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병원 : 10
w. Shelter
정신병동과 의사들의 긴 아침 회의가 끝났다. 우르르 몰려나가는 의사들 뒤를 멀뚱히 바라보던 루한과 종대 두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뒷정리를 자처하고 회의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섰다. 회의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쌩하니 부는 찬바람에 몸을 떨었다. 루한은 부르르 떨며 미간을 찡그렸고 종대는 그런 루한의 지친 얼굴을 훑어보고는 걱정된다는듯 물었다.
"루한."
"응."
"많이 피곤하지? 이사 준비하느라."
"조금.. 준비할 서류가 너무 많았어. 꽤 복잡하더라.."
"그래, 그럴거야. 고생 많이 했어. 혹시 내가 또 도와줄건?"
"이제 대충 다 끝났어. 두가지 서류만 작성하면 완전히 끝."
"다행이네.."
루한이 애써 웃으며 종대와 함께 걸었다.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보이는 그가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올리며 진하게 쌍커풀 진 눈을 크게 떴다. 새벽부터 줄곧 함께하던 종대도 조금은 피곤한 눈치였다. 하염없이 걷다보니 루한의 사무실 앞에 먼저 도착했다. 오른쪽 눈가를 살살 만지던 루한은 하품 했다. 그건 루한이 피곤하면 나오는 버릇임을 알기에 종대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힘들어도 기운내. 내일부터 우리 다시 시작이니까."
"그래야지."
"오늘까지는 조용할테니까 잠 오면 잠깐 눈 좀 붙이고."
"그래. 도와줘서 고마워, 너도 좀 쉬어."
"어. 들어가서 일 봐."
"이따가 끝나고 연락할게."
"그래, 들어가."
종대가 루한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 쳤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베시시 웃으며 바라보던 루한도, 이내 사무실 문을 닫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 책상에는 책들과 진료표가 어지럽게 놓여져있었다. 하루아침에 책상과 모니터 위에 먼지가 한톨 한톨 쌓인것 같았다. 루한이 팔을 걷어붙이고 책상 서랍에서 마른 손수건을 꺼내 책상 위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가볍게 닦아냈다. 그제서야 루한은 의자에 앉아 그만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계바늘이 어느새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고 있었다. 안경을 잘 쓰지 않던 루한은 피곤함 덕분에 눈앞이 흐려지는것만 같아 안경까지 쓰고 중국어로 쓰여진 의학관련 책들과 차트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직은 외국어보다 모국어가 편했는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목이 조금 뻐근해지는걸 느낀 그가 허리를 툭툭 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피곤하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이 몰려오는것 같았다. 잠을 깨울때는 역시 커피만한게 없는것 같다고 생각한 루한은 성큼 일어나 사무실 안에 비치된 냉장고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가 좋아하는 캔커피가 일렬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중 가장 앞에 솟아나와있는 커피를 꺼내들었다. 점심 대신 커피로 떼우려는 생각이였던 그가 몸을 돌려 사무실 안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바깥이 왠지 소란스러운것 같았다.
루한은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답답한 사무실 공기가 조금 눅눅했는지 코를 훌쩍였다. 종대가 피곤하면 눈 좀 붙이라고 했는데. 그냥 바깥 바람 한 번만 맞으면 잠은 물러날것 같았다. 그렇게 종대 없이 병원 밖을 나서는건 두 번째였다.
*
병원에서 멀지 않고 경치가 좋은곳은 역시 이 공원뿐인것 같았다. 커피를 반쯤 비웠을때, 루한은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덥지 않고 시원한 바람을 들이 마시니 기분이 좋아진 루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뒷짐을 지고 걸었다.
아마 이 근방쯤에서 고양이를 본것 같은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토스트를 반이나 떼어서 줬는데,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양이의 보은이란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건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한 루한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분을 더 걸었을까, 공원 안에 조금 더 깊숙히 들어온 그의 반대편 쪽에서 무척 시끄러운 성인 남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스해, 패스! 김준면 패스!"
"간다!"
"오예! 받았음! 딱 기다려."
"야 박찬열 골 막아!"
"어어, 어어, 그거 반칙! 반칙!"
루한이 익숙한 단어에 실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 뒤로 그의 눈에 확보된건, 그가 거닐고 있는 작은 공원 안에 있는 인조잔디로 만들어진 적당한 크기의 축구장이였는데 그 위로 다섯명의 남자가 쉴새없이 공을 뻥뻥차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무척이나 가까워 말소리가 다 들렸다.
"어어, 변백현 선수 신나게 달리네요!"
"기다려 내가 간다!"
"어딜 가~ 이리와!"
공을 차느라 정신 없는 남자들 중 한 명이 다른 또 한 명이 골대를 향해 달리자 긴장한듯 넥타이를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자세를 잡았다. 여리여리한 몸으로 골대를 지키고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이 달리는 사람의 앞을 가로 막았다. 사실 인원이 많지 않아서 실제 달리는 사람은 두 사람에 골키퍼 두 명이였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프로 축구를 보여주는듯 경기에 임했다. 셔츠가 달라붙은것 같다. 루한은 본인도 모르게 그 경기의 룰을 익히고 생각했다. 그러다 달리던 두 사람이 얼굴을 보고 맞닥뜨렸다. 손을 들어 올려 심판으로 보이는 사람을 불렀다.
