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나의 이유
일요일 아침부터 말이 많았다.
모든 스탭들의 휴가가 조금씩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본래대로라면 어제 아침에 찍었어야 하는 싱가폴의 한 식물원의 씬이 갑작스런 폭우로 그 다음날
즉 오늘 아침으로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자!!! 여러분 예상 밖의 일이지만 그래도 모두들 힘냅시다!"
조연출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침부터 고요한 스텝들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 많은 인파 속에 유난히 불안해 하고 있는 내가 있다.
'설마...... 진짜, 에이,설마,,... 오늘 약속에 지장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 태민씨도 잡지 촬영도 비 때문에 오늘로 잠시 미루어졌다니까 적어도 약속한 5시까지는 갈 수 있을 꺼야
그래,,,,,,,, 이 장면 어짜피 중요한 씬도 아니니까 해봤자......
지금이 아침 6시니까 3시간 한다고 그랬는데......'
초조하고 좀처럼 예상 되지 않는 현실에 아침부터 절규를 외쳤지만 그래도 그 시간 내에는 갈 수 있다고
섵부른 나의 불안함이라고 치부했다.
원래 이 바닥에 이렇게 겉잡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었나고 아마 이 일도 그 일 중 하나 일 것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단순한 나의 불안함.
그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꺼야.
자연스러운 MC의 진행으로 촬영은 시작되었다.
모든 출연진들이 마치 지금 일어나 메이크업 하나 받지 못한 것처럼 티를 내었지만
전.혀!
특히 여자 연예인들은 떨어지는 이슬하나에도 화장이 밀릴까 초강력 커버 화장이면서도
저 지금 막 일어난 쌩얼이에요 메이크업을 몇시간동안 받고 왔다.
사실 프로그램을 만들 떄는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특히 이번 해외 촬영 같은 경우는 싱가폴에서 협찬을 받고 간 것이기 때문에
각 지역의 랜드마크는 찍고 가는 것이 애초에 계약 조건 중 하나였다.
그래서 굳이 들어가야 할 필요도!
굳이 진행을 이곳에서 할 필요도 없지만
그놈의 협찬 때문에 이곳에서 이 아침부터 나와서 촬영을 하는 것이다.
예로 들자면 방송의 불가항력 PPL의 작용이라고 할까나.........
자............계산을 하자면 지금이 대략 7시.
촬영은 한 두어시간 더 할테니까
크게 잡아 10시에 끝난다 하면 이 장비 정리하는데 두어시간 하면 12시.
그리고 또 예외 시간이 생겨서 1시간 정도를 허비하면 1시.
가는데 한 40분이니까 그래, 남고도 남지.
넘치네!! 5시까지인데,
그렇게 홀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 나는 열심히 스케치북을 넘겼다.
때로는 MC에게
때로는 출연진에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역시 내 예상대로 10시이군!
딱 떨어져! 이렇게만 되어라.
"00작가, 얘 막내야!
"네,네? 저요?
"그래 여기서 제일 한가해보이네!"
'저 진상 조연출. 일 제일 많은 사람한테 뭐라는 건가여?'
"왜요? 조연출님?"
"너가 이번 해외 출장 엄청 기대했다면서?"
"아.....그렇긴 한데 왜그러세요?"
"여기 정리는 우리가 하고 갈테니까 너는 그냥 너는 여기 적힌 목료표 보고 가서 영수증만 가지고 와라."
"어디인데요? 혹시 멀어요?"
"아~니~ 걱정하지마 내가 너 빨리 보내 줄려고 이러는 거지~!"
"정말 여기 목록표에 있는 곳에만 가서 영수증 받아오면 되죠?
"그래!! 얼른 갔다와, 얼른"
못내 못미더운 말에 등을 떠밀려 거리로 나왔지만 뭔가 탐탁치 않았다.
나 좋으라고 해주는 인간이 절대 아닌데......
천천히 목록표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많지는 않아,,,,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발걸음을 띄었다.
첫번째 가게에 들려 영수증을 가져오는 일은 정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이 가게 우리 스텝이 왔던 곳인데,
두번째 가게는 좀 더 먼 곳에 있었다.
좀더 싱가폴 내부 쪽에 있었던 것 같다.
근데 이 가게도 우리가 들렸던 곳인데,,,,,,,뭔데 음식가게들을 들렸던 곳 마다 영수증을 받아.........아.
순간 모든 상황들이 일렬로 나열되듯이 정리되었다.
원래 모든 회식비와 촬영중 먹는 식비는 영수증을 떼와야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영수증을 가지고 방송국에 첨부하는 것이었다.
