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시작하는 감사한 표지입니다:)
아이됴님께서 주신 감사한 이름표입니다:)
Ep 20. 바람기억 by 경수 + 종인
BGM) 바람기억: 나얼
꿈에 그가 나왔다.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 위로 토닥토닥 쏟아지는 빗소리는 귓가를 가득 메우고, 마주한 시선이 행복해서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둠에 스며든 카페의 불빛은 종인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매일의 풍경이 그러했듯 변함이 없다.
종인의 앞치마 가슴께에 조그마하게 돋아났던 연두빛 새싹은 어느새 선선한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있었다.
지나온 시간을 따라 자라난 푸른 잎들이 서서히 흔들리듯 일렁일 때 종인이 말했다.
'경수야.'
좀 더 낮아진 듯한 그의 목소리는 따스했지만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져서 목이 메어왔다.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꽉 막힌 가슴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하게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을 때, 종인이 환하게 웃었다.
은은하게 비추는 카페 불빛을 가리고 눈이 부셔올만큼, 그는 빛나게 웃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자라있던 푸른 나무가 햇볕처럼 눈부신 그의 미소 아래에서 반짝인다.
그 그림 같은 풍경에 눈가가 시려와서, 경수는 결국 눈을 꼭 감아버렸다.
'...보고 싶었어.'
희미하게 들려온 그의 말에 눈을 떴을 때, 어스름한 새벽 빛에 잠긴 채 곤히 잠든 종인의 모습은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 한참 동안 깜빡깜빡 바라보았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뺨에 서늘한 새벽녘의 공기가 느껴졌지만 종인이 쌕쌕 내뱉은 따스한 숨결이 와닿아 자꾸만 덥혀주었다.
밤새 경수를 받쳐주던 든든한 팔과 이불 속에 함께 나누는 체온이 나른할만큼 포근했지만, 눈을 감기엔 시야를 메운 종인의 얼굴이 아쉬웠다.
이렇게 잠든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서야 두 번째다.
아직 보지 못한 것, 함께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은데...
미동도 없이 종인과 마주하고 있던 경수는 혹여나 종인이 깰까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끌어왔다.
경수는 얼마 전부터 종인의 사진들을 찍어 모으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놓고 '이 쪽 좀 보세요-' 하고 몇 번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어찌나 쑥스러움이 많으신지-
렌즈만 보면 표정이 굳고 시선을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런 모습조차 종인다워서 좋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더 많은, 더 다양한 그의 모습을 담아가고 싶었다.
함께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찰칵,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다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는 옆모습이 좋아서 또 찰칵,
집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가슴 먹먹하도록 좋아서 또 찰칵-
그래서 시선이 마주치는 사진은 많지 않았지만 그런 소소한 일상의 모습과 그 속에 담긴 자연스러운 표정 하나하나가 더 소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경수가 그래도 싫지 않은지, 종인은 '너 때문에 내가 무슨 연예인이 된 것 같다.'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형 보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보려면 더 많이 찍어야 돼요-.'하면 쑥스러운 듯 뒷목을 뽁뽁 긁다가도 어색한 브이자를 날리기도 했다.
찰칵-
정적을 가르는 셔터 소리에도 다행히 종인은 깨지 않았다.
생각보다 너무 크게 울린 소리에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던 경수가 한숨을 폭 쉬곤 제가 찍은 사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진 속 잠든 그의 얼굴 가득 파르스름하게 새벽빛이 내려있었다.
할 수 있다면 이 사진 속에 지금의 모든 기억을 함께 담고 싶다.
뺨에 와닿는 따스한 숨결도, 서늘한 겨울 아침의 공기를 데워주는 포근한 체온도, 순간순간이 아쉽고 소중한 이 마음까지도...
그렇게 한참 동안 잠든 종인을 바라보고 있다보니 푸릇한 새벽을 가르고 말갛게 아침이 밝아왔다.
경수는 그 모든 순간을 기억에 새길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곁에서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종인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왔다.
내일 이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이 시간마다 늘 이 모습을 그리워하게 될까.
괜시리 울적해지는 마음을 숨기고자 경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을 꿈뻑꿈뻑 바라보는 종인에게 일부러 더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침 풍경은 담담하고 조용했다.
종인이 거실의 이불을 정리하는 사이 경수는 거의 다 비운 냉장고 안에 남겨두었던 계란과 식빵으로 간단하게 토스트를 준비했다.
