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야.
민규야.
민규) ………..
새벽 다섯시. 조용한 속삭임과 흔들리는 몸에 민규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눈을 떴고, 곧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고개를 기울였다. 잠긴 목소리가 여주를 향하기도 전에 여주는 쉬이 하더니 석민이를 가리키고, 겉옷을 입고 나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방을 먼저 나갔다.
민규) ………..
꿈인가 싶어 휴대폰도 켜보고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민규는 곧 겉옷을 걸치고 여주를 따라 나갔다.
민규) …왜?
여주) 멀리 가자.
민규) …응?
여주) 우리 멀리, 잠깐만 잠깐만 다녀오자.
여주는 멀리 다녀오자고 말하며 메모지를 끄적거렸고, 곧 그 메모지를 든 채 작게 웃어보였다.
석민) 이야- 이자식들. 너무한거 아냐?
지훈) …………
여주의 쪽지를 확인한 석민이 눈을 비비며 헛웃음을 쳤고, 곧 그 쪽지를 돌려보던 아이들은 아무말 없이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다 승관의 목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승관) 에헤이- 아침도 안먹고 둘이 나간거면 주말 아침당번은 해야겠네~
순영) 그래야겠네!
정한) 이번주 주말 아침당번 이층이지?
승관) 응 ㅎㅎ
순영) 들킴?
쪽지를 가지고 한창 대화를 나눌 때 민현이 소파에서 부시시하게 일어나 계단 앞에 모여있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뭐해?
순영) 여주랑 민규 새벽같이 나갔어~ 둘이 놀러갔다 온대.
민현) …둘 만?
지훈) 응. 둘 만.
원우) ..뭐해? 밥 다했어. 먹어.
민현) 깨우라니까.
원우) 못자는 거 뻔히 아는데 뭐.. 밥먹어.
부엌에서 나온 원우가 계단에 모여있는 아이들을 보곤 말했고, 곧 식탁에 모여 앉았다. 그러자 창균이 자리에 앉으며 석민을 향해, 민규랑 여주는? 하고 물었다.
석민) 둘이 새벽같이 놀러갔대~ 이게 말이 돼?
민현) …아니 잠깐만. 여주가 나갔다고?
석민) 엉. 김민규랑 둘이.
민현) ….여주 네시에 겨우 잤는데. 내가 자는 거 확인했는데.
석민) …새벽에 또 깼나보지 뭐.
민현) …아 그랬나보네.
지훈) 한시간 자고 나간거야? …졸릴텐데. 왜그랬지?
승관) 알다가도 모르는게 우리 여주 마음 아니겠습니까~ 달걀말이 내 거임!
순영) 야이쒸 너 하나 먹었잖아!
승관) 인당 두개여~!
순영) 아따 세 봤디야?
승관) 아니~ㅎ
순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 쪼개 쪼개
지수) 아 근데 피곤하겠다.
원우) 그러게. 민규도 잠 많은데.
지훈) …그럼 금방 오겠지 뭐.
승관) … 야. 저 앞 쪽에 새로 생긴 아파트.
석민) 엉. 왜?
승관) 거기 놀이터 있는데 놀이터에 활강 놀이기구 있대.
석민) …활강? 그 뭐 줄에 매달려갖고 타고 내려오는거?
승관) 엉. 야 가고싶지않냐. 타보고싶은데
석민) 헐 완전. 개재밌을 것 같은데?
아침식사 후 편의점을 다녀온 승관은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석민에게 자신이 보고온 놀이터 이야기를 꺼냈다. 그 후 라떼를 시전하며 요즘은 재밌는게 많아졌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점심 먹고나서 놀러가자는 결론을 도출했다.
순영) 너네 왜 그렇게 신나있냐?
석민) 어?
승관) 형,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 순영이라서. 승관과 석민은 입가에 예쁜 호선을 그려냈다.
