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를 시작하는 감사한 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됴님께서 주신 감사한...
음.... 이름표라고 해도 되나요?! 흑흑흑.. 감사합니다ㅠㅠㅠ
너..너무 늦게 와서 확 뺏고 싶어지신 건.. 아니죠?ㅠㅠㅠ
Ep 16. 인사 by 경수 + 종인
BGM) 인사: 제이레빗(J Rabbit) (프로포즈 대작전 ost)
한참을 아쉬운 듯 발을 떼지 못하는 종인을 돌려보낸 후 들어왔을 때, 아버지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문 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주무시는 것 같기도 했다.
경수는 그 앞을 길 잃은 아이처럼 서성였다.
가슴 벅찬 첫 입맞춤의 감촉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마주한 서글픈 현실의 무게가 시리도록 와닿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신다 한들 이미 자신의 마음은 바뀔 수 없음을 알기에 더 죄송하고 그래서 또 슬펐다.
대충 씻고 방에 돌아오니 그제서야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 맥이 풀렸다.
쓰러지듯 풀썩 침대에 누워 가만히 불 꺼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종인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한 빛이 돌았다.
'잘 자.'
두 글자만 덩그라니 적힌 채 보내져온 종인의 문자를 경수는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둘이 만나지 못하는 동안 제법 말이 길어지나 싶더니, 한 번 얼굴을 보았다고 그새 길이가 또 확 줄었다.
하지만 그 두 글자 사이에 보이지 않게 쓰여진 수많은 마음들이 잠시 벅찰만큼 지쳐있던 가슴을 채워주었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 이 두 글자 뿐인 것 같아서, 조금은 울고 싶어졌다.
경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창에 담긴 두 글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입가에 닿은 따스한 핸드폰의 온도가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던 조금 전의 첫키스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치 무뚝뚝한 두 자에 숨겨 보낸 종인의 마음 같기도 해서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경수는 어두운 방 안 유일하게 밝혀진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액정이 꺼지면 또 켜고, 또 켜고-
마치 성냥팔이 소녀의 간절한 작은 불꽃을 켜듯 자꾸만 핸드폰을 켰다.
희미하게 밝혀진 액정 불빛은 한 번은 설렘, 한 번은 씁쓸함, 한 번은 행복, 한 번은 답답함-
그렇게 경수의 마음 속에 담긴 모든 감정들을 한 번씩 비추듯 켜졌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이 문자를 보냈을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몇 번이고 지우고 또 지우며 보냈을까.
무표정한 얼굴 한 구석에 쑥스러움과 조심스러운 걱정, 망설임, 조바심 같은 것들을 애써 숨기며 핸드폰을 꾹꾹 눌러댔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이 상황에서도 조금은 웃음이 났다.
그래봤자 그도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어린 어른이었다.
어찌보면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행동을 하고 돌아서자마자 미안하다며 풀이 죽어있던, 아직은 서툴고 미숙한 사람.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시작된 어린 감정에 명확한 답이나 가야할 방향이 정해져있을 리 없었다.
세상에는 애시당초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턴가 그를 통해 배운다.
그렇지만 결국 종인은 언젠가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려던 자신을 잡아주었다.
잠깐 사이에 많은 일들이 생겨 잊고 있었지만, 분명 몇 시간 전만해도 경수는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두렵고 어려운 마음에 결국 섣불리 이별부터 말하려던 자신의 앞에 서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는 듯 무릎을 꿇었다.
그와 자신의 내일이 어떻게 달라지든, 이제는 자신도 그를 위해 용기를 내야한다고 경수는 다짐했다.
둘이 함께 한 감정이라면 함께 지켜내야했다.
다부진 다짐에 힘을 실어주는 종인의 짧은 밤인사를 수십번 수백번, 외울 것처럼 들여다보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
.
.
"아빠."
"..."
"...죄송해요."
아침식사를 위해 마주앉아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평소와 다른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마치 어제의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경수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셨고, 늘 그렇듯 유학가서 생활할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가 먼저 가서 우리 살 집이랑 회사 일을 정리하고 있을테니까 넌 방학을 마치고 오거라.
집은 나중에 아빠 친구가 정리해주기로 했으니까 그냥 여기서 지내다가 오면 돼.
12월 23일에 여기서 출발하면, 둘이 뉴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거다."
어제 그 순간 이전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기대가 한껏 담긴 이야기는 드러난 상처를 애써 덮고 또 덮으려는 안쓰러운 노력 같았다.