"어, 백현아. 나 지금 너 발에 걸렸어."
"네? 아니야 형. 뭘 잘못 느낀거겠지."
"세훈 심판? 봤죠?"
"네. 변백현 선수, 고의는 아니였겠지만 김민석 선수의 발을 걸었네요."
"와....."
"김민석 선수 페널티킥 선제해주세요."
".....돈먹인 게임이야 이거.."
이제는 아예 몸을 돌린 루한이 그 쪽을 대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민석과 백현, 준면, 세훈, 찬열 이 다섯 남자들이였고 체구 작은 민석과 또 다른 키 작은 남자 백현이 서로 달리다 부딪힌듯 보였다. 공을 차려 민석의 다리 사이로 발을 넣은 백현에게 걸려 넘어질뻔한 민석이 눈을 크게 뜨며 세훈에게 항의하자 세훈은 민석에게 페널티킥 기회를 내주었다.
백현이 뭐 이런걸로 그런 찬스를 주냐며 어이없다는듯 세훈을 멍하니 쳐다봤는데, 세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석에게 멍석을 깔아주듯 손짓했다. 저편에서 골키퍼를 맡고 있던 찬열이 털썩 주저앉아 한심하다는 듯 백현을 쳐다보았다.
루한이 보기에 골키퍼로 보이는 남자 찬열과 또 다른 체구가 작은 주황빛의 머리를 한 민석을 뺀 나머지 세명은 바깥쪽으로 빠진채로 쪼그려 앉았다. 민석의 팀인 준면은 그를 힘차게 응원하고 있었고, 민석은 씨익 웃으며 공을 가지런히 가운데에 가져다놓았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웃으며 다람쥐같이 다다다 달려가 공을 뻥- 찼다.
모두가 그 공에 시선을 빼앗겼고, 루한마저 공이 날아가는 수평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과는..
"....골이다!!!!!!"
"이야!! 김민석!! 이야!"
"아나. 저거 박찬열 저거 진짜..."
"형, 형, 민석이형, 잠깐만.."
체구 작고 발 빠른 다람쥐 타입의 민석의 멋진 승리였다. 골대를 맞을 뻔 했으나 종이 한장 차이로 빗겨나가 찬열의 곁을 스친 공이 가볍게 골대 안으로 안착했다.
주먹을 쥐고 입에 가져다 대며 안정환 세레모니를 따라하던 민석이 곧 준면과 세훈에게 달려가 껴안고 신나게 춤 비슷한것을 추었다. 지금껏 뒷모습만 보였는데, 얼싸안고 원을 둥그렇게 돌며 방방 뛰니 골을 넣은 민석의 얼굴이 보였다. 하얗고 작고 웃는게 귀여운...
얼굴을 확인한 루한이 그의 뒷모습만 보다가 얼굴을 마주하게 된 뒤 입을 벌리고 벙쪄있다가, 곧 고개를 저으며 바보같은 미소를 지었다.
"축구 잘하네.."
루한이 조금 더 걸어가 그들을 지켜보았다. 축구장 위를 지배하던 민석은 찬열을 몹시 구박하던 백현에게 뛰어가 엉덩이를 토닥였다.
"우리 백현이~ 실망했어?"
"아. 저리가."
"어떡해.. 오늘 저녁은 너가 쏘게 생겼다 야."
"아 나 말고 저 멀대한테 쏘라고 해!"
"에이. 둘이 같은 편인데 어떻게 찬열이한테만 사라구 하냐~"
"아몰라! 몰라!"
준면과 민석, 그리고 세훈이 백현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백현이 어깨를 탈탈 털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고, 혼자 남은 찬열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백현을 쏘아보았다.
"너 때문이야! 너가 민석이형한테 골 줘서 그래!"
"야 너 죽고싶.."
백현이 입술을 앙 깨물며 찬열에게 달려가려 하자 준면과 민석이 웃으며 그를 잡았다. 백현이 찬열을 야무지게 째려봤고 찬열 역시 백현을 미친듯이 노려보았다. 그 분위기에 급 웃음이 나온 민석은 백현을 돌려세우며 애교를 부렸다.
"내기잖아 내기. 다음에는 우리 백현이가 이기도록 하자?"
"난 이길수 있어. 다음에는 형이랑 나랑 편 먹어. 나 쟤랑 하기 싫어."
"무슨 소리! 내가 싫어!"
"시끄러!"
민석이 백현의 엉덩이를 팡팡 치며 실컷 웃었다. 아무래도 저녁 내기를 한 모양이였다. 내기에서 진 백현과 찬열이 서로를 보며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세훈은 그걸 바라보며 저 형들은 언제 철들까,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가볍게 잔디밭을 뛰던 민석이 두 팔을 종이비행기마냥 벌리고 신나게 뛰었다. 준면과 세훈은 서로 팔짱을 끼고 속닥거렸고 여전히 백현과 찬열은 한숨을 푹푹 쉬며 앞머리를 정리했다.
