리가 발갛게 부어오르고 눈이 충혈돼있었다. 서서히 성에가 껴 흐릿해진 거울에 나는 손가락으로 이렇게 썼다. 좆같다. 그리고 다시 손바닥으로 문질러 없앴다. 뽀득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날 진정시켰다.
화장실 안에서 삼십분은 넘게 있었나, 화장실에서 나오자 어느새 외투를 입고 가방을 든 아주머니가 내 앞으로는 급하게 걸어왔다.
“아가씨, 괜찮아요? 응?”
“…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소란을 일으켜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이제 괜찮으신거 맞죠, 응?”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감정에 너무 북받쳐서 아주머니한테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외투 단추를 잠구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제가 이제 본가로 들어가봐야해서요. 아가씨 혼자 있으셔서 어떡하죠?”
“..아,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닌데요, 뭐. 아깐 죄송했습니다.”
“아유, 어린 아가씨가 우니까 내 맘이 얼마나 아프던지.. 도련님 좀있음 오니까 티비라도 보고있어요. 어디 가지 말고. 응?”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으로 향했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그제서야 이 집에 나 혼자만이 남게되었다. 나는 멍하니 거실에 서있다가 소파로 가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한심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빚은 해결됐다는 안도감을 느낀 내가 너무 싫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백현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겁이 나 그저 소파에 가만히 앉아 변백현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오는 그 발걸음 소리를. 이윽고 등 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네. 없어져있을 줄 알았는데.”
그제서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피곤한 듯한 얼굴.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항상 내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을 때의 너가 생각났다. 변백현은 한쪽 손으로 넥타이를 푸르며 내게 물어왔다. 언제 일어났어. 밥은 먹었고?
…저 태연함. 나는 불쑥 화가 나려는 걸 애써 참으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제정신 아니지, 변백현?”
너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다 나직히 웃었다.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가 얄미웠다.
“내가 언제 너한테 돈빌려달라고 했어? 넌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도와달라며, 니가.”
“그게 빚 갚아달란 말은 아니었다고!”
“그럼 그게 무슨 말이었는데?”
……. 그 말에 내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슨 의미로 도와달라고 너에게 전화를 했더라. 그때의 기억이라고는 내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비를 피하다 주머니에 든 네 명함을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건 기억 뿐이었다. 재워달래야지, 돈 좀 빌려달라고해야지, 엄마 찾아달라고 해야지, 같은 어떠한 목적이 있어 전화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너가 절실했었다. 왜 그렇게 네가 절실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놓고 너에게 전화한 것을 후회한 이유는 미안해서, 였다. 내 자격지심과 죄책감 때문에 다가오는 변백현을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나는 어째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나.
나는 힘없이 소파 위로 다시 앉으며 작게 말했다.
“...나는 니가 이러면 너무 미안해서 감당할 수가 없어, 백현아.”
항상 나는 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서 너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내가 추했다. 너는 앉아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에 비치는 웃음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따스했고 달콤했다. 그리고 그 속엔 고등학생 때 날 바라보던 묘한 눈빛마저 담겨있었다.
“불편하지.”
“부담되고 죄책감 들어서 미치겠지, 지금.”
그 큰 돈을 언제 만들어 갚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도 네게 반드시 갚아줘야한다는 부담감, 엄마가 또 다시 연락을 끊고 그 돈을 내게 다 떠넘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난 변백현에게 가해자였지만 변백현은 내게 은인이 된 자책감, 자괴감, 모든 감정이 날 힘들게 만들었다.
변백현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는 내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그거 바란거야.”
“그래야 너가 도망 못가지, 내 옆에서.”
변백현이 내 눈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옷갈아입고 올게,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말이 온전히 이해된 순간, 변백현은 날 돕기위해 빚을 갚아준 것이 아닌 내 발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백현, 너는 나를 너무 잘 알고있었다. 나를 다루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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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사탕 다니 누누 유채 훈이랑쑤 109 님 너무 감사합니다 ♥
날씨가 너무 추워졌죠...ㅠ0ㅠ..? 울 액희들 옷 따뜻하게 입구다니세여!!!
오늘도 읽어주셔서 너~~~~무!!!!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다들 쪽쪽ㅎ3ㅎ
+ 암호닉은 최근편에 신청해주세용 []쳐주시면 감사하게씁니다♡
++추천과 댓글은 작가의 힘...! 아잣아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