어른이기에, 부모이기에 어떻게든 덤덤하게 대처하려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진 경수가 가만히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을 꺼냈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에 담겨있는 여러 의미를 알아차리신 것일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경수의 손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아침에 새로 지은 고슬고슬한 흰 쌀밥의 향이 정적이 흐르는 식탁 위에 희미하게 퍼져들었다.
"...우리 아들, 많이 컸네..."
"..."
나직하게 내뱉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그것이 경수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아버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그 대상을 알 수 없어 더 마음이 아프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경수야."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이후, 아버지가 이렇게 절 불러주시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어느 순간부터는 모두 포기했지만, 그래도 늘 기다렸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절 이렇게 불러주실 때면 행복해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 말고도, 제 이름을 불러주면 너무 좋은 사람이 생겨버렸어요.
저는 아직 어리고 둔해서 뒤늦게 알았지만-
그 사람이 절 불러주면 심장이 두근거려요.
그냥 이유도 없이 웃음이 나요.
저보다 더 나이가 많고 키도 더 많이 큰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너무너무 좋아요...
...이럴 땐, 어떡하죠...?
"경수야..."
"..."
"...니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무도 니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태어나면서 니가 너무 많이 다쳤었거든.
너무 다쳐서 머리가 온통 피투성이였고 울지도 못했어.
부러질 것 같은 네 발목을 잡고 의사가 몇 번이고 네 등을 문지르고 때렸지만 그래도 넌 울지 못하고 축 늘어져있었다.
네가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난 후에 의사가 나에게 그러더구나.
어쩌면 네가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아니, 살아남는다고 해도 자식 노릇은 하지 못할 거라고."
"..."
"네 엄마도 나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우리 둘은 그 때 동시에 소리쳤다.
살려만 달라고. 평생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그 때까지 살면서-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빠."
"...넌 나한테, 우리한테 그런 아들이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진솔하고 담담한 이야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아버지는 이미 울고 계셨다.
경수의 어린 손 아래 놓인 굳고 큰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따스하게 김이 올라오는 식탁 위로 뜨겁게 떨어지는 눈물 방울들을 멍하게 바라보며, 경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밤새 생각했다. 만일 너희 엄마가 함께 있었다면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나보다 생일도 더 늦고 키도 훨씬 작았지만 너희 엄마가 한 선택은 항상 옳았다.
그래서 엄마가 떠난 후에 난 아무 것도 결정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널 그렇게 내버려뒀다."
"..."
"널 그렇게 오래 혼자 둔 내가 제일 원망스럽지만, 그 녀석이 괘씸한 것도 사실이다.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 엄마였다면, 무작정 그 녀석을 몰아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 엄마가 그랬다면, 나도 무조건 따랐을거야.
다만-"
"..."
"...내가 널 보낼 준비가 아직 안됐다, 경수야.
아빠가 못나고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아빠가 준비가 안됐어."
"아빠..."
"...아빠랑 같이 가자. 아빠한테도 기회를 한 번만 줘."
그 한마디에, 이내 경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울어버리고 말았다.
품으로 안겨드는 경수를 끌어안은 아버지도 경수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울고 계셨다.
축축하게 젖어드는 어깨를 느끼며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아무리 제가 용기를 낸다고 한들 이 곳을 떠나야만 하는 설움 때문인지,
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혹은 이렇게나 미약하게 떨리는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안아주지 못하는 자신과 이 자리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 것도 모른 채 홀로 고민하고 있을 종인 때문인지...
어떤 것도 알 수 없을만큼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듯 몰려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하루, 데려와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둥켜안은 채 그렇게 오랜 동안 가슴에만 묻혀있던 울음을 토해내고-
아버지는 한참을 그렇게 같이 울었던 것이 머쓱한 듯 훌쩍이는 경수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시고는 학교갈 준비를 하라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 후 신발을 신고 있는 경수를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툭 던지듯 한 마디를 꺼내셨다.
"...네?"
"...그 녀석 말이다."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 어딘가 종인과 닮아있는 것 같아서-
경수는 퉁퉁 부어오른 눈을 하고도 말갛게 웃고 말았다.
"...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요. 먼저 주무세요."
마지막 말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시선이 울음기가 남은 경수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아 그것으로 대신했다.
.
.
.
딸랑-
"...안녕."
"...안녕하세요."
늘 하던 눈인사를 말로 대신한 것은 어쩌면 녀석의 이 목소리가 밤새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어제도 이 문을 열고 들어왔던 녀석이지만, 어제 그 순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쑥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눈을 피하는 시간마저 아깝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종인은 곧은 눈으로 경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조용히 카운터 맞은 편에 와서 앉는 경수의 눈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이 손을 뻗어 조심스레 애처롭게 달아오른 눈가를 어루만졌다.