그것들을 지켜본 루한이 슬몃 웃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건 처음 보는것 같다. 세상 다 가진 소년의 얼굴을 한 민석은 루한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루한이 조금 아쉬운듯 캔커피를 만지작 거리다 뒷걸음질을 쳤다. 시선은 여전히 민석에게 두고서.
민석은 여전히 뛰어다녔고 앞머리를 휘날리며 준면과 세훈 주위를 빙빙 돌았다. 뭐가 그리 신났는지 영락없는 소년같은 모습에, 백현과 찬열마저 웃음이 터졌다. 민석이 자리에 멈춰서고 더웠는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두 세개 풀었다. 땅에 떨어져있던 물병을 들어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시원하다는듯 활짝 웃다가, 문득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것같은 느낌이 들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루한이 서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채로 슬금슬금 뒤로 걷는 루한의 모습에 당황한 민석이 물병 뚜껑을 주섬주섬 끼워 닫았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공원에는 무슨일로 온걸까?
"준면아, 나 잠시만."
"어디가?"
"저기. 아는 사람이 있어서."
민석이 루한을 가볍게 가르키며 그들의 곁에서 벗어났다. 루한 역시, 자신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민석을 보았다. 아까부터 민석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루한은 자신에게 뛰어오는 민석을 보며 무어라 인사해야할지 빠르게 고민했다.
가까워지고 있다. 민석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흔들며 루한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다섯걸음만 더 오면, 바로 코앞이다.
"......."
"루한..씨!"
"...안녕하세요."
"하아, 하아, 아- 힘들어!"
그가 무릎을 짚으며 혀를 내밀었다. 셔츠가 땀에 젖어있었다. 앞머리도 땀으로 끈적이게 젖어있는 상태였다. 민석의 상태가 무척이나 더워보이자, 루한이 손을 들어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
헥헥거리던 민석이 느껴지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루한이 손부채질을 하고 있자 민석이 눈을 깜빡거리며 멀뚱히 바라보았다. 루한은 뻘쭘해져서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민석이 이내 입술을 깨물다 개구지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나 저기서, 루한씨 보고 바로 뛰어왔어요."
"잘했어요."
"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사무실 안이 좀 더워서.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
"그랬구나...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음..."
"......"
"..민석씨가 골 넣을때부터?"
"어! 진짜? 나 골 넣는거 봤어요?"
"네."
"아! 대박..!"
민석이 발을 동동구르며 소리내어 웃었다. 루한 역시 민석을 보고 가만히 웃었다.
"아.. 좀 부끄러운데."
"공 잘 찼어요."
"정말요..?"
"네. 정말요."
쑥스러워진 민석이 뒷목을 매만지며 허허- 하고 웃었다. 루한도 따라웃다가 문득 자신에게 느껴지는 또 다른 시선에 목을 살짝 빼 민석의 뒤를 쳐다보았는데, 민석의 일행들이 다가오는게 보였다. 루한이 웃음을 멈추고 한발 두발 뒤로 걷기 시작하자 그런 루한을 보고서 민석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투닥거리던 백현과 찬열이 어느새 어깨동무를 하고 민석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준면과 세훈은 여전히 팔짱을 낀채였다. 영락없는 20대 아저씨들 같았다.
"형."
찬열이 백현의 어깨에 둘러진 팔을 내리며 호기심의 눈빛으로 민석을 불렀다. 키가 큰 두 사람과 조금은 작은 두 사람이 등장하자 순식간에 5대 1이 되버린 상황에 루한이 멋쩍은듯 머리를 만졌다.
그러다 민석을 보고 입만 슬쩍 웃어보였더니, 민석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루한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민석에게 잡힌 팔을 본 루한이 놀라 웃음을 거두고 민석의 눈을 쳐다보자 그는 다시 루한을 보며 '인사할래요?' 하고 말했다.
"누구셔?"
"가만있어봐, 지금 말해줄게."
"......."
그리고 루한에게 눈짓하며 당신에 대해 이야기 해도 괜찮냐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루한은 소리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민석은 작게 웃었다.
사실 축구하는 민석을 적당히 지켜보다가 자리를 뜨려는 생각이였지만 민석이 자신을 발견하게 되자 그때부터 적잖히 당황한게 없지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또 이런 자리가 싫지는 않았다. 민석과 친한 사람들처럼 보이는데 인사 한 번 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아는 사람 있으려나? 이쪽은 우리 병원 정신병동에서 근무중이신 루한 선생님이야. 인사들 해."
"어? 이 분은 그때 봤던.."
민석의 소개에 준면이 먼저 루한을 알아보았다. 그때 루한의 환영식을 할때 민석과 함께 그곳에 참여했던 터라 쉽게 누군지 알아볼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한이 익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며 먼저 인사하고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반갑게 잡은 준면이 신기하다는듯 루한에게 꾸벅 인사했다. 루한도 따라 인사했다. 멀뚱히 그 광경만 지켜보며 곁에 있던 찬열과 백현도 어느새 방긋 웃으며 루한에게 다가와 인사 했고, 세훈도 곁에 슬쩍 건너와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그런데 민석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아. 그게!"