둘이 나란히 설거지를 끝내고 다시 한 번 집 안을 훑어보며 마지막으로 정리를 마쳤다.
조만간 남겨진 것들도 대부분 치워지고 새 주인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경수는 몇 번이고 집안 이 곳 저 곳을 어루만져보았다.
나중에-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될 곳이지만 어머니가 계실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구석구석 돌아보는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경수의 느린 걸음을 종인이 말없이 따랐다.
어머니가 쓰시던 안방 앞에 멍하니 선 경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무덤덤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손 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공항까진 안갈게."
"네."
집을 나서는 길, 한겨울에 접어드는 늦은 아침 공기에 코 끝이 시려왔다.
짐을 잠시 바닥에 내려두고 경수의 목도리를 꼭꼭 여며주던 종인이 담담하게 꺼낸 말에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걷던 사람이 사라졌을 때, 그 허전한 서글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손이 겨울 공기를 가를 때, 그 시린 슬픔을 그가 오래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짐을 나눠들었으면서도 그래서 경수는 선뜻 비어있는 종인의 손을 잡지 못했다.
...욕심이었을까.
시작부터 이별이 정해져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지 못한 것은, 역시나 이기적인 것이었을까.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기억만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잊지 않기 위해- 잊혀지지 않기 위해 애를 태우는 마음을 잘 알면서도 그를 잡고 있었던 것은
역시나 잘못된 생각이었을까.
곁에서 말없이 걷는 종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경수의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는 분명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움에 지치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자책하고 마음 아파할 것이다.
...경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억이라는 창살 속에 만들어진 시간의 감옥에 갇혀서 힘겨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아파해도 경수는 함께 해줄 수 없을 것이다.
문뜩 가슴이 아려서 몰래 입술을 꼭 깨물었다.
눈가로 몰려드는 얼얼한 감정들을 종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손 잡아도 돼?"
그래서, 종인이 슬그머니 빈 손을 잡아오며 뒤늦게 의미없는 동의를 구했을 때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몰래 깨문 입술 속으로 수많은 말이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었다.
찬 겨울 공기를 가르고 닿아온 체온에 움찔, 저도 몰래 움츠러들었지만 종인의 따스한 손은 모른 척 경수의 손을 꽉 잡아왔다.
이 체온을... 이 다정한 감촉을... 차마 놓을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를 위해서라면-
어쩌면- 오늘 아침 일찍, 먼저 종인을 돌려보내야 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잡지 말았어야 했다.
언젠가, 미안해하는 그의 마음 뒤에 숨겨진 감정은 몰랐어야 했다.
지난 여름, 그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행복해서 자꾸만 찾아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를 정말 위했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 흐르고 흘러 도착한 결말에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웃으면서 인사해야할텐데,
이렇게 못되게 그를 붙잡았으면 차라리 마지막까지 뻔뻔하게 굴어야 할텐데.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무기력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서 자꾸 눈이 시큰거렸다.
그와 헤어지기 전, 하나라도 더 좋은 기억과 흔적들을 남기고 싶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뒤늦게서야 남겨질 그와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어린 제 모습이 한심했다.
"...울지 마."
뒤늦은 미안함에 차마 꼭 잡지도 못한 손 끝으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애써 참고 있는 눈물을 눈치챈 듯, 경수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아오며 종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 열심히 살거야."
"..."
"너 금방 놓고 잊어버릴 거였다면, 그 날 너희 아버지께 그렇게 무작정 쫓아가지도 않았어.
...지금은 내가 아직 어려서 이렇게 보내주지만..."
"..."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절대 놓지 않을 거니까.
그 약속 지킬 수 있을만큼, 너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수 있을만큼-
열심히 살거야."
"..."
"그러니까 너도 강해져서 돌아와. ...나 지켜줄 수 있을만큼."
먹먹하게 막혀오는 가슴 때문에 그 말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경수는 그저 약속이라도 하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걷는 길 저 멀리 정거장이 보였다.
마침 시간을 잘 맞춰나온 것인지 공항버스 한 대가 이제 막 정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 대 정도는 그냥 보내도 시간이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같은 듯, 둘 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지만
천천히 정거장에 들어설 때까지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내리는 기사 아저씨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짐을 버스에 실어주는 아저씨를 돕느라 잡고 있던 두 손도 떨어졌다.