모두 공돈을 가지고 먹는 것이었기 댸문에 뭐 하나라도 돈이 안 맞으면 원무과에 가서 혼나기 일수였다.
그게 바로 조연출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였고.
그래,,, ,지난 몇일 동안 갔던 모든 식당들에 들려 영수증을 받아와야 했다
가게 수가 문제가 아니였다.
이건, 이건 거리의 문제였다.
랜드마크 하나하나에서 촬영을 했던 것 처럼
우리도 그랬다.
랜드마크 하나하나에서 밥을 먹었다.
보통 그런 것들은 뭉쳐 있지 않아 차로 움직였는데,,,,,,,,,,,,,,
이걸 다 대중교통으로 갔다오라고 심지어 섬? 이걸 어떻게 들어가라는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왜. 하필. 오늘일까....... 아니 왜 나일까.
한참을 지하철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포기해야 할까? 다 때려치고 그냥 돌아가볼까?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2시.
3시간 안에 이곳들을 다 갔다 올 수 있을까?
내가 영수증을 안 가져오면 어떻게 될까?
내가 늦으면..... 이태민은 어떨까?
아니야....... 그래 지금 시작하면 안 늦을꺼야.....
그래 한 30분 정도는 이해해줄꺼야.
그래.
조금은 늦어도 이해해줄꺼야.
내 눈앞에 열리는 열차에 서둘러 뛰어들었다.
안되는 영어로 몸짓발짓을 하며 영수증을 받아내었다.
하ㅏ나 모르는 길이였기 때문에 바로 앞에 가게도 돌고 돌고 다시 돌아 도착했다.
어느새 나의 얼굴은 땀으로 쩔어 있었고 다리는 져려왔다.
어찌나 뛰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보이는 열차마다 탑승했다.
그래 거의 다왔어.
이 집이 네섯번째니까 두곳만 더.
딱 세곳만 더 가면 되.
시간이 몇시지? 라는 생각과 핸드폰을 열어 확인할려는 순간 나의 감촉을 의심했다.
후..........내 핸드폰............
원래 안 되는 날에는 무엇이든 안된다면 투덜거리던 동생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는 재미있다고 놀려댔는데 그게 나의 일이되었다니...........
침착하자.침착해. 어짜피 바꿀 폰이었고 이김에 바꾸자 .
돌아가서 미련 없이 바꾸면 되고. 시간은. 대충 해는 안넘어 갔으니 5시 전은 아닌 것 같다.
연락은......... 시간 맞춰 나가면 되지.... 그래... 이시간에 얼른 뛰자,
몸을 서둘렀던 덕분인지 다섯번째 가게는 빨리 찾아왔다.
그 놈의 섬에 있는 가게...... 지하철로도 좀 멀 것 같은데.
싱가폴의 장점이 있다면 아마 지하철이 매우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수 같은 조연출님이 쥐어진 이 카드를 가지고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섬도 갈 수는 있어 안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갈 수 있는게 어디야, 가야되긴 하니까 간다.
그렇게 도착한 가게는 정말이지 섬에서는 정가운데 해변에 위치했다.
왜 이리도 먼 곳에서 밥은 먹었을까.....
터덜 터덜 따가운 발을 열심히 달래며 돌아가는 길은 참 이상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쨍한 아침 시간 같이 밝았지만 어느순간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어? 왜 이렇게 어두워? 아......... 시간도 모르고...
지하철을 한 정거장 한정거장 돌아올때마다 하늘은 어두워 졌다,
그런 하늘이 너무나도 이상해 용기를 내어 지하철 옆사람에게 시간을 물어보았다.
"저..... 죄송한데 지금 몇시인가요?"
"7시요."
안되는 영어도 7시 라는 불길한 시간을 정확히 나의 귀에 내리 꽂았다.
7시? 7시라니..... 안되도 5시 정도 인줄 알 았는데?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다고?
심장이 뛰었다.
한 역이 지나갈 때마다 어두워 지다 못해 까매지는 밤 하늘에 숨이 막혀 왔다.
아...... 어떻게 이 시간까지 기다리면.....
옴짝 달싹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을 지나 약속한 장소까지 뛰어가는 내 모습은 정말 말도 안 되게 흉했을 것이다.
머리는 이미 땀에 쩔어 헐렁해 삐져나와있고 다리는 너무 아파 이젠 마치 아무 느낌 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 여기 근처 벤치에 앉아 있는다고 했는데......
가길 바랬다.
제발 내 눈에 띄지 말길 바랬다.
한시간 정도 아니 30분 정도 기다리다 갔으면.