준면이 루한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반가움 반 의아함 반으로 쳐다보더니, 역시 그게 궁금했나보다. 민석이 그 말을 듣고 먼저 대답하려 했으나 루한이 눈을 굴리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장 이상적인 대답으로.
"옆집 살아요."
"아. 그래요?"
"네.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오. 뭐야, 그럼. 이웃에.. 병원 동료?"
민석과 루한을 뺀 나머지 네명이 신기하다는듯 오오-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민석은 그런 반응에 쑥스러웠는지 그런 이상한 소리 내지 말라며 애꿎은 백현의 팔을 한대 퍽 쳤다. 그리고 그들은 밝게 웃고는 주저없이 순서대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럼 저도 인사드릴게요. 저는 변백현이고, 민석이형이랑 축구 하면서 친해졌어요. 과는 다르고요, 정형외과 전문의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박찬.."
"얘는 박찬열이구요. 소아과에서 근무해요. 얼굴 보니까 상당히 안색이 좋으시네. 뭐, 허리라던가 무릎같은거. 아픈곳은 없으시구요?"
"아하하... 네. 괜찮습니다."
"야. 변백현 뭔데. 내가 말할거야."
"오세훈이에요. 소아병동 레지던트입니다."
"야 잠깐만 나 먼저 말 좀 하고.."
"김준면입니다. 저도 소아과 전문의구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뵐줄은 몰랐는데."
모두가 찬열의 말을 자르고 하하호호 즐겁게 첫 대면을 나누었다. 찬열이 눈을 치켜뜨며 그들 사이를 뚫고 나오려 했지만, 그들의 축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철벽수비중이였다. 민석이 그런 화목한 분위기에 피식 웃었다. 루한도 그 분위기가 싫지 않았는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살짝 토라진듯한 찬열도 이내 환하게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박찬이라고 부르시면 되요."
친화력이 빠른 사람들 같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다. 루한은 속으로 생각하며 찬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까, 해외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오! 정말?"
준면이 루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민석은 옆에서 물을 다시 마시며 루한의 눈을 쳐다보았다. 준면과 민석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놀란듯 루한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이름이 뭔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어. 찬열과 백현이 서로 마주보고 눈빛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흔들었고, 루한은 미미하게 웃으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네. 맞아요."
"오...해외라. 어디서 오셨어요? 어떻게 한국으로 발령받으신거에요?"
"..특별한 지시로 인해 홍콩에서 전배오게됐습니다."
"아! 그럼..국적도 혹시,"
"중국 베이징 출신이에요."
"아. 정말요? 그럼 외국인이시네요? 한국말을 너무 잘하셔서 한국인인줄 알았는데! 그치?"
"아직 많이 부족해요."
"부족하긴요! 얘보다 더 잘하는것 같은데요?"
"아 너 자꾸 나한테 왜그래."
찬열과 백현이 신기하다는듯 엄지를 치켜세우며 놀란말투로 말했다. 그러다 또 투닥거리자 루한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캔커피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민석이 둘의 팔을 툭 치며 장난 그만치라고 엄포를 놓았고, 준면은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적응하기 힘드실텐데..특별히 힘든건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다들 너무 잘해주셔서 홍콩에서와 크게 다를게 없어요."
"그래요..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자주 봐요."
"네. 좋아요."
"저희는 병원에서 운영하는 축구회 멤버들이거든요. 혹시 축구 좋아하세요?"
"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래요? 잘됐다. 민석아, 루한씨도 축구회 들어오라고 해."
"그럴까? 루한씨. 같이 축구할래요?"
"아..그게."
루한은 축구를 좋아하는게 사실이였다. 하지만, 종대도 축구를 좋아하는데. 번뜩 스쳐가는 종대 생각에 루한이 잠시 손사레를 치며 대답했다.
"저에게 다른 동료가 있어서요. 그 점은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그래요? 아쉽다."
준면이 계속해서 루한에게 말을 하자 가만 보던 세훈이 준면의 옆에 왔다. 그리고 팔을 잡고 꾹 눌렀다.
"왜?"
"선배. 우리 이제 들어가봐야 할 시간 아니에요?"
"어? 그래? 벌써?"
"30분 넘게 놀았어요 우리."
세훈의 말에 다들 시간을 확인했다. 루한도 덩달아 함께 시간을 확인하고, 이제 다시 돌아가봐야 할 시간이 되자 다들 아쉬운지 어색하게 웃었다. 준면은 세훈에게 잡힌 팔을 빼내어 세훈의 어깨를 감았고, 민석과 루한, 그리고 찬열 백현에게 들어가겠다며 인사했다.
"이제 그만 가볼게. 어디 갔다 왔냐고 박선생님이 동네방네 잔소리 하시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만 들어가봐."
"형, 저도 가볼게요."
"응. 오세훈, 너 준면이 말 잘들어."
"당연하죠."