'곧 출발할게요-' 하는 기사의 말에, 아쉬운 마음도 몰라준 채 등을 떠미는 종인의 손길을 따라 경수는 얼떨결에 버스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른 창가 쪽으로 몸을 옮기자 바깥에서 종인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얇은 유리 한 장 너머에서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보였다.
...진짜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오늘 아침에서야 뒤늦게 이별을 실감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버스에까지 오르니 온 몸으로 느껴지는 현실은 더 낯설게 다가와서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흔들리는 시선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경수는 그저 유리창에 조금 더, 조금 더 바싹 다가설 뿐이었다.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있었지만 마치 멈춘 것처럼 종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무뚝뚝한 얼굴에 드리운 미소도, 천천히 깜빡이는 눈꺼풀도, 방금 전까지 맞잡고 있던 커다란 손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유리창에 손을 얹은 채 자꾸만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종인도 버스 쪽으로 다가왔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 차가운 현실의 감촉에 결국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려서, 경수는 얼른 눈을 문질렀다.
일렁이던 종인의 미소가 다시 또렷하게 보였다.
다시 만날 미래의 어느 날까지, 마지막이 될 그의 기억 속 자신의 모습이 눈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서늘한 유리 너머로 마주한 체온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라며 경수는 물기가 채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버스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종인이 한 걸음 물러섰다.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지는 거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을 때 문뜩, 방금 전까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닿아있던 종인의 빈 손이 들어왔다.
날이 추운데... 둘이 함께 걸어왔던 길을 홀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경수는 함께 해줄 수 없다.
하지만...
"아저씨, 잠시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경수의 외침에 백미러를 통해 뒤를 바라본 기사가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
"잠시만.. 진짜 죄송해요, 잠깐이면 돼요!"
다급한 마음이 전해졌을까.
기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서서히 움직이던 버스를 세웠다.
'잠시만.. 잠시만..'하며 급하게 이곳저곳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든 경수가 서둘러 앞문 쪽으로 달렸다.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인도 당황한 듯, 버스 앞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1분만요. 잠깐만, 잠깐만 문 한 번만...제발요-"
몇 번이고 부탁하는 간절한 목소리에 기사는 '시간 늦어지면 안되는데...'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닫혀있던 앞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밖에서 걱정스레 차 안을 올려다보던 종인이 문이 열리자마자 '무슨 일이야? 왜 그래?'하고 물어왔다.
"이거 끼고 가요, 형."
"..."
"집에 가는 길에 손 시리잖아요."
서둘러 종인에게 건넨 것은 경수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털장갑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계속 경수의 체온에 데워져있어서 열린 문 사이로도 느껴지는 시린 공기를 조금이나마 가려줄 수 있을 것이다.
"..."
서두르느라 못다한 인사까지 마저 하고 싶었는데- 안녕이라고 말하는 순간 심장이 깨어질 것 같아서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당황한 것인지, 별 일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장갑을 받아든 종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버스 문이 닫혔다.
한 걸음씩 물러선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스친 것도 아주 잠깐, 버스는 바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창 밖의 모습이 바뀌었다.
'위험하니까 이제 가서 앉으세요-' 하는 기사의 말에 감사하단 인사를 꾸벅한 경수가 고개를 몇 번이고 돌려보았지만
이미 빠르게 멀어진 종인의 모습이 보일리 없었다.
멍하니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경수는 가만히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금 전까지 종인의 손이 닿아있었기 때문일까.
서늘한 차창 어딘가에서 따뜻한 그의 체온이 지친 경수의 이마를 가만히 짚어오는 것만 같았다.
점차 희미해지는 그 흔적에 눈가가 시큰거려왔지만 애써 입술을 깨물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횡단보도에 서서 손을 호호 불고 있는 어느 여학생,
갈색 털모자를 푹 눌러쓴 채 거리에서 군밤을 팔고 있는 할아버지,
카페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잔을 앞에 둔 채 책을 보고 있는 젋은 여자,
또래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건들건들 걷는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를 달려 버스는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그가 있는 세상.
그 세상 속에 이렇게나 많은 삶이 살아가고 있었다.
경수는 새삼스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늘 외롭고 비어있던 제 주변의 세상은 어느새 이렇게나 가득 차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상을 향해 닫혀있던 문은 종인과 마주했던 그 날, 카페에 두고 나서던 우산을 열쇠 삼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도 없었던 밤, 그 길에서 들려온 음악소리는 어쩌면 기적이었을까.