평소 같으면 놀란 토끼눈이 되어 얼굴을 붉혔을 녀석도 이내 가만히 그 손끝에 볼을 부볐다.
"...크리스마스가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
손님이 남기고 간 머그컵이며 유리잔들을 닦고 쓰던 재료들을 정리하던 종인이 힐끗 경수를 바라보았을 때는
붉어진 눈가만큼 발간 입술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희미한 떨림에 잔잔하게 가라앉히려 애쓰던 종인의 가슴도 함께 일렁였다.
"...12월 23일에 출국하기로 했거든요."
"..."
...그렇게 됐구나.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려 했지만, 자꾸만 입매가 굳어져 녀석이 볼 수 없도록 돌아섰다.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낸 무모한 용기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happily ever after-'
...그런 결말은, 역시 무리였지.
사실 녀석이 되찾은 가족의 온도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빼앗으려고 했던 스스로에게 어젯밤 내내 실망하기도 했었다.
녀석의 미래를 위해 멀리 내다본다면, 이랬어야 맞는 일이다.
잘된 일이다.
...그렇지만 결국은 속이 상했다.
"...형."
"...응."
"끝나고 나랑 데이트 할래요?"
잔뜩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본 녀석은 언제나처럼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넌 임마, 지금 웃음이 나오냐?'하는 마음에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또 그 모습이 예뻐서 종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가 끝나고 함께 가게를 정리했다.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해도 경수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설거지를 하고 카운터며 주방을 청소하고...
익숙한 종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고 나왔을 때는 어느새 밤이 한창 깊어가고 있었다.
'이 녀석, 집에 안 들여보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곁에 선 체온은 억지로 떼어놓고 싶지 않아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목적지도, 어디로 가자는 약속도 없었다.
헤어질 시간이 정해져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급했지만 시간에 쫓겨 바쁘게, 억지로 추억을 쌓아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 달 예쁘다."
어스름한 밤구름에 가려진 하얀 달을 보며 문뜩 걸음을 멈춘 경수 때문에 종인도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밤하늘은 온통 새까맣게만 그려놓았지만, 사실 밤하늘도 색이 있다는 것을 카페 일을 시작하고 뒤늦게야 알았다.
어느 날은 까만 크레파스처럼 새까맣고, 어느 날은 푸르스름한 빛이 돌고,
또 어느 날은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이라 밤새 하늘에 둥둥 떠가는 구름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의 하늘이 그랬다.
달빛이라고 해서 한낮의 태양보다 어두울 것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찰칵 사진을 찍은 녀석이 밤하늘 한 구석에 손톱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되는 크기로 찍힌 작은 달을 흐뭇하게 들여다보았다.
경수의 그런 행동이 마치 벌써부터 이 곳에서의 추억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담아가는 것만 같아 못내 심술이 난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종인은 냉큼 경수의 핸드폰을 빼앗아들고 반대편 손으로 경수의 손을 낚아챈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런 유치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리둥절하게 종인을 따라오던 경수가 이내 맞잡은 손 사이로 깍지를 껴온다.
그 꼼지락거리는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이 녀석이 좋다.
이 녀석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는 따라가기에 숨이 찰만큼 좋다.
다 큰 남자애 둘이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모습에 흘끔대거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쓰기에는 둘만의 세상을 신경쓰기에도 바빴다.
이별이 정해진 채 시작된 만남이란 그런 것이었다.
"에헴... 형 자기소개 좀 해봐요."
"어?"
깍지낀 손을 기분좋게 흔들며 걷던 경수가 문뜩 꺼낸 말에 이번에는 종인이 어리둥절해졌다.
자기소개라니... 여기서? 지금?
"난 형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요."
"아..."
탄식처럼 내뱉은 깨달음이 뒤늦게 다가왔다.
갑작스런 만남으로 시작해 어느새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이 순간까지 왔기 때문에 소소한 과정들은 모두 그냥 넘겨졌다.
그러고보면 둘이 함께 한 시간은 초반부터 항상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마치 늘 그 곳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경수의 장난스런 미소에 멋쩍게 시선을 돌린 종인이 '뭐... 뭘 얘기하라는거야.'하고 뒷목을 긁고 있자 녀석이 가만히 웃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음.... 1번- 가족 관계는?"
"부모님, 누나, 나."
"맞다, 그건 전에 들은 것 같아요.