이어서 찬열도 준면의 뒤를 따랐고 백현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루한에게 꾸벅 인사하고서. 그러다 백현이 뒤로 홱 돌아 루한을 쳐다보았다.
"성함이. 루..루..."
"..루한입니다."
"아 죄송. 루한씨. 우리 다음에 또 봐요!"
민석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는 갑자기 흩어지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오지랖 넓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백현이 민석이 팔을 다시 제 자리에 두게 했다. 민석이 당황한듯 미간을 구기며 백현을 쳐다보았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형은 좀 더 이야기 하다 와요."
"어?"
"준면이 형이 눈치가 없잖아. 그래서 그런거야. 조금 있다 저녁 먹을때 봐!"
"뭐..? 준면이가 무슨 눈치.."
민석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쟤 지금 뭐라는거니?
이번에도 민석과 루한 둘만 남게 되자 민석은 더워서 땀에 젖은 두 손을 바지춤에 가져다대며 슥슥 문질렀다. 바람이 시원하게 몰아치는지 조금씩 더위가 사라지는듯 싶어 열려진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기로 했다. 루한은 남아있는 커피를 마시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끄럽죠. 쟤네."
"아니요. 그냥 민석씨가 다 모여있는줄 알았어요."
"욕이에요...?"
"좋다는 뜻이에요."
민석이 씁쓸한 눈을 감추지 못하고 루한을 올려다보자 그가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은 사람들같은데, 욕으로 들릴수가 있나... 이해 못한 루한은 그저 웃었다.
"내가 제일 착해요."
"......."
"못알아듣는척 하지 마요 루한씨."
"네."
루한이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웃었다. 웃음이 크게 나오려는걸 참는 눈치였다. 민석이 입술을 비죽이며 '진짠데..'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허리를 돌리는 스트레칭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축구회 진짜 안들어올래요? 재밌을텐데."
"......."
"행사도 가끔 하는 편이고. 이 축구장 말고도 더 넓은 축구장 있거든요. 다음 달에 또 경기도 있고."
"저도 축구는 좋아하는데.."
"아, 동료분. 맞다 맞다."
"......."
"그럼 그 분한테도 한 번 물어보면 안되는거에요?"
"......."
"뭐랄까? 우린 이웃이니까!"
"......."
"같이 이것저것 하러 다니면 좋을거 같아서...그래서요."
"사실,"
"응?"
"사실, 그 동료는 제가 뭘 하든 상관안하는 친구에요."
"아..그래요?"
"하지만 뭐든 같이 해야 제가 마음이 편해서요. 그래서에요. 늘 저한테 맞춰주니까."
"그러시구나."
"....그런데 또 모르겠어요."
"......."
"마음이 바뀔지도."
루한이 이마를 긁적였다. 그의 앞머리가 하늘을 향해 예쁘게 뻗어있었는데 덕분에 드러난 매끈한 이마가 긁는 손가락으로 인해 구석이 빨개졌다. 민석이 그런 루한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생각이 바뀌었음 좋겠다."
"........"
"멤버가 늘었으면 좋겠네에~"
여전히 팔을 팔랑거리고 허리를 돌리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 루한이 들고있는 캔커피는 다 비워진 상태였다. 정말로 잠이 다 깨버렸다.
"이사는 언제 와요?"
"다음주 내로 할 예정이에요."
"빨리 와요."
"........"
"난 이제 곧 마무리 되거든요. 빨리 집들이 해야지. 얼른 와요."
또...웃는다.
지금껏 본적없는 하얗고 꽃같은 웃음으로 또 예쁘게 웃는다. 루한은 그 웃음에 얼이 빠져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이런 웃음을 가진걸까. 말랑말랑한 볼이 한껏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휘어진 눈은 원래대로 길게 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루한은 민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알았죠?"
"....그럴게요."
민석이 쐐기를 박는듯 루한의 팔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루한은 뒷짐을 진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석은 한손을 풀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루한씨랑, 나랑,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가볍게 연락처 정도는 압시다."
"..아,"
"생각해보고 연락 주기에요?"
민석이 루한에게 핸드폰을 들이밀며 번호를 찍으라고 손짓했다. 루한은 그걸 받아들고 손가락을 눌러가며 정성스럽게 번호를 눌렀다. 민석은 다시 가져와 전화버튼을 눌렀고 곧 신호가 갔다. 루한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일어나는것 같았다.
"컬러링 봐. 새소리야~ 짹짹!"
"아..바꿔야 되는데."
"바꾸지마요. 엄청 매력있네~"
루한이 무안한듯 전화기를 끊지 않는 민석의 손을 잡아내리려 했다. 하지만 휙 피해 한 걸음 물러난 민석이 씨익 웃었다. 저 장난치는 얼굴은 정말 소년같다. 그렇게 생각한 루한이 민석을 따라갔다. 그리고 민석이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을 치며 루한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성큼성큼 뛰고 있다. 루한의 바지 뒷주머니에서는 진동이 계속해서 울린다. 핸드폰을 귀에 댄채로 신나게 뛰어가는 민석의 뒷모습을 쫓았다. 전화 받으라는건가..