그는 오늘만을 살던 자신에게 내일을 기다리게 해주었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자꾸만 웃음이 날 수도,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었다.
언제부턴가 고요하고 미동도 없이 가라앉아있던 마음에 물결이 일기 시작해 점점 더 커다란 울림이 되어 돌아왔다.
내일이면 그가 없는 하늘 아래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걷고 있다.
바로 곁에서 손을 맞잡을 수는 없겠지만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다.
같은 미래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뒤처질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기다려준 그를 위해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이번에는... 어쩌면 자신이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고 경수는 생각했다.
금방 올게요.
형이랑 당당하게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강해져서 올게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던 나에게, 이제는 당신이 미래니까요.
우리의 미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당신 곁으로 돌아올게요.
이별의 무게에 눌려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가슴이, 쿵- 쿵- 조용히 뛰기 시작했다.
.
.
.
...갔다.
버스가 멀리 사거리를 돌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종인은 그제서야 눈을 깜빡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내주었다.
잘했다, 김종인.
잘 보냈다.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자신을 다독이던 종인은 손에 들린 경수의 장갑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다 천천히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부드러운 촉감이 찬 공기 속에 홀로 남겨진 종인의 빈 손을 희미하게 감싸고 돌았다.
손을 마주 잡고 함께 왔던 길을 따라 혼자 걷는 허전함이 조금이라도 달래질까, 종인은 마치 녀석의 손인마냥 장갑을 더 꼭 쥐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한 듯한 자신의 모습이 그 동안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왔기 때문인지, 이 작은 온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종인은 집으로 향하는 길을 지나 계속 걸었다.
어젯밤, 겨울외투 하나만 걸친 채 간단한 차림으로 나섰던 탓에 스치는 바람 아래 드러난 뺨이 얼얼해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천히 걷는 길 구석구석 녀석의 모습이 숨어있어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 여름날, 내리쬐는 태양 아래 내달리던 길을 지난다.
여름빛을 한껏 머금은 해바라기 꽃다발 너머, 말갛게 웃던 너와 마주한 학교 앞을 지난다.
매일 녀석이 자신과 만나기 위해 지나왔을 골목길을 걷는다.
너를 찾아 헤매다 결국 숨기지 못한 마음을 드러냈던 담장길이 보인다.
그렇게 기억만 가득한 길을 따라 걸으니 경수를 보낸 것이 방금 전 일인데도 이미 아득한 옛날 같았다.
이 헤어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인도 나름대로 많이 고민했다.
결국 여기가 끝이라는 뜻일까.
좀 더 참지 못해서, 좀 더 잊으려고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일까.
우리의 미래는... 정말 함께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는 가슴이 답답해와서 더 이상 떠올리지 않고 싶었다.
곧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붙잡고 싶은 마음도.
혹시나 녀석을 원망하게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까. 그렇게 후회하는 순간이 온다면-
혼자 이겨낼 수 있을까.
그렇게 괴롭다가도 말갛게 웃으며 다가오는 녀석을 보면 모든 것이 잊혀졌다.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그저 지금만이 소중했다.
녀석을 처음 만난 한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가고, 바람에 풀내음이 실려 날리는 가을을 보내고 매일의 햇살조차 시린 겨울이 올 때까지-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았던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 문뜩 깨달았다.
마치 종인의 마음 깊은 곳에 당연한 사실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듯, 그것은 기척조차 없이 조용히 떠올랐다.
두 사람의 미래는 결국 종인도, 경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처음 만났던 날, 네가 들고 있던 초록빛 우산 밑에서도 너는 흠뻑 젖어있었다.
도저히 혼자 두고 돌아설 수 없었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너는 내 세상의 가장 깊은 가운데로 들어섰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다시는 비에 젖지 않도록, 커다랗게 드리운 우산 같은 사람.
내 사랑은, 그런 것이다.
만약... 아주 만약에 너의 미래에 내가 없다고 해도 널 위해 살아온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만큼 너는 나에게 가치있는 사람이니까.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변화와 이별을 두려워하기에는,
널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 많다.
깨닫는 순간, 그 동안의 갑갑한 가슴은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리고 찬찬히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싶어서 녀석이 좀 더 천천히 와야하는 게 아닌가- 어이없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느새 종인은 둘이 함께 할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둘이 약속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보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이별은 어쩌면 좀 더 단단히 서로를 보듬어주기 위해 주어진 준비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역시나 두 사람의 처음이 시작되었던 곳.