형네 집에 첨 갔을 때."
그래.
너 때문에 내가 무슨 병에 걸린 줄 알았던 그 날이었다.
네가 주었던 해바라기는 잘 말려서 내 방에 거꾸로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넌 아마 영영 모르겠지.
...날 준 건 아니었지만.
"2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다 잘 먹는데..."
"아, 진짜 재미없네.
그럼, 형이 무인도에 갔을 때!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일 것 같아요?"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것 같은 예시다?
경수 앞에서 멍청한 소리만 자꾸 내뱉어서 스스로를 욕하던 예전의 어느 날이 떠올라 종인은 피식 웃어버렸다.
"...스파게티."
그런 건 여자들이나 먹는 거라고 입에도 안댔는데, 너 때문에 자꾸 먹다보니 내 입맛도 다 변했다.
"나랑 똑같네요."
얼굴을 마주보고 베시시 웃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도 스파게티는 입에서 떼지 못할 것 같았다.
"3번- 제일 싫어하는 건?"
"...바퀴벌레가 제일 싫어. 사실 벌레는 다 싫어.
몸에 닿는 건 싫어서 결국 죽여야 하는데, 죽일 때마다 손 밑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건 사실 가족들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는데, 어쩐지 녀석 앞에서는 술술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전에 종인을 무슨 우상처럼 여기며 쫓아다니던 한 신입생 여후배가 이 얘기를 듣고 '헐... 깬다.' 하는 얼굴로 바라본 적이 있어서,
이건 진짜 좀 '깨는' 얘기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으악, 맞아요 맞아요.
막 빠직- 하는 소리가 딱 뭔가 죽었다는 느낌이라서 너무 끔찍해요."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이렇게 표정이 다양한 녀석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의젓하고 말이 없는 녀석이라 오히려 무뚝뚝한 종인이 나서서 쓸데없는 말을 자꾸 던졌던 것 같고,
익숙해진 후로는 말보다 눈빛으로 더 많은 대화가 오고갔던 사이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경수는 조잘조잘 말이 많았다.
아마 녀석에게도,...이별은 견디기 힘든 일이겠지.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이 어쩌면, 자꾸 달아오르는 눈가를 감추려는 몸부림 같아서 경수의 해맑은 미소에 더더욱 마음이 갔다.
"음... 좋아하는 영화는?"
"그런 거... 딱히 없는데. 그냥 이것저것 다 잘 봐."
"에이, 진짜... 그럼 지금 생각나는 영화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영화는 아니고 애니메이션이지만, 어쩐지 흔한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보다는 영화에 가까웠던 듯 싶으니까.
남는 여운이 길었던 영화였다.
이걸 무려 학교 도서관 DVD실에서 박찬열과 둘이 봤다.
시커먼 남자 둘이 무슨 정신에 그걸 보겠다고 들어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전날 학과 행사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속이 잔뜩 쓰렸던 날 같은데.
언제 한 번 토할 것 같다는 생각에 수업도 못 들어가겠다 하자 찬열도 잘됐다 싶었는지 어슬렁어슬렁 따라왔었지.
대충 하나 골라서 잠이나 자자 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느낌이 좋아 결국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봤다.
'이 새끼, 누가 소녀틱하단 소리 안할까봐 영화도 꼭 지 같은 걸 골라와'라고 툴툴대던 박찬열이 마지막에 울었다는 건 솔직히 의리가 있어서 모른 척 해줬다.
형답지 않은데 또 어딘가 형다운 영화라며 경수는 환하게 웃었다.
밝게 터지는 그 웃음에 멋쩍게 뒷목을 긁던 종인의 기억 속으로 영화 마지막쯤 마음을 건드렸던 대사 한 줄이 문뜩 떠올랐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미래에서 기다릴게."
"..."
"..."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고도 마주본 둘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그 한 마디가 그토록 애틋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어떤 누구도 우리의 미래에 원했던 사람이 함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래서 서로에게 의식하듯 필사적으로 사랑을 얘기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언제 바뀌게 된다고 한들 원망할 수 없기에.
먼 훗날 함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고, 기억 속에 심어두기 위해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너에게 널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내가 의무감으로 지켜야하는 과거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만 나는 너에게 미래이고 싶다.
무엇하나 뚜렷하지 않은 이 순간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너의 미래에 부디 내가 함께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시간이 마주하는 그 순간이 온다면,
우리 다시는 이 손을 놓지 말자.
"...금방 올게요."
한참 동안 서로 바라보다 경수가 먼저 종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안겨왔다.