민석이 짠- 하고 뒤를 돌았다.
"받아요! 빨리."
"......."
"전화! 얼른 받으라니까요."
"......."
...받으라는거구나.
루한이 민석을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민석을 잠시 노려보는척 했다. 민석도 그제서야 자리에 멈춰 루한을 보고 손을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어느새 거리가 멀어진 두 사람이였다. 작게 말하면,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루한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멈추지 않는 진동을 드디어 멈추게 했다. 전화를 받았다.
"....뭐해요?"
"엄청 늦게 받네!"
"정말 받으라고 할줄은 몰랐죠. 미안해요. 번호 저장은 할게요."
"뭐라고 저장할거에요? 이웃? 직장동료? 민석이?"
"음. '민석이'는 좀.."
"어감은 되게 편한데? 그럼 민석씨?"
"..그러죠."
"나는 그럼 뭐라고 저장할까....음. 이웃 아저씨?"
"민석씨."
"아, 장난 장난. 표정 풀어요! 멀리서 봐도 다 보인다."
"먼저 아저씨라고..."
"장난이라니까. 그럼, 서로 이름으로 저장해요."
"그럼 난 민석동생."
"에? 아저씨!!"
"장난이에요."
어느새 함께 장난 치기에 맛들린 루한이 지지않고 민석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민석을 등지고 반대로 걸었다.
"나 아저씨로 보여요?"
- 아-니요.
"그럼 그런 장난은 왜 해요."
- 그냥.
"그냥?"
- 헤헤.
그대로 둘은 전화를 끊지 않고 각자 땅을 툭툭치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서로 정반대 방향의 길을 걸었다.
- 저번에..말이에요.
"......"
- 나. 구해준 날."
"...네."
- 그땐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 못했어요. 너무 놀라서 오히려 내가.. 좀 놀라서 무례하게 행동했죠? 이상하게, 때리기나 하고.
"안아팠어요. 그래서 괜찮았어요."
- 그래요? 당황해서 하나도 기억이 안나네~
"괜찮아요."
- 아니, 내가 미안해요. 그리고 지금 다시 말하는거지만요. 정말 고마워요.
"......"
- 진짜로! 엄청엄청. 고마워요.
고맙다.
루한이 민석의 때아닌 고백에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들리지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민석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는걸까. 잘못 느끼는건가. 처음 느끼는 간지러운 느낌이 사근사근 드는것 같다. 루한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채, 바람에 머릿결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민석 또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루한은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상태였다.
- 다음엔 내가 루한씨 구해줄거에요.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는다! 이게 내 신조니까.
"민석씨가 구해줄만한 일이 있길 바랄게요."
- 기대해요. 나 약속 잘 지키는 남자니까.
"기대할게요."
- 근데 진짜 큰일 나면 어떡하지?
"구해줘요."
- ........
민석이 풉, 하고 전화기에 새어나가지 않게 웃었다. 그리고 더운지 손바닥으로 바람을 만들어 얼굴에 부채질을 했고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루한씨도 가만보면 장난 참 잘치는것 같단 말이야.
- 일단 지금은 과장님의 잔소리에서 구해줄게요. 늦지 않았죠? 얼른 가요 루한씨.
"늦을뻔 했는데, 일찍 보내주니까 가야죠."
- 농담은.
"..조심히 가요, 이웃 민석씨."
재잘대던 두 목소리 사이에 작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둘은 살풋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루한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저편을 향해 뒤를 돌았다. 아까부터 루한을 쳐다보고 있던 민석이 이제서야 자신을 돌아보는 루한을 보고 예쁜 미소로 웃어보였다. 바람에 날아갈것 같은 작은 몸을 움직이다가 이내 두 손을 들어 루한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토끼처럼 걸었다.
루한은 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캔커피를 버렸다. 가벼워진 두 손이 허전해 팔짱을 꼈다. 바람이 점점 불어오고 있었다. 조금 더 깊게 팔을 얽히고, 민석의 대한 생각을 꾸려보았다. 종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모두 친절한것 같았다. 장난끼도 많고 그만큼 친화력도 좋은 민석과 그의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홍콩에 있는 친구들도 떠올랐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지내려니 많이 외로울것 같았는데, 좋은 이웃을 만난건지. 아니면 그도 모르게 고른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한국 생활이 어떻게 될지 내심 기대되는 루한이였다.
그리고 곧 넣어둔 핸드폰을 다시 들어 통화목록에 들어가 가장 처음으로 떠있는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곧 에딧버튼을 눌러 이름을 수정했다.
"....완전 잘 어울리네."
예쁜고양이, 그가 저장한 이름이 나지막히 잠깐 떴다가 사라졌다.
*
백현과 헤어진 찬열, 준면, 세훈은 각자 소아병실로 들어가 아이들을 한 명씩 진찰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아보이는 아이들은 저녁밥도 잘 먹고 다들 즐거워 보이는듯 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문에서 만나기로 한 그들이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찬열아. 너 근데 음악회 준비는 잘 하고 있어?"
"뭐...나름. 망하지 않을 정도만."