익숙한 간판과 수백번을 지나던 유리문 너머 카페는 불이 꺼져 있었다.
문 앞에 '주인 사정으로 오늘은 쉽니다. 죄송합니다.'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쓰여진 종이 한 장만 붙어있었다.
어쩐지 기운이 빠지면서 아득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닫혀진 카페 앞 골목에 우뚝 선 종인은 가만히 잠겨진 문 너머 빈 카페 안을 바라보았다.
저 희미한 어둠 너머- 녀석이 있다.
곧은 자세로 앉은 채 펜을 들고 무언가 열심히 써내려가던 네가 있다.
소리도 없이 그저 그 곳에 있을 뿐이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가던 네가 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가만히 웃던 네가 있다.
너에게...
...안녕이라고 인사는 해줄 걸 그랬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지난 밤, 수줍고도 애틋하게 건넨 네 마음에 답해줄 걸 그랬다.
나만 혼자 걷는 것이 아닌데... 너 역시 홀로 걸어야 할 길이 무섭고 겁이 날텐데,
가슴에 담아둘 수 있게 내 마음 한 조각 정도는 전해줄 것을 그랬다.
혹여나, 널 너무 얽매는 것은 아닐까-
배려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것은 어쩌면 그저 내 두려움이었을지 모르겠다.
네가 남겨주고 간 것들은 이만큼인데, 너에게 내가 준 것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다.
가슴 가득 담겨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어본 적이 없는 말은 들어줄 사람도 없이 빈 골목을 지나는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불어오는 바람 끝자락에 서늘한 물기가 느껴졌을 때 문뜩 종인의 코 끝으로 차갑고 가벼운 무언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어느새 하얗게 물든 하늘에서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는 첫눈이 좀 늦었나..."
초점없는 시선으로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의 귓가에 문뜩 쌕-쌕-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
그 작은 울림에 퍼뜩 정신을 차린 종인이 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어젯밤, 품 속에서 잠든 채 가만가만 내쉬던 녀석의 숨결 같았다.
하지만 천천히 하나 둘 바람을 타고 내리는 작은 눈송이들 너머 보이는 것은 종인이 지나왔던 빈 골목 뿐이었다.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그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또 한 번 나지막하지만 조금은 가쁜 소리가 가만히 종인의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한 종인이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볼 때쯤,
부드럽게 종인의 뺨에 또다른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는 날은 그 소리에 가려 세상이 고요해진다.
그 고요한 정적 속에 낮은 숨소리만이 귓가를 울려오고 있었다.
뺨에 맺힌 서늘한 감촉이 뜨겁게 흘러내렸을 때,
그제서야 종인은 그 숨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홀로 선 골목에 내려앉은 고요한 겨울 속에서 소리 없이 종인의 울음이 퍼지고 있었다.
사실은... 보내고 싶지 않았다.
붙잡을 것만 같아서 공항까지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시작인데, 떨어지고 싶었을 리가 없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별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어른스러워지고자 노력했지만 종인 역시 두렵지 않을리 없었다.
보내고 돌아서자마자 벌써부터 그립다.
약속된 미래까지 남아있는 막막한 시간의 장벽에 압도되지 않고자 애썼지만 자꾸만 서러워졌다.
매 순간, 당장 지금 이 순간 벌써부터 느껴지는 빈 자리에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왔다.
기나긴 시간과 운명의 무게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스스로가 겁난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종인은 손에 든 경수의 털장갑을 마치 마지막 구원인 것처럼 꼭, 더 꼭 움켜쥐었다.
어느새 온기는 식은 채 시린 바람이 서렸지만 부드러운 느낌만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같은 하늘 아래 남겨진 마지막 희망인 양-
그렇게 종인은 한참을 장갑을 쥔 채 빈 골목에 서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에 너를 맡긴다.
짧았기에 더 소중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을 믿기에.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진 것은 체온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선 종인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그리고 맞잡았던 손을 기억하며 꼭 쥔 주먹 위로- 위로하듯 그렇게 첫눈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미래에서 만나자.
서로의 우산이 되어서.
그 때까지,
잠시 안녕.
불꺼진 빈 카페 앞에서 그렇게 종인은 못다 나눈 이별을 고했다.
.
.