지훈) 애들 어디 갔어? 집이 좀 조용하네
준휘) 몰라? 낮잠 자고 일어나니까 없던데?
지훈) 그래?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있는 준휘를 지나쳐 부엌에 들어온 지훈은 가볍게 냉장고를 둘러보더니 간식거리가 떨어진 금요일이라는 걸 자각하곤 우유를 집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 놓인 시리얼을 들고 조그마한 유리 보울에 탈탈 털었다.
원우) 시리얼 먹게?
지훈) 응. 출출해서.
원우) 우유 넣지마. 나 제티 타먹게.
지훈) 그래.
지훈은 곧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고, 원우는 티백을 꺼내 제티를 두 잔 타더니 홀연히 부엌을 나갔다. 방에서 게임을 하며 창균과 마시기 위함이었다.
원우) 그거 깨기 좀 어렵지.
창균) 응.
방에 들어온 원우는 책상에 제티 두 잔을 내려놓곤 창균이 하고 있는 게임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창균) …아. 네가 한 번 해봐.
원우) 아 너무 어려운데?
창균이 작은 탄식을 뱉으며 원우에게 게임기를 넘기고, 잔을 손에 들었다. 원우의 플레이가 시작되자 창균은 멍하니 게임 화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창균) …어디갔을까?
원우) …누구. 여주?
창균) 응.
원우) …글쎄. 새벽같이 나간거면 뭐..놀이공원?
창균) …놀이공원? 여주가 좋아하나. 시끄러워서 디즈니 랜드도 한 번 안가던 앤데.
원우) ..하긴. 사람 많은 것도 싫어하고. 그럼 어딜 가. 그 시간에 연 곳이 없는데.
창균) 그치.
오 깼어!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하며 플레이를 한 덕인지, 화면에 빵빠레가 터지고 둘의 대화화제는 다시금 게임으로 넘어갔다.
오후 다섯시를 향해 갈 때 즈음 민규와 여주가 집으로 돌아오고, 어디갔었냐는 온 갖 물음이 민규와 여주를 향하자 여주는 가볍게 웃으며 바다. 하고 답했다. 그 웃음이 딱히 기분 좋은 웃음 처럼은 보이지 않아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고.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평소처럼 삼삼 오오 모여 놀거나 혼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며, 거실에 모여 앉아 티비를 보던 승관은 여주를 향해 물었다.
승관) 원빈 현빈?
여주) 응?
승관) 원빈 아니면 현빈?
여주) ….원빈?
승관) 김우빈 이민호?
여주) …김우빈?
승관) 송승헌 강동원?
여주) …뭐하는데..?
승관) 아이. 이상형! 송승헌 강동원!
여주) …………
강동원.
티비 속 이상형 월드컵 양자택일을 보던 승관은 재미난 듯 여주에게 물었고, 그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들도 어느덧 둘에게 시선을 옮겼다.
석민) 여주 이상형 없댔어~ 뭘 그런걸 고르라그래?
민현) 그래~ 뭐하는거야-
승관) 다~ 도움이 되는거야 엉? 자 그럼, 원빈 김우빈
여주) ….이게 누구한테 도움이 돼..
승관) 누군가한테는 도움이 돼. 그래서 누구?
여주) …김우빈.
승관) 그럼 김우빈 강동원?
여주) …강동원.
승관) 들었지? 여주 원픽은 강동원이다?
승관은 여주의 원픽이 강동원이라며 아이들에게 말하고, 곧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금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석민이 고개를 저었고, 여주의 옆에 있던 민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민규) 그걸 누가 몰라. 여주는 배우 잘 몰라서 늘 원픽이 강동원이었어.
승관) ..그래?
여주) 응. 근데 또 뭐 잘생겼으니까.
석민) 넌 여주 원픽이 강동원인걸 어떻게 알았냐? 나도 모르는데.
민규) 중학교 때 들었어. 근데 아직도 강동원일줄은~
여주) 자꾸 이상형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아는 배우 중에 제일 잘생긴 배우 말하는거지, 딱히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건 아니라서.