"완전 기대된다?"
"기대하지마. 그냥 마음 놓고 봐."
"어우, 그래도 예전에는 장기자랑 얘기만 하면 소리만 뻑 지르더니. 이번에 연습 좀 했나봐?"
"내가 변백현 꼬셔가면서 진짜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 정말 좋지 않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을 정도만큼만 할거야. 꼭."
찬열은 얼마전 병원에 지각한 사건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고과가 깎인 그 순간부터 난 다시 새로 태어난거야. 꼭, 성공은 아니여도 실패는 하지 않으리.
지켜보던 세훈이 찬열의 어깨를 잡으며 한마디 던졌다.
"기대는 안해요 형."
"응..?"
"최대한 열심히 준비하면, 언젠가 다들 알아줄거에요."
"그래 임마. 잘 해."
옆에서 거든 준면이 찬열을 놀렸다. 세훈과 준면은 쿡쿡 거리며 다른 병실로 돌아갔고, 찬열은 그 자리에 서서 급히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은 다들 나를 까기위해 태어났나봐. 응원은 못할 망정 저런 말이나 하고 앉아있다. 미워 죽겠다!!
하지만 곧 찬열의 옆에 모여든 아이들 덕분에 그는 급하게 표정을 풀고 자리에 쭈그려 앉아 아이들 눈에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어떤일이 있었는지, 아픈곳은 없었는지 묻던 찬열에게 아이들은 해맑게 대답했다.
그리고 찬열은 생각했다. 내가 정말 힘든 몸을 이끌고 음악회 준비를 하는 이유는, 역시 이 천사같은 아가들 때문이라는걸.
준면과 세훈이 2층 가장 맨 끝 호실로 들어갔다. 요새 가장 두 사람이 모든 관심을 쏟아 돌보고 있는 아이가 편안한 안색으로 곤히 누워 자고 있었다.
"많이 좋아진것 같네요."
"그러게.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조금 더 지켜봐야 하긴 해야겠는데, 크게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
"네."
손가락이 비죽 나와있는걸 세훈이 아프지 않게 잡아올려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병실 안을 채웠다.
"세훈아."
"네."
"너는 이런 아이들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감사하다는 생각이요."
"......."
"지켜주고 싶고, 치료해주고 싶고."
"......."
"책임져야 할 아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돌볼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최근에는 애들이 저에 대한 경계를 풀어줘서 너무 좋은거 있죠, 선배."
"아이들은 좋은 사람을 구분할줄 알아. 그래서 그런거야."
"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럼. 내가 아는 오세훈은, 적어도 속물은 아니거든."
"......."
"감사할줄 알잖아. 돌볼수 있음에."
준면이 아이의 이불을 다시 한 번 정돈한뒤 차트를 꼭 껴안고 세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머리가 차분히 가라앉은게 보기 좋았다. 가운 안에 보기 좋게 드러나있는 세훈의 니트 또한 넓게 펴주던 준면은, 세훈을 보고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나도 레지때는 이런 저런 생각 많이 했었다."
"......."
"못볼거, 볼거 다 봤으니까. 겁도 많이 났지."
"저도 아직 겁이 많이 나요. 다 보이니까요."
"근데 그게 어쩔수 없는거잖아. 세상이 다 그렇더라."
"네."
"누군가 지켜줘야 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면 돼. 어려운거 아니야, 세훈아."
"......."
"소신 잃지 말고, 지금처럼만 사랑해줘."
"......."
"의학적 지식, 월급, 연봉. 그런거 다 떠나서, 진심으로 지금처럼만 대해줘."
"..네, 선배."
"미리 아빠가 되어보는것도 꽤 좋잖아?"
준면이 웃어보였다. 세훈은 그의 모든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준면은 정말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가 말하는 의학적 지식, 월급과 연봉. 준면은 그런 모든 면에서 단연 튀는 원탑이였다. 하지만 늘 준면의 목적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나을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들이였고 세훈은 그런 준면 밑에서 많은것들을 배워왔다.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였다.
세훈이 가만히 서서 그의 말을 곱씹고, 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준면이 뒤에서 불렀다.
"나가자."
"......."
"..곧 퇴원해도 되겠어. 푹 자게 하자."
"형."
세훈은 가끔 준면에게 선배라고 부르지 않고 형이라고 하기도 했다. 마음 넓은 준면은 그런 세훈을 혼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받아쳤다. 왜 동생?
준면이 대답함과 동시에 세훈은 급작스레 달려가 준면을 힘껏 껴안았다. 형이라고 자주 부르지만, 이런적은 처음이다. 갑자기 자신을 껴안는 세훈에 당황한 준면이 입술을 비죽이며 왜이러냐며 물었다. 하지만 세훈은 찰거머리같이 붙어 떨어질줄을 몰랐다.
"왜 이러는데.."
"형, 너무 좋아요."
"응?"
"형이 너무 좋다구요."
"나? 그러지마. 인기 관리 못해."
"그런거 아니니까 걱정말아요."
"음, 음."