.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다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 곽효환, 얼음새 꽃-
+주저리주저리 |
꼭 왜 이렇게 새벽시간에만 찾아뵙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내일은 월요일인데 왜...?;;;ㅋㅋㅋㅋ 사실 주말 내내 시험에 시달리다보니 저한테는 이제 막 주말이 시작되는 기분인데 진짜 월요일이네요;;ㅠㅠ ...워낙 낮 시간에 찾아뵌 적이 거의 드문 것 같은 건... 제 기분 탓일까요?;;;ㅎㅎ
...너무 오랜만에 찾아뵌 게 민구스럽고 쑥스럽고 죄송하고... 막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한 번 해봤습니다;;; 이젠 왠지 제가 죄송하다고 하는 말은 믿지 않으실 것 같아요... 흡..ㅠ...
그래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덕에 오늘 시험은 '나름(...:))' 잘 봤습니다ㅠㅠㅠ 뭐랄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라는 마음의 희망(이라고 쓰고 반성이라고 읽지요..)을 발견하게 해준, 그런 시험이었달까요...^^... 응원해주신 여러분, 이해해주시고 기다려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ㅠㅠ 바쁘단 핑계로 감사말씀은 하나하나 남겨드리지 못했지만 큰 힘이 되었습니다ㅠㅠㅠ 졸린 눈 막 비비고 이러고 있으면 안돼!! 이러면서 세수 한 번 더 하고 오고ㅠㅠ 그렇게 정신 차릴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셨어요ㅠㅠ 감사합니다ㅠ
밀린 댓글들이 많지만 너무 늦어진 20화를 먼저 가지고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오자마자 붙들고 앉아있던 것이 왜 지금 이 시간인가요;;;; 으하하;;;
그래도 한 가지, 어떤 곡을 BGM으로 넣어야할지- 원하는 분위기를 찾을 수 없어서 헤매고 있다가 잠시 손을 놓은 사이 나얼 님이 앨범을 내셨다는 게 정말 기적같은 일이랄까요...;;ㅎㅎ
사실 20화는 시작할 때부터 생각해두었던 BGM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음... 이건 뭔가...10%가 부족해...ㅠㅠ' 하는 기분이 들어서 선뜻 쓸 수 없던 참이었거든요;;ㅎㅎ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두 녀석의 이별에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바람기억을 처음 듣고 오랜만에 노래를 듣고 울 뻔 했네요- 사람 많은 곳에서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 뻔 해서 고생했습니다;; 음악 자체가 가지는 순수한 힘을 믿기 때문에, 결국 고심 끝에 20화 BGM은 완전 최신곡인(ㄷㄷㄷ;;;) 나얼 님의 신곡으로 결정했습니다.
벌써 3시가 가까워져 가네요- 오타 수정하느라 한 번 보고 나면 아마 또 새벽녘인 3AM에 글을 올리는 센스돋는 짓을 하게 될 듯 합니다. 기다려주신 것에 비해 사실 너무 소소한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소소한 이별이라니, 제 마음 속에 있는 거창한 이별은 그럼 대체 뭘까요;;;ㅋㅋㅋ) 사과가 추구하는 것이 결국 네 녀석의 성장인만큼, 이 시간도 결국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카디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데... 언제나 부족한 필력이 제 발목을 붙잡는군요;;;
오랜만에 아까 잠시 독방을 슬쩍 들여다보니 아마 이번주에 시험이신 분들도 많으신가봐요..ㅠㅠㅠ 이번 한 주도 만만하지 않은 한 주가 될듯 싶지만, 그래도 저희 모두 또 힘내요-ㅠㅠ 기운 내서 아자아자, 한 주 무사히 잘 보내고 즐거운 추석 연휴를 맞이하도록 해요!!ㅠㅠㅠ ...아... 추석 연휴라니, 갑자기 막 호랑이 기운이 무럭무럭 솟아납니다;;;ㅋㅋㅋ
방학 때에 비해 시간이 줄어들어서 예전처럼 감사한 마음을 바로바로 다 표현하진 못하지만, 결코 그렇다고 작아지진 않았어요-ㅠㅠ 바쁘고 지칠수록 오히려 더 더 감사드리고 더 힘을 얻습니다ㅠ 제가 받은만큼 돌려드려야 하는데... 늘 부족한 모습이라 죄송하네요ㅠㅠ
한 주도 화이팅, 힘내세요!!! 다음 편에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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