정한) 저번엔 백마 탄 왕자가 이상형이랬잖아. 그건 뭐야? 왕자처럼 잘생긴 사람?
여주) 아닠ㅋㅋㅋㅋㅋㅋㅋ 그런 의미 아니야
민현) 그러면?
여주) …그냥 뭐.. 막 소설에 그런 대사 있잖아. ‘이 때 백마탄 왕자님이 갑자기 등장하면 좋을텐데.’ 이런 거.
힘들 때 짠 하고 나타나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보통 백마 탄 왕자라고 하니까. 나도 짠 하고 나타나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음 좋겠다- 뭐 그런…
쓸데없는 소망같은거지.
Epilogue
“………..”
“………..”
“………..”
“왜 나만 데려왔어? 바다 오고싶었으면 말을 하지.”
..다같이 오면 좋잖아.
좋지 않은 우중충한 날, 평일 오전. 사람이 없기에 아주 적절했다. 텅 빈 모래사장 위에 덩그러니 그려넣은 듯 한 둘이 철벅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민규가 나지막이 물었다.
“………..”
“………..”
“혼자오고 싶었어.”
“………..”
“메모도 붙이지 않고, 그냥 혼자 도망치고 싶었어.”
“….왜?”
“………..”
“………..”
“..그냥. 잠도 안오고,”
지수 오빤 때문에는 없다고, 내 탓하지 말라그랬지만, 잠을 못자는 건 내가 생각이 많기 때문이니까 내 탓이거든.
“…그래서 그냥. 도망치고 싶었어. 혼자.”
“…………”
“근데 그럼, 네가 또 아플까봐.”
“…………”
“날 너무 좋아하는 우리 민규가, 또 날 찾아다닐까봐.”
“…………”
“그래서, 그래서 같이온거야.”
여주의 말에 민규의 눈이 탁해질대로 탁해졌다. 한동안 둘 사이에 말이 오고가지 않고, 바다의 소리만이 가득 채웠다. 여주는 제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상처가 가득한 손을 뻗어 민규의 손을 맞잡았다. 미안해.
“………..”
“…자꾸, 못난 짓만 골라해서 미안해.”
“………..”
“…..……”
“…우리 의사 선생님, 디게 좋은 분이다?”
“………..”
“맨 처음에 민현이 형이 억지로 자리 마련해서 진료 받은 날,”
“………..”
“아무 말도 안하고 한시간을 그냥 앉아있다 왔는데도 나갈 때 아무말 안하고 그냥 웃어주셨어.”
그러다가 또 보는 날엔 자기 얘기를 막 하더라. 뭘 먹었는지 어제 저녁에 집에가서 뭘 했는지.
민규는 자기가 어떻게 진료를 하게 됐는지, 여주가 없던 빈 시간을 자기가 어떤식으로 보내왔는지 천천히 풀어내려가기 시작했고, 맞잡은 두 손은 놓지 않은 채 대화는 이어졌다. 그러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민규는 눈물이 가득한 채, 무릎에 얼굴을 묻은 여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주야. 나 고집 되게 쎈 거 알지.”
“……….”
“이런 나도 이렇게, 네가 오고, 선생님도 도와주고, 약도 먹어서, 이렇게 너 보잖아.”
“……….”
“우리 이제 놓아주자.”
“……….”
“네 옆에 있는 그 까만거,”
그 까만거…. 우리 제발 그거 놓자. 응?
민규의 울음소리는 잔잔한 파도 소리와 같았다. 고개를 쳐박고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모래 사장에 눈물을 뚝 뚝 흘리는 내게, 너무나도 듣기 아까운 소리였으며 벅찬 소리였다. 날 위하는 네 목소리는 몇년을 들어도,
아프다.
**
아팠던 시간과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같을 수 밖에 없다
까만거=우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