"형같은 선배가 우리 집에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
"나, 어릴때 사랑 별로 못 받고 자랐거든요. 근데 나는 형이랑 있으면 사랑 받는 기분이 들어요."
"뭘...갑자기."
"그래서....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못받은 사랑만큼 다 주고 싶어요."
"........"
세훈의 말에 준면이 멀뚱히 놓은 손을 들어올려 천천히 세훈의 등을 토닥였다. 어릴적 이야기는 세훈에게서 간간히 들어왔던 터라, 대충 그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말 없이 세훈을 함께 안아준 그가 곧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마음이야. 그렇게 앞으로 행동하면 돼."
"....형.."
"다만 네 행복했던 어린시절만 꺼내. 힘들었던 과거를 기억해내려 하면 순수를 지킬수 없어."
"......"
"선배랑 같이 하루하루 배우자. 그게 네 할일이니까."
세훈이 준면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세훈의 얼굴에는 군기가 잔뜩 들어가있었다.
"우리 몇시에 나가기로 했었죠?"
"여덟시."
"가요. 선배."
다시 잘 웃는 세훈으로 돌아오자 준면이 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가끔 그런 세훈이 귀여웠다.
강약이 조정되는 전구를 제일 약하게 켜뒀던 불을 끄고 병실을 나섰다. 누워있던 아이가 입을 한 번 오물거리고는 자리를 뒤척이다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꿈속으로 향했다.
*
"오늘 경수랑 저녁 먹기로 했다고요?"
"네. 선배님한테도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많이 바빠보이셔서요."
"바쁘긴. 종인씨 버리고 나가서 축구까지 하다 왔는데. 비록 졌지만... 분하다."
"그래서 오늘 같이 식사 못하시는거에요?"
"그게 참. 내기에서 져가지고. 박찬열 때문에!"
"진정하세요 선배님."
백현이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렸다는듯 벌떡 일어난 종인을 향해 앉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오히려 뚜벅뚜벅 다가온 종인에게 흠칫 놀란 백현이 뒷걸음질을 쳤다. 곧 자신에게 화가난듯이 들려온 종인의 말은, '저녁 같이 해요. 선배.' 였고, 근엄하게 저녁 내기에서 진 백현은 미안하다며 거절하던 참이였다.
"나 내일도 잠깐 짬내서 축구하러 갈거니까 종인씨 섭섭해 말아요."
"새 프로젝트때문에 자리 비우시는거 다 알아요."
"어.....그래요? 알고 있었어요?"
"선배님에 대해 모르는게 어딨어요. 제가."
"어우..."
닭살 돋는다는듯 스스로의 팔을 헤집던 백현이 이내 개구지게 웃었다.
"근데 오늘은 진짜 축구하고 왔지롱."
"이겨야지 왜 져서 돌아왔어요. 다 알고도 보내드린건데."
"아니, 그런게 있어요. 그냥 박찬열때문에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할거야.."
"아쉽다..."
"근데, 경수랑 많이 친해졌나봐요. 둘이 저녁까지 같이 하고. 물론 오늘은 내가 못가서 많이 아쉽지만 많이 먹고 돌아와요."
"그럼 다음에 시간 될때 같이 가요."
"에이~ 경수가 서운해 해. 안돼."
"경수씨도 허락했어요."
"그럴 애가 아닌데..."
"네?"
"아, 아니에요. 난 괜찮으니까, 둘이 잘 다녀와요. 보기 좋네!"
백현이 부랴부랴 가운을 벗어던지고 가디건을 챙겨입었다. 교수님 만나고서 퇴근 해야한다. 아직 관문이 남아있어서 좀 짜증나지만..
"그럼 다음엔 꼭 같이 가기에요 선배님!"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잘 다녀오세요."
"알았네요. 종인씨도 잘 다녀와요."
백현이 먼저 문을 닫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경수와 종인이 저렇게까지 함께 하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자신이 정말 잘 소개시켜줘서 좋은 우정으로 발전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왠지 가운데에 껴서 소금이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종인도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고, 요 며칠 못 본 경수도 왠지 그럴 느낌이였다. 백현은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가운데 껴서 휘둘리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둘이 더 친해지도록 내가 자주 빠져줘야겠다, 라고.
일단 저녁을 사야 한다는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은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 사람들 식탐이 어마어마해서 너무나 겁이 나지만.. 부디 다음번엔 꼭 이겨주리. 그땐 진짜 민석이형이랑 편 먹을거야.
주먹을 꼭 쥐고 1층으로 내려가는 백현의 뒤로, 병원 내 밝은 스위치가 하나, 둘 밝게 켜지기 시작했다.
잡음 없이 하나 둘 켜지는 전등처럼, 그들의 청춘은 이제부터 시작이였다.
-
암호닉
낫닝겐 / 너구리 / 핫바 / 치즈스틱 / 조무래기 / 노란색연필 / 변골반 / 모카 / 이든 / 낑깡 / 연 / 두부 / 텐더 / 초코푸딩 / 히융융 / 홍홍아직도랩을한다 님♥
세훈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것처럼
저도 모든 독자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S2
글을 쓰게 해주는 원동력인 여러분......애정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