폭 하니 품에 들어오는 작은 체온이 따스했다.
늘 쓰다듬고 싶었던 그 동그마한 머리꼭지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작은 등을 감싸니 손 끝으로 고르게 늘어선 척추뼈들이 느껴졌다.
제 것도 꼭 같은 모양일텐데, 왠지 이 녀석이라 더 정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반짝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경수의 입가가 베시시 웃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자 등허리에 놓여있던 작은 손이 옷자락을 꼭 잡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 어느 날, 이 하얀 이마에 몰래 입을 맞추며 울고 싶어졌던 그 순간을 지나 둘이 함께 이만큼이나 왔다.
비록 어느 날부턴가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함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두 사람이 같은 미래에 있기를 지금 이 순간 꿈꾸고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저리주저리 |
으으음... 으으으으으음... 네... 그렇습니다... ...진짜 늦게 찾아뵙습니다.ㅠㅠㅠ 나날이 더, 더 느려지는 것 같아 늘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ㅠㅠ 할 수 있다면 읽어주시는 감사한 모든 분들께 '제가 글 올리면 문자 드릴게요!!!'라고 하고 문자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ㅠㅠㅠ 특히 사과를 읽어주시는 비회원님들..ㅠㅠㅠ 신알신도 없이 찾아와주셔서 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ㅠㅠㅠ
사실 원래대로라면 이번 편- 찬백이들을 제가 데려와야 하는게 맞는데, 감성가뭄에다가 복잡미묘한 찬백이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제가 멘붕에 빠져서(*-ㅅ-*;;) 이번 주말은 이렇게 그냥 넘기는건가.. 하고 몸부림치다가 독자2님...이 아니라, 여명님이 알려주신 감사한 BGM을 듣고 잠시 감성을 살짝 채운 후 후다닥 돌아왔습니다;;
비루하고 소소한 이야기이나마, 그래도 최소한 제가 '음... 이 이상은 내 수준에서는 무리야' 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는 되야 기다려주시는 분들께도 예의지! 하는 마음으로 쓰다보니 점점 더 느려지는 것 같아요..ㅠ 8월 중순 이후로는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생기기도 했네요^^;; 그래도 늘 사과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어집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처음에 한 번 끝까지 꼼꼼히 보고 난 이후에는 마음이 아파서 다시는 보지 못하고 있던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결국, 미래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남기고 치아키가 떠나버렸잖아요..ㅠ 상상력도 부족하고 빨리빨리 정신에 물들어있는 저에게 열린 결말은 늘 힘이 듭니다ㅠㅠㅠㅠ 그러다가 조금 더 철이 들고(?) 담담해진 후에 다시 볼 수 있게 됐어요. 이런 건 성장해서 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메말라서 변하는 것일까요-?
12시 전에 올리겠다!! 고 다짐해놓고 결국 1시가 지나가고 있네요-ㅠㅠㅠ 태풍이 온다고 해서 화분들을 들여놓고 아빠랑 일요일 밤을 아쉬워하면서 한 잔 하고 나니 시간이 어느새 후다닥=ㅁ=... 요즘 엄마가 여행을 가셔서 아빠랑 둘이 밥해먹는다고 아둥바둥하고 있었거든요;;ㅎㅎㅎ 태풍에 화분 다 날아가면 저희는 당장 내쫓길지도... 흑흑흑...ㅠㅠ
달아주시는 감사한 댓글 하나하나, 제가 너무 늦게 인사를 드려 송구스럽습니다ㅠㅠㅠㅠ 바쁘더라도 짬을 내서 자꾸 찾아뵈야 하는데, 사람이 뭐 이렇나요ㅠㅠㅠ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사과를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 늘, 제가 온 마음 다해서 감사드리고 또 응원하는 거.. 아시죠?!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또 뵙겠습니다:)
ps. 그나저나, 경수 이 녀석... 제가 미쳤지 왜 시작할 때 얘를 고3으로 만들어놔서;; 고3 여러분께는 얘가 딩가딩가 돌아다닐 때마다 막 죄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ㅠ 고3시절을 두 번 지내본 사람이라(*-ㅅ-*.....) 그 마음을 제가 어찌 모를까요...ㅠㅠㅠ 여러분, 지금 당장은 와닿지 않는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팅입니다! 여러분의 미래로 나아가는 작은 발걸음이니만큼 너무 부담가지지도, 힘들어하지도 마시고 그저 주어진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신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좋은 길로 이끌어지게 될거예요-:) 늘 응원하고 있어요- 화이팅! |