그냥 돌아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날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련하게 나만 기다리다 지금까지 있지 말아주길.
정말 그렇다면 더 이상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지이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때였다.
강한 두 손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항상 쓰고 다니는 모자는 어디다 벗은건지 마스크는 밑으로 잔뜩이나 내린체 나를 붙잡는
이태민이 보였다.
"어디있던거야? 전화도 안되고, 내가....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왜 전화를 안 받아! 난 네ㄱ"
많이 놀랐는지 언성을 높이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왜,왜,왜 기다렸어요? 왜? 그냥 가지! 기다리지 말지! 왜 바보처럼 기다렸어요!왜!
안 오면 안 오나보다 그러고 신경 쓰지 말지 왜 그랬어요, 내가 뭐라고......진짜...."
눈시울이 따끔따끔하다. 뜨거워지는 것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마구 마구 소리를 치는 나를 바라보는 이태민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안 보이려고 안 감으려고 눈을 부러 크게 떠도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지금 시간이 몇시에요?
서둘러 그의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반이 잖아요? 8시 반! 이 시간이 되도록 기다리기는 왜 기다려요!
본인도 힘들면서 자기도 힘든데 왜 그랬어요!"
방울방울 넘치는 눈물에 화가 났다.
너가 왜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리니? 잘 못한 건 넌데...... 오히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건 내 앞에 있는 그인데.
따뜻하고 보드라운 것이 얼굴에 느껴졌다.
앞이 막혀 보이지 않았다.
깜깜하고 조금은 숨이 막혔지만 두근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에 천천히 내쉬는 숨소리에
그에게서 나는 시원한 스킨향기에 마음이 놓였다.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만난것 처럼.
지금까지 이 길을 오면서 생각하고 그를 만나 퍼붓더 모든 마음도 내려앉았다.
그는 두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근데 내가 걱정했어. 전화도 안되고. 시간은 가는데 이 밤에 혹시나 다쳤을까봐.
이렇게 안고만 있어도 부서질 것 같은 너인데 잘 못되었을까봐............
그래서 그랬어, 근데 이제 다 됀찮아. 돌아왔으니까 됐어.
그럼 된거야."
끄윽끄윽 거리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이유 모를 나의 눈물도 그의 품에 안겨있으며
흔들리는 나의 등도 차분히 쓸어내려주는 그 손길에 알게되었다.
내가 이렇게 울고 있는 이유는 바로 몇분동안은 기다려 줄 것이라는 나의 안일한 생각때문이었다.
애써 그럴듯하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만나는 날을 기다리면서 정작 그 날에는 일자리에,
내가 돌아와서 겪어야 할 핀잔들에 책임을 돌리며 내가 책임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그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나는 항상 그랬다, 나를 배려하는 그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항상 온갖 편한 것은 내가 다 누리고 있었다.
사랑한다면서 그를 두번째로 두고 힘들다 피곤하다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나는 항상 첫번째이고 먼저였는데,
보지 않아도 나를 얼마나 걱정했을지 뻔히 보인다.
그 힘든 스케쥴을 다 끝내고 이 곳에 왔을까? 나를 쓸어내리는 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손길 하나하나에
미안했다.
"미안해요, 나는 진짜 정말 안되나봐............
그 간단한 약속하나 못 지키나봐..........."
말없이 나를 안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미안해요"
"00야"
나의 이름은 조용히 부르는 그가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감쌌다.
허리를 내려 흔들리는 내 두 눈동자에 온전히 그의 시야를 맞춘체 그는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에 옆에 있고 싶다고 했을때 한 말 기억해?
이만큼은 너가 와야 한다고. 하지만 내가 항상 기다리고 있을 꺼라고."
"넌 왔어.
그 때도 지금도 늦었는지 빨랐는지는 필요없어. 그냥.......... 너가 이만큼만 와 았으면 되는 거야.
넌 그렇게 나에게 터무니 없이 과분한거야."
싱가폴의 저녁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여러가지 불빛들의 형형색색 네온사인 야경을 이루는
밤 거리 그 많은 반짝임 중에 서 있는 한 남녀가 있다,
보드럽게 턱을 바춰주는 남자의 손길에 여자 두 눈을 꼭 감았다, 살짝 발꿈치를 오린 여자와 살짝 허리를 내린 남자.
서로의 입술이 다가갈 때마다 체온이 나누어 지는 것같다.
서로의 따뜻함을 나누어 나는 너를 , 너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
한참을 맞다었던 입술은 살며시 떼며 남자가 말했다.
"오늘 내방에서 같이 있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